380화. 바닷속으로(3)
* * *
[이 몸은, 어,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
하벨의 허벅지에 꼬리를 잡고 앉은 아라가 주변을 기웃거렸다.
까만 코가 벌름거렸다.
[여기에는 정령들이 없구, 물고기들도 안 보이구. 바다도 까맣구.]
무언가 불만인 아라의 웅얼거림에 하벨은 옆구리를 콕 찔렀다.
"왜 그래, 아라야? 어디 불편해?"
[막 속이 간지러워. 그런데 이 몸은 이게 뭔지 모르겠어.]
아라는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뭔가 꽉 막힌 것 같고, 이상하게 안절부절못한 느낌이 들고, 또 발가락하고 손가락하고 다 간지럽고 그렇지?"
[엇! 대장이 어떻게 알았어?]
"나도 그렇거든. 아주 답답해. 정말 콱 막힌 기분이 들어서, 미칠 지경이야."
그리웠던 바다도 잠시, 하벨은 밀려오는 답답함에 목이 타고, 몸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웠다.
이 답답함은 자신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이 몸은, 음, 뭔가 울적하기도 해. 어서 저 위로 올라가고 싶어. 이 몸은 여기가 싫어.]
"지금 물이 느끼고 있는 감각이니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 슬픔이 너무도 깊으므로 우리도 영향이 있는 거지."
하벨은 자신을 주목하는 시선을 계속 흘리며 아라의 말에 대답했다.
"…이보시오."
"다 끝났어?"
왕의 말에 하벨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날 여기 가운데에 놔두고 자꾸 뭔가를 속닥거리길래 아직 시작하지 않았나 싶어서 나도 속닥거렸지. 혹시 시작했어?"
"…미안하오."
여하가 대신 사과했다.
"이걸 왜 네가 사과해? 애초에 무례하게 군 건 네가 아니라 너의 부친인걸."
하벨이 싱긋거리며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용왕님! 진짜 보고만 있을 거예요?
―진짜 속이 터진다고요! 용왕님을 가운데에다 두고 뭐 하는 짓인지! 대체 누가 누굴 심판한다는 거예요?
―애초에 저건 용왕님이 먼저 고안한 거잖아요.
열을 올리는 물의 말에 하벨은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쉬잇."
―으으.
물이 심통이 난 채로 요란하게 흔들리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미안하오."
왕이 사과했다.
"오늘 같은 날은 내 평생 처음이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해서 당혹감에 당연히 해야 할 예의도 차리지 못했소."
물의 말 때문인지 몰라도 왕은 외관상 인간의 모습을 띤 하벨의 모습에도 날을 세우지 않았다.
"일단, 용왕이 무엇인지 말해주겠소?"
왕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시작할까 생각하니 하벨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대장은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대단해!]
아라가 숨도 쉬지 않고 말하다가 마지막에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하벨은 아라의 의지를 이어받고자 아라가 원하는 대로 거창하게 소개했다.
"너희의 왕. 너희가 밟는 모든 걸 주었으며 세상을 구한 왕이었지."
터무니없다기엔 물이 긍정하며 하벨 주변으로 반짝이는 효과를 주듯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감이… 오질 않소."
"간단히 말해서 너희를 구한 신비한 힘이든, 진귀한 힘이든 저게 내 힘이란 소리야."
하벨은 손을 들어 대충 밖을 가리켰다.
웅성웅성.
하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인어족들이 여기저기서 말을 토해냈다.
자신들의 유일한 희망이 저 정체 모를 남자의 힘이라니.
"내가 먼저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해줄게."
하벨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하나. 내 힘을 가지러 갈 거야."
이곳에 발을 내디디자마자 영혼이 공명했다. 어서 자신을 데려가라며 지금도 울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둘. 너의 약속을 받을 거고."
아직 칼리우스가 어떤 의견을 꺼낸 것도, 용이 가진 권능을 개방한 것도 아니니 서명을 받을 순 없었다.
하지만 미리 서명을 받는다는 약속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셋. 바다를 조사해서 치료할 거야."
"감히……."
"아버지!"
여하가 왕을 말렸다. 지금 하벨을 잃는다는 건 모든 걸 잃는 게 아닌가.
"저분은 우리의 귀인입니다."
"갑자기 찾아와 이리 건방진 소리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미 충분히 대해주고 있거늘."
"느닷없이 찾아온 내가 아니꼽고, 당황스럽고 뭐 그래서 화가 난다는 건 이해해. 하지만 뭐가 우선인지 모르겠어?"
하벨은 저자가 왕이기에 더 느슨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정말 내가 가도 되겠어?"
협박에 가까운 말에 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내가 실언했소."
순간 감정에 휩싸인 건 사실이나, 지금 모든 걸 손에 쥔 자는 다름 아닌 하벨이었다.
"하지만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해주겠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와중에 저 힘을 가져간다면 어떻게 들리겠소?"
"당연히 좋지 않겠지. 하늘이 무너진 느낌일지도 몰라."
"설령 그게 당신의 힘이라 한들, 우릴 저 바닷물에서 보호하고 있는 힘은 줄 수 없소."
왕은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다른 건 포기해도 저 힘을 포기한 순간 남아 있던 백성들이 죽어버리는 결말을 맞닥뜨려야 하는데 이걸 포기한다니.
"나는 왕이오.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하벨은 저 대답에 잠깐 웃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 아닌가.
"나도 무턱대고 가져가겠다는 게 아니야. 우선 너희들이 지낼 수 있는 장소는 마련해줄 거야."
그 말이 나올 거라 이미 예상했기에 하벨은 자신이 아라와 함께 온 이유를 들먹였다.
이곳에 반영구 정화제부터 깔아둘 생각이었다. 영혼을 흡수하는 동안 일어날 공백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후에 영혼을 흡수하고, 강해진 힘으로 이전과 같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할 셈이었다.
"여러 말이 오가더라도 나는 불확실한 사실에 매달릴 수 없소."
왕은 얼굴을 구겼고, 하벨은 느긋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 역시 이해해. 네 말 하나에 수많은 목숨이 움직일 테니까."
"당신도 왕인 이상 내 각오가 어떤지 이해해주리라 생각하오. 그러니 바다를 치료해주시오. 그렇다면 기꺼이 포기하겠소."
이야기를 듣던 하벨의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음, 그건 너의 고집이야? 아니면 단지 내가 미덥지 못할 뿐이야?"
"불확실한 사실에 매달릴 수 없을……."
하벨이 손가락을 들자 물들이 위로 움직였다.
쿠웅.
그 흔들림에 자신의 힘에 둘러싸인 이곳 전부가 요동치고 말았다.
이곳을 바치던 지반이 조금 무너져내린 것처럼 주변에 보이던 것들이 삐딱해 보이기까지 했다.
[으, 으어어엇! 대장! 이건, 이건 위험해!]
아라가 기겁했다.
"나는 너한테 내가 누구라고 말했어. 얼굴까지 드러낸 상태로. 내가 왜 그랬을까?"
하벨은 싱글벙글 웃었고, 왕은 진땀을 흘리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보다 위니까?"
쿠웅.
지반이 또 흔들렸다.
"아니면 네가 무서워서?"
"귀, 귀인이여……."
"여하야. 나는 지금 살짝 기분이 나빠. 네가 여기에 있어서 나는 한 번 더 참았어."
처음에 긴가민가했다.
여하의 아버지는 인간보다 오래 산 만큼 표정을 숨기고, 눈빛을 숨기는 데 더 능숙해 솔직히 헷갈렸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에게 제안을 꺼냈을 때, 하벨은 비로소 왕의 눈빛에 드러난 어떤 경시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어족이 위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채로.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너희가 받드는 물이 나를 '왕'이라 불러줬어. 내 증명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어?"
하벨은 저 왕이 우스웠다.
너무도 오랫동안 왕이었기에 모든 것들이 굳어진 게 분명했다.
고집도.
보는 눈도.
옳다고 믿는 신념마저.
자신 역시 공감이 가면서도 딱하고, 측은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상황이 아님에도 세월만큼이나 오래 굳어진 고집은 참 질기다 싶었다.
"내가 우스웠는가?"
천천히 하벨은 왕을 압박했다.
"아니면 그대의 아들인 여하를 믿고, 내가 데려온 문하와의 인연을 생각해 가볍게 여겼던 것인가?"
왕의 잘못은 하나였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죄.
"나는 그대를 존중해 그대가 바라는 대로 따랐다. 나는 그대를 존중해 그대의 나라 역시 걱정했다. 하나, 그대는 나를 어떻게 보았는가?"
무조건 자신을 떠받들라는 말이 아니었다.
무조건 자신의 제안을 허락하라는 말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상대적으로 많이 불리한 왕이 협상하자고 값싸고, 더러운 것만 제시하니 왜 화가 나지 않을까.
"내가 인간으로 보이나? 아니면 어르고 달래면 쉽게 넘어갈 어린아이로 보이는가?"
하벨의 물음에 아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장……? 있지, 이 몸은 대장이 화를 풀었으면 하는데…….]
"너희에게 내려진, 물과 소통할 수 있는 그 축복은 대체 누가 주었다 생각했는가?"
자신이었다.
하벨의 서늘한 미소에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곡을 찔려버렸다.
잔잔한 파도 같았던 물속이 폭풍우라도 맞은 것처럼 요동치고 있어 무척 불안했다.
이 땅덩어리를 바치고 있는 지반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나의 거대한 물방울 같은 이곳을 감싼 저 깨끗한 물이 요동치고 또 치다가 이대로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모든 걸 떠나 왜 나를 업신여겨도 된다고 생각했나? 나는 혼자이고, 그대는 다수라서?"
하벨은 왜 저런 생각이 나오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떠받드는 상황에만 익숙해지다 보면 굽히는 법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틀렸다."
하벨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었다.
순간, 모든 물이 정적에 잠겼다.
자신의 힘에 쌓인 채로 잔잔하게 치던 물결도, 저 밖에 바닷속에서 끝없이 휘몰아치던 물살도.
전부 멈춰 자신에게 경례했다.
보아라.
내 값어치는 이 정도다.
그렇게 직접 보여주자 인어족 모두가 벌벌 떨었다.
저들이 이름을 어인에서 인어로 바꾸든 간에 그들 핏속에 같은 피가 흐르는 이상 절대로 이 관계를 해제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에게 모든 걸 바친 쪽은 어인족이었으니.
"너는 오히려 내게 엎드리고, 빌어야 했다."
하벨은 자신의 영혼이 다가온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일단 멈춰 세웠다.
"알량한 협상을 꺼낼 시간에 무엇이든 내놓을 테니,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말했어야 했다."
"귀인이여!"
여하가 저 말도 안 되는 압박감을 뚫고 말했다.
온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인어족 왕자로서 아버지의 무례를 사과하겠소!"
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본 하벨은 끝맺음을 아는 자였다.
좋든 나쁘든 그 끝은 항상 어떤 식으로라도 결단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쁜 쪽으로 끝맺음이 나려고 하자 온몸을 바쳐 소리쳤다.
"결코, 귀인을 업신여긴 게 아님을 내가 대신해서 분명히 말하겠소!"
여하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말을 꺼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몸이 흔들리고,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고, 그냥 속이 다 비틀려왔다.
"내, 내가 이곳을 나왔던 이유도 저 숨 막힘이었소! 인어족은 한번 왕이 되기 시작하면 그 자식이 왕위를 받을 때까지 왕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구조요!"
왕의 자리는 종신형에 처한 감옥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늙었소."
여하는 그간 외면했던 사실을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돌아와 바라본 아버지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이전과 너무도 달라 있었다.
지쳐 보였고, 뭔가 흐물흐물 녹아 있는 것만 같았다.
"원래는 내가 받아야 했지만, 내가 도망쳤단 말이오!"
여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자신이 가출하기 전에 아버지와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여하야. 나는 늙었다. 고집은 세졌고, 아둔해졌고, 상황판단도 되지 않아 이제 그만 물러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구나.
그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저렇게나 정정한데. 왜 벌써 자리를 떠넘기려는 걸까 싶었다.
고민했다.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그 자리가 무서웠다.
훌륭한 왕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그 거대한 압박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냥 바다 자체가 숨이 막히는 공간이 되어버려 지상으로 나왔다.
"귀인이여, 아버지가 지키려는 건 본인이 아니라 백성들이오!"
여하는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처음 지상에서 보았던 산처럼 거대했던 아버지가 오늘 너무도 초라해졌음을 알았다.
"고집이 세지고, 아둔해졌고, 제대로 판단하지만 못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버지는 백성들을 먼저 생각한 결과일 뿐이오!"
자신이 아는 아버지라면 절대 본인을 생각할 사람이 아니었다.
―여하야. 왕은 감정을 내비치면 안 된다. 다 숨겨야 한다. 너는 인어족의 자존심이자 그들의 모든 것이니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감정을 죽이라 말할 정도로 왕의 자리가 어떤 건지 아는 분이었으니까.
자신의 자긍심이 곧 백성들의 자긍심이라는 알았으니까.
"여하야."
하벨은 싱긋 웃었다.
저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여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냥 간절했다. 너무도 간절했다.
"너는 대체 왜 가출했는지 모르겠네. 이렇게 훌륭한 왕의 자질을 가졌는데."
하벨은 힘을 거뒀다.
지금 칼리우스가 임시로 저주를 해제하는 마법을 걸어놓은 상태일 뿐, 조심조심해야 할 때였다.
"…그러니 내 얼마나 속상했겠소?"
왕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맞아. 당신보다 훨씬 나아."
"나는 늙었소."
"나도 늙었어."
여하는 대수롭지도 않게 말을 던진 왕과 이를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하벨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왜 입을 벌리고 있어? 협상할 때 싸우는 거야 당연한 건데. 물론, 건방지다고 한 건 사실이야. 내놓을 것도 없이 덤비는 건 우습지."
하벨은 코웃음을 쳤다.
[이 몸도 사실은 어……. 엄청, 엄청 당황했어.]
아라는 눈동자를 굴렸다.
싸우는 거라 생각할 만큼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사나웠다.
"상황이 불리해도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한다, 여하야."
왕의 가르침까지 이어지자 여하는 여전히 이 분위기가 적응되질 않았다.
"그것도 맞긴 하는데, 일단 그건 뒤로해야겠어. 여기 바닷속에 뭔가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하벨이 던진 말에 싹 날아가 버렸다. 눈빛부터가 달랐다.
"…뭐, 뭐가 있다는 것이오?"
여하가 바짝 긴장하자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이 몸은 지금 좀 무서워.]
아라는 하벨이 느낀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나랑 너를 답답하게 만든 무언가가 저 바닷속에 있어."
하벨의 표정이 찬찬히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