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79화 (379/415)

379화. 바닷속으로(2)

* * *

하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의 시체가 썩지 않게 하는 용도라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시작한 건 접니다."

하지만 하벨 티에라는 하벨의 표정을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죽음을 덮고 잠들어 있던 용왕님을 깨운 건 접니다."

그 눈빛은 하벨 티에라를 본 이후로 가장 반짝였다.

"이토록 끔찍한 세상에 용왕님을 내던진 것 역시 접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선택뿐이었으니까요. 저는……."

하벨 티에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은 그저 용왕의 육체가 썩지 않게 하는 용도라니.

이런 비참한 역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제가 이런 건지, 저 다음 대는 괜찮을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억울했습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제 욕심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다."

부디, 한 번이라도 좋으니.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삶은 너무나도 괴로워 누구라도 좋으니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를 끌고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용왕님? 제 선택이 모든 일의 끝이자 시작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 얄미웠던 하벨 티에라의 말이 이제는 다르게 들려왔다.

너무도 절박했다.

"제가 주제넘게 선택한 이 결과에 모든 게 시작됐습니다."

―반드시 그래 주세요. 아무 힘도 없는 저였지만,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세요.

이래서 하벨 티에라가 할 수 있었던 일 중 가장 거대했던 게 바로 '선택'이었다.

"나아가겠다고. …어떤 희생을 다 감수해도 좋으니 저는 멈춰 있고 싶지 않았어요."

두려움이 하벨 티에라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자신의 욕심으로 한 존재의 인생이 바뀌었다.

결코,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존재에게.

눈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너도."

하벨은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나랑 같네."

하벨 티에라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든 걸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그 슬픔을 왜 모를까.

후회했기에 자신도, 하벨 티에라도 나아가기로 했다.

"잘했어, 하벨 티에라."

하벨은 하벨 티에라를 칭찬했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하벨 티에라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걸 이해한다니.

이걸.

"…이제 제가 드릴 게 없어요. 요새 랜턴에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았잖아요. 제가 기억하는 모든 걸 긁어모았지만, 그것뿐이에요. 저는 이제 쓸모가 없어요."

"너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용감한 자야. 소중한 걸 위해, 세계를 위해 기꺼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자가 바로 왕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니까."

"왜… 그러세요? 화가 났어요?"

"누가 뭐래도 그때의 너는 훌륭한 결정을 내린 거야."

"……."

하벨 티에라는 조금 전과 달리 더 깊게 올라온 말에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려보지만,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더 빨랐다.

딱!

하벨은 자신이 자학할 때마다 라르웬이 그랬듯 하벨 티에라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너도 멍청이야. 누가 티에라가 아니래? 너는 처음부터 티에라였잖아?"

멍하니 이마를 만지고 있던 하벨 티에라는 기어코 울음이 터져버렸다.

"…으, 흑."

눈물이 펑펑 떨어져 그는 흐느꼈다.

티에라.

단지 이름이 아닌 진짜 티에라가 되고 싶었던 그 마음을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다.

"네 선택으로 미래가 변하는 소리가 들리지?"

하벨의 말에 하벨 티에라는 고개를 끄덕일 수조차 없었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하벨에게 들었다.

자신의 선택인, 자신의 모든 걸 바쳐 다시 살린 하벨이 정말로 자신을 용서해주었다.

기뻤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잘 들어, 하벨 티에라."

너무도 서럽고, 기쁘게 울고 있는 하벨 티에라를 보며 하벨은 그를 강하게 불렀다.

"네 선택이 나였다고 하는데, 모두의 선택은 너였어. 내가 아니라 너였다고. 이런 네가 어떻게 반쪽짜리일까."

다음에 언제 만날지 모르니 이 착각을 깨주고 싶었다.

"넌 반쪽짜리가 아니야."

하벨은 단호히 말했다.

"용왕이다."

"……아."

"아주 훌륭한, 용왕 말이야."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을까.

"용왕님……."

펑펑 울던 하벨 티에라가 울먹이며 하벨을 불렀다.

"왜?"

"진짜 기쁜데요."

"기쁜데?"

"전 용왕… 안 할 건데요."

"……어?"

하벨 티에라는 손을 내렸다.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에 하벨 티에라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용왕님을 계속 보니까 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어요."

"날 보니까 사라졌다고? 왜?"

"그걸 몰라서 물어요?"

"모르겠는데?"

정말로 모르겠다는 하벨의 표정에 하벨 티에라는 눈물을 닦던 와중에 한숨을 내쉬었다.

"…용왕님."

하벨 티에라는 어깨에 힘을 빼며 말문을 열었다.

"말해."

"일단 드리긴 했는데, 좀 예쁘게 써주시면 안 됩니까? 몸뚱어리가 너덜너덜하기 전입니다. 이러다 부서지겠어요."

"예쁘게 쓰고 있어."

"그게요?"

"…그래."

"와. 진짜요? 정말요? 진짜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언제 울었냐는 듯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하벨 티에라의 말이 참 아니꼬웠다.

"물어볼 게 있어."

"유렌이라면 만나봤어요."

"언제?"

하벨의 눈썹이 올라갔다.

"눈이 덮인 산에 오를 때요. 그때, 빙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준 사람이 바로 유렌이었어요."

―머나먼 정상에서 바다가 보이는 장소에 서거라.

애초에 눈이 덮인 산을 알려준 것부터가 유렌이었다.

"…뭐? 그럼 왜 알려주지 않았어? 이건 어차피 실제로 벌어진 과거 일이라서 괜찮잖아."

"사실 유렌인지 계속 모르고 있었는데, 최근에 용왕님께서 과거 기억을 떠올린 걸 보다가 목소리가 비슷해서 알았어요."

"류아도 몰랐어?"

"모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애초에 유렌을 소개해준 게 류아니까요. 그때는 '유렌'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다른 이름을 꺼냈어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거든요."

'…미친 새끼.'

하벨은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빙의와 회귀에 유렌의 손길이 닿은 줄 알았지만, 설마 유렌이 하벨 티에라와 만날 정도로 직접 개입했을 줄이야.

"용왕님.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이미 기분 나쁜데? 유렌을 옹호하려는 거잖아."

"옹호가 아니에요. 그냥 그때 느낀 걸 말씀드리려는 것뿐이에요. 싫으면 말아요. 이제 보내드리려고요."

하벨 티에라가 손을 뻗자 하벨은 뒤로 물러섰다.

"그것만 말해."

"…간절했어요. 정말요. 왜 저러지 싶은 생각이 들만큼이요."

"미친……."

하벨은 귀를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더 기겁하겠는데요?"

하벨 티에라는 어느덧 개구쟁이가 되어 말문을 열었다.

"산에 올라갈 때까지 도와주고, 막 빙의 됐을 때 절 향해 절까지 했는데요?"

"…뭐어? 뭘 했다고?"

하벨이 놀라며 묻는 말에 하벨 티에라가 그를 밀었다.

툭.

"티에라 가문 근처에 '테스베이의 하루'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미리 선금 줬으니까,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잘했다고 과자 먹으러 왔는데요?'라고 하면 됩니다."

하벨 티에라는 뿌듯함을 드러냈다.

"알겠죠, 막내님?"

* * *

"…위로 올라갔던 사람들은 괜찮을까?"

얼굴에 비늘을 가진 인어족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하늘로 뻗어 있는 빛줄기 하나가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모두가 혼자 들어가기 벅찬 저 빛줄기에 의존해 육지로 나가겠다고 했다.

손등에 비늘을 가진 인어족은 창을 쥔 두 손에 힘을 주며 밖을 바라보았다.

어딜 보아도 검고 역겨운 검은 덩어리들이 물살을 따라 흔들렸다.

저게 바닷속에 갑자기 나타나 인어족 대부분을 죽이고 자신들을 가둔 오염 덩어리였다.

닿기만 해도 썩어버리는 오염 덩어리를 막는 힘은 지금 왕실에서 보관 중이던 어떤 물건에서 비롯되었다.

검은 바다가 아닌, 투명한 바다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맑고 맑은 물이 나오더니 자신들을 감싸주었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까지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괜찮겠지. 반드시 지상의 사람들을 데려올 거야."

저 기적과도 같은 힘이 퍼졌을 때 사람들은 희망으로 가득 차다 곧 절망으로 뒤덮였다고 했다.

어떻게 본다면 결국, 갇히지 않았던가.

모두가 죽을 거라 판단했지만, 이 힘은 오히려 바닷속 식물을 더 튼튼하게 성장시켜 주어 식량난 해결과 함께 짙은 절망을 걷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 오염 덩어리가 언제 자신들을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떠안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구해주긴 할까? 우리가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얼굴에 비늘이 난 인어족이 얼마 전에 떠난 '문하'를 생각하며 물었다.

"맞아. 낙관적으로 생각했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이지."

그때, 어디선가 장난기가 가득한 말이 들려왔다.

"…거봐."

얼굴에 비늘이 난 인어족은 실망감을 감추질 못했다.

"하지만 그 낙관적인 생각 덕에 이곳 상황이 바뀔 수가 있었어. 내가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

얼굴에 비늘이 난 인어족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

분명히 보초를 서고 있는 동료는 왼쪽에 있는데 소리가 오른쪽에 들리다니.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창이 갑자기 자신 쪽으로 다가왔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누구냐."

손등에 비늘이 난 인어족은 동료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기며 갑자기 나타난 자를 향해 창을 겨눴다.

인간처럼 보였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인간이었다.

"나는 하벨 티에라."

싱긋 웃던 하벨의 눈이 천천히 떠지자 푸른 눈동자가 어려 있었다.

[이 몸은 아라야! 안녕!]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물살을 따라 아라의 망토가 휘날려 아주 용맹해 보였다.

"그리고 용왕이기도 하지."

하벨이 손을 뻗자 그의 주위로 물이 모여들었다.

―용왕님!

―진짜 용왕님이에요?

물이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그럼, 나야. 지금 느껴지지 않아? 모든 물이 연결됐어."

하벨은 다시 눈웃음지었다.

자신은 이곳에 오기 전에 열쇠의 수호자가 가진 힘을 이용해 두 개의 힘을 열었다.

하나는 물과 물을 연결하는 힘.

다른 하나는 연결된 이 힘을 통해 어떤 공간적 제약도 없이 이동하는 힘.

사실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힘은 바로 후자였다.

저게 있어야 바다로 갈 수 있었다.

제아무리 자신이 열쇠의 수호자라고 해도 없는 내성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지.'

하벨은 잠깐 눈동자를 굴렸다.

영혼이 부족했을 뿐인데 그렇게 고생할 줄이야.

덕분에 하벨 티에라까지 만나지 않았던가.

'진짜 과자를 사 먹으라고 가게 선금을 남겨놨을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차고, 웃겼다.

유렌이 빙의에 직접 개입했다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복잡하고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긴 바다였다.

자신이 그토록 오고 싶었던 바닷속. 그 사실만으로 행복하지 않은가.

―느껴져요.

―사실 꿈을 꾸는 줄 알았어요. 물론, 진짜 꿈을 꿀 수는 없지만, 이게 그런 느낌이구나 하고 알게 됐으니까요.

물이 하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꼬리가 달린 것처럼 요동치는 물결에 보초를 서던 인어족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어서 전해줘.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였던 용왕이 돌아왔으니, 아."

하벨이 손가락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물거품을 가리켰다.

물거품은 두 개였다.

하나가 걷어지자 문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대로 굳었다.

진짜 바닷속이었다.

진짜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걷어지자 인어족들은 당장 무릎을 꿇었다.

"…와, 왕자님!"

천천히 눈을 뜬 여하가 꿈에서나 들어봤을 소리를 이어 기억 속에 조금은 흐릿해졌을 고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토해야 할까.

여하는 눈시울을 찌르는 감각에 하벨을 바라보았다.

"…고맙소."

지금으로서 꺼낼 수 있는 말은 이 떨림과 반가움을 담은 감사의 인사였다.

하벨은 싱긋 웃으며 저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마움은 뒤로 하고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않던가.

"아버지에게 안내하게. 급한 용무가 있으니."

여하의 담담한 목소리에 인어족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 * *

"…여전하네."

하벨은 자신을 바라보는 인어족들의 시선에 그리움을 느꼈다.

어인족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판단할 자리가 있다면 그 사람을 가운데 앉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왕과 대면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걸 만든 건 자신이었다.

압박감을 느끼며 진실을 토하는 자리였다.

이렇게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줄이야.

어떤 말이 쏟아질지 하벨은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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