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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78화 (378/415)

378화. 바닷속으로

* * *

"마침 잘 왔어, 헤레스."

"저, 음, 다시 돌아가도 될까요?"

하벨이 다정하게 말해도 헤레스는 밀려오는 불안함을 삼켜야 했다.

"축하해, 헤레스. 보름달을 완성 시키다니. 넌 정말……."

"도련님. 일단 진정하세요."

헤레스는 하벨을 말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방금까지 엘라힘한테 교황청을 부쉈다는 상큼한 말을 듣지 않았던가.

"그럼, 일단 난 엘라힘을 불러올게."

라르웬은 다시 문손잡이를 쥐었다.

"…잠시만요. 왜 신관님을 부르시는 거예요?"

혼란스러움을 담아 헤레스는 라르웬한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막내한테 들어봐봐. 아마 기가 찰 거다."

헤레스의 고개가 다시 하벨에게 향하자 그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다 모이면 시작하려고."

대체 뭘?

헤레스는 갑자기 시작된 침묵이 진짜 무서웠다.

"…저, 그냥. 그냥 진찰하러 왔을 뿐인데요?"

처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 * *

"…자, 그래서 열쇠의 힘을 개방하려고 합니다. 이해하셨죠?"

하벨은 굳어진 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카샬, 헤레스, 엘라힘, 여하, 그리고 분명 재차 들었음에도 겁에 질린 아라까지, 진짜 다 완벽했다.

"시작합시다."

"…미, 미치셨습니까?"

카샬이 언성을 높였다.

아니, 이건 진짜 어디부터 어디까지 잘못됐다고 말해도 될 만큼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아니, 왜 그래? 요약도 잘했고, 왜 해야 하는지도 설명했고, 뭐가 문제인데?"

영혼을 다 얻은 후에 벌어지는 불안정한 상황보다 조금 고생하겠지만, 열쇠로 미리 힘을 개방시킨 뒤 안정적으로 바닷속으로 가겠다는 게 뭐가 잘못된 건지.

자신이 보기에 빠진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련님이 문제입니다."

카샬은 사실을 꼽았다.

"내가? 왜?"

하벨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전혀.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의 아들, 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아무 문제 없이 돌아오셔서 정말 안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몸을 혹사하겠다고 하시면 이게 문제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하지만 방법이 이것뿐이고, 시간도 없어. 지금 레놀드 왕국에 강제로 눌러앉은 클로저가 회의라는 이름으로 에른스트의 시선을 끌어주고 있잖아?"

"…바닷속에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헤레스가 기가 찬 표정을 하며 하벨을 말로써 찔렀다.

찔린 하벨은 몸을 잠깐 떨었다. 유난히 헤레스의 눈꼬리가 사납다고 생각했다.

하벨은 살짝 주눅 든 목소리를 냈다.

"조금 전에 드란트 전하한테 연락이 온 거 너도 들었지?"

"드란트라면 코스모피안 왕국의 왕이 아니오?"

혼란의 바다에 헤매고 있던 여하가 마침 아는 말이 나오자 반가워하며 물었다.

"맞아. 조만간 레바놈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발견된 계약서를 토대로 레놀드 왕국에게 항의하겠다고 말했어."

페트리오가 크라마를 통해 드란트에게 소식을 전달했다는 보고는 받았다.

자신이 드란트에게 전해준 정보는 두 개였다.

하나는 드란트에게도 이미 언급한 레놀드 왕국보다 더 큰 괴물이 레놀드 왕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는 그 괴물이 레놀드 왕국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드란트는 고맙게도 쪽지 한 통을 보내주었다.

―시선을 끌어야 하는가, 개구쟁이처럼?

드란트가 바라보는 자신이 개구쟁이라는 건지 몰라도 하벨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여 지금 드란트는 레놀드 왕국을 자극해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암살사건과 폭파 사건, 이 두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게 틀림없었다.

결국, 이득을 위해 움직인 셈이니 하벨은 드란트의 호위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지금 바로 바닷속으로 들어갈 기회야. 그러니 지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 론입니다."

하벨의 시선을 받은 엘라힘이 고개를 숙였다.

시엘느에서 하벨이 신의 아들이라는 걸 증명했기에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진통제는, 이미 들어가고 있어요."

헤레스는 하벨에게 달린 링거들을 바라보았다.

"제가 신의 은총을 써 고통을 더 덜겠습니다."

엘라힘은 하벨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를 이해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신이 있기에 이 힘은 더 유한하지 않았다.

다만, 하벨의 체력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몰랐다.

저번에 에른스트에게 배를 뚫렸을 때 정말 많은 체력을 소진하지 않았던가.

"자, 가겠습니다."

[자, 자, 잠깐만, 대장!]

아라가 다급히 외쳤다.

"왜 그래, 아라야?"

[이 몸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지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후… 하.]

아라는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신 뒤에 카샬에게 매달렸다.

[이제 이 몸은 준비가 됐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고."

하벨은 모두에게 넌지시 경고했다.

"사실 이게 더 불안정한 거 아닙니까?"

"그건 절대 아니야, 카샬.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능하니까."

과거에도 해본 적이 있기에 하벨은 다른 이들보다 너무도 여유로웠다.

이미 가졌되, 아직 열리지 않은 힘을 개방하는 건 무척 간단했다.

손에 열쇠를 쥐었다고 생각한 후에 힘을 골라 열면 그뿐이었다.

열쇠가 작동하면 다른 열쇠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지만, 힘 자체는 어마했다.

"시작한다."

하벨은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열쇠를 쥐는 상상을 하며 힘을 작동하는 말을 너무도 오랜만에 꺼냈다.

'수많은 문을 내게 보여라.'

손아귀에 작은 열쇠가 생기자마자 찬찬히 뜬 하벨의 눈동자에 황금빛 빛줄기가 피어올랐다.

수많은 문이 보였다.

불안정한 지금, 아직은 보면 안 되는 것들을 보았기에 눈이 탈 것처럼 이글거렸다.

'…더럽게 아프네.'

하벨은 다른 누군가를 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아직 열리지 못한 힘이 문처럼 나타났다.

그중에 자신이 열 힘은 두 가지였다.

쥐었던 손을 펼치자 작은 문 두 개가 하벨의 손에 나타났다.

물과 물을 연결하는 힘.

물을 통해 이동하는 힘.

물과 물을 연결하는 힘은 이미 반쯤 열렸기에 한결 수월했고, 물을 통해 이동하는 힘은 물과 물을 연결하는 힘이 열리면 손쉽게 열릴 힘이었다.

하벨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열쇠를 확인하고는 첫 번째로 닫힌 문을 열었다.

딸깍.

반쯤 잠긴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격렬한 통증이 뒤따랐다.

"아아아악……!"

하벨이 내지르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침대로 몸이 쓰러졌고, 누워 있음에도 허리가 튕겼다.

헤레스가 이미 소리를 차단했지만, 하벨은 무의식중에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비명을 억눌렀다.

'열려. 열리라고.'

몸이 요란 법석하게 떨리며 누군가 자신의 몸을 꽉 잡아주는 게 느껴졌다.

끼이익.

열리는 속도가 왜 이렇게 굼뜬지 몰랐다. 열릴 때마다 살갗이 하나씩 벗겨지는 고통이 몰려왔다.

파르르 떨리던 몸이 갑자기 멈추더니 목구멍에 치미는 뜨거움이 몰려왔다.

누군가 자신의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하벨은 그대로 토해버렸다.

"…커헉!"

바닥을 적신 피와 함께 열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제야 자신에게 쏟아지는 신의 은총이 보였다.

'…미치겠네.'

쾅쾅 뛰는 심장 소리가 얼마나 큰지 주변 소리가 귓가에 닫지 않았다.

당장 정신을 놓아버릴 것처럼 아득한 고통에 하벨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정말 의식을 놓아버린다면 문도 열지 못하는 채로 끝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일은 사양이었다.

'하나 더.'

하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문을 하나 더 열어버렸다.

자신이 이 통증을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지만, 다시 처음부터 느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한 번에 통증을 느끼는 게 낫지 않겠는가.

딸깍.

닫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허리가 휘며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몸이 찢어지고,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에 눈앞이 잠깐 어두워졌다가 밝아졌을 때,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온몸이 땀에 절여 있다고 생각이 들 만큼 축축했고, 입술을 움직이는 것도, 손끝조차 까닥하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 무렵, 두 개의 문이 열렸다.

반짝반짝하며 새어 나오는 힘들의 소리는 힘차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닮아있었다.

쏴아아아.

마치 그 소리가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듯 다정하게 휩쓸자 하벨은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의 눈빛을 본 뒤에야 활짝 웃다가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

파도 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키득거리는, 물이 꺼내는 웃음소리가 그 속에 천천히 섞여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 * *

"…진짜 미쳤어요?"

누군가 지르는 소리에 하벨은 눈을 떴다.

하벨 티에라가 놀라며 자신을 흔들고 있지 않던가.

"무슨 힘을 그따위로 씁니까! 진짜 미쳤어요, 용왕님?"

"상황만 본다면 충분히 미칠 만하지 않아?"

하벨은 태연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리고 그 손가락은 하벨 티에라를 향했다.

"너."

이윽고 손가락은 허공을 가리켰다.

"아버지."

허공을 가리키던 손가락은 찬찬히 풀어졌고, 땅으로 내려왔다.

하벨 티에라를 바라보는 하벨의 눈동자에 슬픔이 어리며 당장 하벨 티에라를 안아주었다.

"미안하다."

"……."

화를 내던 하벨 티에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섣불리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 만남도, 하벨이 이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하벨 티에라의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맺혀버렸다.

"내가 미안하다, 하벨 티에라."

하벨은 하벨 티에라를 만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사과하고 싶었다.

"…왜."

하벨 티에라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분명 들리는 건 사과지만, 다가왔을 땐 어느새 위로되고 말았다.

"나 다음에 네가 있다는 걸 몰랐어. 알았다면 나는 너를 위해 기꺼이 다 주었을 텐데."

"왜 또… 사과하는 건데요?"

"이건, 내 잘못이니까. 잘못은 사과해야지. 내 독단에 네가 휘말렸어. 그건 사실이잖아."

하벨은 조금씩 떨려오는 하벨 티에라의 떨림에 등을 토닥여줬다.

"너는 용왕이었어."

"…예. 저는 용왕이었습니다."

하벨 티에라는 울먹였다.

"그래서 회귀를 버틸 수 있었어. 비록 영혼이 없다고 해도 인간이 아니니까."

"정답… 이에요."

하벨 티에라는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눈물이 나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지만, 하벨 티에라는 안도를 느꼈다.

"저는 반쪽짜리였습니다. 용왕의 육체만 가진, 반쪽짜리요."

"그 사실을 류아한테 들은 거지?"

"예. 다 들었습니다."

―…당신이 용왕입니다. 2대 용왕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만 용왕일 뿐입니다. 당황스러운 거 압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존재는 애초에 용왕밖에 없고, 영혼은 당신에게 반응했다고 합니다.

"정말… 당황했어요."

하벨 티에라는 류아의 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가 차 웃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방법에 자신은 물어보았다.

자신이 바로 잡을 수 있냐고.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신은 안 됩니다. 당신이란 존재는 이 육체가 썩지 않게 유지하는 용도, 그 자체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애초에 임시로 태어났다고 그랬어요. 용왕의 육체가 썩지 않게 하는 용도요."

하벨 티에라를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그가 뒤로 물러나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제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원래 그런 존재였으니까요. 애초부터 임시 용왕인 셈이에요."

"어… 어떻게……."

―덜떨어진 저는 안 되고, 용왕님밖에 없었어요.

하벨 티에라가 이전에 말했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저 말을 들었을 때, 제가 어떤 선택을 했겠어요?"

하벨 티에라는 눈물을 닦았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지금처럼, 그때도 웃었다. 그 웃음은 천천히 지워졌지만.

"하지만 류아 씨는 진지했고, 저는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제 인생을 전부 부정당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 속에 또 하벨 티에라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상이… 무너지고, 다 죽었으니까요. 저도, 죽어가고 있었으니까요."

하벨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하벨 티에라라고 무사할 거라 생각했을까.

"류아 씨는 제게 선택을 맡겼어요."

하벨 티에라는 잠깐 눈을 깊게 감았다.

낮임에도 검은 태양이 떠오르던, 그 끔찍한 순간을 기억했다.

그 상황에서 저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이 과연 진실할까 아닐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다 같이 미쳐갈 뿐.

"이 모든 걸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시작하는 순간 저한테 괴로움만이 덮칠 거라고 경고도 해줬어요."

―…그래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께 할 수 있는 건 그저 설득일 뿐이니까요.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여도 괜찮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든 존중하겠습니다.

"물론, 류아의 표정은 달랐지만요. 정말 애절했어요."

하벨 티에라는 잠깐 웃었다.

"용왕님."

"……."

차분히 부르는 저 소리에도 하벨은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벨 티에라라는 존재는 자신을 위해 탄생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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