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패가 들어오다(3)
* * *
"자, 잠깐만. 이걸 어떻게 다시 돌려받을 수 있게 된 거야? 에른스트에게 빼앗겼다며."
라르웬은 하벨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의문이 밀려왔다.
빼앗긴 열쇠가 제 발로 걸어온 것도 아닌데 이걸 손에 넣었다니.
<혹시 신이 너한테 그 열쇠를 다시 주었더냐?>
"맞아요. 받았어요."
룬델의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어갔다.
"그럼 그 열쇠를 애초에 신이 가지고 있던 거였어? 그랬다면 왜 너한테 주지 않은 거야?"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라르웬의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그건 아니었을 거예요. 내 생각에는 말이죠. 놈이 흘린 거예요."
<흘렸다니? 에른스트가? 그게 가능한 일이더냐?>
"일단 말이죠. 에른스트가 생각한 열쇠의 수호자는 아마도 두 평행 세계를 유지하는 자일 겁니다. 그래서 균형을 망가트려 하나의 세상으로 만들면서 모든 계획이 시작됐죠."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이미 자신이 여러 번 말해주었으니.
하벨은 손을 올리며 열쇠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열쇠의 수호자는 그게 아닙니다."
잠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뜬 하벨의 눈에 이채가 가득했다.
무언가 달랐기에 라르웬은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는 여러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보이지 않는 문으로 이루어져 문이 열리면 허락된 것이며 문이 닫히면 허락되지 않은 겁니다. 이 허락은 세계의 법칙이라는, 살아 있는 법률이 관리해요. 신마저도 이 법칙에 자유로울 수 없을 거예요."
"아득… 하네."
라르웬은 자신이 상상도 못 한 세계를 머릿속에 담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어려웠다.
신이라는 존재가 이미 큰데 그 신마저도 자유롭지 못하다니.
"뭐, 그 법칙이고 뭐고 사실 그건 필요 없어요. 마주칠 일도 없으니까요."
다음 설명을 위해 살짝 언질을 줄 필요가 있었기에 제법 무겁게 설명했지만, 정말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애초에 법칙에 걸릴만한 일을 벌이려면 에른스트처럼 미쳐야 할 테니까.
"어쨌든,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저이며, 제 몸을 지키고자 신이 떼어다 준 물의 권능이 더해져 만들어진 게 접니다."
[…대, 대장이 열쇠였어?]
숨을 짧게 들이마신 아라는 충격에 입을 벌렸다.
자신이 아는 열쇠와 하벨은 너무도 달랐다. 하벨은 누가 봐도 인간인데.
"그래, 아라야. 나는 열쇠……."
"넌 막내야. 이제 와서 네가 열쇠라고 해도 넌 내 동생이니까 됐어. 더는 확인할 필요도 없고, 말을 나눌 필요도 없어."
라르웬은 하벨의 말을 자르며 그의 정체성에 힘을 주었다.
<라르웬이 말이 맞단다. 넌 내 아들이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야. 내가 걱정되는 건 혹여나 그 사실에 네 마음이 다치지 않았을까 그게 더 신경 쓰이는구나.>
토닥이며 어루만지는 룬델의 목소리까지 이어지자 하벨은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몰랐다.
솔직히 상처받았냐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았다.
열쇠인 건 충격받았지만, 어차피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 계속 말해봐."
아무 일도 아니라며 자신을 재촉하는 라르웬의 말에 하벨은 실실거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세계의 법칙에 손을 대는 건 나도 허락받지 못했는데 에른스트는 오죽하겠습니까? 분명 무언가를 대가로 치를 때, 동시에 열쇠의 진짜 힘이 빠져나왔을 겁니다. 애초에 맞지 않는 힘이니까요. 그걸 신이 가져간 게 아닐까 싶어요."
결론이 추측으로 나긴 했지만, 하벨은 자신이 생각한 범위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확신했다.
"그럼 아까, 네가 썼던 힘을 연다고 하던데. 그건 왜 가능한 건데?"
[맞아. 네가 방금 말한 거랑 맞지 않잖아. 세계의 법칙 어쩌고 했잖아.]
라르웬이 꺼낸 말에 루룸 역시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세계의 법칙은 건드릴 수가 없죠. 가령, 내가 누군가의 수명을 건드리는 건 세계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내가 이 세계를 어떻게 돌아다닐지 말지, 그건 세계의 법칙이 아닌 거죠. 그렇잖아요?"
대답을 듣자마자 라르웬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소리를 냈다.
"왜 웃으세요, 형님? 좀 치사해 보여요?"
"뭐가 치사해? 원래 그런 건 써먹어야지. 이 허점을 아는 데 써먹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그런데요?"
"난 또 네가 뭘 대가로 바쳐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
안도가 섞인 웃음이라는 걸 알자 하벨은 자신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내 힘이라서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그럼 됐어."
라르웬은 팔짱을 낀 채 한결 편안하게 앉았다.
"아버지."
하벨은 라르웬을 바라보며 룬델을 불렀다.
<그래, 하벨아.>
"말이 나온 김에 부탁 좀 드릴게요, 아버지."
<뭐든 말하렴.>
"힘을 개방한 뒤에 반영구 정화제를 놓고 갈 테니, 넓게만 퍼트려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하벨아. 음… 내가 듣기에 힘을 연다는 게 마치 강제로 여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이거 괜찮더냐?>
"아뇨. 이거 강제… 맞아요."
하벨은 잠깐 머뭇거렸다.
탁.
편안하게 앉아 있던 라르웬이 제 이마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코밑을 슥 쓸었다.
<나는 사실 이 부분은 네가 영혼을 되찾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보는데 내 생각이 틀렸더냐?>
"맞아요. 제가 영혼을 다 모으면 알아서 개방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라르웬의 상체가 앞으로 조금 나왔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라르웬은 조금 전과 달리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 대장이 억지로 열쇠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대장은 어, 아프지도 않을 거구.]
아라 역시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었기에 볼을 살짝 부풀렸다.
가만히 있으면 다 해결이 될 텐데 왜 자신을 아프게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영혼을 다 모은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하벨은 속에서 밀려오는 답답함을 조금 털어놓았다.
"그래서 지금 바닷속으로 가겠습니다."
따악!
라르웬은 바로 하벨의 이마를 때렸고, 그는 뒤늦게 손을 올렸지만, 이미 이마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왜 때려요?"
하벨이 울컥해 물었다.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이게 왜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뭐가 말이 되는 소리인데?"
"조각난 내 신체는 앞으로 2개가 남았어요."
하벨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조각났다는 말도, '신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역시 입안이 참 쓰다 싶었다.
"언제 에른스트에게 들킬지 모르는 지금 틈의 세계와 바다 중에 바다에 먼저 들리는 게 맞잖아요?"
틈의 세계와 바다는 둘 다 에른스트의 영역이겠지만, 바다에는 감시자가 없을 게 분명했다.
애초에 아무도 가지 못하는 곳이었으니.
"그러니까 왜?"
라르웬이 차분하게 묻자 하벨은 구겨졌던 얼굴을 폈다.
"인어족은 살아 있으니까요."
사실 여하만큼이나 자신도 어인족이 살아 있길 바랐다.
그들을 버린 자신의 죄가 늘 발목을 잡았으니까.
"시엘느에서 에른스트에게 대항하고자 약점을 찾아다녔대요. 그러던 중 에른스트가 인어족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했고, '문하'라고 불리는 인어족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하가 울었구나."
라르웬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인어족이 살아 있는 건 여하가 내내 바라왔던 순간일 테니까.
<하벨아. 너는 지금 인어족이 에른스트를 찌를 핵심이라고 생각하더냐? 그래서 바닷속으로 가고자 하더냐?>
"예. 에른스트가 숨기고 싶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바닷속에 숨겨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구태여 인어족을 공격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벨은 눈가를 좁혔다.
"그러니 바다에 가야 합니다. 제가 열쇠를 사용해야 합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벨은 이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이미 익숙했다.
<너를 이해한단다, 하벨아.>
룬델의 대답에 라르웬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뭘 더 말할 수 있을까.
"그럼, 헤레스를 불러올게. 엘라힘 신관님까지 부르는 건 요란해 보이려나. 하지만 둘 다 있는 게 낫겠지? 어쨌든 너는 지금 습격을 받아 요양 중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라르웬이 담담하게 말하자 하벨은 왠지 주눅이 들었다.
"화… 안 나요?"
"내면 뭐 하겠어. 넌 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쉽게 포기를……."
"이건 포기가 아니야, 막내야."
짧게 숨을 내쉰 라르웬은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지금은 아버지가 허락했고, 너를 믿고 얌전히 밀어주는 게 널 위한 길인 걸 아니까 그렇게 내린 결정이야. 다시는 포기한다는 말 같은 건 쓰지 마.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가려다 라르웬은 다시 등을 돌렸다.
"네가 다시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다고 그랬는데. 나도 그래."
라르웬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그 들끓는 괴로움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나도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절박함이 목소리에 가득 차 하벨은 가슴이 떨려왔다.
라르웬은 등을 돌렸다.
<하벨아.>
"예, 아버지."
룬델의 목소리마저 무거웠기에 하벨은 미안했다.
바닷속에 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저들이 왜 모르겠는가.
<이제야 왜 네가 반영구 정화제를 내게 맡기는 건지 이해했단다. 혹,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더냐?>
"예, 맞습니다."
오염된 물이 에른스트가 만든 거라면 이를 왜 사용하지 않을까.
현존하는 여러 방법 중에 오염된 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하벨 자신이 지니고 있었다.
최대한 많이, 최대한 멀리 깔아두어야만 했다.
<회담은 걱정하지 말거라.>
"…아버지?"
하벨의 눈이 커졌다.
티에라 가문은 정화제를 제외하면 어떤 세력과 교섭도 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룬델이 바안의 뒷배에 있음을 알렸고, 이번에는 자신 때문에 룬델이 여러 왕국과 교섭을 시도하고자 했다.
이 변화가 티에라 가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괜찮다. 자식이 나아갈 때 넘어지지 않게 길을 닦는 건 부모의 역할이란다. 네가 이렇게 움직이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룬델의 목소리는 땅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여우비 같았다.
<내가 널 위해 움직이는 걸 허락해주렴.>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그렇게 될 수 있는지 하벨은 매번 매번 룬델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올 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룬델이라면 자신을 안아주며 그저 토닥거릴 게 분명했다.
"아버지."
하벨은 숨소리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그래, 하벨아.>
"곧 어떤 형식으로든 끝이 올 겁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만큼 막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니 절 믿어주세요."
똑똑!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딱.
창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너를 믿는단다. 늘 믿고 있단다.>
귓가를 다정하게 만지는 손길처럼 라르웬이 밖으로 나가자 헤레스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다가왔고, 아라와 루룸이 힘겹게 창문을 열자 새가 날아왔다.
[쪽지가 있어, 대장!]
아라가 새를 쓰다듬으며 방긋 웃었다.
라르웬이 나가려다가 말고 문을 닫았고, 헤레스가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펼쳤다.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헤레스가 눈시울을 붉혔다.
"…도련님. 보름달. 보름달이 완성됐어요!"
하벨의 눈이 차차 커졌다.
완성이라니.
[이거 봐봐, 대장!]
하벨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 아라가 가져다준 쪽지를 받았다.
―아주아주 큰 임무 완료! 자신감 최고로 상승!
레디나가 넘긴 쪽지였다.
검은 달 일원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추신. 누구부터 죽일까요? 알려주세요. 지금 다들 손이 근질근질하네요.
하벨의 미소가 그제야 더 크게 번져갔다.
"아버지."
<그래, 하벨아.>
"제 마음대로 할 거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불안한 마음을 녹일 아주 좋은 수단이 손에 들어왔다.
"그럼 끊을게요, 아버지."
하벨은 헤레스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유 모를 불안함이 올라오자 헤레스의 안경이 흘러내렸다.
"…왜에, 웃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