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패가 들어오다(2)
* * *
[맞아, 나도 저거 물어보려고 했어. 여하가 나갔으니까 이제 끝난 거 맞지? 계속해도 되는 거 맞지?]
또 다른 정령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건 진짜 기분 좋았어!]
―반영구 정화제를 밖에서 말하는 건 안 돼. 에른스트는 우릴 볼 수 있으니까, 대장이나 이몸 등 여기에서 나온 말을 밖에서 하는 것도 안 돼.
아라의 명령이 얼마 전에 떨어지지 않았던가.
아직도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이안의 명령에 아라의 명령이 겹쳐진 상황이 낯설지만, 그래도 정령들은 좋았다.
아라는 정령왕임에도 보듬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게다가 반영구 정화제를 만드는 것도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옛날에 존재했다던 맑고 깨끗한 바다 그 품으로 들어온 기분이었기에 놀랄 만큼 행복했다.
[음. 조용히 들어올래? 이 몸이 보기에 아주 중요한 대화가 오갈 거라 생각해. 하지만 다들 쉿 해야 해. 알지?]
아라가 웅성웅성하는 정령들을 향해 앞발을 올려 입에 갖다 대자 정령들은 그 모습을 따라 했다.
[뭐야, 아라야?]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정령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던 루룸이 아라를 보더니 라르웬의 머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라의 등에 못 보던 망토가 있었다.
라르웬 역시 뒤늦게 아라를 바라보며 놀란 눈으로 문을 닫았다.
[이거 신이 줬다?]
아라가 망토를 자랑하듯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배시시 웃었다.
"……."
라르웬은 그대로 의자를 쥐고선 멈췄다.
해명을 바라는 눈빛에 하벨은 아라만큼이나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에 시엘느를 갔다 왔잖습니까."
"…자, 잠깐만 있어 봐."
라르웬은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 중 첫 번째가 바로 하벨 때문이었으니까.
―검은 달을 부수고 난 뒤에 시엘느에 들렀다가 오겠습니다. 아마 얼마 안 걸릴 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마치 시엘느를 옆집 친구 집에 가듯이 꺼내는 말에 왜 기가 차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하벨은 이미 갔다 왔고, 이 소식을 정령들에게 들어 암살사건과 관련해서 아직도 여러 조사 때문에 발이 묶인 넬시아를 대신해 찾아온 것이었다.
"신을……."
라르웬은 자신이 말하고도 기가 차 웃었다.
신을 만났다니.
"신은 있었습니다."
[…쉬잇.]
아라가 정령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지시했다.
"하지만 지금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에른스트는요?"
[너,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꺼내는지 알고 있어? 신이 왜 중요하질 않아?]
루룸이 라르웬 대신 기겁하자 하벨은 차분히 대꾸했다.
"당연히 아무 일도 아니지, 루룸. 애초에 에른스트가 뭐가 되려고 했는지 잊었어?"
"…신이 되려고 했지."
라르웬은 그제야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게다가 엘라힘이 저보고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알려드렸잖아요."
하벨은 말하던 도중에 정령들을 향해 손짓했다.
[헤헤헤! 신난다!]
이 시간에도 부지런히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어 놔야 했다.
에른스트가 정령의 힘을 느끼지 못하기에 자신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
"에른스트는요?"
하벨이 또 묻자 라르웬은 얼굴을 쓸어내린 뒤에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더 빨리 오게 됐어."
라르웬이 입가를 핥자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고 있던 하벨의 손이 잠깐 멈췄다.
"네?"
"우리 대표가 여기에 도착한 거 알고 있지?"
"들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기회라 생각해 자리를 비운 게 아닙니까?"
하벨 자신이 움직이기 전에 칼리우스를 시켜 이곳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에게 도망치라는 지시를 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그 이유로 에른스트가 자신에게 찾아왔고,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증명했기에 놈이 안심하며 나간 사이에 검은 달과 시엘느의 일을 처리하고 올 수 있었다.
"그래, 그 대표가 말이야."
무언가를 심각하게 꺼내려다가 라르웬이 곧 씩 웃었다.
그가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그건 왜요?"
"기왕이면 아버지도 듣는 게 좋잖아? 너도 할 말 있을 거고."
"어떻게 아셨어요?"
하벨이 놀란 눈을 하며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내가 네 형님인데 이걸 모르겠어?"
라르웬은 코웃음을 치며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한 뒤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버지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알 수 있지. 보통 몇 초면 받아?"
"3초를 넘긴 적은 없어요."
"그럼 봐봐."
라르웬이 연락용 아이템을 가리켰다. 아라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통화음이 이상할 만큼 조금 길었다.
<무슨 일이더냐?>
룬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봤지? 나한테는 좀 딱딱한 거 봤지?"
라르웬이 콕 집어 말하자 당황한 룬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아니, 아니란다. 요새 헤스트리아 왕국 일로 바빠 방금도 정신이 없었단다.>
[이 몸은 다 들었어. 룬델이 달라.]
아라가 살짝 실망하며 말하자 룬델은 더듬거리며 해명했다.
<그게 아, 아니란다. 정말 아니야, 아라야. 라르웬? 제대로 설명해주렴!>
오랜만에 당황한 룬델의 태도에 라르웬은 배를 잡고 웃었다.
"푸흡.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요. 어쨌든, 막내한테 온 김에 아버지한테도 보고하려고요. 알고 계시면 좋잖아요? 그렇지?"
웃음을 겨우 멈춘 라르웬은 말을 꺼내며 하벨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이게 그렇게도 좋은 건지, 하벨은 감동이란 감정을 얼굴에 그렸다. 이러면 앞으로 더 보여주고 싶지 않은가.
아버지도, 누님도, 자신도 하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라르웬은 이 마음을 누른 채로 자신이 이곳에 오고, 룬델에게 연락한 이유를 꺼냈다.
"자, 일단 들어주세요. 클로저의 대표. 그러니까 크로니안이 에른스트를 이기고 여기에 눌러앉았어요."
<그, 그게 무슨 소리더냐?>
"…네?"
라르웬은 놀란 룬델과 어리둥절한 하벨의 표정에 더 신이 났다.
"듣자 하니까 레놀드 왕국에 틈의 세계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고 하더라고요."
"진짜요?"
의외라는 하벨의 표정을 라르웬 역시 이해했다. 자신도 처음에 그랬으니.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떻습니까? 달님 씨의 부탁이니 일단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실이냐 아니냐로 말하자면 사실입니다. 저는 꽤 많이 봤고, 사실 이전부터 주목하고 있었으니까요.
자신만만한 크로니안의 표정에 라르웬은 딱히 반발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국, 크로니안은 레놀드 왕실로 들어와 한자리를 차지했으니까.
"그럼."
라르웬이 싱긋 웃자 하벨은 그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렸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여기는 레놀드 왕국이 아닙니까? 아니, 애초에 클로저는 모든 나라가 합의해서 만들어진 단체잖아요."
하벨이 크로니안에게 바란 건 에른스트의 시선을 끌어주는 일이었다.
일단 실랑이를 하는 것 자체로 에른스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클로저에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흐름이 오히려 더 좋게 흘러가지 않더냐? 하벨 네가 벌인 일들의 화살이 어디로 쏠릴지 눈에 보인단다. 아주 노골적으로.>
레바놈의 일도, 하벨의 습격도, 마법사 협회 일까지, 모두 클로저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저도 보여요. 그래서 얼떨떨하면서 다행이다 싶은데. 클로저가 그만한 힘이 있는지 몰랐어요."
하벨이 궁금한 건 이 사실이었다. 클로저가 정말로 레놀드 왕국을, 에른스트를 꺾고 들어왔는가.
만약에 이게 아니라면 에른스트가 일부러 보내준 게 아닐까. 하벨은 살짝 오른 의심을 잠재우고 싶었다.
"나도 몰랐지. 그런데 클로저는 일단 모든 나라가 합의해 만들어졌지만, 독자적인 곳이야."
라르웬은 클로저가 어떤 단체인지부터 짚고 갔다.
"과거의 행동을 본다면 지금까지 클로저가 이렇게 깊게 관여한 적은 없어. 그만큼 크로니안은 각오를 한 모양이야.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는 권리를 발동할 만큼."
라르웬이 클로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며 뿌듯함 역시 숨기지 못했다.
"권리라뇨?"
"틈의 세계가 이제는 무엇인지, 어떻게 탄생한 건지 등등 알 건 다 알게 됐잖아? 네 덕분에 말이야."
라르웬은 하벨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풀지 못한 숙제를 하벨이 풀지 않았던가.
<그래. 라르웬이 말이 맞단다. 하벨 네가 많은 것들을 풀었지.>
룬델 역시 자랑스러움을 드러냈다.
또 살짝 먹먹해 보이는 하벨의 표정에 라르웬은 즐거워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아무도 몰랐어. 그래서 이 틈의 세계가 평균 이상치를 몇 개월간 넘어버리면 어느 나라든 임시로 머물 권리를 만들었어. 틈의 세계를 닫지 못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대표는 이 권리를 들이민 것 같더라고."
"에른스트는 다 알면서도 나 때문에 이걸 거절하지 못했겠네요?"
"그렇지. 그 자리에 바로 내가 있으니까."
라르웬은 낄낄 웃었다.
자신이 하벨에게 클로저 일을 말해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 에른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바로 하벨이었다. 하벨이 에른스트가 벌일 계획의 중심에 있었기에.
하벨은 활짝 웃었다.
"좋은데요? 에른스트가 날 의식해서 틈의 세계가 열리지 않게 막을 확률이 높고요."
"바로 그거야. 왜 내가 너한테 이렇게 빨리 달려왔는지 알겠지?"
라르웬의 시선이 여기저기 움직이더니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너도 잘했어. 신의 아들이고 뭐고 간에 네가 이렇게 사고를 덜 쳐서 다행이다. 진짜 빨리 오길 잘했어."
라르웬이 팔짱을 꼈고, 하벨은 그가 한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한쪽 눈썹을 올렸다.
"교황청을 부쉈는데요?"
"그럴 수도 있지. 다시 고치면 되잖아? 솔직히 여기 오기 전까지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르지, 막내야?"
"아니……."
"계속 이렇게만 해. 그러면 당연히 내가 좋게, 좋게 넘어가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하벨은 문득 페트리오의 말이 떠올랐다.
―어서 가십시오, 도련님. 시엘느의 일은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시엘느의 추기경이 에른스트의 약점을 잡고 구출해온 인어족 문하가 여하에게 줄 쪽지를 쓰는 사이 페트리오가 자신을 재촉하며 꺼낸 말이 있었다.
―신의 아들이니 뭐니 그런 말을 들어도 제게 도련님은 도련님입니다. 사고 치면서 돌아다니시는……. 하, 이번에는 그래도 친 사고 중에 제일 수월하겠습니다. 정말 멀쩡하시고, 피도 흘리지 않으셔서 진짜 다행입니다. 이런 사고만 쳐주십시오. 그럼 제가 카샬 놈이 뭐라고 하든 다 막아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진짜 너무 힘들어서 잠깐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페트리오의 말과 라르웬의 말이 너무도 닮아있었다.
사실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데, 여기서 놀란 게 아니라 몸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동하다니.
"형님?"
"왜 그래?"
"대체 얼마나 힘드십니까?"
하벨이 안쓰러움을 담아 바라보자 라르웬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내가 힘들다고? 막내야. 나보다 힘든 건 너야."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보거라.>
룬델은 무겁게 목소리를 냈다.
<하벨 네가 시엘느로 갔다는 건 보고로 들어 안단다. 그런데 지금 뭘 부쉈다고 했더냐?>
"교황청이요."
하벨은 얼른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교, 교황청을?>
"에이, 그 정도는 부술 수도 있죠."
라르웬이 넌지시 말하자 룬델이 이마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교육을 잘못한 것이더냐?>
"막내가 다치는 게 더 나아요? 아니면 교황청만 부수고 온 게 나아요?"
갑자기 묻는 라르웬의 질문에 룬델이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하벨은 신이 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을 만났어요. 제가 일단은 신의 아들이거든요. 아, 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아버지 아들이 아닌 건 아니에요. 질투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룬델의 말문이 막히자 하벨은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렸다.
"저 열쇠를 다시 얻었어요."
[열쇠? 어떤 열쇠를 말하는 거야?]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그 열쇠. 나는 열쇠의 수호자였으니까."
갑자기 꺼내는 저 말에 이번에는 라르웬이 하벨은 멍하니 보았다.
분명 하벨은 예전에도 자신을 열쇠의 수호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열쇠를 에른스트에게 빼앗겼고, 두 세계가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오오옵! 그럼 이 몸한테 보여줄 수 있어?]
아라가 눈을 반짝거리며 망토를 살짝 쥐었다.
하벨을 닮아 얼마나 예쁜 열쇠일지 기대가 됐다.
"그거야 간단하지."
하벨은 웃다 말고 슬쩍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막내야? 나 좀 불안하다?"
"이제 이 열쇠로 제가 이전에 썼던 힘을 열 생각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어요."
자신이 왕이라 불릴 수 있었던 힘.
아라나 다른 정령들이 지닌 물의 길보다 더 상위에 있는 힘을 이 열쇠로 열어 더 빨리 개방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한 번 가본 길인데 뭐가 어려울까.
하벨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