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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75화 (375/415)

375화. 패가 들어오다

* * *

"…이야기요?"

문하가 눈을 깜박거렸다.

"일단, 내가 누굴 언급할 거야. 놀라면 안 돼."

그렇게 말해도 하벨은 문하의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간 걸 확인했다.

"…안 놀라도록 하겠습니다."

"여하라고……."

"와, 왕자님께서 살아 계셨습니까? 왕자님을 어떻게……. 헙!"

문하는 이리저리 말을 꺼내다가 곧 자신의 입을 막았다.

절대로 새어나가면 안 되는 비밀을 발설한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하벨은 안도하며 웃었다. 정말로 여하를 좋아하는 게 보였으니.

"여하라면 나랑 같이 있어."

"당장 왕자님을……."

물이 소용돌이치며 문하의 머리를 때리듯 쥐어박았다.

―이 멍청아! 우리가 뭐라고 했어? 공손하게 받들어야 한다고 그랬잖아!

―감히, 용왕님을 협박하려고 하다니!

"쉬이이.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나는 대화를 하러 왔으니까."

하벨이 손을 들자 분노로 거친 파도를 치던 물이 멈췄다.

문하의 입이 벌어졌다.

항상 오만한 물이 이렇게 공손히 말을 듣다니.

"여하는 지금 내 호위야. 잘 지내고 있고,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왕자님이 누구 밑에 들어가다뇨. 그런 성격이……."

"너희를 걱정해서 나한테 부탁을 하러 왔어."

"왕자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요. 바로요."

"지금은 안 돼.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여하를 만나고 싶은 문하의 마음은 하벨도 이해했다.

왜 이해하지 못할까.

하지만 자신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지금 터를 잡은 나라는 레놀드 왕국이었고, 그곳에 에른스트가 있었으니.

에른스트에게 이 사실을 들키면 죽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누가 죽을지, 얼마나 죽을지 가늠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들키면 안 돼.'

유렌을 만나야 했다.

없애버릴 것들도 남아 있었다.

"일단 내가 먼저 전할게. 여하는 너희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조차 의심하고 있어. 바다는 더 심하게 오염돼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그랬거든."

"살아 있습니다! 더 깊은 바닷속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로부터 진귀한 힘을 받은 적이 있다고 왕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다의 오염이 인어족을 덮칠 때, 그 힘이 우리를 지켜줬습니다!"

'…내 힘이다. 하벨 티에라도 모르는 저 미래를 류아는 봤을까.'

류아가 인어족에게 자신의 신체를 넘겼을 때만 해도 크지 않았겠지만, 지금으로서 저들에게 있어 오염된 바다를 막을, 유일한 방어막이 되어버렸다.

"그게 내 힘이야. 그렇지?"

하벨이 씩 웃자 물이 문하에게 여러 말을 하나씩 얹었다.

―저는 못 봤고, 쟤는 봤어요!

―저 봤어요! 맞아요! 용왕님의 힘이에요! 류아가 줬어요!

―어서 전해줘. 지금 용왕님은 아주, 아주 나쁜 것 때문에 귀가 막혀있어.

물은 문하를 재촉했다.

"…용왕님의 힘이 맞고, 류아가 줬다는데요?"

'역시나.'

하벨은 류아가 줬다는 말에 속으로 흡족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마 들어도 모르겠지만, 내가 용왕이야."

하벨이 눈웃음을 짓자 문하는 주춤거렸다. 저 웃음에 어쩐지 긴장감이 사르르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인어족을 구할 거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정말이야. 물을 걸고 맹세할게."

―너어는, 너는 진짜 나쁘다. 우리 용왕님이라고. 되게 귀중한 존재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래. 우리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

물이 금세 화를 내자 문하는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게 아닌데…….'

문하는 하벨을 곁눈질로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인간들은 다 나쁘다고 배워왔기에 지금처럼 호의는 너무도 낯설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너무도 예뻤다. 분위기마저 신비로웠다.

"그러니까 말해줄래?"

하벨이 다시 묻자 추기경 뒤쪽에서 서 있는 칼리우스와 아라가 문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장은 문하를 안 잡아먹어. 대장은 완전 따스한데.]

아라가 슬픈 눈으로 문하를 바라보자 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하가 하벨의 진심을 알길 빌었다.

'이 분은… 신의 아들이시다. 신의 아들.'

추기경마저 속이 탔다.

눈앞에 저토록 신성한 분이 있음에도 왜 보질 못하는 건지.

"…바닷속에 진귀한 힘이 흐른다고 했잖습니까?"

문하는 뭔가에 떠밀리듯 말을 꺼냈다.

"그랬지."

하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하는 입가를 핥았다.

"사람한테… 쫓겨서 바닷속으로 갔는데, 갑자기 오염의 힘이 더 세져 버려서 음, 어떻게 본다면 갇혀버린 거죠."

"난 너희를 가둔 자를 알아."

에른스트.

놈이 레놀드 왕국처럼 자신의 물에 무언가를 넣어 조종한 게 틀림없었다.

인간과 어인의 화합을 어떻게든 뭉그러뜨리려고.

'…설마, 이전에도?'

하벨은 유렌과 대신들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벌어진 인간과의 대립을 잠깐 생각했다.

갑자기 틀어져 버리지 않았던가.

"…너희 인간들이 바다를 그렇게……."

"아니. 다른 놈이야. 헛발 디디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하벨이 싱긋 웃자 문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어쨌든, 그 힘이 십여 년 전부터 달라졌습니다. 위를 향해 모습을 바꿔나가서 잘 만하면 바닷속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생겼어요."

"우연히 그렇게 모습이 변했다는 거야? 우연히?"

헤스트리아 왕국에는 정령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바닷속에는 대체 뭐가 있길래 그런 걸까.

"물이… 도와줬습니다."

문하는 사실을 말고 싶지 않았지만, 물이 떠미는 바람에 실토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그제야 사실을 알게 되자 하벨은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물이 오랫동안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인어족들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왔던 모양이었다.

'착하네.'

하벨은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자 물이 얼른 달려들어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때부터 한 명씩 도전하기 시작했어요. 이 위협에서 빠져나오려면 지상에 사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문하는 그때를 생각하며 얼굴을 왈칵 구겼다.

살이 녹아내려도 육지를 향해 바닥을 헤엄쳤다. 죽을 만큼 애를 써 올라간 그곳에서 사람들이 들이밀던 건 환대가 아닌, 날카로웠던 작살이었다.

"우리를… 죽였어요! 역시 인간들이 우리를……."

찰랑.

물방울이 문하의 얼굴에 튀었다.

"진정해."

문하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물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말해줬잖아? 헛발 집지 말라고. 널 공격했던 건 다른 놈이야."

다른 놈이라니.

문하는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조금 전에도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솔직히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지상에서 올라왔을 때 머리끝까지 새겨진 기억이 날카로운 작살뿐인데.

"음… 사람들이 너희에게 했던 행동을 옹호하는 건 절대 아니야. 그건 잘못됐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맞아. 너를 괴롭게 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면 미안해."

하벨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이는 문하의 표정에 일단 사과부터 했다.

추기경의 말을 따르자면 문하를 구했을 때는 2~3개월 전이라고 했다.

상처가 이제 막 아무는 시기였다.

"…그놈 이름이 뭐예요?"

문하는 아직도 얼굴에 남았던 물의 촉감을 되살리며 물었다.

방금 피부에 닿았던 물은 뭔가 달랐다. 잊을 수 없을 만큼 다른 물이었다.

"에른스트."

"…에른스트."

"문하야."

하벨이 부드럽게 문하의 이름을 불렀다.

"여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알려줘. 전해줄게."

"…왕자님한테요?"

문하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하야."

지금도 저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적응되질 않았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헷갈렸다.

"인어족을 구해줄 테니까, 너도 나를 좀 도와줄래?"

"…도와주다뇨?"

"음. 지금 인어족을 구하고 있는 그 힘이 내 힘이라서 가져야 하거든."

"그, 그건……."

"이러면 내가 곤란하잖아? 그래서 너희를 돕는 거야."

그냥 힘을 가져간다고 한다면 반발이 있을 테니 누구라도 말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작은 힘이라도 이미 반대 의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를 테니까.

"어때? 도와줄래?"

"싫… 다고 하면요?"

문하가 꼬랑지를 내린 채로 물었다.

"그럼 나도 안 도와주는 거지. 나만 일방적으로 하는 건 싫어서 말이야."

하벨이 싱긋 웃었다.

"그렇지?"

* * *

―…왕자님 바보, 이 멍청이! 무슨 가출을 그런 식으로 해요? 죽을래요? 예? 제가 얼마나 걱정 했는 줄 알아요? 만나면 저 때립니다. 진짜 때릴 거라고요! 이 멍청이 왕자님!

편지를 읽던 여하가 당장 구겼다.

"왜?"

하벨이 키득거리며 묻자 여하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하가 아니야?"

"아니오. 이렇게 건방진 놈은 문하가 맞소."

"살아 있대."

"…다행이오."

여하는 뒤늦게 미소를 입가에 달았다.

너무 뜻밖에 찾아온 소식에 얼굴 근육이 움직이질 않았다.

하벨은 여하 앞으로 날아가 말똥말똥하게 바라보는 아라에게 손짓하며 그를 다독였다.

"기뻐해도 돼, 여하야."

"…혹시 들었소?"

"네가 가출한 거?"

"사춘기… 였소."

"사춘기 하나 아주 거세게 치렀네."

[사춘기가 뭐야, 대장?]

하벨에게 다가오던 아라가 물었다.

"음. 사춘기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지는 시기야."

[왜에?]

"살아 있으니까. 내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니까. 그런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니 헤매는 거지. 그래서 화가 나는 거야. 답답해서 세상이 넓고, 너무 거대해서 무서우니까."

[그럼 이 몸도 사춘기를 겪고 있는 걸까? 세상은 넓구, 너무 넓어서 이 몸을 삼켜버릴 것 같아.]

아라의 눈동자 속에 두려움이 넘실거렸다.

[모르는 것도 많구, 해야 하는 것도 많구, 슬픈 것도 많구, 이 몸은 요새 헷갈려.]

하벨의 손길이 턱밑을 긁어주자 아라는 기분 좋게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새롭게 생긴 아라의 망토가 덩달아 흔들렸다.

리본하고 세트라 무척 잘 어울렸다.

아직 망토가 어떤 기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라가 말하길 적에게서 '지켜준다'라고 했다.

그래서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아라의 힘이 더욱 필요해진 만큼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는데.

[용용이도 사춘기인가 봐. 이 몸이랑 비슷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그랬어!]

칼리우스는 다시 레놀드 왕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혔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 힘이 나한테 마법의 길을 알려줬어. 도련님의 저주를 막을 마법이 곧 완성될 거야! 그러니까 저주를 막을 임시 마법을 걸어둘 거고, 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을… 아! 권능을 허락한다고 그랬어!

권능을 허락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 사실 하벨은 소름이 돋았다.

저 권능을 사용하려면 신의 허락이 필요한지 몰랐으니까.

만약에 이를 허락받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럼, 여하도 이 몸이랑 용용이랑 같네?]

"그렇지. 그런데 여하는 아주 심하게 앓은 거지. 가출했다잖아?"

하벨은 재미있는 걸 발견한 것처럼 여하를 빤히 보았다.

"…그런 가벼운 게 아니었소."

"그렇겠지. 뭐, 왕위를 물려받는 게 싫지 않았을까?"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몸을 살짝 흔들던 여하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문하가 말했소?"

"아니. 예상했지 뭐야. 잘했어!"

"……?"

갑자기 이어진 하벨의 칭찬에 여하는 밖에서 두드리는 문소리마저 인식하지 못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이긴 칭찬하는 건데."

하벨은 잠깐 아라에게 손짓했다.

[응?]

아라의 귀를 있는 힘껏 막고는 하벨은 목소리를 낮췄다.

"왕의 자리라는 거 진짜 어려워. 아니, 그냥 어렵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야. 죽을 것 같다고. 누가 다시 왕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거야. 혹시 너 말고도 받을 사람이 있다고 하면 갔다주고 그냥 도망쳐. 무조건."

여하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게 왕이었던 자가 할 소리일까.

"그래도 모든 걸 버리고 떠나기가 엄청 어려웠을 텐데, 너 되게 용기 있는 사람이네."

"…이런 칭찬은 처음이요. 다 날 보고 겁쟁이라면서 욕하기 바빴는데."

"네가 겁쟁이라고?"

하벨은 당장 인상을 찡그렸다.

"나라를 다스릴 자신도 없는데 덥석 왕위를 받아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드는 멍청한 놈보다 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마자 깔끔하게 떠난 네가 더 용감한데?"

왕이 어리석으면 나라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있는 백성들 모두가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고맙… 소."

여하는 편지를 손에 쥐고서 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소가 천천히 번져갔다.

아버지가, 백성들이, 전부 살아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믿기가 너무 어려웠다.

문을 열자 라르웬이 서 있었다. 여하는 고개를 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여하 왜 저래? 울 것 같던데? 네가 울렸어?"

라르웬은 안으로 들어오면서 얼떨떨한 표정을 드러냈다.

"아니, 내가 여하를 울릴 사람처럼 보여요?"

"뭐, 못할 것도 없지. 네 그 입이라면 울리는 것도, 화를 내게 하는 것도 금방이니까."

"그게 무슨……."

[있지, 있지, 이제 들어가도 돼?]

정령들이 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눈동자가 너무도 초롱초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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