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경배하라(3)
* * *
담담한 명령임에도 신과 관련 없는 페트리오 자신마저 머리가 숙어질 만큼 묵직했다.
복종을 바라는 하벨의 말에 엘라힘이 신물을 든 상태에서 무릎을 꿇고 하벨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신의 아들이시여."
신관들 역시 다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하벨이 하벨 티에라든 물 마법사든 이제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벨은 신의 아들이었다.
"신의 아들이시여……."
신관들이, 성기사들이 모두 하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신의 종으로서 저희에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엘라힘은 이곳에 무릎을 꿇은 자들 중 가장 높은 추기경으로서 명령을 바랐다.
하벨은 그들을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 하벨은 말문을 열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게. 이제 말을 들을 준비는 됐어?"
하벨은 시선이 바뀐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준비됐다.
모두가 그렇게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주 흡족한 표정이었다.
"잘못했다 싶으면 앞으로 나와. 자진해서."
하벨이 손가락을 앞으로 가리키자 신관들과 성기사 중 일부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벌써 참담함으로 물들어갔다.
잘못했다.
정말 잘못했다.
그렇게 눈으로 빌고 있었다.
"들었겠지만, 신은 강림을 바란 적이 없어."
하벨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누가 감히 멋대로 신의 의중을 판단했지?"
"…잘못했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죄를 지어 나온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당장 무릎을 꿇었다.
죽음을 언급했을 때 짓는 그들의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다.
지금도 잘못을 그리며 자신의 존재를 반가워했다.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해?"
하벨은 가볍게 물었다. 애초에 '죄 많은 아이들'이라 언급한 건 신이었으니 하벨은 죄의 경중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감히 신을 의심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잘못에, 아니, 인간으로서 하면 안 되는 죄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까지 많은 이에게 물었던 '죄'의 모습 중 가장 신선했다.
일단 정말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니.
"그럼 왜 손을 댔어? 신을 강림시켜 뭘 하려고 했길래 안 되는 줄 알면서 손을 댄 거지."
"…두려웠습니다."
"뭐가?"
하벨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신께서 저희를 버렸다 생각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도하고 울부짖고 그렇게 해도 신께서 저희에게 남겨주신 애정의 흔적인 신의 은총 역시 더는 차오르지 않아 무서웠습니다."
대답을 이어나가던 고위 신관을 대신해 그들 사이에 조용히 있던 한 신관이 입을 열었다.
"저는 가장 가까이 신을 모시라는 의미로 추기경이라는 자리에 오른, 신의 종입니다."
추기경은 하벨 옆에 서 있는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부러웠다.
저 맑고 맑은 눈이 부러웠고, 신을 의심하지 않은 그 믿음이 부러웠다.
"진실을 보지 못한 제 우매한 눈과 감히 엘라힘 추기경을 죽이려고 했던 제 모든 것들을 사과하겠습니다."
추기경이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쿵.
"왜 이런 일을 벌였냐 물으신다면 감히 신께 묻고자 했습니다."
추기경은 재차 사과하며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쿵.
"왜 저희를 버렸냐고요. 왜 저희에게 이토록 긴 기다림을 내렸냐고요."
쿵.
"그저 묻고자 했습니다. 저희에게는… 방법이, 방법이 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신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
결코.
"고개를 들어."
바닥으로 머리를 찍으려 하던 추기경이 얼굴을 들었다.
피가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추기경은 신음을 내지 않았다. 그저 공경하게 하벨을 받들 듯 무릎 꿇은 자세로 바라보았다.
"교황은 어디에 있지? 살아는 있나?"
"이 사실이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워 잠시 감금했습니다. 무사하십니다."
"추기경은 들라."
하벨이 말문을 열자 추기경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신의 강림과 관련된 일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들라."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너희를 유혹한 이는 에른스트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서 너희가 모시는 신을 불러 죽이고 새로운 신이 되려는 자였다."
하벨의 말을 들은 추기경의 몸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신이 죽이다니.
신을?
의문으로 물들어가는 그들의 시선에 하벨은 기꺼이 대답했다.
"그래. 너희가 신을 죽이려고 했다."
"…제발, 죽여주십시오!"
머리가 잠깐 정지되었다가 추기경은 흐느끼며 절실하게 간청했다. 울음은 금세 에른스트과 작당했던 다른 이들에게도 번져갔다.
자신들이 신에게 묻고자 시작했던 그 일이 이토록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줄 몰랐다.
―신을 부를 방법을 안다고 말하면 들어볼래?
어느 날 나타난 그 남자가 속닥였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제법 높은 자가 기부라는 목적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속닥거린 그 말은 너무도 달콤했다.
―신은 있어. 하지만 신하고 너희하고 이어진 문이 닫혔을 뿐이야. 나는 그걸 억지로 여는 방법을 알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말아. 나는 강요는 하지 않으니까.
신은 없다며 수많은 이가 조롱하고 신관들 사이에도 믿음이 사그라질 무렵에 간절하고, 너무도 간절해 누군가 말해줬으면 했던 말이 도르르 굴러왔다.
이미 신을 향한 갈망이 너무도 컸기에, 목마름이 너무도 컸기에 신을 향한 믿음이 흔들릴 수 없었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매달리는 게 그렇게 나쁜 짓일까. 생각해보면 참 불합리하잖아. 너희는 일방적으로 들어야만 하는데 때론 거꾸로 돌아가는 게 뭐가 어떻다고.
하지만.
하지만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자신에게 화를 내도 좋으니 자애로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게 그렇게도 죄일까.
'…죄였다.'
추기경의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감히 감당할 수도 없는 거대한 죄.
"이 불경하고도 끔찍한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이 신께 더 큰 해악이 되는 걸 알기에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저희를 죽여주십시오."
추기경은 지금 자신이 사라졌으면 했지만, 신을 모시는 자로서 신의 허락 없이 자신의 목숨을 끊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저희가 감히 신의 아들을 해하려 했던 점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추기경은 이윽고 또 다른 죄를 실토했다.
"에르티안 왕국과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폭발 모두 저희가 저지른 일입니다. 저희를 죽여주십시오. 제발, 죽여주십시오!"
"신은."
하벨은 에르티안 왕국에서 폭발이 터졌을 때 코끝을 맴돌던 화약 냄새가 몰려오는 기분을 느꼈다.
터진 폭탄에 휘말려 붕대를 덕지덕지 감지 않았던가.
아직도 그때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하벨은 신의 뜻을 전했다.
"너희를 용서했다."
―비록 죄가 크지만, 이 아이들과 용, 그리고 정령왕에게 내린 것들이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거란다.
자신을 도울 유일한 것 중 저들이 포함되지 않았던가.
추기경은 감히 고개를 올려 하벨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음에도 신이 자신들을 용서하다니.
"그 뜻으로 신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며 신의 은총이 차올랐을 텐데?"
하벨은 상황을 대충 짐작하며 말을 꺼냈다.
"…예. 그렇습니다."
추기경은 울먹거렸다.
신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으며 신의 은총이 차올랐다.
가득.
정말 많이.
그래서 당황하고 당황해 현실을 의심했지만, 신께서는 다 알고도 용서해준 거라니.
"하지만 그건 명심해. 신은 너희를 용서해줬지만, 너희가 저지른 죄는, 희생자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신의 아들이시여.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너무도 단호한 하벨의 말에 추기경은 오열했다.
"저희가… 죄 많은 저희가 신께 저지른, 사람들한테 저지른 이 불경함을 갚을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뭐든 할 수 있었다.
죄를 용서받았지만, 이미 신을 향해 검을 들었던 몸으로 무엇을 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이 죄는 반드시 갚아야만 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태연하게 꺼낸 하벨의 말에 모두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선, 신을 강림시켜야 했기에 에른스트는 너희가 필요해. 아주 간절하게. 하지만 지금이라도 정신 차렸다면 너희가 신을 강림하고자 했던 모든 흔적을 지워."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먼저였다.
여차하면 에른스트가 무엇도 실행시키지 못하게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들을 다 지워버려야 했다.
"다시는 이 터무니없는 짓거리가 또 벌어지지 않게. 그게 먼저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모두 오늘 내로 당장 다 지워버리겠습니다."
추기경은 여전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강한 의지가 가득했다.
"에른스트가 너희에게 다시 연락이 올 거야."
"죽여도 시원찮을……."
"혹시 오늘 놈한테 연락이 왔어?"
하벨은 추기경의 분노를 막았다.
레바놈이 죽고, 자신이 습격받고,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이 도망간 상황에 에른스트가 제일 처음 확인한 곳이 어디며 다시 또 확인할 곳이 어디겠는가.
"왔습니다. 현재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진행도와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놈이 또 연락이 올 거야. 그럼,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몇 번이든 적당히 장단이나 맞춰줘.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습니다."
추기경은 대답했으나, 왜 에른스트의 손아귀에 다시 끌려가는 척 연기해야 하는지 눈동자에 의문이 어렸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이렇게 당하고도 그냥 가만히 있을 셈이야?"
그 눈빛을 읽었기에 하벨은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아뇨.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에른스트는 신의 정의를 뒤흔들었을뿐더러 저희의 손으로 신을 죽이도록 유도했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엘라힘은 목소리 힘을 가득 주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럼 가장 잔인한 게 뭔지 보여줄 테니까 나를 따라와."
하벨은 자신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신의 아들이시여……."
추기경은 무언가 생각이 나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런 긴 호칭은 필요 없어. 나를 그냥 이름으로 불러."
계속 듣다 듣다 보니 하벨은 저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 자꾸 귀에 거슬렸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차라리 '용왕'이라고 불러. 그편이 낫겠네. 어쨌든 뭐가 생각이라도 난 거야?"
"예. 용왕이시여."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가 오랫동안 느끼고 있던 생각입니다. 강림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며 들었습니다. 오미너스, 정령들, 세력의 다툼 등 결국, 마지막 차례가 저희가 될 거라 예상하면서 말이죠."
'그렇지.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기만큼은 거짓말을 말하기가 어렵지.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겠지만, 신의 강림을 신관만큼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있을까.'
하벨은 속으로 긍정하며 추기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의 강림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신관들이었다.
신을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다면 신을 불러낼 준비만 하면 무얼 할까.
"저희 역시 신의 강림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신의 강림이라는 말과 함께 추기경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막지 못했다.
신에게 용서받았으나, 지은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른스트가 바다만큼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추기경은 말을 하다 말고 잠깐 숨을 내쉬며 눈빛을 달리했다.
"그래서 직접 알아봤습니다. 응당 거래란 공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놈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고, 놈이 너그럽게 허용되는 선 안에서 계속 움직였습니다. 저희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매서워진 눈꼬리에 에른스트를 향한 분노가 실려 있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놈이 사람을 시켜 바다에 무슨 짓을 하는지 확인했습니다."
"무슨 짓을… 했는데?"
하벨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바다와 관련해서 알고 있는 거라곤 모든 오염된 물이 모여드는 곳이며 그곳에 어인족이 살고, 여하마저 녹아내릴 정도로 끔찍이도 오염도가 높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어떤 정보든 좋았다.
칼리우스의 권능을 위해 어인족의 서명을 받고자 바닷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인어족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피해 바닷속으로 들어갔던 인어족을 놈이 죽였습니다."
"…인어족이라는 건 어떻게 알고 있지?"
하벨은 엄지로 손가락을 문질렀다.
여하의 말을 따르자면 사람들이 인어족이 가진 재생의 능력을 시험하는 일이 일어났기에 이를 피하고자 깊은 바닷속에 몸을 숨겼다고 했다.
―…인어족은 사람을 싫어하오. 아주 증오하오. 우리의 이 치유력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한 적이 있소. 그래서 우리는…….
그런 기억이 있음에도 여하는 자신에게 기꺼이 피를 나눠주었고, 경고해주었다.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갔소.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오죽했으면 그렇겠소?
그 정도로 의심이 많은 인어족이 자신들이 인어족이라는 걸 순순히 밝힐 리가 없었다.
"저희가 얼마 전에 인어족을 구했습니다."
"…뭐?"
하벨은 의외의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인어족을 구했다니.
[우와아아! 여하가 진짜 좋아하겠다! 여하가 만세를 부를지도 몰라!]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안내해."
하벨은 명령했다.
뭘 더 주저할까.
* * *
―…온다, 와.
―무례하게 하면 안 돼. 아주아주 위대한 분이니까.
물이 걸어오는 말에 인어족은 깜짝 놀랐다.
"대체 누가 온다는 거야? 나는 누구인지 몰라."
―몰라도, 경배해.
―맞아. 그냥 고개를 숙여.
―받들고, 찬양하라고. 너희 인어족이 지켜야 할 분이기도 하니까.
인어족은 그 말에 바짝 긴장했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물이 저렇게 말을 하는지.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바짝 긴장했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자신을 구해줬던 추기경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뒤를 따라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들어오자 인어족은 뭔가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자신의 피를 따라 전해지는 들끓음에 고개가 멋대로 숙어졌다.
"물이 나를 소개했겠지? 그걸로 일단 경계는 풀렸으면 좋겠네."
저 남자는 당연하게도 물을 언급했다.
"나는 하벨 티에라야. 너는 이름이 뭐야?"
분명 자신보다 어려 보였음에도 인어족은 그를 하대할 수가 없었다.
"…문하입니다."
"좋아, 문하야."
하벨은 이곳이 원래 자신의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자를 끌고 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어때?"
장난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