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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73화 (373/415)

373화. 경배하라(2)

* * *

절대로 그 말만큼은 내뱉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신을 향한 자신의 증오가 짙었고, 이제껏 신의 존재는 없다고 부정해왔으니까.

하지만 신의 종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걸 인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가면을 써 정체를 숨기고 저들의 위에 서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벨은 물 마법사라 알려진 자신의 탄생 위로 신의 아들을 얹어 저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저들이 왜 에른스트의 손을 잡았겠는가.

그만큼 신을 향한 갈망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컸기에 조절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를 충족시켜주는 수밖에.

"…무슨."

신관들은 가면 뒤에 드러나는 저 존재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하벨 티에라였다.

아주 긴 시간 동안 탄생하지 않았던 물 마법사가 아닌가.

"그게 무슨……."

세상에 유일한 물 마법사.

이 존재의 등장으로 마법사들이, 아니, 사람들이 난리가 난 건 알고 있었다.

사기다, 아니다를 두고 모든 나라에서 하벨 티에라가 마법사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가.

마법사는 결코, 신의 은총을 지닐 수 없었다.

―신의 아들이 신을 이용하려는 자를 처벌하러 달 문양 가면을 쓰고 올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퍼진 소문과 같은 모습으로 하벨 티에라가 나타났다.

설마.

우연이겠지.

신관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잘 봐."

하벨은 신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에 뭐가 있는지 몰라도 자신이 가져야 하는 게 맞았다.

어떤 힘을 넣어도 꼼짝하지 않았던 신물이 움직였다.

굳게 닫혔던 상자가 스르르 열리는 모습에 신관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언제가 되었든, 내 아들이 찾아올 것이다.

신의 말이 끊어지기 전에 들렸던 신의 목소리.

―내 아들이 아닌 존재는 그 누구도 이 상자를 열 수 없다.

정말이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저 상자를 연 자가 없었으니까.

그런 상자가 열렸다.

안에 반짝거림이 고스란히 묻은 새하얀 열쇠가 빛에 둘러싸였다.

'…열쇠?'

하벨의 눈이 커졌다.

'그럴 리가.'

분명히 자신이 가진 열쇠는 에른스트에게 뺏기고 말았다.

하벨이 긴가민가하다 어떤 이끌림에 그 열쇠를 쥐자 빛이 하벨에게 스며들었다.

'이, 이건… 내가 에른스트에게 뺏긴 힘이다.'

대체 어떻게.

딸깍.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하벨의 귀에 들려왔다.

'그럴 리가…….'

하벨이 혼란스러울 때쯤, 천장에서 내려온 빛이 하벨을 덮은 모습에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입을 벌렸다.

신관이라면.

신의 말을 기억하는 자라면 저 광경을 보고 어떻게 부정할까.

―그러니 내 아들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다.

신의 아들이었다.

하벨 티에라가.

세상에서 유일한 물 마법사인 하벨 티에라가 정말로 신의 아들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엘라힘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이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벨이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지만, 제 몸에 깃든 신의 은총이 날뛰어 소름이 일어나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까지 몰려와 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몽글몽글.

하벨이 열쇠를 흡수하자 물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신께서 내리시는 빛처럼 따스했고, 햇살을 받은 것처럼 일어나는 반짝거림에 신관들은 모두가 입을 맞춘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칼리우스가 마법을 사용해 힘이 주변으로 퍼지는 걸 막았다.

"…으읏."

칼리우스는 신음이 살짝 나왔다.

하벨의 힘이 다른 쪽으로 더 커졌다.

분명히 레놀드 왕국에 있던, 자신의 둥지에 마나를 흡수한 뒤일 텐데.

칼리우스는 곧 신기할 만큼 편해지자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하벨 위로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아니었다.

그저 하벨 머리보다 조금 더 멀리에서 쏟아진 빛줄기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저 힘이 모든 걸 편안하게 했다.

세상의 유일한 자이며 세상을 지킬 수호자인 용이여.

따스한 말이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 순간, 칼리우스의 머릿속에 마나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내 그대에게 내린 권능을 허락하겠노라.

'권능이라면…….'

칼리우스는 더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빛이 반짝거렸다.

마나가 하벨의 저주를 해제하고자 만든 마법의 그다음 부분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반쪽은 주술인 전혀 다른 마법이기에 얼마나 많이 막혀 왔던가.

칼리우스는 마나가 움직이는 걸 지켜보았다.

[우오오옵…….]

아라는 눈을 크게 떴다.

빛이 따사롭게 내려와 자신을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물의 이끌림으로 태어난 정령왕이여.

빛이 바람을 통해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는 분명 바람의 목소리임에도 달랐다.

자연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노라. 긴 그리움을 따라 이어진 그들의 슬픔이 깊어진 만큼 이 망토가 그대를 향한 모든 위협을 막아주노라.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아래로 내려와 등을 토닥거리자 망토가 나타났다.

푸른 리본처럼 털이 가득 달린 푸른 망토가 아라에게 살포시 덮었다.

[우와아아! 진짜 망토야?]

내 그대에게도 내린 권능을 허락하겠노라.

[권능? 이 몸한테도 권능이 있어?]

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고마워! 너무 고마워!]

아라는 자신에게서 떠나는 손길을 향해 말했다.

자신을 쓰다듬은 저 손길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신기했다.

위대하면서 동시에 지나가다 본, 누군가는 잡초라 부를 만큼 흔하디흔한 꽃이지만 참 어여쁜 그런 존재 같다고 생각했다.

하벨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저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흐릿하나 빛을 따라 그려지는 형체가 보였다.

그 형체는 칼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예쁜 망토도 선물해주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자신의 눈에만 그 모습이 보인다는 게 열 받았고, 그 시간이 원래는 짧지만,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형체가 자신에게 다가오다가 머뭇거렸다.

…아이야.

자신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열쇠의 수호자여. 그 열쇠는 원래 너의 것이니 그 힘은 찬찬히 에른스트에게서 나와 다시 원래의 형상을 이룬 것뿐이다. 당황하지 말거라.

이번에 왜 자신의 영혼이 공명하는가 싶었는데 이유를 들어도 개운하지 않았다.

요컨대 에른스트가 들고 갔어도 힘을 모조리 흡수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빠져나갔다는 게 아닌가.

하벨은 저 존재를 바라보았다.

'혹, 내가 당신의 아들임을 칭해 화가 나 이렇게 왔습니까?'

하벨은 저 존재에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 않구나.

'그럼 왜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나타났습니까?'

원망을 담아 말했다.

지금은 신이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에른스트를 물리치고자 '신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신성 국가 시엘느를 자신의 발밑에 꿀리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신이 나타나 오히려 당황스럽고 마음이 삐딱해졌다.

'아니. 에른스트를 이렇게 무서워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그렇게 불렀을 때는 아무 소식도 없더니 말입니다. 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게 그렇게 두렵습니까?'

한때, 자신은 정말 간절하게 그를 불렀다. 뭐든 희생할 테니, 제발 이 모든 비극을 끝내달라 간청했다.

자신의 존재는 희생에 있어서 적어도 일반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을 테니까.

너는 열쇠의 수호자이며 나의 권한 전부를 떼어 만들어진 존재다.

'권한 전부를 떼어 만들다뇨?'

앞은 알고 있지만, 뒤는 몰랐다.

세계에는 여러 문이 있구나. 평행한 세계가 하나가 되지 못하게 이를 막는 문이 있으며 내 목소리가 세상에 있는 저들에게 닿을 수 있게 도와주는 문 등 감히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이 있지.

하벨은 말문을 열기가 어려웠다.

열쇠의 수호자라는 게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존재이지 않은가.

세계의 법칙에 따라 정해진 문이 열리지 않게, 또는 닫히지 않게 이를 지킬 단 하나의 열쇠가 탄생해야 했다.

'…내가, 열쇠였다니.'

하벨은 기가 찼다. 이렇게 진실을 들을 줄이야.

열쇠는 문을 지켜야 하기에 강한 힘이 필요했고, 나는 물이라는 세상을 이루는 강한 요소 하나를 떼어 모든 권한을 너에게 주었다. 그게 너이며 용왕이다.

신은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여.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 말에 하벨은 신을 원망했다.

'내가.'

얼굴이 찌푸려지고, 마른침을 힘껏 삼켰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투정에 가까운 말이 튀어나왔다.

'처음부터 엉망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나는. 나는, 누군가를 지켜야 했고. 누군가를 죽여야 했습니다. 오직 나만 그 거대한 부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나만이! 이게… 이게 당신의 뜻이었습니까?'

미안하다.

'버티는 게 어려웠습니다. 왜 내가 다… 전부 다 떠맡아야 했습니까?'

미안하구나.

'왜… 내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라도 내 옆에 있었다면…….'

혼자라고 느끼지 않았다면.

그저 성냥처럼 작디작은 온기라도 있었다면.

분명 달랐을 텐데.

'…처음으로 내가 느낀 따스함은 당신이 주셨잖습니까.'

그 따스함을 어떻게 잊을까.

정신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몰렸어도 그리워했던 따스함이었는데.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당신과 말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원망해야 하는데, 하벨은 더는 원망할 수가 없었다.

그저 토로하게 되어버렸다.

속상했다고.

슬펐다고.

'그랬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나는 무너지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태양이었다.

신이 손을 뻗어 하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벨의 눈동자가 금세 일렁거렸다.

나는 바람이었다.

처음 세상에 나와 느껴본 그 손길이었다.

단 한 번도 잊을 수 없었던, 룬델의 손길과 비슷하지만 다른 다정함을.

때론 땅이었으며, 번개이기도 하고, 불이 되기도 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듯, 하지만 서툰 그 손길에 하벨은 처음 태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물이 될 수 없었다. 물의 힘은 이미 너한테 다 주었으니 그곳으로 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게… 신이구나. 무능하고 무능해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무엇도 허락이 되지 않는 게 신이다.

하벨은 제 눈동자에서 일어나는 일렁거림에 신이 더 흐릿하게 보였다.

멀리서 계속, 계속 너를 보았다. 대단하구나. 잘했구나. 나는 너를 신보다 위대한 자라 칭하고 싶다.

손을 내려 천천히 하벨의 얼굴로 뻗어왔다.

쭉 이렇게 해주고 싶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네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벨의 한쪽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드디어 내가 너의 눈물을 닦아주는구나.

이게 뭐라고.

신이 너무도 행복하게 활짝 웃었다.

이 불안정함이.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지금 자신이 불안정하기에, 열쇠의 수호자도 용왕도 아니기에 만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겨우 눈물을 닦아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제약이 있을 줄이야.

비록 죄가 크지만, 이 아이들과 용, 그리고 정령왕에게 내린 것들이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거란다. 너의 눈물 하나 닦아주지 못한 날 용서하지 말거라.

'…지금 기쁩니까?'

그렇구나. 나는 기쁘구나.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구나. 불안정한 너와 불안정한 세계가 합쳐져 일어난 이 기적을 나는 영원히 기억하마.

멈췄던 시간이 빨라지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신은 사과했다.

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너의 존재가 저 아이들과 나를 이었던 문을 열어주었다, 열쇠의 수호자여.

하벨은 신이 뒤로 물러가려고 하자 두 걸음 다가와 그를 안았다.

어쩌면 이 만남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그를 힘껏 안았다.

아라보다 더 포근하면서 햇살보다 더 따사로웠다.

'…고맙습니다.'

고맙… 다고?

'태어나 겪었던 일들이 너무 고단했지만, 슬픔이 너무 넘쳐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를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내가… 내가 감히 너의 행복을 빌어도 되겠는가.

'빌어주세요. 내가 아무도 잃지 않게 빌어주세요.'

신은 조심스럽게 하벨을 안아주었다. 마치 손끝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신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하벨은 궁금했지만, 그가 느낀 길고 긴 외로움이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사랑스러운.

신은 조용히 흐느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아. 고맙구나. 이 온기를 평생 기억하마.

신이 뒤로 물러나자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빛이 신관들에게 뻗어 나갔다.

나의 종이여. 모두 두려워 말거라, 인내하거라.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귓가에 잔잔히, 또박또박 박히는 신의 목소리에 신관들은 흐느꼈다.

으흑.

드디어.

길고 길었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비로소 빛이 보였다.

이 감정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신께서……."

신물을 안고 있던 엘라힘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모두가 듣고 있었다.

신관이라면 모두 들리고 있었다.

이건 어떤 기록에도 없는,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만 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눈앞에서 기적을 보았으니 엘라힘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부짖었다.

"신이시여!"

그 이름을 목놓아 불러보았다.

누가 신이 사라졌다고 그랬던가. 하벨이 신의 아들인데.

아들의 힘으로 나와 너희를 이어주는 길이 생겼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날 믿고 기다려줘, 고맙구나. 내 아들을 부탁하겠노라.

신의 마지막 말과 함께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신관들이 가진 순환의 길에 메말랐던 신의 은총이 가득 채워졌다.

그토록 갈구하던 힘이 들어오게 됐다.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신의 아들을 지켜야 한다!"

신이 일컫는 그의 아들이 누구겠는가.

신의 명령에 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전부 하벨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끼어들 기세로 상황을 살피던 페트리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모두가 하벨을 향해 무릎을 꿇고, 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이 광신도를 떠오르게 할 만큼 격정적이었다.

'…이거 뭐야.'

페트리오는 눈앞에서 펼쳐진 사실에 넋을 잃다 뒤늦게 양팔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도련님께서 신의 아들이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빛이 벽도 뚫지 않았음에도 내려와 멋대로 움직이는 모습도, 신관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우는 모습도.

'…미치겠네'

페트리오는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나를."

하벨은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감이 가득한 눈으로 저들에게 명했다.

"경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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