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경배하라
* * *
"…신난다뇨?"
엘라힘은 놀란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예쁜 건물을 부숴보겠어요?"
대수롭지도 않게 꺼낸 하벨의 말에 엘라힘은 더욱 놀랐다.
하벨 자신이 한 행동은 결코 의미 없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누군가 시선을 끌어줘야 페트리오가 움직이기 편하지 않겠는가.
'아마, 지금쯤 좀도둑이 속으로 뭐라고 하고 있겠지만, 뭐 어때.'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라 하벨은 신이 났다.
처음 한 방 날렸을 때, 교황청이 부서지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왕 부서지는 김에 위에서 본다면 땅이 내려다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벨은 1층 바닥이 보이자 그제야 만족했다.
"괜찮… 습니까?"
엘라힘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내려놓으며 하벨에게 물었다.
"아,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자신의 힘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정령의 힘을 썼기에 순환의 길이 아주 잠깐 욱신거리고 말았다.
여기서 더 했다면 울렁거렸겠지만, 버틸 만했다.
하벨은 손에서 식물을 퍼트리며 원형 계단처럼 자라난 식물로 한 걸음 내려와서는 엘라힘한테 손을 뻗었다.
"이제 내려갈까요, 신관님?"
* * *
콰아아앙!
조용하던 기도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천둥소리처럼 거세게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신관 누구든 눈을 뜬 사람이 없었다.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도 시간은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신과 약속한 신관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으니까.
콰콰콰콰콰!
하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모두가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신성한 시간이라는 걸 알지만,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이나 소리가 일어나자 인간으로서 밀려드는 이 의문을 해결해야만 했기에 신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혹시 신께서 우리의 목소리에 응답한 건 아닙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신께서 저희에게 목소리를 내려주실 때 언제나 상냥한 빛이 감돌던 걸 잊었습니까?"
덩치가 큰 신관은 말도 안 된다며 천장을 가리켰다.
솔직히 이제는 신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천장에서 벽을 뚫고 내려오는 그 말도 안 되는 빛줄기를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잘 들어보세요."
그때, 목소리가 굵직한 신관이 환희하며 모두의 관심을 끌어들였다.
"우리가 신께 무어라 기도했습니까? 이곳을 부숴도 좋으니 신께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흔적만 보여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게 흔적을 내보여주신 겁니다!"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자 누군가는 제법 그럴싸한 소리에 희망을 품었으며 다른 신관은 밀려오는 불안함에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아니면 누군가의 습격일 수도 있잖습니까."
"누가요? 여기를요?"
코웃음을 치며 꺼낸 말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커지고, 서로의 말이 맞다며 꺼낸 이들까지 생겨나자 이 소란이 방을 가득 차기 전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고위 신관이 목소리를 냈다.
"정숙하세요. 지금은 신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신관님. 방금 그 소리가 무엇인지……."
"문제가 터졌다면 누군가 올 겁니다. 그때 움직여도 늦질 않습니다. 지금 신께서 어떤 마음으로 우리와의 연락을 기다리는지 모르십니까?"
마지막으로 신과의 연락이 끊어지기 전에 신이 내던 불안감을 어떻게 잊을까.
꼭, 이게 마지막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답답함을 호소하는 느낌이 가득했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가 들려오자 고위 신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움직였다.
살짝 문을 열자 성기사가 고개를 숙인 뒤에 급히 보고했다.
"신관님. 교황님의 방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습격이 벌어졌습니다."
"…습격이라뇨?"
"모르겠습니다. 적은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보이는데, 엘라힘 추기경을 목격했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추기경께서 애초에 여기에 어떻게 올 수 있는 겁니까?"
엘라힘이라면 현재 하벨을 따라 레놀드 왕국에 있지 않은가.
사람이 어떻게 레놀드 왕국에서 바로 시엘느로 올 수 있을까.
설마 레놀드 왕국으로 갔다는 사실이 다 거짓이었을까.
고위 신관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회의할 시간이 없을 테지.
'다른 이들도 아니고 엘라힘 추기경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설마, 진짜 다 알아버린 걸까?'
자신들이 몰래 시체를 유기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실험 재료로써 보냈다는 사실을.
진작 처리했어야 했는데.
아니, 검은 달에게 처리를 맡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에 하벨 티에라와 동행하는 바람에 손도 대지 못했는데.
"신관……."
"여기 계세요. 나오지 마시고요."
고위 신관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신관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성기사를 따라갔다.
제발.
부디 제발 그 사실을 퍼트리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길 바랐다.
'…신이시여, 저를 가엾게 여기소서.'
* * *
누군가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달 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남자와 그 뒤를 엘라힘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 하얀 옷을 입은 신관들과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둘러쌌지만, 감히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에헴. 다 비켜! 어? 우리 손에 신물이 있다구!]
아라는 그 분위기를 즐기며 늠름하게 소리쳤다.
하벨 역시 덩달아 신이 났다.
"이야, 이거 진짜인데요? 나는요, 이런 거 너무 좋아요."
교황청에 구멍을 내고 여유롭게 내려와 교황의 방을 구경했다.
뭔가 반짝반짝한 것들로 이뤄졌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교황의 방은 생각보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일반인의 방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겸손했다.
그런 교황이 왜 도중에 사라졌는지 방을 보자마자 감이 왔다.
교황이 신관들의 비밀을 알아버린 게 분명했다.
에른스트에게 붙은 신관들을 말렸겠지.
'이미 눈이 돌아버린 사람한테 차분히 설득해봤자 이게 먹히겠어?'
눈앞에 술술 그려지는 사건에 하벨은 구태여 물의 기억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벨은 교황의 방에서 저들이 '신물'이라고 부르는 상자를 발견했고, 엘라힘이 들고 걸어왔다.
단지 그뿐이었음에도 신관들은 물론 성기사 역시 '공격'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처럼 계속 쫓아오면서 말로서 무어라 지껄이는 게 전부였다.
―신물이 있으면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엘라힘이 처음 신물을 가리키며 꺼낸 말에 귀를 의심했다.
이 신물이 뭐라고 공격을 하지 못하는 건지.
―신물은 신의 물건이기에 이를 공격한다는 그 행위 자체로 신을 배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관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형벌이나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교황은 이 물건을 보호하고자 방에 놔둔 겁니다.
그리고 설마했지만, 정말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신물을 쟁취한 자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판이었을 줄이야.
"어째서입니까, 추기경님?"
고위 신관 중 한 명이 엘라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몇 번을 보아도 엘라힘이 맞았다.
"무엇을 말씀하는 겁니까, 신관님?"
엘라힘은 손가락질이 이어져도 똑같은 질문으로 대꾸했다.
대체 뭐가 잘못됐느냐는 물음에 고위 신관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왜 저 야만인 곁에 서 있는 겁니까? 저 야만인은 교황청을 습격한 자입니다."
"말조심하십시오. 당신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자가 아닙니다."
"맞아, 맞아. 입 조심해. 그러다가 큰일이 나."
엘라힘의 말 이어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경고했다.
이러다가 하벨한테 무슨 말을 들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맞아, 맞아! 대장 입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라르웬도 꺾고, 어? 넬시아도 꺾고, 또 카샬도 꺾고, 하여튼 엄청 많이 이긴, 아주 무서운 입이라구! 위험해!]
되도록 분위기를 잡으려고 말도,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전혀 살벌하지 않은 칼리우스의 협박에 자신을 욕하는 건지 다른 이들을 협박하는 건지 모를 아라의 말에 하벨은 오히려 웃음이 났다.
너무도 귀엽지 않은가.
"여기입니다. 그리고 이쯤 됐으면 대부분 신관이 모였겠네요."
엘라힘이 먼저 제자리에 멈췄다.
앞서가던 하벨 역시 뒤늦게 발을 세웠다.
"바로 여기가 교황청에서 가장 넓은 홀입니다."
엘라힘의 소개와 함께 하벨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딱.
손가락을 부딪치는 하벨의 신호와 함께 아라가 정령수를 넣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죠?"
하벨은 하늘에서 번개를 쏘아 내렸다.
파지지지지직!
번개가 내려오며 천장을 뚫고 하벨의 발밑에 채찍질하다가 사라졌다.
신호가 떨어지자 칼리우스가 먼저 주변에 소리를 차단했다.
소리를 차단했기에 홀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에서 우르르 몰려드는 가면을 쓴 자들의 행렬은 가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신관처럼 똑같이 입었기에 얼굴을 덮은 가면이 더 기괴하기까지 했다.
"……!"
신관들이 무어라 소리치기 전에 칼리우스가 저들의 소리를 막아버렸다.
침묵이 주는 두려움을 자신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의 눈에 어린 두려움이 커지자 하벨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얘들아!]
소리를 막은 건 어디까지나 신관들과 성기사들이기에 아라의 목소리가 더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아라가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령들을 부르자 그들은 창문에 매달려 힘차게 대답하며 아무도 나갈 수 없게 땅을 움직였다.
쿠르르르.
바닥에서 솟은 흙더미가 모든 길을 다 막아버렸다.
교황청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내부에서는 신관들과 성기사를 가면단과 마법사들이 둘러쌌고, 그들 모두를 다시 흙이 감싸 이중으로 차단해버렸다.
대화를 나누기에 아주 훌륭하지 않은가.
"…입막음은 다 시켰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페트리오가 걸어왔다.
"다른 신관들은?"
하벨이 묻자 페트리오는 고개를 숙였다.
"당부대로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켰습니다."
"고마워. 하나하나가 귀중해져서, 죽이면 안 되지."
신의 은총이 오미너스에게 효과적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걸 어떻게 포기할까.
물론, 다른 쪽으로 쓸 수도 있었고.
"이제 됐어."
하벨이 칼리우스에게 말하자 그들의 소리가 돌아왔다.
"…지금 신을 배신한 겁니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신께서 이렇게 살아 계신데!"
"이곳은 신을 모시는 곳입니다! 신의 분노가 무섭지 않습니까?"
비난이 쏟아졌다.
체면을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욕지거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신을 들먹이는 꼴을 보니까 하벨은 기가 찼다.
그 신을 위해서 신관 중 일부가 대체 무슨 일에 손을 댔는지 모르면서 이렇게 떠들어도 될지 싶었다.
이러다가 나중에 다 밝혀지면 어떤 모습을 할지 진짜 너무도 궁금했다.
"…닥치십시오!"
그때, 참고 참았던 엘라힘이 말문을 터트렸다.
마냥 온화했던 엘라힘이 분노를 드러내자 아라가 쭈뼛거리며 하벨에게 매달릴 정도였다.
"모든 신의 종은 들어주십시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신께서 저희에게 내린 사랑을 배반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함입니다!"
숨을 들이켜며 내지르는 분노는 몹시 컸다.
엘라힘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이 딱하면서도 '신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아직도 양심을 외면한 모습을 가증스러워했다.
"다들, 최근에 퍼진 소문은 들었을 겁니다."
소문이라는 말에 얼굴을 구기는 이들이 보였다.
"신의 아들이 신을 이용하려는 자를 처벌하러 달 문양 가면을 쓰고 올 것이다."
엘라힘은 모두의 시선이 잠깐 하벨에게 향하는 걸 느끼며 말문을 열었다.
"바로 여기에 신을 배반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추기경인 제 신분과 신께서 내려주신 엘라힘이라는 이름과 신께서 사랑으로 제게 주신 은총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웅성웅성.
신과 연결이 끊어지면서 신관들에게 찾아온 아주 큰 시련이 바로 채워지지 않는 신의 은총이었다.
신의 은총은 오직 신에게만 부여받는 힘으로 이는 곧 신관을 향한 신의 사랑이라 말할 수 있었다.
신관 중 단지 신에게 사랑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자가 바로 엘라힘이 아닌가.
그 사랑 덕에 신과의 연결이 끊어진 와중에서도 어마어마한 신의 은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자이기도 했다.
그런 엘라힘이 다른 것도 아닌 '신의 은총'을 내걸었으니 저 말이 거짓이라 누가 말하겠는가.
엘라힘은 신물을 손에 쥔 채로 손바닥을 뻗어 하벨을 가리켰다.
"이분은 그 오만한 이들을 심판하러 왔습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 의문이 신관들을 휩쓸었다.
"지금."
하벨이 말문을 열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엘라힘이 저토록 옹호할 정도의 자가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도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벨이 손바닥을 들었다.
"여기에 모인 자 중 감히 신을 강림하려고 한 무리가 있습니다."
신의 강림.
그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자 반발이 컸다.
"…신을 강림시키다뇨?"
"마, 말도 안 됩니다! 감히 신의 종으로서 신을 부르다뇨! 신께서 먼저 강림을 언급하셔야 합니다! 그게 먼저입니다!"
하벨은 신관들의 반발 속에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교황은 이를 알아차리고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그 사실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교황을 납치해 지금까지 가뒀습니다."
사라진 교황.
이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일부였다.
"무슨 소리입니까? 교황님께서는 지금 신께 기도를 드리러 기도실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 말했겠죠.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잖습니까."
하벨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곡을 콕 찔러버렸다.
여러 사람이 입을 다물자 하벨은 용왕이었을 때도 많이 해보았던 자애로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용서합니다. 그들은 사악한 한 존재의 목소리에 넘어갔을 뿐이니까요."
용서.
지금 상황에서 얼마나 달콤하게 들릴까.
흔들리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흔들렸기에 에른스트에 가담했던 무리가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체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오만한 말을 꺼내는 겁니까!"
"맞습니다!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오직 신뿐입니다!"
"잘됐네요."
하벨은 가면에 손을 댔다.
일단 시끄럽게 울리는 저 입을 막고자 했다.
"내가 바로."
천천히 떨어지는 가면을 따라 신관들의 눈에 깊은 혼란이 가득 찼다.
"신의 아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