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71화 (371/415)

371화. 신난다(3)

* * *

엘라힘은 하벨이 왜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하벨 티에라라는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와 처한 상황이 자유롭지 않으나, 달님은 달랐다.

누구도 모르기에 한계가 없었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 큰일까지 처리하는 게 얼마나 편하겠는가.

하벨에게 달님이란 그런 존재였다.

무언가를 몰래, 편안하게 처리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하벨이 시엘느에게 하려는 행동을 본다면 정체를 숨기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결코, 그냥 물어본 게 아닙니다. 혹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엘라힘은 대답이 없는 하벨의 모습에 자신이 너무 무례했나 싶어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 교황청에 들어가려면 신의 은총이 필요하기에 자신과 동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여기에서 신의 은총은 곧 신분을 의미하는 신분증에 가까웠기에 현재 신의 은총이 떨어진 신관들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에요. 이번에는 가면을 벗어야죠."

하벨은 엘라힘의 걱정을 날려버릴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저 대답하지 않았던 건 자신의 신경을 확 잡는 무언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달려 있다면 신관님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알아챌 겁니다. 내가 하벨 티에라라는 걸요. 이건 가면으로 가릴 수가 없어요."

달님이라는 가명을 쓴 순간부터 언제가 되었든 끝이 오리라 생각했다.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그동안 많이 해 먹지 않았던가.

하벨은 잠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걸 찾아야겠습니다."

지이이잉.

자신의 신경을 잡는 감각. 영혼이 공명하고 있었다.

바로 밑에.

'…그럴 리가.'

여기는 영혼이 든 신체가 없을 텐데.

처음 류아가 그렇게 말하고 도중에 아니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체 뭘까.

"그런데 신관님. 여기 밑이 어딥니까?"

"음."

엘라힘은 잠깐 고민하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옅은 미소를 보였다.

"교황의 방입니다. 신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기에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교황께서 지금 사라지셨기에 공실인 상태지만요."

"지금 바로 이쪽으로 갈 수 있습니까?"

"아뇨.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괜찮을 거라 봅니다."

"나중에는 괜찮다뇨?"

"교황의 방에는 '신물'이라고 불리는 게 있습니다. 언제인지 몰라도 신께서 직접 언질 주신 게 있습니다."

"네……?"

하벨은 그 '신물'이라는 게 몹시 거슬리게 들려왔다.

저 아래 자신의 영혼이 공명하고 있질 않던가.

'…신물이라니.'

"신물을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상자를 여는 자야말로 자기 아들이라는 증명하는 거라고요."

엘라힘이 이어 꺼내는 말에 하벨을 머뭇거렸다.

'영혼 말고 흡수할 게 뭐가 있지?'

[어……?]

아라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힐끔 하벨을 쳐다본 뒤에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이 몸은 있지… 신물이라는 게 신이 대장을 생각해서 내버려 둔 힘 같아!]

아라가 하벨을 찌르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이 몸은 한숨을 내쉬라고 대장을 찌른 게 아니었어! '대장, 어서 눈치채야 해'였는데.]

아라가 무언가에 실망하자 칼리우스가 아라를 쓰다듬으며 하벨을 향해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그럼 나는 달님보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찌를래."

조금 전부터 하벨이 넋이 나간 듯 보였다.

가볍게 찌른 아라와 달리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기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신이 언제인지 몰라도 신관들에게 꺼낸 말이기에 그 말은 고스란히 기록되어 이어지지 않았겠는가.

언제인지 몰라도 신의 아들이 이 땅에 나타날 때를 기다리며.

"신관님. 신물이라는 게 어떻게 생겼습니까?"

"모릅니다. 아무도 상자를 열지 못했으니까요."

"그럼, 이야기가 쉽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하벨이 연락용 아이템을 꺼내자 이번에는 엘라힘이 당황한 눈초리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예?"

"내가 신의 아들이라면서요."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부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취소할게요."

하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저기 신물은 아무래도 내가 가져가야 하는 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원치 않아도 내가 뭐가 되는지 아시겠죠?"

태연하게 꺼낸 말에 엘라힘은 점점 눈이 커지더니 곧 눈동자가 튀어나갈 정도로 입마저 벌렸다.

"그, 그렇다는 건… 시, 시, 신께서……."

엘라힘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신이 그 말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여기까지 봤다는 게 아닐까.

자신은 신의 미래 속에 있는 거고.

이 벅찬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 제가……."

"잠시만요, 신관님. 지금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하벨은 엘라힘을 멈춰 세우곤 자연스럽게 꺼낸 연락용 아이템을 흔들었다.

일단 안으로 침투해 상황을 본 뒤에 페트리오에게 지시를 내릴 참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더 좋은 게 있었다.

"좀도둑."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이제 때가 됐습니까?>

"마나는 걸린다는 거 알지?"

<압니다.>

"내가 높은 곳에 있어도 너희는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하벨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딜 보아도 흰옷을 입은 사람들투성이였다.

<습격의 기본은 잠입이 아닙니까?>

"…잠입했다고?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그러는데?"

<신관들과 함께 대동하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 신관들은 돈을 좋아하더군요. 배때기에 슬쩍 꼽아주니까, 상단이랍시고 안으로 보내줬습니다.>

"나도 그럴 걸 그랬네. 괜히 꼭대기로 올라왔나?"

영혼이 어디 있는지 바로 찾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니꼬웠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합류할 수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음, 후회가 살짝 돌긴 했는데 나는 요란한 걸 좋아해서."

<지금도 요란합니다. 충분합니다. 그러니 내려오십시오. …잠시만요, 설마 저 석상을 부수실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어?"

<다행입니다. 진짜 다행입니다.>

"아니,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도련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법사의 탑을 화려하게 부순 도련님이요.>

"그건 제일 짜증 나서 부쉈고, 이건 뭐, 날 위해 남겨놔야지. 어쨌든, 소란은 용용이가 잠재울 거야."

<도련님.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게 있습니다.>

"웬일이야? 걱정이 한 가지밖에 없다니."

<엘라힘 신관님을 이제라도 대동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정체가 들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체를 숨긴다고 해도 적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신관님은 내 옆에 있어야지."

엘라힘에게 '신관님'이라는 말을 붙이지만, 사실은 추기경이었다.

지금 가장 신과 가까이 있으며 그 어떤 신관보다 발언권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지금 내가 하려는 건 도박이 아니야. 가진 걸 다 털어도 못할 수도 있는데 신관님을 어떻게 내버려 두고 가겠어?"

<정말… 괜찮으십니까? 정체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페트리오의 불안함을 읽기라도 한 건지 엘라힘은 하벨을 바라보며 단호할 정도로 확실하게 주장했다.

"신관은 어떤 순간이라도 신을 우선시합니다. 그게 신관이 될 수 있는 조건이며 신관이자, 신의 종으로서 체결한 맹약입니다."

신관은 절대로 신을 배신할 수 없다는, 남에게 들려줘서는 안 되는 사실을 언급하자 하벨은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엘라힘은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그저 인자함을 드러낼 뿐이었다.

"이거… 알려주면 안 되는 내용 맞죠?"

하벨이 묻자 엘라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사실은 신관 이외에 아무도 모릅니다. 그만큼 위험한 사실이죠."

"그걸… 왜 알려주시는 겁니까?"

하벨은 여전히 의문으로 물들어갔다.

이 정보를 자신이 어떻게 이용할지 알고 이렇게 함부로 알려주는 걸까.

"저는 하벨 공을 믿습니다. 그러니 불안함을 없애 드려야죠. 믿고 나아가십시오. 하벨 공께서 하시려는 행동은 제 판단에 따르자면 옳습니다."

엘라힘은 보잘것없는 자신의 말이 하벨에게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엘라힘을 빤히 바라보던 하벨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아주 좋은 선물이었다.

"…좋습니다."

다시 연락용 아이템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좀도둑."

<예, 도련님.>

"헤일리스도 있지?"

<있습니다. 셴마저 대기하고 있죠.>

헤일리스가 공식적으로 코스모피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로 찾아오지 않았던가.

에른스트가 왜 레놀드 왕국의 마법사 협회를 부셔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했겠는가.

헤일리스와 셴이 모였기에 그런 말을 꺼낸 게 틀림없었다.

마법사 협회장 두 사람이 모인 이유가 알고 보면 오미너스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소문이 몰아가도 에른스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법사 협회를 밀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원래 같은 편이 적이 되면 골치 아픈 존재가 마법사였다.

자신은 그런 둘에게 시엘느에 모이라 명령했다.

비록 시선이 쏠려 있다곤 하나, 움직이지 못할 건 없었다.

'오히려 마법사를 쓸데없이 여기저기 퍼트리면서 동선을 늘린 뒤, 가면단의 움직임에 맞춰 일부는 사라지면 그만인 것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하벨은 페트리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계획대로 진행해. 지금부터 교황청을 봉쇄한다."

<예! 움직이겠습니다.>

자신이 만들고, 페트리오가 키운 가면단이 다시 움직였다.

하벨은 밑에서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을 바라보며 아라를 불렀다.

"아라야."

[응.]

"가면단이 침투하면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막아줘."

가장 훌륭한 요원이 지금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조용히 스며들어 강력한 공격을 할 존재가 바로 정령이 아닌가.

[에헴. 이 몸만 믿어! 교황청을 차지하는 게 이번 목표잖아? 이 몸은 지금 엄청 두근두근하다?]

아라가 너무도 기뻐 보였다. 어떤 부분이 아라를 기쁘게 했는지 몰라도 하벨 역시 잠깐 가면을 벗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 나도 즐겁네. 에른스트에게 거센 한 방을 먹인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가슴이 벅찰 수가 없지."

하벨은 뒤를 잠깐 바라보았다.

칼리우스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덩달아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칼리우스 양쪽에 빈 곳이 가득 보여 아쉬웠다.

모두를 데려오면 좋았을 테지만, 에른스트의 의심을 피하고자 최소한의 인원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고, 레디나마저 검은 달 일로 지금 좀 바빴다.

지원할 수 있는 인원이 있다면 일부러 레디나 쪽으로 돌렸다.

랜턴이 갑자기 흔들렸다.

하벨 티에라 역시 지금 순간 즐기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왜 검은 불꽃이 타오르지 않는지 모르겠네.'

류아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은 신관들이 모조리 죽어있던 모습이라고 했다.

신관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걸까.

아니면 하벨 티에라는 보지 못했던 걸까.

'너한테 할 말이 점점 쌓이기만 하는구나.'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심각한 이상이 생겨야 하벨 티에라가 찾아왔으니, 물어야 하는 게 많음에도 만날 수가 없었다.

하벨은 우선 눈앞에 있는 일을 집중했다.

"신관님."

"예, 하벨 공."

"내가 교황보다 더 높죠?"

"…높습니다."

엘라힘은 하벨이 짓는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에 불안함을 느꼈다.

[대장, 왜 그래? 그런 미소를 지으면 이 몸은 좀 무서운데?]

아라가 하벨의 볼을 살짝 누르며 아랫입술을 먹었다.

저건 뭔가를 하겠다는 신호가 아닌가.

"그러니 용서해주세요, 신관님."

칼리우스가 입을 열기 전에 하벨이 싱긋 웃었다.

참 해맑은 미소가 아닐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여길 좀 부숴보려고요. 내가 더 높으니까 괜찮잖아요. 그렇죠?"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걸까.

엘라힘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하벨이 손가락을 튕기며 아라와 칼리우스를 불렀다.

"간다, 얘들아."

하벨이 가면을 쓰기 전에 그의 손아귀에 바닥에서부터 날아온 온갖 돌멩이와 흙더미가 쌓이는 걸 보았다.

천장을 부숴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물러서세요."

가면을 뒤집어쓴 하벨은 망설임도 없이 땅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그 소리에 엘라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그러시면……."

엘라힘은 부서지는 천장을 보며 기겁하다 여기에 가기 전에 헤레스가 꺼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말려주세요. 그냥 무조건 말려주세요!

'…이걸 대체 어떻게 말립니까?'

엘라힘은 허허하고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내뱉었다.

천장이 터져나가듯이 부서지고 있었다.

파편이 자신한테 다가왔지만, 금방 나타난 바람이 막아주었다.

―도련님께선 아직 부상자란 말입니다. 아시겠죠?

'모르겠습니다, 헤레스 씨.'

이미 한 방으로 들어갈 공간은 충분하건만, 아니, 넘치건만, 하벨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손아귀를 감싼 손 뒤로 또 흙더미가 모였다.

그의 어깨너머로 팔이 하나씩 빠르게 생겨나고, 열 개가 넘을 때쯤에 다시 아래를 향해 휘둘렀다.

콰콰콰콰콰!

대체 얼마나 부수려는 건지 몰라도 우르르 쏟아지는 흙더미나, 거세게 부는 바람만 보아도 성 한쪽이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뭔가 하시기 전에. 그러니까,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일 때가 기회에요. 그때 말려야 합니다. 말리지 못하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정말요.

'…미안합니다, 헤레스 씨. 이미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엘라힘은 흙먼지마저 날리며 자신에게 걸어오는 하벨을 보며 속으로 헤레스에게 몇 번을 사과했는지 몰랐다.

아름답던 은으로 된 교황청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도 엘라힘은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귀에 쏙 박히는 하벨의 말 때문이지 않을까.

"이거, 되게 신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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