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신난다
* * *
달님이라니.
레이엘느는 뒤로 물러났다.
"레디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레이엘느는 자신의 머릿속이 구겨지고 갈리지는 걸 느꼈다.
"수업료를 준다면 친절하게 설명해줄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달님에게서 들려오자 레이엘느는 손아귀에 힘을 줬다.
빌어먹을.
이런 날 술이나 퍼먹고 있다니.
술을 마저 깨려고 마나를 끌어당기자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는 너를 몹시 싫어했어. 그래서 내가 멈췄어. 넌 이제 마나를 못 쓸 거야."
뒤쪽에서 다가온 해가 가득 묻어난 가면을 쓴 자가 목소리를 냈다.
[우와아, 용용이 대단해.]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미친…….'
레이엘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걸어옴에도 소리가 없었다.
레디나가 여기까지 접근했음에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저 해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놈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네가 어떻게 날 배신해? 날……?"
"레이엘느 아저씨. 이건 사실 배신이 아니잖아요?"
레디나가 키득거렸다.
배신이라는 말을 레이엘느가 꺼냈다는 그 자체로 참 우스웠다.
대체 누가 먼저 배신을 했는지 바로 보이질 않던가.
"배신을 한 건 처음부터 아저씨였잖아요."
레디나가 레이엘느에게 달려들었다.
다급히 검을 꺼낸 레이엘느는 레디나가 찌르는 단검을 막았지만, 한쪽 무릎이 흔들렸다.
자세가 좋지 않았다.
"아직도, 나를 원망했다니."
레이엘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키웠다. 나는 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고!"
"개소리 집어치워!"
아버지라는 소리에 레디나는 단검에 바람을 실었다.
사납게 스치고 간 레디나의 단검을 레이엘느가 받아 쳐냈지만, 검날이 깨지고 말았다.
"나는 살기 위해 엄마를 죽였어. 네놈이 내게 했던 그 말을 벌써 잊었어?"
레디나는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살고 싶으냐, 레디나? 그럼, 네 엄마를 죽여라.
"나는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데. 치사하게."
레디나는 레이엘느를 비웃었다.
지금도 그때의 꿈을 꿀 때마다 레이엘느의 말과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놈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툭 던진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덩달아 자신의 심장마저 이미 내려앉은 후였다.
그렇게 온몸이 땀에 젖으며 깨어나곤 하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 아저씨가 엄마를 배신할 리도 없고,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킬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레디나. 너는 그때 어렸어. 그래서 기억을 잘못 받아들인 거라고 그랬잖아."
레이엘느는 마나를 끌어오려고 하지만, 정말로 마나가 멈춰버렸다.
다급했다.
오러를 쓸 수 없기에 살기가 어린 저 검날을 겨우 한 끗 차이로 피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게 전부라니.
"레디나. 레디나! 내가 너의 어머니를 배신한 건 맞아. 하지만 너의 어머니가 널 인질로 잡았는데 이걸 보고 있어야 했다고? 나는 널 구하고자……."
"좀 그럴듯한 말을 꺼내지그래?"
레디나는 우스웠다.
여기까지 와서 저딴 개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너는 그때, 고작 11살이었어, 레디나!"
레이엘느가 레디나의 단검을 밀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레디나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래, 11살이었지."
오히려 분노를 담았고.
"부모를 잃기에 어린 나이였고."
슬픔을 담았으며.
"그럼에도 너는… 내게. 내게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을 시켰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죄책감마저 단검에다 담았다.
"레디나, 정신 차려!"
밀리는 건 레이엘느였다. 그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레디나를 설득하고자 했다.
부들부들.
손이 떨리고 레디나의 단검에 밀려 자신의 검날이 어깨에 닿자 레이엘느는 급하게 부르짖었다.
"레디나 넌! 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실수로 너의 어머니를 죽여버렸다고!"
쓸데없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레디나는 레이엘느의 옆구리를 노리려던 손길을 멈췄다.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지만, 레디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실수였으면 했으니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사실이길 바랐으니까.
"이 기억을 피하려고 너 스스로 다른 기억을 덮었어. 그걸 내가 막으려고… 지금까지 내가 너를 위해 무얼 했는데."
파지지직.
그때, 레이엘느의 손아귀를 향해 번개가 튀겼다.
그가 놀라며 검을 쥐지 않은 다른 손에 있던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챙그랑.
단검이었다.
레이엘느는 그대로 숨을 참았다.
"네놈은 끝까지 레디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을 생각밖에 하지 않다니."
하벨은 빤히 보이는 수작질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마음을 뒤바꾸었다.
정말 역겨웠다.
저 말로 레이엘느는 레디나를 말 잘 듣는 꼭두각시로 만든 게 틀림없었다. 말로서 계속, 계속 레디나를 억눌렀겠지.
"레디나. 휘둘리지 마. 기억이 불안정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너의 기억을 의심하지 마.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만 기억해."
휘리리릭.
레디나의 단검이 회전했다.
"복수요."
자신이 엄마를 죽인 후로 쭉 바라왔던 건 복수였다.
제일 사랑하는 엄마.
―사랑한다, 레디나.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준 엄마.
그녀가 눈을 감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을 사랑한다며 눈으로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눈을 감겨주지도 못하고 레이엘느 손에 끌려가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냥.
제발.
제발 무엇이든 좋으니까, 레이엘느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콰직!
레디나는 그대로 레이엘느의 옆구리에 단검을 집어넣었다.
"하하하하!"
손에서 느끼는 짜릿한 쾌감에 웃으며 검을 비틀었다.
"딸이 있었어? 너한테?"
이윽고 희열마저 느꼈다.
―검은 달의 수장한테 혹시 자식이 있어?
하벨이 떠올린 저 물음에 답을 이제야 할 수 있다니.
레이엘느에게 딸이 있었다.
딸이.
"…안 돼."
레이엘느의 눈에 드디어 절망감이 어렸다.
거무튀튀한 모습이 참 예뻤다.
"왜 안 되는 거야? 너랑 나랑 똑같잖아."
레디나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진짜 딸이든 아니든 관심 없어. 그냥 네 딸이라는 게 중요할 뿐이지."
"…레, 레디나. 제발, 이러지 말자."
"너는 엄마한테 내가 있다는 걸 알았어. 모두에게 비밀로 했는데, 너한테 들켜버린 거지."
레디나는 마음이 미어졌다.
자신이 약점이 되어버렸기에 이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너는 그걸… 약점으로 잡았어. 그래서 엄마가 너 따위한테 지고 말았던 거야. 네가 날 죽일 거라 협박했으니까!"
레이엘느가 지금 칼리우스 덕분에 오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도 자신이 상대했던 적에 비하면 약했다.
기억 속에 반짝거리는 엄마의 손놀림에 비하면 레이엘느는 너무도 둔했다.
레디나는 다시 바람을 실으며 검을 휘둘렀다.
콰드득!
갑자기 실린 무게에 레이엘느가 막고 있던 검이 밀려 부러짐과 동시에 어깨를 파고들었다.
레이엘느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레디나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무게를 싣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내기 위해 레이엘느의 살갗을 배어나겠다.
그녀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튀는 피가, 바닥에 뿌려지는 피가 늘어갈수록 레이엘느의 몸이 무너져내렸다.
레디나가 손을 멈추자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단검 끝에 맺힌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으며 레이엘느가 무너져내렸다.
피부였던 곳에 자상만이 빼곡해 피부가 너덜너덜해지고,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새빨간 피로 물든 레이엘느의 꼴을 보며 레디나가 너무도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누구 하나 잔인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기억나지?"
레디나는 어깨로 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나한테 살고 싶으면, 엄마의 목을 베라고 나한테 말했잖아."
자신을 바라보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나는 거부했어."
당연히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죽일 수 있을까.
아무 연고도 없는 자신의 엄마가 되어준 것만으로 이미 넘치는 사랑을 받았는데.
―죽여!
―당장 죽여버리라고!
자신에게 엄마를 죽이라고 강요한 이들의 목소리마저 귓가에 들려왔다.
"그런데 네가 나한테 다가와 속삭였잖아."
레디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했어도 레이엘느의 모습이 너무도 웃겨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펜으로 온몸이 죽죽 그어져 있는 것만 같아 정말 보기 좋았다.
"지금 엄마를 죽이지 않으면 그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들개한테 줘버리겠다고."
―레디나. 넌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야 해. 죽으면 끝날 것 같지? 아니. 아직 시체가 남았잖아? 이 사체는 내 거야.
다정했던 레이엘느의 목소리가 한순간 돌변했다.
소름 끼쳤다. 귓가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너한테 돌아갈 거라 생각했어?
자신을 바라보던 부릅뜬 눈이 무서웠다.
―아니. 나는 저 시체를 손가락부터 시작해 갈기갈기 찢어서 들개한테 먹이로 줄 거란다. 뜯어먹히고 남은 건 까마귀한테다가 던져줄 거야. 그리고 남은 뼈다귀는 뒷골목에다가 두면 누군가는 좋다고 들고 가서 이걸로 국을 끓여 먹을지 누가 알겠어?
저 말을 들은 그때의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엄마가 죽는 건 정해져 있었고, 자신은 그저 시신이라도, 아니, 죽어서까지 엄마가 고통받는 게 싫었다.
―싫어? 싫으면 네가 죽여.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인다면 시신은 훼손하지 않겠다 약속할게. 아저씨는 말이야,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래서 죽였다.
엄마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아니 어쩌면 죽음이 무서워 그럴듯한 핑계로 삼을 수도 있었기에 레디나는 그 말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네가… 키우겠다고 했지?"
엄마를 죽이고 부들부들 떠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으며 레이엘느는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키우겠다고.
그리고 부드러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너의 진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모든 게 혼란스러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
―환영한다, 레디나. 너도 이제 검은 달의 일원이다. 네가 전 수장의 의지를 이어 검은 달을 지켜야 한다.
엄마의 눈을 감겨줘야 하는 자신을 안으며 그 저주 같은 말을 퍼부음에도 따스하게 들려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된 지금은 그때 레이엘느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연극에 불과했다.
자신을 파괴하려는 달콤한 말에 불과했다.
"그 연극에서 네가 얻은 건 뭐겠어?"
레디나가 레이엘느의 팔을 밟고서는 단검을 그대로 박아넣었다.
레이엘느는 신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존경, 경외, 무언가 다를 거라는 어떤 기대감? 뭐 그런 거겠지. 오물은 레디나 네가 다 떠안았으니까."
하벨은 레디나의 뒤를 이어 말해주었다.
레이엘느가 전 수장을 죽여야 했지만, 오물을 뒤집을 각오조차 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를 어린 레디나한테 덮어 씌워버렸다.
그럼 레이엘느가 감당해야 할 비난의 화살이 어디로 향했을까.
레디나였다.
그녀는 고작 11살 때 그 감정을 떠안아야 했다.
"너도 참, 진짜 만만찮은 쓰레기 새끼네."
하벨은 레이엘느의 한심함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11살짜리 아이를 이용하고 싶었어? 그렇게 모든 비난을 떠안을 용기조차 없으면서 수장 자리는 하고 싶었고?"
하벨은 혀를 찼다.
"쪽팔리게 진짜.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벌써 머리를 수천 번은 박았겠네. 그래놓고 뭐라고? 레디나를 키웠다고?"
"…네놈이 다 망쳤어!"
레이엘느는 하벨을 보며 소리쳤다.
"입 닥쳐!"
레디나가 왼손을 발로 짓밟더니 단검을 마저 내리찍었다.
콰악!
레이엘느는 당장 고통보다 분노가 앞섰다.
갑자기 달님이 나타나 자신이 세웠던 모든 걸 앗아가는 것도 모자라 레디나까지 빼앗아버렸다.
저 말 잘 듣는 인형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니.
어릴 때부터 하나씩 쌓았던 세뇌가 다 무너져내린 게 분명했다.
"그래, 그래. 날 원망하든 말든, 넌 끝이야. 그란덴."
하벨은 레이엘느에게 건성건성 말하고는 그란덴을 불렀다.
이 사건의 끝은 자신이 아니라 저들이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애초에 검은 달을 찢어놓은 건 자신이었으니까.
에르티안 왕국에 뻗었던 세력도 잘라냈고, 코스모피안 왕국에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져 휘청거리고 있던 차에 간부까지 다 죽었으니 타격이 얼마나 더 클까.
'…그리고 너희는 시엘느에게 버려졌다.'
이 순간을 노렸다.
검은 달이 가장 약해질 순간이자, 레이엘느를 아주 손쉽게 꺾을 좋은 기회를.
설령 놈이 방심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애초에 마나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그 사실만으로 칼리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열린 문틈으로 한 명씩 걸어왔다.
손등에 문양이 반짝거렸다.
모두 검은 달 무늬가 떠오르자 레이엘느는 눈을 크게 떴다.
온 피부에 새겨진 자상에도 신음을 내뱉지 않던 레이엘느가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로 숨을 들이마시며 신음을 토했다.
"너희가 어떡해……."
"이제라도 바로 잡으려는 것뿐이야."
"그란덴, 너까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애초에 거짓으로 우리를 붙잡고, 설득한 건 너야. 전 수장인, 크리샤가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여서 검은 달을 말려 죽이려고 한다고."
촤아악!
그란덴이 서류를 레이엘느를 향해 뿌렸다.
레이엘느의 피에 서류가 붉게 물었다.
"아니었다. 크리샤가 옳았다."
그란덴은 치솟은 배신감에 겨우 감정을 삼키고 있었다.
검은 달은 애초에 돈이 부족할 수가 없었다.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상상도 못 할 돈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저 돈을 중간에 가로챈 건 바로 너다, 레이엘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