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나다(3)
* * *
"괜찮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공이 가진 힘으로 적의 몸에 상처를 냈고, 그래서 붙잡았으니까요."
에른스트는 다른 자들을 흔들 때처럼 부드러운 말을 건네며 하벨을 긁어나갔다.
네가 해냈다며.
네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며.
하벨 티에라는 결핍이 깊은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일수록 가벼운 칭찬에 약하기 마련이었으니.
"그래서 적은 어떻게 됐습니까?"
여전히 믿기지 표정을 지으며 하벨이 묻자 에른스트는 상냥함을 드러냈다.
"거긴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뒤를 쫓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푹 쉬십시오. 이전과 같은 습격은 없을 테고……."
"…저하, 오미너스 말입니다."
하벨이 갑자기 오미너스를 언급하자 에른스트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을 끊었다는 자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에른스트는 하벨이 꺼내는 이다음 말을 조급하게 기다렸다.
"네. 말하세요."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에서 본 게 맞다면 무조건 없어져야 합니다."
"거기서 무얼 봤습니까?"
"검고 진득한, 마치 바다와도 같은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벨은 처음 오미너스를 봤을 때 다가온 충격을 떠올리려 애를 쓰며 말을 꺼냈다.
"그게 맞습니다. 그게 오미너스입니다. 마법사 협회가… 지옥을 만든 겁니다."
천천히 목소리를 낮춘 에른스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끔찍한 걸 말이죠."
"방법이 있습니까?"
하벨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에른스트가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오미너스라는 존재를 없앨 수 있는 수단이 반드시 있을 테지.
"나한테 있습니다. 나는 이 오미너스를 이전에 발견한 뒤로, 저 끔찍한 존재가 세상을 집어삼킬 거라 예상했습니다."
굳건한 의지를 드러낸 에른스트는 정말로 세상을 위해 무엇이든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끔찍했다.
샤넬리움이 에른스트라는 걸 몰랐다면 정말이지 깜박 속아 에른스트를 다시 보고 있을 만큼 뻔뻔한 연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공께서 오미너스를 없앨 힘이 없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앞에만 있어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정말로 제가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하벨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정말 노력했다.
사람이라면.
아니, 살아오면서 온갖 서러움을 가득 느꼈던 하벨 티에라라면 이 결정에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 역시 흔들려 보았다.
하벨 티에라가 보았던 미래에 샤넬리움은 세상을 파괴하는 놈이 아니었을 테지.
물 마법사라 알려진 자신 이외에 새로운 영웅이 나왔던 건지, 아니면 본인이 세상의 영웅이 되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샤넬리움이라는 존재는 그저 세상을 위해 애를 쓰는 자로서 남았을 게 분명했다.
"예. 됩니다!"
에른스트는 모처럼 들려온 기쁜 소식에 이걸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영웅.
이 찬란한 말을 덧붙일 수 있는 존재는 지금으로서 하벨 티에라가 가장 적합했다.
티에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정령도 보지 못한 둔재.
인간이라면 거의 다 지닌 내성조차 없어 방 안에 처박혀 나오지도 않던 그가 갑자기 물에게 선택을 받아버렸다.
이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직도 하벨 티에라가 물 마법사라는 사실에 이리 떠들고 있는데.
"아니, 공밖에 없습니다. 오미너스의 위험함과 이를 없애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존재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 아닙니까?"
"거짓이 무슨 상관일까요? 공이란 존재로 사람들이 이미 희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세상을 좀 먹는 이 오염이 사라질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에른스트는 계속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계획을 앞당길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실제로 이 오미너스가 오염을 퍼트리고 있다면 더욱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존재 때문에 정화제를 써도 소용이 없는 거잖아요. 대체 언제까지 오염된 물을 저렇게 내버려 둘 셈입니까?"
"…그렇죠. 만약에 오미너스가 오염을 퍼트리는 범인이라면 없애야 합니다. 오염은… 더 심해지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쉬세요. 너무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졌잖아요."
에른스트는 표정과 달리 말에는 조급함을 담지 않았다.
지금은 저 결심이 굳어지도록 가만히 둘 차례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공께서 이렇게 마음을 먹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에른스트는 하벨의 마음에 파도를 일으키고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저하? 왜 저한테 고개를 숙입니까?"
"이는 당연한 겁니다. 그럼 이제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당황함이 가득한 하벨의 눈빛에 에른스트는 눈이 휘었다.
이런 대우에 적응하도록, 하벨을 천천히 부드러운 구름 위에 태울 생각이었다.
에른스트가 등을 돌리자 하벨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문이 닫히고 하벨은 입가를 가렸다.
'저 병신 봐라.'
속으로 숫자를 세다가 하벨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대장?]
창문 밖에 있던 아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벨은 배를 잡고 웃으며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이 몸은 대장이 왜 웃는지 모르겠어.]
아라가 눈동자를 굴렸다.
에른스트하고 한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웃기다고 생각한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웃겨서. 좀 바보 같잖아."
하벨은 아라한테 손을 뻗었다.
에른스트가 웃기고, 이 상황이 웃기고, 자신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에른스트의 생각이 웃기고, 저딴 놈한테 당한 자신이 웃겼다.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이해가 되긴 해.'
위에 있기에 아래 상황은 너무도 잘 보이지만, 정작 본인의 상황은 아래에 정신이 팔려 알지 못했다. 설마하니 누가 자신의 뒤통수를 칠까 하는 그 가벼움이 눈을 가렸으니.
자신이 그래서 에른스트에게 당했고, 이제는 놈이 당할 차례가 아닌가.
뒤통수 맞는다는 게 얼마나 아픈 건지 놈이 알아야 했다.
"이제 갈까, 아라야?"
[벌써 시엘느로 가는 거야? 하지만 좀도둑한테 연락은 안 왔는데?]
아라가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벨은 벌써 웃고 있었다.
"도련님. 클로저가 도착했습니다."
카샬의 보고에 하벨은 다시 아라를 바라보았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안도하고 있던 에른스트에게 예상치도 못한 존재가 튀어나왔으니 이제 시선이 쪼개질 테고,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이 어디 있을까.
"검은 달부터 부수러 가야지."
에른스트가 검은 달을 포기했다는 걸 방금 확인했으니 이제 검은 달을, 검은 달의 수장인 레이엘느를 처리하러 떠날 차례였다.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평소 입에 대지도 않았던 술병이 레이엘느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당신과 우리의 계약은 이제 끝이오.
쪽지로 보내진 저 말이 전부였다.
한 줄.
겨우 한 줄이었다.
개처럼 부려져 일한 대가가 겨우 한 줄에 불과했다.
'이러면…….'
레이엘느의 얼굴이 가득 일그러졌다.
하지만 지금은 버려졌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 중요한 건 시엘느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법사 협회도 더는 어떤 시체나 죽어가는 인간을 받지 않게 되었다.
물 마법사 탄생 이후 마법사 협회로 향하는 시선이 많아졌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칼에 손을 놓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지금 모든 지원이 끊어진 상황에서 사실상 과거의 검은 달과 다를 것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돈이. 돈이라는 건 손에 들어갔다 나가면 그뿐인 것을.
이전 수장이 죽기 전에 꺼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돈에 매달려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암살자라는… 남의 피를 먹고 자라는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없어. 그 끝에 뭐가, 쿨록, 뭐가 있는지 몰라?
꿀꺽꿀꺽.
레이엘느는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버려지는 일뿐이야, 레이엘느. 우린… 버리기 쉬운 말이 될 뿐이라고.
그녀의 말이 결국, 맞았다.
돈이라는 건 암살자가 정당한 방법으로 벌기엔 제약이 많았다.
남을 죽인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소위 말하면 양지로 손을 뻗기엔 자신들이 너무 더러웠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레이엘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내 딸은…….'
입안에 느껴지는 쓰디쓴 알코올 맛과 함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시엘느에 그렇게 개처럼 고개를 숙였던가.
돈도 돈이었지만, 검은 달 일원 중 그 누구도 모르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시엘느의 신관만이 딸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는데.
이건 검은 달을 버린다는 사실을 떠나서 치료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미친 새끼들…….'
탁!
레이엘느는 병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아?'
시엘느에서 검은 달과 맺었던 온갖 계약서를 다 백지화로 만들었지만, 증거가 남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전부 다 자신의 손에 남아 있었고, 이걸 퍼트려버린다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흐흐."
레이엘느가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났다.
숨 가쁘게 달리며 세워놨던 검은 달의 모든 게 '달님'이라는 존재로 휘청거리고 결국, 이렇게 무너져내리지 않았던가.
어디에서 꼬였나 생각하면 역시 '달님'이라는 존재를 만난 뒤였다.
'일단 그놈은 뒤로하고, 시엘느부터 박살 내자.'
하.
입을 벌리자 술 냄새가 풍겨왔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신이 제일 잘하는 걸 손에 꼽는다면 당연히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었다.
딸은 신관 한 놈을 잡아다가 계속 치료하게 하면 그뿐이지 않을까.
'그래. 그거면 되는 거야. 그거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리에 레이엘느가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아예 눈동자를 돌렸다.
손에 쥔 술병을 차분히 테이블에 놓으며 살짝 흐리멍덩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살짝 진 그곳에서 익숙한 낯빛을 한 누군가가 걸어왔다.
"왜 혼자 술을 먹고 있어요?"
방긋 웃는 얼굴에 레이엘느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나 깜박거렸는지 몰랐다.
"…레디나?"
"오랜만에 보죠? 몇 년 전에 스치듯 봤으니까, 사실 엄마가 죽고 난 후로 처음 보는 거잖아요."
"…네가 여길 어떻게 알았지?"
왜 레디나가 여기 있는지보다 어떻게 레디나가 이곳에 올 수 있는지가 너무도 이상했다.
이곳의 위치는 간부밖에 모를 텐데.
하지만 간부들은 그란덴만 제외하고 클로저와 달님 손에 다 죽지 않았던가.
"아. 이걸 깜박했네요."
레디나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암살자가 가지고 다니기에 비싼 물건이었기에 레이엘느는 그 모습을 너무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술 때문인지 몰라도 의식이 몽롱해진 탓에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레이엘느는 숨을 내쉬었고, 그 숨에서도 짙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또르르.
레디나가 던진 무언가가 굴러왔다.
사람 목이 네 개가 보였다.
구르고 구르니 저게 누구인지 파악하는 데 몇십 초나 걸리고 말았다.
얼굴을 파악하자 술이 화악 깼다.
"누구인지 아시겠죠? 모르면 물어도 돼요. 지금 많이 취해 보이니까요."
레디나가 웃었고, 레이엘느는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너였니?"
간부들은 모두 그 전투에서 죽었다.
대체 어떻게 죽었냐고 해도 이를 알려줄 사람은 없었다.
"아뇨."
레디나의 입에서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소리가 나오자 레이엘느는 피식 웃었다.
"네가 나를 배신했다는 말이 내부에서 자주 들려왔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배신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 지금까지 너를 키워준 건 나인데, 네가 배신하는 것도 우습고, 이곳 검은 달을 버린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
말과 달리 레이엘느의 시선이 레디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술이 점차 깨어나자 여러 가지 상황이 눈에 밟혔다.
레디나가 대체 어떻게 간부의 목을 들고 있는 것이며 이곳까지 깔린 경비를 어떻게 뚫었으며 밖에 문을 두드렸던 그 소리는 대체 무엇인지.
여러 가지 상황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힘의 논리에 의거에 간부의 목을 4개나 들고 왔으니 저는 이제 간부가 된 거 맞죠?"
"…그래."
레이엘느는 스산한 레디나의 미소를 보았다.
아직 새끼에 불과했던 짐승이 대체 언제 저렇게 날이 선 송곳니를 가졌던가.
자신이 손에 없는 단검이 레디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레디나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으며 간부 목을 들고 왔겠는가.
술에 찌들었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배신이다.'
그럼 이곳에 깔린 경비를 어떻게 뚫고 왔겠는가.
'레다나가, 그란덴이 배신한 거다.'
자신이 술이나 퍼먹고 있을 때, 검은 달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럼 저 밖에 노크 소리는 대체 무엇일까.
콰앙!
문이 거칠게 열리고, 달 무늬 가면을 쓴 남자가 여유롭게 걸어왔다.
"나다."
씨익 웃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네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달님 말이야."
[짜안, 이 몸도 왔어!]
아라가 손을 뻗어 말랑한 젤리를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