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나다(2)
* * *
<그 일로 오늘 비공식 모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시엘느에서 검은 달을 바로 버릴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간 엮인 게 많을 테니까. …흐음, 생각보다 시간이 좀 필요하네?"
하벨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뭘 어쩌겠는가.
자신이 여기서 더 세게 나가봤자 의심만 살 게 뻔했고.
"아직 시간은 있어. 오히려 잘 된 거 아니야? 너 지금 계속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고 있다며?"
슬그머니 꺼낸 라르웬의 말에 하벨은 입가를 할짝댔다.
정령들이 자신한테 모여 있으니 라르웬한테 숨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들으니 뭔가 잘못이라도 한 느낌이었다.
"정화제는 괜찮아요. 정말로 몸에 해롭지 않아요. 정말로요."
"그건 알고 있는데. 진짜 어떤 부분이 너의 양심을 찌르는지 모르겠네."
눈치를 살피는 하벨의 모습에 라르웬은 기가 찼다.
<…잠시만요.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고 계시다뇨?>
페트리오가 깜짝 놀라자 하벨은 넌지시 자랑처럼 대답했다.
"만들고만 있겠어? 벌써 하나씩 옮기고 있는데?"
<도련님이요?>
"아니. 고맙게도 정령들이 대신 옮겨주고 있어. 내가 그랬어 봐봐. 형님이 옆에 있는데 지금 그 말이 나오겠어?"
"말보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밧줄을 써야지."
"들리지, 좀도둑?"
<아주 든든하다고 전해주십시오.>
"기대한 내가 잘못……."
<도련님, 그 반영구 정화제를 정말 사람이 옮길 수 없습니까? 만약 옮겨진다면 지금보다 더 효율적으로…….>
"그건 불가능해. 원래는 아예 옮겨지지 않았는데 아라의 도움으로 정령들까지는 허락이 되는 걸로 바뀌었거든."
하벨은 사실 이것도 고마웠다.
만약에 이마저도 되지 않았으면 자신과 아라가 얼마나 더 많이 움직여야 하겠는가.
[그럼, 그 이상은 왜 안 되는 거야?]
루룸이 호기심을 담아 아라에게 물었다. 이쯤 되면 정화제가 왜 움직이지 않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힘이 섞여 있는 존재가 아니면 정화제가 싫대.]
'진짜 너무하네.'
하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물이 가진 그 오만함을 고스란히 받아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리고, 어, 정화제는 물의 오염을 막아야 하는 숭고한 의무가 있기에 이걸 지켜야 한다고 그랬어.]
"진짜 재수 없네."
라르웬이 코웃음을 쳤다.
정령사와 정령 사이에서 나온 힘이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지.
"그러면 도련님이 반영구 정화제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칼리우스가 던진 말에 시선이 하벨에게 쏠렸다.
"글쎄. 저번에는 꼼짝도 안 하던데, 용왕의 힘을 쓰지 않아서 그런……."
"됐어. 할 필요 없어."
라르웬은 괜히 미래가 예상됐다.
정화제를 만들 때마다 하벨이 용왕의 힘을 쓰면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정령들이 옮겨주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부정한 것들부터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아, 잠시만요, 도련님.>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페트리오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이어 페트리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련님.>
"무슨 일인데?"
<지금 신관들이 움직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잠시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좋은 소식이 오겠네? 조심해서 접근하는 거 잊지 말고. 뭐가 되었든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연락용 아이템이 끊어지자 하벨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자아, 준비합시다."
드디어 움직일 시간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용용아."
"응, 도련님."
"지금 협회장한테 명령을 내릴 수 있어?"
칼리우스가 마법사 협회, 협회장을 지배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름을 지배했기에 명령을 내릴 수 있을 테지.
"할 수 있어! 내 머릿속에 이름이 많아."
"그럼, 협회장한테 이렇게 전해줘."
하벨은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술래잡기가 시작되니까, 절대로 술래한테 잡히지 말고 도망치라고. 샤넬리움 레놀드, 놈이 술래야."
술래잡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지금 뭐라 그랬지?"
에른스트는 분노로 이가 다 떨릴 지경이었다.
<그, 그게 사, 사라지셨습니다.>
마법사 협회에 심어둔 멍청한 놈이 말을 지껄였다.
조금 전과 다를 거 없는 말에 에른스트는 다시 물었다.
"누가?"
<협회장이 사라졌습니다. 잠깐 어디로 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평소에도… 그, 말없이 잠깐 어디로 갔다가 오곤 했…….>
"찾아."
그 말만 남기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에른스트는 지금 '단순히'라는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레바놈이 죽은 것도.
하벨 티에라가 습격을 당한 것도.
지금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이 사라진 것도.
죄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왜 모를까.
'도대체 어떤 놈이지?'
에른스트는 계속 고민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짐작하기도 어려웠고, 집히는 구석도 없었다.
―…검은 달에서 일을 벌인 게 맞습니다. 정화제를 독점하는 티에라 가문을 흔들기 위해서 룬델 티에라의 약점인 하벨 티에라를 노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습격은 없던 걸로 알고 있다고…….
시엘느의 어떤 신관이 꺼내는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자신의 눈이 사라졌음에도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시엘느에서 독단적으로 검은 달을 이용해 티에라 가문을 공격했겠지.
그토록 신이 고팠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은 검은 달을 버리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지금 시엘느는 자신에게 반드시 꼭 필요한 집단이었고, 이 세계의 신을 부를 수단이었으니.
에른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에 하벨 티에라한테 마법사 협회를 언급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배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과 이를 꿰맸다는 것 역시 레놀드 왕국의 주치의를 통해서 들었다.
습격은 진실이었고, 몸을 움직이면 안 될 정도라는 것도 알지만, 지금 하벨 티에라의 방은 사각지대였다.
마법사 협회로 가기까지 신형 마차를 사용한다고 하면 빠르면 2시간, 늦으면 3시간 거리였다.
협회장이 사라졌다는 시간을 생각하면 어림잡아도 1시간 반.
'…상태도 볼 겸 확인하자.'
에른스트는 들끓는 의심을 가라앉히고자 움직였다.
* * *
"…안 되오."
물비린내가 어렴풋이 풍기는 호위 기사가 말문을 열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건 내 알고 있으나,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했으니 이걸 하벨 공과 말을 나눠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누구든 만남을 거부한다고 말했소. 그러니 허락할 수 없소."
어색했다.
말투나, 시선 처리, 그리고 대해야 하는 모든 게 이상했다.
에른스트는 기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기사라고 소개했지만, 기사처럼 보이진 않았다.
"집사를 불러주게."
에른스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밖에서 이미 몇 차례 소란이 있었으니 어디에서 보고를 들을 시간이 충분했다.
탁.
문이 열리자마자 집사는 허리를 숙였다.
"저하. 이제 막 도련님이 잠을 청하던 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거절부터 밀고 왔다.
환영을 해주고, 대우를 해주어도 무례를 생각나게 하는 태도였다.
그게 아니라면 어딘가 초조한 걸지도 몰랐다.
대체 왜?
"내가 예의가 없이 왔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하벨 공의 습격과 관련된 일이니 직접 말을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도련님께서 이런 일이 있을 시에 넬시아 아가씨와 라르웬 둘째 도련님과 상의해주셨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집사는 버튼을 눌러 불이 켜진 것처럼 재빨리 응답했다.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다 멈추자 에른스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당황함이 가득 묻어난 표정부터 보였다.
"저, 저하."
'의사였던가.'
에른스트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련님께서는 잠이 드셨으니 물러나시죠."
눈을 감고 있어 집사의 표정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놀란 기색이 은은하게 비쳤다.
의사가 지금 오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설마.
설마.
에른스트는 계속해서 드는 의문을 떨쳐내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보아하니 진찰하러 온 모양인데, 같이 들어가도 되겠는가?"
"…도련님께서 잠이 드셨다고 그러니 저는 이만 물러날까 생각합니다."
"나 때문에 그럴 수야 있나. 걱정하지 말고 진찰하게."
"아닙니다, 저하. 도련님의 잠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통증 때문에 잠을 쉽게……."
탁!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무언가가 넘어오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적이 일어났다.
마치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울린 것처럼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눈빛을 교환하는 듯한 모습에 에른스트는 단번에 언성을 높였다.
"지금 뭣들 하는가?"
에른스트는 바로 나아가 손잡이를 잡아 비틀었다.
"그만두시오!"
기사가 손을 뻗지만, 에른스트가 먼저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밀려오자 가슴이 흔들렸다.
설마.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올라올 것만 같았다.
사실 레바놈도, 마법사 협회도 하벨 티에라와 얽히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만약에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하벨 티에라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주물렀다면.
'내 반드시 네놈의 모가지를 당장…….'
에른스트가 발을 멈췄다.
옷가지들이 보였다.
'네놈.'
채 닫지 못한 창문에 커튼이 흩날렸고.
'네놈!'
침대에 하벨 티에라가 보이지 않았다.
'네놈……!'
분노에 얼굴이 일그러지려던 차, 숨소리가 들렸다.
침대 뒤쪽에서 손이 튀어나오자 집사가 당장 달려갔다.
"…도련님!"
"미안. 땀 때문에 열어놨는데, 좀 추워서 창문을 닫으려고 그랬거든? 그런데, 하, 이게 되질 않아서… 옷이라도 입으려… 저하?"
와들와들 떨던 하벨이 에른스트를 보았다.
"뭐… 하고 있었습니까?"
에른스트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누가 보아도 하벨 티에라는 밖에 나갔다 온 사람이 아니었다.
'…병신아, 놀랐는가?'
하벨은 속에서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예전에는 에른스트라는 존재를 몰랐기에, 기억 속에 덮어뒀기에 생각하지 못하고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우연과 사실이 더해져 하나씩 알았고, 이 세상도, 제 죽음도, 과거의 악연도, 그리고 에른스트까지 알지 않았던가.
레바놈도 죽고, 자신도 습격당한 와중에 에른스트가 무얼 알아보겠는가.
'마법사 협회밖에 없다.'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놓칠 수 없는 게 바로 오미너스와 마법사 협회의 관계가 아닌가.
그래서 용용이를 시켜 협회장에게 도망가게 했다.
'그리고 너는 내게 올 거라 생각했다.'
최근 에른스트에게 마법사 협회와 관련된 말을 들은 게 누구일까.
바로 자신뿐이었다.
의심이 많은 에른스트가 당연히 자신도 용의 선상 안에 넣을 거라 확신했기에 저번에 자신만 못한 연극을 잠깐 꾸며보았다.
연기에 익숙한 카샬을 주축으로 해서 연기를 아예 못하는 여하, 의사라는 위치를 이용해 의심을 증폭시킬 헤레스, 이렇게 세 사람으로 꾸며보았다.
"열이 나서… 그런지 제가…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인사도 하지 않았네요. 전하를 뵙……."
"아닙니다."
에른스트가 하벨의 행동을 말렸다.
굳었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착각했다.'
에른스트는 속으로 웃었다.
요즈음 정체 모를 적을 생각하느라 예민해졌을 뿐이었다.
하벨 티에라가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고, 레놀드 왕국의 왕인 샤르비에에게 둘이서 무얼 이야기했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코스모피안 왕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다 그만 피를 토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몸이 약한 것도 사실이었고, 샤르비에와 무슨 말을 나눈 것도 아니었으며 이곳에서 습격을 당하기까지 했는데.
저 가여운 자에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부끄러워졌다.
"저하. 제가… 상처 때문에 정신없어 그만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침대로 자리를 옮긴 하벨은 말을 꺼내며 다른 이들을 쳐다보았다.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줄래?"
하벨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왔던 카샬, 헤레스, 여하까지 물러나자 하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저하."
하벨의 사과에 에른스트는 당황한 척 표정을 이어나갔다.
"공이 왜 사과합니까? 이렇게 멋대로 쳐들어온 건 납니다."
"그게 아니라, 절 습격한 자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손등에 검은 달 무늬가 있었고요. 이 단체는… 계속 절 노리고 있던 단체인데 이름은 솔직히 모릅니다.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될 줄은 정말……."
"검은 달입니다. 문양 그대로의 단체죠."
에른스트는 하벨을 위해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사실 검은 달을 이용할까 싶은 생각도 했지만, 검은 달은 하벨을 영웅으로 만들어주기엔 부족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단체 때문에 하벨 공과 말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내신 겁니까?"
"공 덕에 잡았으니까요."
'…지랄하고 있네.'
하벨은 참 웃겼다.
신이었던 자가 이토록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잘하다니.
"제가요? 솔직히 습격 당시 기억이 또렷하지 않습니다. 제가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벨은 에른스트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이러면 얼마나 신나서 날뛸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