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66화 (366/415)

366화. 나다

* * *

"…아니, 무슨 일이오?"

여하는 갑자기 나가버린 헤레스의 모습에 살짝 얼이 빠졌다.

"마나가 도와준 거야."

칼리우스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자신이 도와달라고 마나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콧방귀도 끼지 않던 마나가 스스로 움직였으니.

"도련님은?"

카샬이 여하에게 물었다.

"깨어난 모양이오. 나보고 들어오라 말했소."

당황스러움도 잠시, 여하는 자신의 뒤에 있는 문을 잠깐 바라보았다.

역시 뭔가 껄끄러웠다.

* * *

"…그래서 지금 좀도둑한테 시엘느의 흐름이 달라졌다고 연락이 오면 바로 출발… 하려고요."

마지막에 라르웬의 눈꼬리가 올라간 만큼 하벨의 말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니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라르웬은 말꼬리를 늘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칼리우스를 시켜서 마법사 협회장을 도망치게 해 에른스트의 시선을 끌겠다고?"

"…어?"

칼리우스가 그대로 멈췄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네."

하지만 하벨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에 버려진 검은 달을 박살 내고, 시엘느로 가고, 또 어딜 간다고?"

라르웬이 묻자 하벨의 시선이 여하에게 향했다.

"바다요."

탁.

라르웬은 당당한 하벨의 말에 이마를 때리며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짜, 막내야……."

"네……?"

아라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행복해하던 레디나가 그대로 멈췄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걸까.

[바, 바다라고? 이 몸이 아는, 그 커다란 곳?]

"맞아, 아라야. 바로 그 바다야."

"…더 자.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네."

라르웬은 눈을 잠깐 깊게 감았다가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아뇨. 제대로 깼어요, 형님."

"내가 진짜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막내야. 너는 바다로 갈 수 없어."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내린 눈의 영향이 아직도 하벨의 몸에 남아 있었다.

손등에 올라온 푸른 기를 겨우 잠재웠더니 저런 소리라니.

"너 헤레스가 왜 정화제가 든 링거를 놓고 갔는지 몰라?"

"갈 수 있어요, 형님."

"…바다에 간다고, 그랬소?"

여하는 들어오면서 들었던 말에 얼떨떨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바다에 간다니.

천천히 설렘이 차오르던 순간, 배를 찌르듯 날카로운 카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카샬은 다급히 하벨에게 다가갔다.

"바다에 갈 수 있다고 해도 가면 안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가장 잘 아시잖습니까."

"알아. 내 몸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여하의 힘이 필요해."

"길이라면 내가 안내해줄 수 있……."

"안내? 너 지금 무슨 개소리야?"

카샬이 여하를 보며 바로 날을 세웠다.

"왜 그러시오?"

"왜 그러냐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도련님께서 오염된 물의 내성이 아예 없다고."

"…들었소."

"그럼 그것도 몰랐어? 오염된 물은 이미 맹독이고, 그 물이 가득 모인 바다는 도련님께 어떤 곳이겠어? 바다에 닿는 그 순간 그냥 바로 죽어."

솔직히 류아가 숨긴 영혼 중 하나가 바닷속에 있다고 했을 때 귀를 의심했다.

언젠가 그때가 오겠다고 생각해도 너무 빨랐다.

하지만 그걸 간다고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하벨이라는 사실이 기가 찼다.

"아니… 죽진 않는데……."

"너는, 도련님께서 입은 옷들이 그냥 단지 보호 목적이었다고 생각했어?"

카샬은 웅얼거리는 하벨의 말을 흘리며 여하를 몰아붙였다.

"아니… 나는……."

여하는 정말로 당황했다.

가볍게 본 건 사실이었다. 아니, 누구라도 가볍게 볼 수밖에 없질 않은가.

저렇게 당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데.

"카샬, 그만해.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너는!"

하벨이 말리지만, 카샬은 울분이 차올랐다.

"도련님께서 먹고 마시는데 필요한 물을 별도로 관리하느라 매번 따로 식사가 차려지거나 남들보다 식사 시간이 더 늦어진다는 걸 몰랐어?"

자신은 매번 보았다.

매번 겪었다.

하벨이 하벨 티에라였을 때부터 쭉 지켜보았다.

내성이 없다는 이유로 사람이 물 한 방울에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

그 물 한 방울 하나가 어디까지 숨통을 쥘 수 있는지.

"왜 도련님께서 밖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지. 목이 말라도 외부에 있는 물 한 모금조차 먹을 수 없는지 진짜 몰랐다고?"

바다라니.

안내라니.

저런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하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걸 알지만, 카샬은 말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진짜…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특히 당사자인 하벨이 어떤 마음으로 꺼냈는지 알기에 카샬은 하벨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이미 예상했잖아, 카샬? 지금 바다로 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을 뿐이야."

"미안하오. 내가 너무……."

"아니. 너는 사과할 필요 없어. 지금 이 난리가 난 원흉은 하벨이니까."

라르웬은 여하의 사과를 말렸다.

"맞아, 내가 원흉이야."

저 당연하다는 듯한 하벨의 대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르웬은 차분히 하벨을 불렀다.

"하벨아."

"방법은 있어요."

"방법은 있겠지. 네가 생각도 없이 말을 꺼낼 리가 없을 테니까."

"에른스트가 누구인지, 에른스트가 뭘 바라는지, 그 끝마저 이미 다 알잖아요? 여기서 어떻게 멈춰요?"

"그게 아니야. 바다에는 너 말고도 들어갈 수 있어. 차라리 내가 갈게."

"인어족을 설득해야 해요."

"그러니까 내가 할게. 귀족들이랑 얽히기 싫기에 애초에 콧방귀도 끼지 않는 거지, 설득이라면 자신 있어."

"거기에 내 영혼이 든 육체가 있어요."

"그것도 내가 들고 올게. 이건 틈의 세계에 나온 이들만 만질 수 없는 거잖아? 내가 할 수 있잖아?"

"인어족이 어쩌면 내 힘으로 버티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애초에 인어족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건 가능성이잖아?"

여하는 자신의 종족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는 라르웬의 말이 마냥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사실 자신도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 꽤 오래 좌절했던 건 마찬가지였으니.

"아까 멋도 모르고 길을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라르웬 씨의 말이 맞소. 인어족이 없을 수도 있소. 그리고 바닷속까지 들어갈 방법이 있다고 해도 나도 견디지 못했는데 이걸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모르겠소."

"난 버틸 수 있어. 하지만 나머지는 아니야. 그러니 내가 가야 합니다, 형님."

하벨이 싱긋 웃으며 라르웬을 쳐다보았다.

봐봐라. 여하도 저렇게 말하지 않냐는 시선이 말과 함께 이어졌다.

"인어족인 여하마저 버티지 못했던 바닷속을 형님이 어떻게 버틸 수 있습니까?"

"너의 힘으로 갈 거잖아. 그렇지?"

라르웬은 하벨이 어떻게 바닷속에 갈지 예상이 됐기에 허를 찔렀다.

"네. 그 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날 네 힘으로 감싼 뒤에 내가 들어가면 되는 거잖아?"

"안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데 형님을 그 바다로 보내라고요? 말도 안 됩니다."

이렇게까지 고집을 세울 라르웬이 아니었기에 하벨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힘이 살짝 풀린 라르웬의 표정에 하벨은 볼 안쪽을 깨물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왜 내가 하고 있냐… 고 꾸짖는 거였어요?"

"그래."

"그래서 나를… 보낼 수 없다는 거예요?"

"맞아. 내가 널 어떻게 보내겠어. 네가… 거기 가면 죽는다는 걸 아는데, 내가, 아니 여기 있는 모두가 널 보낼 수 있겠어?"

"그래도 가야 한다면요?"

"가야지. 너라면 분명 말없이 떠나버릴 테니까. 그것보다 훨씬 낫잖아?"

라르웬은 손을 뻗어 하벨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막내야. 어깨에 힘들어 갔으니까 좀 빼고. 네가 잠들어 있던 사이에도 착착 진행된 거 봤지?"

"봤어요."

"짧지만, 방법을 찾아볼 거야. 그래도 안 된다면 너를 보내야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그게 뭐예요."

하벨은 괜히 웃음이 났다.

방법을 찾고, 찾다가 없으면 놓아주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뭐긴 뭐야. 혼자 다 떠안지 말란 말이야. 너 말고도 움직일 유능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라르웬은 하벨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하벨이 지금 하려고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라르웬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에 그동안 방법을 찾고 싶었다.

"예.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에른스트도 훌륭하게 대처해줬잖아요?"

하벨은 라르웬이 참 고마웠다.

자신을 말리려는 것도 방법을 찾자고 말하는 것도 전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를까.

―지금 걔는 엄청 바빠. 얘들하고 놀다가 종종 보여. 막 여기 갔다가 저기도 가고 계속 어디를 돌아다녀.

조금 전에 놀러 온다는 핑계로 찾아온 정령들에게 주변 정리한다고 바쁜 에른스트의 상황을 들었다.

귀족들이 소집되었고, 주변 경계를 높였으며 음식 재료부터 더 꼼꼼한 감시를 이어 근처 수색까지 다른 왕자나 기사들 틈에 껴 지휘하고 있다는 소식에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에른스트가 움직인다는 건 결국, 연극이 정말 제대로 먹혔다는 의미가 아니고 뭐겠는가.

'너의 세뇌이니, 네가 모든 걸 감당할 수밖에 없겠지.'

원래라면 세뇌한 누군가를 뒤에서 느긋하게 조종하면서 관리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을 테지.

세뇌라는 힘은 효율이 좋은 만큼 들킬 확률이 높았다.

정해진 명령을 이뤄내야 하기에 자신이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느꼈던 어색함처럼 무언가 이질적이고 이상한 부분이 분명 계속 드러날 테지.

그렇기에 이처럼 복잡한 상황이라면 에른스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내야."

라르웬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상황이 내심 마음에 걸려 말문을 열었다.

"형님께서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자신들이 펼친 연극이 에른스트에게 통했을 수도 있지만, 역으로 에른스트가 연극임을 알고 이 사실을 파고들어 진실을 알 때까지 적당히 장단을 맞춰줄 수도 있었다.

"지금 에른스트가 보이는 모습이 가짜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거잖아요?"

"맞아. 에른스트가 아니라 우리가 속고 있는 거라면 어떡할래?"

우려와 근심이 섞인 표정을 보며 하벨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뇨. 그럴 일은 없어요."

"왜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카샬도 어느 정도 마음에 걸렸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에른스트가 연극을 펼치는 거라면 그가 무조건 확인해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지이잉.

하벨은 옆에 살짝 두었던 연락용 아이템에서 진동이 오는 걸 느꼈다.

"…오."

보나 마나 페트리오였다.

이렇게 시간을 잘 맞춰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설령 내가 누구인지 에른스트가 알아냈다고 해도 놈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손에 쥐며 말했다.

정말로 에른스트가 자신을 알았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이미 열쇠를 뺏었고, 수호자로서 제 가치도 없는, 죽이면 그뿐인 존재일 텐데 대체 무슨 노력을 기울일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계획을 방해하려고 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목을 쳐내는 과정에 포함되기에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서 지켜야 할 곳은 뻔해요. 모든 일의 시작이자 모든 일의 끝인 신성 국가 시엘느를 놈이 지키려 할 겁니다."

에른스트의 목적은 이전에도 지금도 신이었기에, 조건 대부분을 다 만족했기에, 신의 대리자들이 있는 시엘느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엘느야 말로 신이 내려올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곳이니.

"보세요. 아니잖아요. 그걸 좀도둑이 증명해준 겁니다."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흔들며 씩 웃었다.

에른스트는 여기에 있는데 페트리오에게 연락이 왔다는 건 무슨 말이겠는가.

그저 계획대로 잘 됐다는 걸 드러내는 셈이었다.

"그러니 여길 내가 먹을 겁니다. 이제 시엘느는 내 거예요."

[오오, 이 몸은 벌써 기대가 돼! 이 몸은 있지, 대장의 입이 제일 무서운데, 이럴 때는 하나도 안 무서워! 막 엄청 든든하다?]

아라가 손을 뻗어 하벨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착하다, 예쁜 입.]

말캉한 느낌이 전해오자 하벨은 배시시 웃었다.

"그래, 좀도둑. 어떻게 됐어?"

<에른스트가 왔을 때 주무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페트리오이 언급한 말에 하벨은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체 누가 저 소리를 좀도둑한테 전달한 건지.

카샬이 씨익 웃자 하벨은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심한 듯이 카샬을 바라보았다.

"너는 진짜……."

"그럼 저는 일단 식사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가자, 레디나."

"금방 올게요."

허리를 숙이며 먼저 밖으로 나가는 카샬을 따라 레디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와."

하벨이 기가 찬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 저는 도련님의 그 대범한 면모에 정말로, 정말로, 푸흡, 존경합…….>

"됐고, 어떻게 됐는데?"

하벨은 겨우 웃음을 참는 페트리오의 장난스러운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저는 도련님처럼 담력이 좋지 않아 대놓고 시엘느 내부로 직접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좀도둑. 한가한가 봐? 일이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술술 풀린 모양이지?"

<아직 아닙니다. 아직 시엘느에서 검은 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안 버렸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벨은 밀려오는 의문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방금 자신만만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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