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연극(3)
* * *
"진정하세요, 도련님."
헤레스가 하벨을 토닥거리자 그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옆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따뜻하던 온기가 없었다.
"아라는? 아, 아니다."
하벨은 지금 이게 무슨 질문인가 싶어 머리카락을 쥐었다. 연극이 어떻게 됐는지,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묻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었다.
당황함이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머릿속이 멍하면서 동시에 텅 비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푸, 푸하핫!"
라르웬의 웃음이 들려왔다.
잠깐 침대 아래에 숨어 있던 라르웬이 허리를 올리며 배를 잡고 웃자 루룸과 아라가 튀어나왔다.
[와앙!]
아라가 앞발을 높이 뻗자 그제야 하벨은 안도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아침부터 날 웃기다니. 진짜 최고다, 막내야. 푸하핫!"
"나는 하나도 안 웃깁니다."
하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에른스트가 왔을 때, 슬쩍 눈을 뜨며 검은 달을 언급하려고 했는데.
"진짜, …하, 진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이 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좋았어!]
아라가 하벨에게 달려들며 몸을 흔들었다.
이 익숙한 온기에 하벨은 배를 만지작거려주었다.
"네가 잠들어서 더 진짜 같았는데? 그래서 놈도 속은 모양이야."
"속았어요?"
하벨은 라르웬이 던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네가 생각한 계획이 술술 흘러가서 뭔가 불만인 것처럼 보인다?"
"아뇨. 불만이라기보다는… 이걸 속네? 이런 기분이죠."
자신이 누워 있을 때, 레디나와 여하가 연기를 해주었다.
보는 재미가 느껴질 정도로 실감 나는 연기였다.
'아니지. 도중에 레디나는 진심이 됐던데. 단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제법 매서웠어.'
이렇게 흔적을 만드는 사이 소리는 칼리우스가 지웠기에 제아무리 정령 기사들이 날고 긴다고 해도 어떻게 알고 오겠는가.
'아라가 정령들한테도 미리 부탁했고.'
[정령들도 진짜, 진짜 잘해줬다? 이 몸은 하나씩 찾아가서 잘했다고 칭찬해줬어!]
꼬리를 흔들던 아라가 하벨의 손을 꼬옥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저 이유가 엄청 컸겠지. 이런 거 있잖아? 정령들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정령왕도 내 손에 들어왔으니. 으하하하."
라르웬이 팔짱을 낀 손을 흔들자 하벨은 엄지를 올렸다.
"잘 어울리는데요?"
"시끄럽고,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누님이 지금 그쪽에 가 있어. 나도 도중에 불렸는데, 내가 너무 날만 세우니까 더는 안 부르더라고."
"용용이는요?"
"칼리우스 님은 카샬 씨와 함께 있어요."
헤레스의 대답에 하벨은 의문을 느꼈다.
"왜 그래, 헤레스? 카샬하고 칼리우스하고 무슨 일이 터지기라도 했어? 좀 심각하게 보인다?"
"그… 마법사 협회 말이에요."
"마법사 협회가 왜?"
"칼리우스 님하고 아라 님이 훌륭하게 처리하셨어요."
그 말에 하벨은 놀란 눈으로 아라를 바라보았다.
"두, 둘이 갔다고? 둘만?"
[응! 용용이랑 이 몸만 갔다 왔어! 봤지? 에헴. 이 몸이랑 용용이는 엄청 장한 일을…….]
하벨이 아라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정령이 병에 걸리는 일은 없지만, 물리적인 공격은 통했다.
신의 은총이 정령에게도 통하는지 모르는 이상, 아라를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친 곳은 없어?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막 놀라거나, 끔찍했던 것도……."
아라가 귀를 쫑긋 세운 상태에서 앞발을 들어 하벨의 입을 막았다.
[…하.]
그제야 아라는 놀란 마음에 숨을 내쉬었다.
"왜, 왜 그래, 아라야?"
[이 몸은 있지, 아무렇지도 않아.]
아라가 헤헤 웃으며 다른 앞발로 하벨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이 몸은 돌아와서 금화 초콜릿도 먹고, 잠도 잘 자고 방금까지 용용이하고 루룸하고 놀았는데? 지금 엄청 놀란 건 대장이야. 이 몸이 대장을 놀라게 했어?]
[하벨.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아는데, 그래도 우리는 인간보다 튼튼해. 스윽 스쳤다고 어디 부러지고 그러진 않으니까, 아라 좀 놔.]
루룸이 하벨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그제야 하벨의 손에 힘이 풀리자 아라는 하벨을 안아주었다.
[용용이가 엄청 멋졌어! 막 이름을 알려달라고 그러니까, 다 우르르 이름을 줬어. 마지막에는 협회장이 용용이한테 무릎도 꿇었는걸?]
아라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칼리우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용이라는 사실은 칼리우스가 입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누가 봐도 용이었다.
칼리우스의 까만 날개가 등에서 파닥거렸으면 정말 멋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벨은 아라를 토닥이며 라르웬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살짝 날카롭자 라르웬은 시선을 살짝 흘렸다.
"그게 말이지, 막내야. 설마하니 칼리우스가 아라를 데리고 마법사의 탑으로 갈 거란 생각을 못 했단 말이지."
―아! 나, 잠깐 도련님이 깨기 전에 얼른 갔다 올게.
누가 들어도 아라한테 간다는 말이 아닌가. 저 말이 어떻게 마법사의 탑을 갔다 온다는 말인지.
마치 옆집으로 놀러 갔다 오겠다는 말을 풍겼기에 다들 대수롭지도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라와 칼리우스가 보이지 않았다.
―둘째 도련님. 혹시… 아라 님도 못 보셨나요?
제일 먼저 이상함을 느껴 자신에게 찾아온 건 헤레스였다.
"…그건 저도 잘못했습니다. 저 역시 칼리우스 님께서 마법사의 탑에 가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아니야, 헤레스. 형님, 방금 그렇게 쳐다봐서 미안해요. 내가 그랬습니다. 내가 말했어요."
하벨은 그제야 자신이 칼리우스에게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칼리우스는 자신이 당부한 말을 지켜주었다.
분명 자랑스러워해야 했는데, 걱정부터 앞서고 말았다.
[다들 왜 그래? 이 몸이랑 용용이랑 잘 갔다 왔어. 이 몸이랑 용용이도 해낼 수 있어! 할 수 있다구!]
그렇기에 아라가 화를 내며 모두를 쳐다보았다.
"그게 아니야, 아라야. 다들 너랑 용용이랑 이렇게 둘만 보낸 게 미안해서 그런 거야. 결코, 너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아앗, 그런 거였어?]
아라는 그제야 화를 누그러트리며 방실방실 웃었다.
[우린 해냈어, 대장! 우린 최고였어!]
하늘로 손을 뻗은 아라는 승리를 향한 쾌감을 느꼈다.
"정말 잘했어. 내가 지금 얼마 자랑스러운지 몰라."
하벨은 아라를 껴안았다.
"막내야. 이제 어떡할 건데?"
분위기를 해쳐서 좀 그랬지만, 라르웬은 이제 다음을 그리고 싶었다.
"레디나는요?"
"여기 있죠!"
레디나가 천장에서 떨어지자 하벨과 아라가 동시에 놀랐다.
"하하하!"
아주 방긋 웃는 레디나를 따라 헤레스와 라르웬이 웃었다.
"아, 아니! 그냥 나오면 되는 거지, 왜 천장에서 떨어져?"
하벨은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욱하고 내질렀다.
"놀라게 해주려고 연습했단 말이에요. 제 소소한 취미라고요.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들어보신다면 오오, 하시면서 이해해주실 걸요?"
레디나는 흡족함을 숨기지 않았다.
오늘 또 하벨을 놀라게 했다는 뿌듯함에 달력에다가 매일 동그라미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대체 왜 네 재주를 왜 이런 데다가 쓰는 거야?"
"은밀함을 연습하는 거죠. 그런데 도련님은 거의 매번 놀라시네요? 다른 때에는 엄청 예민하시던데요."
"그러게. 나도 놀리고 싶잖아?"
라르웬은 레디나가 등장하기 전에 바닥에 지는 그림자를 보았기에 놀라지 않았다.
"물이… 반응을 안 한 걸 어떡해요?"
하벨은 자신의 주변에 있을 물을 향해 째려보았다.
보통 물을 통해 전해 오는 흐름을 자신이 먼저 읽고, 물이 말을 꺼내는 순서로 왔기에 물이 작정하고 흐름을 차단하면 읽을 수가 없었다.
"쟤들도 장난꾸러기라고요."
하벨은 키득거리는 아라의 웃음소리가 커지자 물이 장난쳤다는 걸 확신했다.
"어쨌든, 레디나."
"네, 도련님."
이미 놀린 후였기에 레디나는 행복함을 드러내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놀란 마음을 추스른 하벨의 표정은 조금 진지해 보였다.
"슬슬, 시엘느로 갈 준비를 해둬. 목 따러 가야 하거든."
드디어 검은 달의 수장을 죽일 때가 왔다.
어둠 속에,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자 뒤에 숨어서 용케도 목숨줄을 부지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길어지는 법.
그 빛이 없는데 그림자가 어떻게 있을까.
"목부터 베어버리는 거예요? 시엘느로 가신다면 시엘느부터 다 삼킬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순서가 의외였기에 레디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혹시 밖에 여하도 있어?"
"있죠. 불러올까요?"
레디나의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데려올게요."
헤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중요한 말을 나누려고 하니, 말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자신이 가는 편이 나았다.
헤레스는 발을 움직이며 숨을 짧게 내쉬었다.
금세 보름달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벨을 진찰할 때마다 보름달 문제를 종종 나누곤 했다.
―괜찮아, 헤레스. 부담가질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지금 네가 만든 보름달로도 오미너스를 없앨 수 있다는 결론이 났어. 내가 틈틈이 정화제를, 이거 절대로 내 몸에 문제가 되는 거 아니니까 화내지 마.
헤레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하는데 그게 쉬울까.
―어쨌든, 정화제를 만들어서 정령들이 이걸 옮겨주고 있어. 내가 만든 정화제의 힘이 어떤지 알고 있지? 충분히 보충해줄 수 있으니까 괜찮아.
자신이 못하면 하벨이 그만큼 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이걸 완성할 수 있을 텐데.'
오미너스의 움직임은 자신이 만들었지만, 여러 마법사의 손을 걸쳤기에 기존 마법과 달라졌다.
칼리우스에게 도움도 요청해서 90% 완성에 이르렀다.
하지만 더는 부탁할 수가 없었다.
이건 고집이 아니라 칼리우스 역시 하벨에게 뒤덮인 저주를 해제할 수 있는 마법을 거의 다 완성하고 있었으니.
그때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기껏 만들어 놓았던 마법이 다 무너져내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늘, 자신의 답답함을 어떻게 알았는지 칼리우스가 웃으며 건넨 말이 있었다.
―헤레스. 마법은 네가 바라는 대로 널 이끌어줄 거야. 정말이야. 내가 널 도와줬을 때, 마나가 먼저 움직여줬어.
'그렇다면 왜 제게 보여주지 않을까요?'
헤레스는 아쉬움과 간절함을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한 채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여하 씨."
"왜 그러시오?"
여하가 하품하며 대꾸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혹시 귀인이 나를 또 부르는 것이오?"
"맞아요. 할 말이 있나 봐요."
"…으음."
바로 구겨지는 여하의 표정에 헤레스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도련님을 어려워해요? 혹시 도련님이 뭐라고 했나요?"
"음……."
여하는 헤레스를 잠깐 곁눈질로 살피다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를… 외부인이 아니라고 했소. 그래서……."
"맞아요."
헤레스의 대답이 바로 이어지자 여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오?"
"도련님의 몸에 여하 씨의 피가 계속 돌잖아요?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인지. 이게 어떻게 외부인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더 외부인인 걸요?"
피를 나눈 형제까진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게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여하의 표정이 이미 심각했기에 헤레스는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
"그대도 참 희한한 말을 하오. 그대가 어떻게 외부인이오? 귀인이 그대를 얼마나 아끼는지 매번 내게 부탁하는 걸 알고 있지 않소?"
코웃음을 치는 여하는 마치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보였다.
"아뇨. 그건… 몰랐어요. 정말로."
헤레스는 잠깐 가슴이 뭉클거렸다. 정말 모르던 사실이었다.
"어쨌든 들어가 봐요. 그렇게 표정에서 티가 나면 도련님께서 신나게 놀릴……."
헤레스가 말을 멈췄다.
마나가 갑자기 꿈틀거렸다. 대체 어디에서 반응한 건지 몰라도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헤레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지만, 헤레스는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앗, 쉬잇. 다들 쉿."
칼리우스는 헤레스 주변에 맴도는 마나의 반짝거림을 확인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문 닫고, 귀 세우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카샬이 문 앞에 섰다.
"지금 마나가 헤레스한테 뭔가를 속닥이고 있어."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무엇인지 대충 예상이 됐다. 지금 헤레스에게 어떤 깨달음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마나가 헤레스가 완성하려고 하는 마법의 길을 알려주려는 걸지도 몰랐다.
헤레스의 눈동자에 가득하던 반짝거림이 꺼지자 그녀는 당황하며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어서 가, 헤레스."
칼리우스는 헤레스가 해야 하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지금 마나가 알려준 길을 쫓아가야지."
헤레스는 그 말에 무엇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달려나갔다.
머릿속에 그려진 저 길이야말로 손에 놓으면 안 될 해결책이었으니까.
카샬이 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요!"
헤레스는 씨익 웃으며 그 어떤 모습보다 자신감이 가득한 채로 앞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