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64화 (364/415)

364화. 연극(2)

* * *

"왜 이곳에 왔냐니……."

"막내를 습격한 자가 내부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너무도 타이밍이 좋지 않습니까?"

라르웬은 에른스트를 쏘아붙였다.

"막내가 쓰러지고, 습격이 일어났습니다. 애초에 막내가 쓰러진 것 역시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때, 뒤에서 한 손이 뻗어 나와 라르웬의 머리를 눌렸다.

"죄송합니다, 저하. 지금 경황이 없기에 무례를 범했습니다."

넬시아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묻어나는 분노를 에른스트가 읽었다.

"아닙니다. 내가 갑자기 온 게 맞습니다. 범인은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찾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범인이 애초에 있긴 합니까?"

고개를 살짝 올린 라르웬의 눈빛에 '범인은 너지?'라며 조금은 화가 나는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다.

'저 눈알을 파버리고 싶군.'

에른스트는 저 시선이 거슬렸지만, 슬쩍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잠깐만 하벨 공을 뵙게 해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하벨은 지금 안정을……."

"잠깐입니다, 저하. 정말 저희도 이 이상 불안함을 이겨낼 자신이 없습니다."

훅하고 지르는 라르웬의 말을 넬시아가 자르며 에른스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에른스트는 허락을 맡고, 하벨이 있는 침실로 걸어갔다.

물러가는 기사와 시종, 시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차마 자리를 떠나기가 힘들어 보이는 안경을 쓴 여성이 보였는데 행색을 봐서는 의사로 보였다.

그리고 신관이 눈을 스쳤다.

잠깐이지만, 시선을 마주쳤다.

믿음을 향한 강렬한 불꽃에 에른스트는 눈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아 잠깐 눈을 깊게 감았다.

너를.

하지만 눈을 감았지만, 어두웠던 시야 안에 피어오른 빛줄기와 함께 신의 목소리가 닿았다.

용서하지 않겠노라.

그 어떤 분노로도 잠재워지지 않는 소리에 에른스트는 잠깐 숨을 멈췄다.

'망할…….'

이래서 신관이 싫었다.

저 거지 같은 신은 자신의 시종에게 말조차 걸지 못할 정도로 덜떨어졌으면서 이렇게 자신에게는 경고를 날리다니.

'그래서 어떡할 건가.'

에른스트는 오히려 신을 비웃으며 눈을 떴다.

두 세계가 합쳐져 소통할 수 있는 연결망까지 끊어져 버린 상태였는데.

'오래 버텼어. 참 질길 만큼.'

어떻게든 신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경고한 것 같지만, 그 말은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며 와전되고 말았다.

그 와전된 말을 자신이 이용했기에 신의 추종자를 더 쉽게 포섭할 수 있었고.

"…하."

에른스트는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

누가 보아도 긴장된 표정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이건 연극은 아니다.'

에른스트는 신중히 살펴본 결과 결론을 내렸다.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를 속일 수는 있지만, 정령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짓말은 할 수 있지. 정령왕의 명령이 있다면.'

그 정령왕은 지금 제 손에 잡혀 있었다. 그러니 이건 진실이라 해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놈이지?'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레바놈을 죽이고, 하벨 티에라를 습격했다.

멀리서 본다면 서로 상관없어 보일지라도 이 모든 일은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에른스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자신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일부러 벌인 일인 건 분명했다.

대체 누가.

에른스트는 하벨 앞에 섰다.

피 냄새가 났다.

창백한 안색이 그 뒤에 눈에 들어왔다. 열이 나는지 식은땀도 흘리고 있었다.

기절과도 같은 잠을 청하는 게 분명했다. 확실히 습격을 당했다고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하벨 티에라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다.'

에른스트는 주먹을 쥐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나를 알고 있다니. 어디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걸까.'

마음이 흔들렸다.

잘 이어진 길이 느닷없이 부서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적이라니.

이건 너무 위험했다.

'경고인가.'

에른스트는 일그러트린 얼굴로 등을 돌렸다.

'날 향한 경고… 라고 한다면.'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날뛰었다.

쿵.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쿵.

"하벨 공께서 깨어난다면 꼭 쾌차하길 바란다고 전해주십시오. 저는 전하께 보고하러 가겠습니다."

쿵.

에른스트는 긴 그림자를 늘어트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소리가 멀어짐에도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온 레디나, 헤레스, 칼리우스 그리고 여하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분위기를 잡았다.

"…하아."

귀를 쫑긋 세우던 칼리우스가 내뱉는 숨소리에 라르웬의 웃음이 먼저 터졌다.

이어 한 명씩 터진 웃음에 칼리우스가 다급히 소리를 낮췄다.

"그렇게 웃으면 큰일 난다고!"

"아는데, 푸핫! 아… 진짜 미치겠다. 웃음 참느라 죽을 뻔했네!"

라르웬은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그런데 다시 봐도 모르겠어요. 그냥 일반 사람 같아요."

레디나가 웃음을 잠깐 멈추고 양팔을 문질렀다. 하벨이 추측하고, 페트리오가 사실이라 결론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솔직히 믿지 못할 뻔했다.

"이리저리 살피는 모양새에 소름 끼쳤어. 눈빛만큼 예사롭지 않았거든."

짧게 숨을 내쉰 넬시아가 내쉰 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트렸다.

에른스트가 자신을 볼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곤두서는 느낌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그냥 이상했어.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아서 다행이야."

에른스트를 가까이서 보자 칼리우스는 심장이 뛰었다.

두려움과 다른 형용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나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걸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래도 도련님은 진짜 잘 자고 있네?"

칼리우스가 배시시 웃자 카샬은 시계를 확인했다.

"놈이 오기 3분 전에 잠드셨으니 이대로 계속 주무실 테지."

대단한 건지, 대범한 건지, 에른스트가 오기 전에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을까.

카샬은 시계를 다시 집어넣었다.

"도련님께서 물의 기억을 읽으셨다고 그랬잖아요. 피로도가 정말 많이 쌓이셨어요. 코피도 다시 흘리셨잖아요? 그 정도로 몸이 힘들어서 이렇게 된 겁니다."

헤레스는 하벨이 흘리는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내가 보기에 그대들을 신뢰하는 걸로 보이오."

여하가 슬쩍 꺼내는 말에 모두가 미소를 하나씩 달았다.

"여하 씨도 포함해야죠. 신뢰받는다는 건 진짜 좋지 않아요? 저는 이 맛에 중독됐을지도 몰라요."

레디나가 배시시 웃었다.

"그, 뭐가 됐든 고생 많았소. 깔끔했소."

여하는 괜히 뒷덜미를 만지작거리자 레디나가 손가락으로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에이, 같이 했으면서 왜 그래요? 덕분에 좋은 그림이 만들어졌어요."

하벨이 머물던 원래 방을 그 꼴로 만들 수 있었던 건 여하가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아! 나, 잠깐 도련님이 깨기 전에 얼른 갔다 올게."

칼리우스는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눈을 떴다.

아라가 다른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마법사의 탑을 갈 차례였다.

칼리우스가 양손으로 흔들며 밖으로 떠나자 레디나가 슬쩍 물었다.

"칼리우스 님은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라 님이 걱정되어서 보러 가는 거겠지."

카샬이 대수롭지도 않게 말을 꺼내자 헤레스는 걱정을 떨치며 엘라힘을 보았다.

에른스트를 만나고 난 뒤, 엘라힘의 표정이 굳은 상태였다.

"신관님. 혹시, 에른스트를 보고도 뭔가 느껴진 게 없어요?"

"…있습니다."

엘라힘이 무겁게 꺼낸 말에 라르웬까지 웃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 속에 있는 신의 힘이 너무도 분노하며 날뛰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굳어버린 표정으로 엘라힘은 말을 멈췄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불길한… 신성함을 느꼈습니다."

불길함과 신성함.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단어가 엘라힘의 입 밖으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역겨움까지 맴돌아 속이 울렁거렸지만, 엘라힘은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정말… 신이었던 자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아까 당신이 귀인에게 신의 은총을 쏘았을 때, 놈이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았소."

여하는 자신이 본 걸 말했다.

애초에 신의 은총을 사용해달라고 엘라힘에게 부탁한 건 하벨이었고, 에른스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달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는 건… 신의 은총이 어떤 작용을 한다는 말이잖아?"

라르웬은 팔짱을 꼈다.

잠깐 혀를 날름거리며 입가를 핥았다. 당장 맴도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엘라힘뿐이었다.

"신관님. 신과 신의 힘이 상극으로 부딪히는 것도 가능합니까?"

"그건 모릅니다. 이건 그 어디에서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엘라힘은 그 사실과 관련된 어떤 것도 알고 있지 않았다.

"상황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좋지 않습니다."

자신이 에른스트를 보자마자 이렇게 이질적이면서도 거부감이 드는데 그와 이어진 신관들은 이 감각을 어떻게 참는지 궁금했다.

"신관님."

넬시아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예, 넬시아 공."

"교황님께서는 지금 무얼 하는지 알고 계신가요?"

지금까지 실례라 생각해 묻지 않았던 교황의 상태를 꺼냈다.

아마도 이쯤 되면 하벨이 먼저 꺼내지 않을까 싶었다.

신성 국가 시엘느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교황이었다.

이렇게 나라가 엉망인데 대체 무얼 하기에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이며 어떤 소식도 들리지 않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교황님께서는……."

엘라힘은 머뭇거렸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암담함이 들이닥치자 엘라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라지셨습니다."

"사라졌다고요?"

당황스러운 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내려앉자 잠에 빠진 하벨의 숨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 * *

[…있지, 용용아.]

아라는 물의 길에서 나왔다. 하지만 바로 보이는 마법사의 탑이 눈이 들어오지 않을 만큼 하벨이 걱정됐다.

[대장은 괜찮았어? 막 슬퍼하지 않았어?]

칼리우스의 어깨에 앉으며 아라는 시무룩함을 드러냈다.

"도련님은 지금 꿈나라로 갔는데?"

칼리우스의 손길이 아라에게 향하자 아라는 꼬리를 바짝 올렸다.

[대, 대장이 자고 있어?]

"응. 엄청 힘들었나 봐. 눕자마자 금방 잠들었어."

[우와아.]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이 몸은 진짜 걱정했는데, 자고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우리 차례야, 아라야."

칼리우스가 탑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저 높은 탑을 둘이서 해결해야만 했다.

여기에 하벨도 그 누구도 없었다.

―용용아. 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서 미리 말해둘게. 만약에 내가 널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도 마법사 협회는 반드시 네 밑에 둬야 해. 부담이라고 느낄 수 있어. 그랬다면 미안해. 하지만 이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하벨이 미안해하며 꺼냈던 말이 칼리우스의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밖에 할 수 없다는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힌 것처럼 찌르르 울렸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다.

"나는 아직 막 주변을 둘러볼 만큼 시선이 넓지 않아. 그러니까, 여기서 내 눈이 되어줘, 아라야."

[응응! 내가 용용이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볼게. 이 몸은 자신 있어!]

의지를 드러낸 아라가 앞발을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우리가 해내면 대장이 기뻐하겠지?]

뒤늦게 눈에 들어온 마법사의 탑에 때문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응. 엄청 기뻐할 거야."

칼리우스는 앞으로 나아가며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해내지 못해도 괜찮아. 도련님은 우리를 분명히 따스하게 맞이해줄 테니까."

숨을 몇 번이고 내쉰 칼리우스는 가면을 쓰고는 일부러 자신의 마나를 드러냈다.

마법사의 탑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마나에 반응에 흠칫 놀랐다.

마나가 달랐다.

거대한 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

해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마나가 멈췄다.

"너희의 이름을 내게 바치거라."

모든 마법사의 주인인 용이 찾아왔으니.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거대한 마나의 넘실거림이 마법사들을 덮쳤다.

* * *

하벨은 눈을 떠서는 위를 힐끔 바라보았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쬈다.

햇살이 보일 리가 없을 텐데. 너무도 이상했다.

꿈일까 싶어 감았다가 다시 떠도 저놈의 햇살은 변함이 없었다.

"…와아."

밀려오는 허망함이 꺼 입이 저절로 벌렸다.

'에른스트가 왔는데 기절했다고? 내가?'

"좋은 꿈 꾸셨어요?"

헤레스의 목소리에 하벨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방긋 웃고 있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벨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주무셨죠."

"…그놈은?"

"이미 왔다 갔어요."

"왔다 갔다고?"

"네."

"그, 그러니까 내가 놈이 왔는데, 쿨쿨 잠이나 잤다고?"

"그럼요. 그래서 저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하벨은 헤레스의 말에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미쳤다, 미쳤네.'

과거 용왕이었을 때도 물의 기억을 읽는 건 힘들었는데, 지금은 이 정도 부작용을 불러올 줄이야.

"연극은? 아, 아니. 상황은 어떻게 됐어?"

하벨은 침이 말라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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