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63화 (363/415)

363화. 연극

* * *

원래라면 자신한테 넘겨야 할 레바놈이 죽어버렸으니 에른스트가 얼마나 당황할까.

레바놈이 죽든 말든 진실이 밝혀지는 건 그대로이지만, 자신의 활약상을 달라졌다.

무엇이든 적이 살아 있어야 가장 큰 활약을 할 수 있을 테니.

이래선 반쪽짜리일 뿐이었다.

'혼란스럽겠지. 방향이 느닷없이 달라질 테니 신경질도 많이 날 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하벨은 슬그머니 비웃음을 드러냈다.

'그때 내가 습격까지 당한다면 어떨까.'

에른스트가 연이어 미심쩍은 상황과 마주하면 이를 어떻게 보겠는가.

우연이라기에 미심쩍은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으니 꼭 누군가가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오만하고, 머리가 빠르기에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경계심이 올라가고, 눈이 좁아져 없는 적을 만들기 시작할 게 뻔했다.

놈이 이유를 찾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은 행동할 시간을 버는 셈이었다.

"그럼 도련님. 나는, 이제 레디나의 일이 끝나면 마법사 협회로 바로 가면 되는 거야?"

칼리우스는 하벨이 시킨 일을 기억하며 물었다.

"그래. 네가 마법사 협회를 빠르게 휘어잡아야 해."

에른스트가 그다음 손을 대려고 했던 곳이 바로 마법사 협회였다.

오미너스를 함께 엮어 자신을 높이 세우는 것과 별개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마법사들을 나락으로 만들어버릴 셈이었다.

적으로 돌변하면 무서운 곳이 바로 마법사들이었으니.

사람들이 마법사 편에 서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에른스트가 목적을 위해 마법사의 탑을 사용할 거라는 걸 아는데 대체 왜 내버려 둬야겠는가.

차라리 자신이 쓰는 편이 나았다.

"마법사의 탑은 내버려 둬, 용용아. 나는 그곳을 신호로 쓸 생각이거든."

하벨은 마법사의 탑을 잊지 않았다.

헤일리스와 약속하지 않았던가, 마법사의 탑이 부러지는 모습을 꼭 보여주겠노라고.

약속은 지킬 셈이고, 에른스트의 절망을 알리는 신호로 사용할 셈이었다.

후우.

하벨은 차를 호호 불었다.

지나왔던 자신의 흔적들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는 걸 오늘에서야 더 와닿았다.

작은 줄기라 생각했던 이들이 뭉쳐 이토록 굵직한 나무가 되어줬으니까.

'…결코, 다시는 놓지 않겠다.'

하벨은 입속으로 들어오는 달콤하면서도 끝맛이 쓴 유자차의 맛을 느끼며 다짐했다.

* * *

"…하."

에른스트는 읽어나가던 서신을 구겼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레바놈 코스모피안 왕자는 독살을 당해 비극적인 삶을 맞이했다니.

'독살?'

말이 되지 않았다.

방금까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편지를 교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독살이라니.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레바놈, 그 빌어먹을 쓰레기가 죽어서 내 계획에 오물을 튀겨?'

에른스트의 몸에서 뿜어나는 검은 기운이 창문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꽃들을 향해 뻗어 나가자 한순간에 말라비틀어지고 말았다.

하벨의 몸이 좋지 않다는 건 자신도 들어봤기에 계속 계획을 수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레바놈을 죽인 범인으로 하벨만큼 떠오르는 자도 없었다.

원한도 있으며 최근에 마주치지 않았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에른스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초조함이 넘실거렸다.

계획의 끝자락까지 도달하는데 너무도 긴 시간이 흘렀다.

두 세계가 합쳐져 일어난 혼란은 이 세계의 신을 강림하는 데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수습해야 했다.

'참자. 참을 수 있다.'

겨우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떠돌았던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도 짧은 순간에 가까웠다.

'몇 번만 더 참으면 된다.'

이제 곧 코앞인데 괜히 불안함에 일을 망칠 수 없었다.

지금은 하벨을 잘 토닥거리면서 바꾼 계획을 천천히 세우는 방법이 최고였다.

하벨이 영웅이 되는 방법은 아직 더 남아 있었으니.

오미너스.

그 사랑스러운 존재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하……."

에른스트는 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그때는 내가 잘못했다. 내가 내 자만심에 취했던 거야.'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자신의 세계, 이오르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세계에서 자신은 쫓겨났다.

증오스러운 그 새끼.

'…아니야. 멈춰.'

에른스트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뭐 하겠는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을 애태우면 무얼 하겠는가.

이 세계를 버린 신을 대신해 자신이 다시 이곳을 관리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과거에 했던 잘못은 다시 하지 않는 거야. 이 세계는 정말 소중히 대해 줘야지. 정말…….'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에른스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분명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신경질이 가득 묻어난 소리에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이어졌다.

"…하벨 티에라……."

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 중 '하벨 티에라'라는 말에 에른스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벨이 왜?'

에른스트는 머릿속에 의문을 둔 채로 문을 벌컥 열었다.

"저, 저하."

왕실 시종이 딱 보아도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벨 티에라 님이 계시는 르미에느 궁에서 습격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여 지금……."

에른스트에게서 풍겨 오는 기세에 왕실 시종은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하벨 티에라가 습격을 당해?'

이 얼마나 기가 찬 소리인가.

'하벨 티에라를?'

빠드득.

이가 갈렸다.

에른스트가 걸을 때마다 불길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감히 누가!'

누구든 용서치 않으리라.

* * *

"…안 됩니다, 저하!"

정령 기사들이 에른스트를 말렸다.

저 쓸모없는 것들이 다 거추장스러웠다.

입구부터 시작해서 뭐가 그렇게 우르르 모여 있는 건지.

그렇게 모였다면 당연히 하벨 티에라를 보호했어야 하는 게 맞았다.

'쓸모없는 것들.'

에른스트는 저것들의 모가지를 다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비키거라! 티에라 공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이는 내 잘못이니!"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럼 너희들은 뭘 했단 말인가?"

에른스트가 정령 기사들에게 호통했다.

저들의 자유를 보장해 준 건 하벨 티에라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함이기도 하고 정령 기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정령 기사들은 허를 찌르는 소리에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저하. 화가 나신 건 이해하나, 그리 언성을 높일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들 중 단장이 말문을 열었다.

참 당당한 모습에 에른스트는 기가 막혔다. 지금 하벨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건 정령 기사들임에도 저런 태도를 할 수 있다니.

"내 나라에서 벌어진 일에 그럼 누가 언성을 높여야 하는 건가?"

"아시다시피 이곳에 정령님들이 계십니다."

에른스트는 이미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당황함과 분노로 뒤섞인 정령들의 표정에 큰일이 났다는 게 너무도 잘 보였으니.

"맨 처음 발견하신 분은 정령님들입니다."

정령 기사단장은 자신들이 무능력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래서 도련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정령님들께서 말씀하시길, 범인은 갑자기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그럼, 암살자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레놀드 왕국에서 건네준 명단을 바탕으로 이곳 시종들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자를 선별한 건 레놀드 왕국입니다."

에른스트는 그제야 왜 정령 기사단장이 저렇게도 당당한지 이해했다.

너희가 통과시킨 자 중에 범인이 있다. 이번 습격은 너희의 잘못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

"지금 우리가 잘못했다는 건가?"

에른스트는 기가 찼다. 아주 극진히 대해주니 머리 꼭대기까지 오를 기세였다.

"저희가 이곳에 오기 전에 어딜 들렀다가 왔는지 생각해주십시오."

정령 기사단장의 태도는 공손했으나, 흐르는 분위기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코스모피안 왕국을 거쳐서 오지 않았는가. 두 나라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이를 좋게 보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하는 건 당연했다.

'저자의 말에 모순은 없다.'

에른스트는 일단 화를 가라앉혔다.

티에라 가문은 레놀드 왕국에 들리기 전에 코스모피안 왕국을 거쳐 간 뒤였다.

게다가 레놀드 왕국에서 내어준 마차를 타고 왔으며,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몇 번의 검사를 걸쳤는지, 모든 게 레놀드 왕국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내 다시 알아보겠네."

그렇기에 에른스트는 화를 참았다.

굳이 정령 기사들과 싸워 괜히 하벨 티에라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벨 티에라 공의 상태만 보게 해주게나. 잠깐이면 된다네."

"현재 상황이 좋지 않기에 저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저하?"

정령 기사단장의 정중한 말에 에른스트는 이를 허락했다.

일단 하벨 티에라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대체 누구야?]

[그러니까! 누가 티에라 가문을 습격한 거냐고?]

하벨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정령들이 자신들끼리 떠들어대는 소리가 에른스트의 귀에 닿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곱지 못했다.

[쟤가 그런 거 아니야?]

[그런가 봐. 코스모피안 왕국에서도 그 누구더라?]

[레바놈?]

[맞아. 그 나쁜 인간이 하벨을 괴롭혔잖아. 난 쟤도 수상해.]

[하벨 어떡해. 피도 막 흘렸던데.]

정령들은 에른스트를 향해 더 거센 반응을 내보였다.

'…범인은 대체 누구지?'

에른스트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정령들이 범인을 봤다면 자신들끼리 떠들 테니까.

힘을 쓰면 손쉽게 알 수 있지만, 지금은 딱 아슬아슬한 수준이라 꾹 참아야만 했다.

[그런데 하벨을 습격한 사람 얼굴은 봤어?]

[아니. 난 못 봤는데.]

[나도.]

서로 모른다는 말이 줄지어 오던 와중에 한 정령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 몸이 아주, 아주 중요한 명령을 내릴 거야.

조금 전,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아라가 자신들을 불러 모았다.

정령왕의 명령이기에 가슴도 콩닥콩닥 뛰면서 몹시 즐거웠다.

―에른스트라고 아주 나쁜 존재가 있어! 에른스트는 우릴 볼 수 있는데, 지금부터 우리는 이 나쁜 존재를 속여야 해. 이번에 우리 역할이 어어엄청 중요해. 다들 힘을 모아줬으면 해.

그 작은 몸집으로 앞발을 높이 뻗으며 했던 말이 생각났기에 정령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건 거짓말이 아닌 명령이었다.

[나는 봤어!]

[봤다고? 진짜?]

[얼굴 말고, 다른 걸 봤어. 인간 두 명이었는데. 요기, 손등에.]

[손등에?]

[손등에 달 무늬가 있었어. 서로 같이 있으니까 막 반짝거렸어.]

'…달 무늬?'

에른스트는 달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단체가 있었다.

최근 시엘느에서 길들이고 있다는 단체 이름에 '달'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었다.

[어떤 달 무늬였는데?]

[색은 검은색이었어. 그러니까 검은 달처럼 보였어!]

검은 달.

그 말과 함께 에른스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때마침 방문이 열렸기에 정령 기사단장은 에른스트가 방을 보고 분노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방을 치우지 못해 도련님이 다른 방에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이쪽입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에른스트는 원래 하벨이 있었던 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방에서 암살자가 갑자기 나타났고, 이를 저항한 하벨 티에라의 몸부림이 그려졌다.

바닥에 채 마르지 못한 물웅덩이가 보였고, 바람이 불었는지 베개에 있던 깃털들이 사방에 퍼져 물과 뒤섞인 것도 보였다.

침대 이불에 삐져나온 솜털, 침대에서 적의 검에 공격당했는지 떨어진 핏자국 하며 깨진 창문까지, 보면 볼수록 열이 받았다.

"저하."

정령 기사단장이 에른스트를 말렸다.

"미안하네. 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으니."

슬쩍 올라간 에른스트의 입꼬리에 짜증이 걸려 있었다.

'검은 달. 아니, 시엘느에서 감히 멋대로 일을 벌여?'

대체 언제부터 하벨 티에라를 노린 건지 몰라도 이건 아주 계획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난 습격만 봐도 하벨 티에라를 죽일 기세로 덤볐으니까.

하벨 티에라가 죽는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는 데 아주 큰 차질이 생겨났다.

신이 강림하기에 앞서 이 세상에 있는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는 존재가 반드시 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전쟁이란 존재 역시 절대로 빠질 수가 없었다.

영웅이라는 존재의 탄생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안겨주는 아주 소중한 수단이었으니.

똑똑.

정령 기사단장이 노크하자 잠시 뒤에 문이 열렸다.

무거운 분위기가 문밖에서 새어 나왔고, 여기저기 피가 묻은 복장을 한 집사가 걸어 나왔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집사가 곧 고개를 숙였다.

"실례… 했습니다, 저하. 경황이 없어 이렇게 인사가 늦어진 점 정말 송구하게 생각……."

"됐네. 그것보다 하벨 공은 어떠한가?"

반짝이는 빛이 새어 나오자 에른스트는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 세계의 신이 내는 냄새가 역하게 밀려왔다.

신이 되고자 한다면 신을 따르는 추종자의 힘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고 있으나, 사실상 가까이하기에 너무도 꺼려졌다.

'신관이 같이 따라왔다고 그랬는데. 이 신관은 특히나 힘이 강하다.'

에른스트는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싹 지워질 것만 같았다.

저 힘은 언제봐도 불쾌했으니까.

"목숨은… 부지하셨습니다."

집사가 또 두 박자 늦게 대답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지.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굉장히 날이 선 목소리였다. 이름이 라르웬이라고 했던가.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무지 연기라고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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