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연극 준비(3)
* * *
그냥 레디나에게 자신을 습격해달라고 그랬고, 마침 페트리오에게 연락이 왔기에 넌지시 실제처럼 조금 상처를 내봐도 괜찮지 않겠냐고.
[음. 이건 대장이 나빴어. 좀도둑하고 레디나랑 카샬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이 몸이 냈을 거야.]
아라마저 하벨에게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나빴지. 도련님께서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
목에 가득 힘을 준 칼리우스의 시선을 이어 헤레스까지 원망이 깃든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저는 도련님을 낫게 해주려고 그러는데 도련님께서는 이렇게 본인을 다치게 할 줄은 몰랐……."
"아니야. 그거 아니야."
하벨은 답답함에 발가락에 힘을 가득 줬다.
이거 분위기만 본다면 자신이 완전히 악당이 아닌가.
"다들 들어봐."
괜히 마른침을 삼키며 하벨은 차분한 목소리를 내고자 애를 썼다.
"그러니까, 날 찌르는 척하고 사방에 뿌려지는 피는 동물 피 대체하고,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던 엘라힘 신관이 달려와 상처 치유하는 척하는 걸로. 여기서 조금 더 사실감을 주고자 레디나와 여하가 날뛰는 거지. 어, 어때?"
말을 끝마친 하벨은 진땀을 흘리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페트리오는 얼른 허락했다.
"왜 진작 이런 말씀을 꺼내지 않았습니까?"
그제야 흡족해진 카샬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벨은 자연스럽게 레디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도련님을 제가 찌르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렇지."
"그냥 적당히 소란 피우고 저쪽 창문으로 나가서 아라 님의 도움을 받아 예쁘게 착지한 뒤에 다시 물의 길을 타고 돌아오면 된다는 말이죠?"
"오, 맞아! 바로 그거야!"
하벨이 활짝 웃다 말고 갑자기 크게 뛰는 아라의 심장 소리에 깜짝 놀랐다.
쿵쿵쿵.
"…아라야? 너 왜 이렇게 심장이 뛰어?"
[이, 이, 이 몸은 벌써 긴장돼.]
아라의 몸이 바짝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이 몸이 잘못하면 레디나가 큰일이 날 수가 있잖아?]
"아라 님."
레디나가 부드럽게 아라를 불렀다.
"저는 이보다 더 위험한 임무도 많이 했어요. 절벽에서 뛰어내린 적도 많고요. 여긴 높지도 않고, 착지 잘못해도 죽을 높이도 아니에요."
정체가 들킨 암살자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어릴 때, 그 죽음을 비틀고자 무슨 짓이든 다 하지 않았던가.
"이건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하벨이 자신에게 검은 달의 수장이 되어달라는 말에.
―그러니, 네가 새로운 검은 달의 수장이 되어줘.
하벨이 검은 달이 필요하다는 말에.
―필요해. 검은 달이 가진 그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가 필요해.
그만큼 하벨이 궁지에 몰렸다는 걸 느꼈다. 그러면 안 되지만, 기뻤다. 이렇게 하벨의 부담을 나누어 가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에른스트를 이용해 검은 달을 저 밑으로 처박아버리려면 더 확실해야 한다고.
검은 달로서,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척하겠노라고.
"그러니까 아라 님. 실수해도 괜찮아요. 제가 수습할 수 있어요. 습관처럼 여기 위치를 달달 외웠어요."
시녀로서 장점이 바로 의심을 사지 않고 위치 파악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안심하라며 짓는 레디나의 표정에 아라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차게 외쳤다.
[아니야, 레디나! 이 몸도 할 수 있어! 이 몸도 해낼 거야!]
칼리우스가 변했다. 매일 같이 놀기에 그 변화가 확 느껴졌다.
아라는 자신만 멈추는 건 싫었다. 칼리우스랑 같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대장. 레디나한테 전해줘. 이 몸은 할 수 있다구!]
"아라가 할 수 있대. 아주 힘이 들어가 있어."
자신을 재촉하는 아라의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어떤 의지가 드러났다.
하벨은 그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칼리우스도 그렇고, 아라도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기쁜 일인데 뭔가 섭섭하네.'
<도련님.>
페트리오의 목소리에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살짝 떼서는 대답했다.
"이제 화가 안 나지? 맞지?"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레디나가 움직이면 제가 추가적인 흔적도 만들어놓겠습니다.>
"너는 정말 최고야, 좀도둑."
하벨은 진심을 담았다.
에르티안 왕국에서 뒷수습은 대부분 룬델이 해줬지만, 밖으로 나와 뒷수습은 페트리오가 담당해주었다.
<최고는 제가 아니라 도련님입니다. 저를 포섭하지 않으셨습니까?>
"지랄도 참……."
카샬은 귓가에 들려오는 저 말을 그냥 흘려듣기란 어려웠다.
속이 다 울렁거렸다.
<도련님. 왕자님한테 왜 화가 났냐고 물어 봐줄 수 있습니까?>
"…너어?"
카샬이 정말로 깜짝 놀랐다. 곧 시선이 하벨을 향했다.
하벨의 눈이 커졌다.
"왜 날 봐? 난 말한 적 없어. 내가 그럴 것 같아? 보나 마나 크라마잖아. 이거 진짜 섭섭한데?"
사람이 제일 방심하는 곳이 바로 하늘이었다.
설마하니 날아다니는 새가 무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망할, 주정뱅이가!"
카샬은 얼굴을 가득 구겼다. 빤히 예상됐다. 술이나 퍼먹다가 저열한 웃음이나 흘리며 입을 가볍게 놀렸겠지.
파르륵.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어쨌든, 도련님.>
페트리오는 조금 전보다 더 편안해진 목소리로 하벨을 불렀다.
<오늘 같은 일은 자제하시면서 다른 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고마워, 좀도둑. 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가면단의 실제 주인은 도련님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시엘느로 오실 도련님을 맞이하고자 준비하겠습니다. 아차, 새로 받은 피는 잘 받았습니다.>
새로 보냈다고 한다면 역시 '자안'밖에 없었다.
하벨은 입가를 잠깐 핥았다.
"혹시 뭔가를 봤어?"
여기서 더 나올 게 있을까 싶었지만, 하벨은 여러 가지로 확인하고 싶었다.
<예. 샤넬리움이 에른스트였습니다. 이걸 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던 차에 도련님께서 알려주셨더군요.>
하벨의 어깨가 아래로 살짝 내려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정말로 에른스트가 샤넬리움이라는 걸 확인받자 하벨은 마음이 착잡했다.
"혹시 또 알아낸 게 있어?"
하벨은 그 마음을 안고서는 다른 걸 물었다.
<에른스트가 헤스트리아 왕국에 퍼트린 오미너스를 회수하여 소규모 나라로 퍼트릴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계획의 끝이 시작된다'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헤스트리아라는 말에 카샬은 입술을 깨물었다.
머저리 같은 왕이 생각난 탓이었다.
"역시…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네."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 하벨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유자차를 향해 손을 뻗다가 주저했다.
어떻게든 오미너스를 없애버려서 다행이었지, 그게 아니었으면 난리가 날 뻔했다.
<에른스트와 유렌이라는 자의 관계가 좀 이상했습니다.>
"어떻게 이상했어?"
<에른스트가 유렌의 상태를 묻는 기억이 많았는데, 마냥 협력 관계라고 보이질 않았습니다. 특히,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유렌을 차지해야 한다는 듯이 자안에게 말하고 있는 부분이 이상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유렌은 깨어났나?'였고요. 이 또한 그냥 안부를 묻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되는 행동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에른스트가 유렌을 차지한다고?'
그 말에 하벨의 눈이 찬찬히 커졌다.
유렌은 틈의 세계에 지배자로서 그의 영혼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얽혀 있는지 몰랐다.
'에른스트 역시 육체가 없어 유렌에게 얽매여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에른스트가 원래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지 않았던가.
정말로 육체가 없었다.
'분명히 지금 틈의 세계에 얽매여 있는 이들과 달리 유렌이 죽어도 에른스트는 사라지지 않겠지.'
그런 위험부담을 에른스트가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유렌을, 하필 많고, 많은 사람 중 그를 선택했겠는가.
'…그릇이다.'
하벨은 천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틈의 세계라는 곳은 평행했던 세계가 합쳐져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신이었던 에른스트는 어쩌면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생각했다.
육체가 없는 에른스트가 신이 되려면 뭐부터 해야 했겠는가.
'신의 힘을 버틸 수 있는 육체가 필요했다.'
푸핫.
하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래, 대장?]
아라는 느닷없이 터진 하벨의 웃음에 살짝 놀라며 바라보았다.
"푸하핫. 진짜 웃기잖아?"
[어음, …카샬이 왕자님인 거? 그건 웃긴 게 아니라 사실인데?]
아라의 고개가 갸웃거릴 때쯤, 하벨은 웃음을 멈추고 궁금증으로 물든 모두의 시선에 응답하듯이 대답했다.
"유렌이 에른스트를 위한 그릇이었어. 신의 힘을 담기 위한 몸이라는 거지."
"네……?"
레디나가 어깨를 바짝 올렸다.
"유렌은 이미 훌륭하게 해내고 있잖아?"
틈의 세계에 있는 모두가 유렌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이를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그릇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애지중지하면서도 이를 빼앗을 궁리만 한 거였어."
하벨은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서 유렌 네놈이 내가 필요했구나.'
유렌은 신의 힘을 담을 그릇이 되는 그 거지 같은 상황을 어쩌면 겪었을지도 몰랐다. 이게 아니라면 유렌이 왜 자신을 도울까.
유렌이기에.
틈의 세계라는 거대한 세계를 지니고 있기에 시간을 역행하는 그 힘을 사용할 대가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
벌써 몇 번이나 페트리오의 한숨 소리가 들렸는지 몰랐다.
<저 진짜, 몇 년 치 늙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책을 써도 아무도 안 읽을 게 뻔합니다.>
"의외로 재미있다고 해줄 수도 있지. 그리고 넌 아직 어려, 좀도둑."
키득거리는 하벨의 웃음에 카샬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예. 어리시죠. 이제 딱 70일이시니까요. 100일 잔치가 곧 열리겠네요? 계속 준비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습니다."
"…너, 그거 진심이야?"
하벨은 기가 찼다.
"예. 진심입니다. 아마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쟤가 꺼내서 좀 그렇지만, 사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페트리오가 슬쩍 끼자 연락용 아이템에 귀를 대고 있던 아라가 실실 웃으며 앞발을 들었다.
[이 몸도! 이 몸도 엄청 기대돼! 이 몸이랑 대장이랑 같이 100일이야!]
뭐라고 말을 할 수 없게 아라가 너무도 행복함을 드러냈다.
헤레스와 칼리우스마저 기대를 하는데 저걸 어떻게 말릴까.
<기억은 이걸로 끝이었습니다. 부디 도련님께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마워, 좀도둑. 아주 큰 도움이 됐어."
유렌과 에른스트의 관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유추할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던가.
이게 큰 도움이 아니면 대체 뭐가 도움일까.
<그럼, 준비할 테니 도련님께서는 언제나 몸 좀…….>
"좀도둑. 한 가지 물을 게 있어."
<한 가지는 맞습니까?>
"그럴걸? 어쨌든, 시엘느에 돌고 있는 소문이 여러 개가 있지?"
<있죠. 신이 강림할 거라는 사실과 세계의 멸망, 뭐 신은 죽었다, 새로운 신이 탄생할 것이다, 등등 많습니다.>
"거기서 혹시 신의 아들과 관련된 소문이 있어?"
<당연하게도 있습니다.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소개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라의 특징인지 모르겠네요.>
"그럼 그걸 좀 부풀려 줄 수 있어?"
<어느 정도로 부풀리면 되겠습니까?>
"그냥 평소 소문 정도에서 신의 아들이 신을 이용하려는 자를 처벌하러 달 문양 가면을 쓰고 올 것이다, 같은 덧붙임만 해줘."
"왜 그런 소문을 내시려는 겁니까?"
카샬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려는 모습에 하벨을 말렸다.
"이건 긁어 부스럼이 아니야."
하벨은 모두를 달래듯 말을 꺼냈다.
"아마 에른스트와 엮인 신관들은 저 소문은 흘리지 않고 듣고 있을 거야. 그중에서도 중요한 정보들은 빼놓지 않고 기록할 테고."
"왜 그런 정보를 수집하는 거죠? 되게 불필요하고, 번거롭잖아요?"
조직 생활을 했기에 레디나는 의문을 드러냈다.
"지금 시엘느가 뭘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
하벨이 손을 뻗어 유자차가 든 잔을 쥐었다.
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신을 따르는 자가 하면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잖아? 누군가가 고발할까 무서운 거지. 그 소문 속에 어떤 게 섞여 있을지 두렵기도 하고."
<도련님께서는 그 두려움을 이용하고자 하십니까?>
페트리오의 물음에 하벨은 이를 부정했다.
"아니. 내가 이용하려고 하는 건 그저 그 사실을 각인시키는 거야. 나중에 더 깜짝 놀라게."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럼 이제 정말 들어가겠습니다. 도련님께서도 부디, 몸 건강히 만나도록 기대 하겠습니다.>
시엘느에서 만남을 뒤로하며 페트리오는 연락을 끊었다.
"자, 우리도 시작해볼까? 이제 레바놈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라서 사건이 하나가 더 터지면 혼란스럽겠지?"
하벨이 연락용 아이템을 집어넣으며 유자차를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