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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61화 (361/415)

361화. 연극 준비(2)

* * *

'아니. 전혀!'

눈을 떠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하벨은 눈이 너무도 무거웠다.

[아니야. 대장은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아.]

아라가 이를 부정하자 하벨은 입가가 살짝 풀리는 걸 느꼈다.

'역시 아라야. 너밖에 없어.'

[그런데 왜 맨날 이러는 거야? 나는 진짜 궁금했다? 티에라 가문에서도 하벨이 쓰러진 적이 많잖아? 뭐더라, 체력을 기른다고 도는 걸 봤는데.]

[아, 그거? 해가 있을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몰래 도는 거 나도 봤어!]

정령은 중간에 끼어들며 키득거렸다.

[해가 질 때까지 뭘 해? 아주 살판났네, 하벨. 라르웬은 그것도 모르고 온종일 네 걱정인데. 응?]

루룸이 딱 소리가 날 정도로 하벨의 이마를 때렸다.

[아아앗! 그러다가 대장이 깨면 어떡해?]

아라가 기겁하자 톰톰이 코웃음을 쳤다.

[하벨 정도면 맞아도 되잖아? 넬시아나 라르웬이 눈을 부릅떠도 이렇게 온종일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다가…….]

하벨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톰톰이 다급히 말을 멈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나, 산에서 놀고 오다가 하벨을 본 적이 있는데? 열심히 오르고 있었어. 아라 너도 있었잖아?]

정령이 지그시 꺼내는 말에 아라가 털을 바짝 올렸다.

'…그걸 또 봤어?'

하벨 역시 깜짝 놀랐다.

하벨 티에라의 몸이 집에 오래 있던 만큼 몸이 엉망이었기에 운동 겸 몰래 갔던 것뿐이었다.

[이, 이 몸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 이, 이거 라르웬하고 넬시아한테 말하면 대장이 큰일 나.]

[나는 말할 건데?]

톰톰이 침대 끝에 매달려 키득거렸다.

[하벨 쟤는 아주 많이 혼이 나야 해. 괜찮으면 쓰러져 오고. 또 괜찮나 싶으면 쓰러져 오고. 이게 대체 몇 번째야?]

[톰톰. 비밀로 해주면 안 돼? 응? 이 몸이 부탁할게.]

아라가 일렁거리는 눈으로 톰톰을 바라보았다.

[대장은 있지, 움직여야 숨을 쉬는 것 같아. 가만히 있으면 엄청, 엄청 불안해해. 그게 이 몸도 느껴질걸.]

어쩌다가 하벨이 알려준 말을 아라 자신은 들은 적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만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처음에는 새하얀 풍경 속에 있었고, 유렌한테 강제로 끌려온 뒤에 나는 그저 왕좌에 앉아 굳게 닫힌 문만 바라봤거든. 그냥… 아무것도 못 한 거지.

그때 하벨의 목소리는 물속에 잠겨 있다고 느낄 만큼 슬픔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 몸이 너희에게 물어볼 게 있어.]

아라가 안건을 내자 정령들이 모두 아라를 바라보았다.

편안한 숨소리가 하벨에게서 흘러나왔다.

대체 왜 정령들이 모였는지 몰라도 하벨은 저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우리가 대장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뭘 돕겠다는 건지, 어떻게 돕겠다는 건지 생각은 해봤어?]

루룸이 아라를 바라보았다.

아라는 자신들의 왕이었다. 왕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알 수 없는 신뢰감이 차올랐으며 아라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건 자칫하다가 아라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루룸의 목소리는 살짝 가라앉았다.

[무턱대고 돕겠다고 한다면 오히려 하벨한테 방해가 될 수 있어.]

[이 몸도 그건 알아. 하지만 우리도 대장을 도와야 해. 우리는 대장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잖아?]

아라는 눈에 힘을 주었다.

정령들 모두 자신을 바라보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대장은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 수 있어.]

[알아.]

루룸이 대답하자 정령들이 뒤이어 목소리를 냈다.

[그 예쁜 거 말이야? 나도 에르티안에서 하벨이 만든 거 봤어. 그건 진짜로 정화제인지 모르겠던데?]

[이 몸이 아는데, 대장은 반영구 정화제를 많이, 아주 많이 만들어도 괜찮아.]

'그렇지. 저들이 나에게 주는 힘의 근원은 애초에 내 힘이니 얼마를 받아도 상관없지.'

부작용이 없기에 순환의 길만 내어준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영혼도 반 이상 모았으니 오히려 더 좋은 정화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 정도까지 된다고?]

톰톰이 놀라며 물었다.

[응응!]

아라가 자랑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래서 말이야, 이 몸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반영구 정화제를 여기저기 퍼트리는 게 어떨까? 이 몸은 가능하다고 봐.]

'장한데, 우리 아라?'

하벨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부분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어 참 고맙다 싶었다.

반영구 정화제가 단순히 오염된 물을 정화하는 데에 끝나지 않고 오미너스를 무찌를 정도로 자신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걸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반영구 정화제를 옮길 수 있었어?]

루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분명 그 자리에서 가만히 돌고 있지 않았던가.

[그건 걱정하지 마! 이 몸이 할 수 있어. 정화제는 정령사와 함께 만든 우리의 힘이니까.]

아라가 주먹을 쥐며 말하자 하벨은 손가락부터 움직였다.

아라의 눈동자가 얼마나 초롱초롱 빛이 나는지 보고 싶었다.

[이 몸이 얼마 전에 아벨에 갔다 왔어.]

아라의 말에 정령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도 가고 싶은데.]

[…나도. 지금 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지 못했지만, 다음번에 꼭 가고야 말 거야.]

[아벨은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까, 계속 말해 봐.]

루룸이 정령들의 소란을 잠재우며 아라를 재촉했다.

[대장이 저번에 요양하러 아벨에 머물렀을 때, 우리를 위해서 반영구 정화제를 만들었거든?]

[그건 말만 요양이었지.]

루룸은 하벨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요양이었다.'

오히려 하벨은 코웃음을 치고 싶을 정도였다. 침대에 등을 뗀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인지.

[이 몸은 반영구 정화제를 만져봤다?]

헤스트리아 왕국 때 하벨이 반영구 정화제로 오미너스와 싸웠을 때가 생각나 아라는 쪼르르 달려갔었다.

[왜 만져봤냐면, 저번에 대장이 반영구 정화제로 싸웠을 때 이 몸한테 말을 걸었어.]

뭐든 될 수 있다며 말을 걸지 않았던가.

정말로 반영구 정화제는 자신의 지시에 맞춰 물이 되었다가 불도 되었다가 그렇게 바뀌었기에 혹시나 하던 마음이 컸다.

[반영구 정화제가?]

톰톰이 믿기 어려운 눈빛으로 아라를 쳐다보았다.

[응응! 이번에도 정화제가 이 몸한테 '뭐든 말해줘'라며 말을 걸어왔어!]

아라는 그때 느꼈던 놀라움을 앞발을 위로 크게 뻗으며 표현했다.

[그래서 이 몸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화제한테 말해봤어. 움직일 수 있냐고.]

평소 자연에게서 여러 말이 들려오지만, 정화제는 참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당신이 왕인데 누가 나한테 명령해요?

아라는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하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행복감과 함께 새삼스럽지만, 자신이 진짜 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몸이라면 된다고 그랬어. 반영구 정화제는 정화제랑 달라. 그건, 그냥 자연이야. 모든 자연이 뭉쳐진 힘. 우리의 진짜 힘이야.]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그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몸이 할 수 있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아라는 곧 긴장됐다.

만약에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괜히 하벨의 볼을 꾸욱 누르며 혀를 날름거렸다.

[혹시… 해줄 수 있어?]

[반영구 정화제를 옮길 수 있다면 그건 당연히 해야지.]

루룸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대꾸했다.

애초에 오염된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정화제였고, 그것보다 더 나아간 힘이 바로 반영구 정화제였다.

거절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기에 뒤이어 손을 흔드는 정령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쏟아졌다.

[나도 할래. 나는 저 예쁜 정화제를 본 뒤로 꼭 옮기고 싶었어.]

[나는 물이 깨끗해질 일만 생각해도 행복해.]

[모든 물이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로… 정말로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어.]

한 정령의 꼬리와 귀가 축 늘어졌지만, 눈은 행복함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검은 바다가 아닌 맑고 깨끗한 바다가 펼쳐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귀를 쫑긋거리던 아라가 대부분 동의했다는 걸 알자마자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일단 우리부터 옮기는 걸로 하자. 다른 정령들은 이 몸이 설득할게. 아마 대장이 일어나면 깜짝 놀랄지도 몰라.]

아라가 앞발을 입에다가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때까지 이건 우리들끼리…….]

"이미 놀랐는데, 아라야?"

하벨이 눈을 슬쩍 뜨자 아라가 털과 꼬리를 바짝 세우며 그대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대, 대장!]

"안녕, 작은 친구들아."

하벨의 미소에 잠깐 멈췄던 정령들이 손길이 이어졌다.

[너, 아직 더 자야 해. 아침이 되려면 2시간 정도 남았어.]

톰톰이 정령들 뒤에 숨어서 말문을 열었다.

"저 작전이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결국, 내가 껴야 하는 거 맞잖아?"

하벨이 활짝 웃자 루룸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거 틀렸어. 벌써 시동 걸었는데? 곧 거침없이 나아가겠네.]

"하자. 해보자고."

하벨은 결론부터 내렸다.

에른스트가 정령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 힘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정령왕 이안을 가두고서 일일이 확인하러 올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배가 뚫렸던 그 사건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졌고,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벨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애초에 놈은 정령들의 힘을 감지할 수 없는 거다.'

두 세계가 합쳐져 우연으로 태어난 존재가 정령이 아닌가.

정령의 힘을 감지할 수 있었다면 에른스트가 제일 먼저 없애려고 시도했을 존재가 바로 어정쩡하게 태어난 아라일 테니까.

'배가 뚫린 것치고 값싸게 얻은 정보다.'

하벨은 정령들을 보며 장난스레 미소를 지었다.

"아라야. 정령들은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인지 알지?"

세상에서 유일한 정령사 가문인 티에라 가문, 그곳의 막내였다.

"내 땅이 어딘지 알고 있지?"

정령들이 보금자리를 둔 아벨의 진짜 주인이었다.

"가자."

하벨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정령수가 쏟아지면 자신에게도 좋았고, 반영구 정화제가 나라 곳곳에 뿌려질 생각을 하니 벌써 신이 났다.

* * *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 넘어서 쏟아지는 잔소리에 귀에서 피가 날 것만 같아 잠깐 귓가에서 뗐다.

"왜 떼십니까? 이번에 저놈이 다 옳은 소리만 하는데 이참에 딱 붙여서 들으시죠."

카샬 마저 얼굴을 가득 구기며 하벨을 보고 있었다.

[이 몸은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 대장이 저 말을 들으면 아주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야.]

연락용 아이템에서 귀를 대는 걸 좋아하는 아라마저 슬그머니 하벨의 다리로 내려왔다.

[좀도둑이 엄청, 많이 화가 났어.]

아라가 옷자락을 꼬옥 쥐자 하벨은 슬쩍 목소리를 내뱉었다.

"…좀도둑. 너무 화내지 말고."

<아니! 아니이, 도련님! …하, 제발 좀.>

페트리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지금 시엘느에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좀도둑. 조금만 생각을……."

<제가!>

페트리오는 하벨의 말을 끊어버렸다.

<샤넬리움이 에른스트라는 것도 참았습니다. 그놈이 있는 레놀드 왕국에 도련님께서 계속 머무시겠다는 말 역시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떠난다는 게 더 이상해 보일 수 있으니까요. 아니, 어쩌면 적의 아가리 속이 제일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건드리면 페트리오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벨은 안절부절못하며 묘하게 살벌하게 웃고 있는 레디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번에 자신이 벌일 일의 주역이 바로 레디나였으니까.

'…아. 무섭네.'

하벨은 조용히 자신을 진찰하는 헤레스의 눈빛에 무언가 목에 탁 걸릴 것만 같았다.

<또 도련님께서 에른스트를 자극해 시엘느가 검은 달을 버리게 하려는 의도 역시 이해합니다. 그란덴이 만든 반란 조직과 함께 검은 달의 뒤통수를 치라는 지시 역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란덴은 레디나를 위해 움직이기로 했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였다.

검은 달의 수장, 레이엘느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검은 달 일원을 포섭해 현 검은 달에 반기를 드는, 지금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

하벨은 말을 살짝 더듬었다.

<이건 오히려 그래만 합니다. 그게 효율적이며 습격하기에도 좋으니까요.>

페트리오가 계속 긍정해주곤 있지만, 하벨은 밀려오는 서늘함을 느꼈다.

'아직 누님하고, 형님이 안 오셨는데. 벌써 무섭단 말이지.'

어제 밖으로 나가 물의 기억을 통해 여러 가지를 보지 않았던가.

이참에 에른스트의 세뇌 역시 막을 방법을 그곳에 두었다는 자신의 말은 지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몰랐지만, 그 뒤로 자신이 피를 좀 흘린 모양이었다.

<다 떠나서, 저 일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도련님께서 검은 달에 습격을 당하셔야 하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그래야만 사건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사실 마음에 들지 않지만요. …하.>

페트리오는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저는 여기까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 많이 참았습니다. 정말 많이 흘려보냈습니다.>

"…그렇지?"

하벨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흉내가 아니라고요? 진짜 습격을…….>

"아니야, 흉내야, 흉내!"

하벨이 다급히 말을 바꿨다.

조금은 사실적으로 하자는 말을 꺼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가시방석이 될 줄이야.

"자자, 다들 흥분하지 말고 들어봐."

하벨은 필사적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모두를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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