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60화 (360/415)

360화. 연극 준비

* * *

「저항하지 마라.

너희의 주인은 없으니.

이 땅에 내리박는 내 힘은 모든 걸 지배하는 힘이다.

너희 몸에 묻은 이 힘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으리.」

물에 힘을 넣었을 때 에른스트가 꺼낸 말이었다.

'에른스트……!'

하벨은 에른스트를 원망하며 자신에게 박은 저주처럼 물에다가 놓은 힘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반짝.

하벨의 머릿속에 놈이 그 힘을 어디에서 사용했는지 사진처럼 박혀왔다.

가면 밑으로 코피가 떨어졌다.

[대장, 이제 멈춰. 코에서 피가 나!]

"맞아. 도련님, 이제 그만해."

아라에 이어 칼리우스까지 하벨을 말렸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지금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어떤 방식으로든 알아내는 게 너무 어려웠다.

특히 에른스트가 레놀드 왕국에 있다는 걸 알았기에 더욱 건드리기가 곤란해지지 않았던가.

이건 자신이 해야만 했다.

―용왕님. 이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시잖아요.

―영혼이 다 모여 있어도 아파하셨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괴롭겠어요?

―여기서 멈추세요! 멈춰요, 좀!

"그럼, 레놀드 왕국에 벌어진 폭탄 사건은… 그건 누가 그랬는데?"

하벨이 숨 가쁘게 꺼낸 말에 물들이 혼란스러워했다.

―그, 그건 모르겠어요.

―시야를 흐리고 있어요. 왕국 가까이에 손을 뻗을 수가 없어요.

―저쪽으로 가면 우리를 잃어버릴 거예요.

'그럼 그렇지.'

하벨은 실망하지 않았다.

에른스트가 왜 오염된 물을 이용했겠는가. 아니 애초에 왜 물을 오염시켰겠는가.

재앙이라 불릴 수 있는 건 많았다.

솔직히 물 말고 공기를 오염시켰다면 더 큰 혼란이 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물을 선택했다.

'날 죽여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가? 아니면 내가 두려웠던가?'

물은 자신의 눈이자 모든 것이었다.

그런 물을 오염시켰으니 무엇이 두려웠는지 빤히 보이지 않은가.

이미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폭발이 에트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폭발 사건과 같다는 결론은 내려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대체 저 일을 했느냐는 사실인데, 이는 자신이 에르티안 왕국으로 가서 물의 기억을 읽는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었다.

―코스모피안 왕국을 위하여!

에르티안 왕국에서 폭탄을 터트리기 전에 그 광기가 어렸던 목소리를 생각해본다면 분명 세뇌가 틀림없었다.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을 게 분명했기에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하벨은 기억을 넘겼다.

노루가 뛰어다니는 기억, 나비가 날아다니는 기억, 나무꾼이 나무를 베어온 기억 등 무수히 많고, 작고 평범한 기억들까지 모두 스며들었기에 머리가 펑 하고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땅을 적시던 코피가 어느덧 작은 웅덩이를 만들 때쯤, 하벨은 눈을 부릅떴다.

신관.

그 글자가 보였으니까.

'…신관?'

하벨은 귓가에 닿는 소리가 뭉개져 들려왔지만, 눈에 어린 빛은 꺼지지 않았다.

신관들이 걸어왔다.

그들 손에 폭탄이 들려 있었다.

「이 모든 건 신을 위한 행동입니다.

신과의 목소리가 끊어진 이 땅에 희망은 없습니다.

부디,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뺏는 이 죄를 용서하지 마소서.

제발, 이 땅에 강림하소서.」

신관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뭐?'

하벨은 밀려드는 기억에 잠깐 눈앞이 까맣게 물들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풀 위를 걸어 다니는 작은 벌레가 보였다.

툭.

피가 나뭇잎을 적셨다.

아직도 코가 뜨거웠다.

"…하."

하벨은 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무래도 기절한 탓에 용왕의 힘이 강제로 끊어진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이 나라에… 신관이 왔네. 정확히 무얼 하는지 몰라도 기억하고 있네.

샤르비에가 그러지 않았던가. 신관이 왔다고.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폭발과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그 폭발이 시엘느에서 벌인 거라니.'

하벨은 그렇지 않아도 찌푸려진 얼굴에 다른 주름이 잡히는 걸 느꼈다.

[괘, 괜찮아? 이 몸이 누구인지 알겠어?]

아라가 시야 안에 보였다.

하벨은 싱긋 웃었다.

"물론이지. 아라잖아?"

다 잊더라도 아라는 기억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바닥을 향했던 몸이 천천히 끌어 올라가면서 안도가 담긴 아라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도련님?"

엉덩이가 바닥에 닿자 그제야 칼리우스가 보였다.

열심히 하벨을 주무르면서 칼리우스는 당황함보다 설명부터 이어나갔다.

"정신만 놓았어. 진짜 잠깐이야. 한 5초 정도?"

"아무래도 머릿속에 과부하가 일어났나 봐. 기억이… 너무 많이 쏟아졌거든."

하벨은 갑자기 감기는 눈에 깜짝 놀라서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겨우 다시 이어나갔다.

머리가 아직도 지끈거리고 있음에도 졸음이 쏟아졌다.

마치 이제 그만 기절하라고 강제로 눈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도련님은 이제 가야 해. 더는 정말로 안 돼. 만약에 도련님이 가겠다고 해도 나는 이제 진짜 말릴 거야. 도련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칼리우스의 시선에 아라가 앞발을 부딪치며 손뼉을 쳤다.

[오오. 용용이 방금 멋졌어.]

"안 돼. 하나만 더."

하벨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눈앞이 흔들렸다.

몸이 휘청거렸고, 머리가 크게 흔들리자 칼리우스가 하벨을 바로잡았다.

"그럼, 나한테 업혀, 도련님."

"혼 안 내네? 방금 말릴 거라며?"

"도련님은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도련님을 차라리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게 나아. 선배가 생각은 유연해야 한다고 그랬어."

'…꼭 작은 카샬 같네.'

하벨은 왠지 웃음이 났다.

"얼마 안 멀어. 저기야."

칼리우스에게 업힌 하벨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나아가자 하벨이 목소리를 냈다.

"여기서 멈춰줘."

하벨은 방금 자신의 머릿속에 보았던 그 장소임을 확인하고는 땅에 내려왔다.

서 있으면 휘청거리기에 하벨은 그냥 땅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손을 댔다.

답답함에 가면을 벗으며 코피를 옷자락에 닦았다.

뭘 망설이겠는가.

"갈게."

숨 한 번 들이마시고 하벨은 용왕의 힘을 끌어왔다.

눈동자가 푸르게 변하자 물이 다시 요동쳤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물줄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물속에 파고든 그 힘을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에른스트의 힘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캬아악.

물이 자신에게 날을 세우자 하벨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평생 겪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에른스트.'

물에 퍼진 것들을 보더니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의 주인은 나다."

물이라면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물을 통해 뻗어나갔다.

자신이 탄생하기 전에도 물은 존재했으나, 의지를 가진 물은 자신의 시작과 함께 태어났으니 발밑에 있는 게 당연했다.

"내 부름에 응답하거라."

물이 자신에게 인사하고자 땅에서 솟구쳤다.

[…우와아.]

아라가 감탄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하벨의 명령과 함께 거무튀튀했던 물에 물살이 일어나더니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냥 말만으로 정화제를 사용한 것만 같았다.

하벨은 물을 바라보았다.

물의 몸에 여러 가지 글자가 보였다.

'저거다.'

물에 새겨진 말.

모든 것은 내 손바닥 위에.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하벨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용용아. 간다."

"응!"

하벨은 여느 때처럼 칼리우스를 믿으며 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번개가 튀듯 하벨의 손 주변에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하벨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누구도."

오히려 명령을 내렸다.

"내 명령 위에 있을 수 없다."

오만한 말에는 더 오만한 말로 대꾸해야 하지 않겠는가.

명령이 새겨지자 물과 하나로 합쳐졌던, 레놀드 왕국에 넓게 퍼졌던 그 힘이 글자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하벨은 글자를 그대로 붙잡았다.

콰득.

손아귀에 들어올 만큼 구기고, 구겼다.

여기서 더 구긴다면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하벨은 딱 한 번을 남기고 멈췄다.

―…왜 멈추는 거예요?

지켜보고 있던 물이 물었다.

"이러면 너무 쉽게 들킬 테니까."

하벨은 씩 웃었다.

진정한 절망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터져야 짙은 법.

이미 놈은 이곳에 온 뒤였다. 또 올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여러 가지를 떠올려봐도 이게 최선이었다.

"자, 얘들아 이거 봐봐."

하벨은 에른스트의 힘 옆에 저걸 없앨 만큼의 자신의 힘을 두었고, 재빠르게 다른 물로 겉을 덮어 위장했다.

―뭐 하는 거예요?

물이 물었다.

"딱 한 방을 대비한 거야. 내 신호에 너희가 저 물을 풀기만 하면 돼. 간단하지?"

―아아. 뭘 하는지 알겠어요. 물론…….

―아아앗! 용왕님!

"왜……."

하벨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말해야 하는데, 다시 쏟아지는 코피와 몸이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보였다.

조금 전 기억을 읽은 대가일까.

'…이러면 혼나는데.'

어둠이 덮쳐왔다.

* * *

바다 위를 떠돌고,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챙겨야 할 것은 무엇이며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마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 기억은.'

하벨은 넓게 펼쳐진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이게 어떤 기억인지 알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겨울 바다 이외에 무어라 또렷하게 생각나는 게 없었다.

―용왕님.

물이 자신을 불렀다.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맞아요. 우리도 슬퍼요.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슬픈데, 용왕님께서는 오죽하실까 싶어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이러다가 용왕님마저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요.

―아직 남아 있잖아요. 더 많이 지켜야 할 백성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자신은 저 간절한 말이 귓가에 와닿지 않는지 그저 가만히 바다 위에 떠 있었다.

하늘에서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냈는지 몰라도 눈가에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울고 있었다.

소리도 죽인 채, 우는 소리를 잃어버린 채로, 겨울이라 생각했던 그 광경 속에 저 멀리 푸르른 잎을 단 나무를 눈에 담았다.

'…겨울이 아니다.'

자신이 떠 있는 이 바다에 내리쬐는 계절은 겨울이 아니었다.

슬픔이 너무도 컸기에 감당할 수 없어 주변으로 흘러나왔다.

뜨겁고, 푸르러야 했던 여름은 슬픔이라는 겨울에 잡아먹혀 주변에 모든 걸 얼려버렸다.

아침이 되었고, 밤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렀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슬퍼하고, 또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던 자신의 눈동자가 먼저 돌아갔다.

불길함이 느껴졌다.

―…뭐, 뭐예요?

그리고 뒤늦게 물이 반응했다.

―저거 너무 이상해요.

―어떻게 저런 존재가 있는 거죠?

존재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형태조차 이루지 못한, 마치 버려진 겉껍질을 쓰고 나온 검은 형체에 가까운 것이 무엇인지 하벨은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에른스트였다고? 저게?'

에른스트에게 몸이 없다는 건 이미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저 흉측한 존재는 이 세계에서 오직, 에른스트 하나뿐이었다.

무게가 없는지 눈 위를 걸음에도 자국 하나 없었고, 바다를 건너옴에도 물에 빠지지 않았다.

불길함이 짙어졌다.

가슴에 울리는 무언가가 경고처럼 울려왔다.

저 존재를 허용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자꾸만 울려 자신은 움직였다.

―저희는 진짜로 보지 못했어요.

―맞아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건 없는데.

"누구인지 말하거라."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마치 쇠를 긁는 소리처럼 들려와 무척 낯설었다.

"…바다의 수호자여."

에른스트가 말문을 열었다.

'정말 에른스트다.'

하벨은 비로소 언제 에른스트와 만났는지를 알게 됐다.

"너는 이곳에 허락된 이가 아니라는 걸 안다. 어서 꺼지거라."

자신의 말과 함께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서는 에른스트를 휩쓸었다.

치이이익.

마치 오미너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힘에 에른스트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에른스트가 녹아내리는 거지?'

하벨은 그 사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바다의 수호자여! 부디, 내게 너의 몸을 허락해주게나!"

에른스트는 다급한 소리로 외쳤지만, 파도는 그를 휩쓸 뿐이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넋을 잃은 자신의 귀에도 웃기게 들릴 뿐이었다.

"신이 너를 버렸기에 너의 소중한 존재가 죽어버린 것이다!"

소중한 존재라는 말에 귀신같이 파도가 멈췄다.

"…뭐?"

자신이 눈을 크게 뜨는 게 느껴졌다.

'개소리!'

하벨은 이를 악물었다.

저건 다 개소리였다. 애초에 수족이라는 존재를 이용한 건 에른스트였다.

놈은 어쩌면 처음부터 저 수족을 이용해 세상을 휘어잡을 생각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탄생했고, 수족이라는 존재를 없애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에른스트의 모든 것을 없앴다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너는 신의 손에서 탄생한 존재. 내 눈에는 그게 보여."

에른스트가 꺼내는 말에 하벨은 속이 들끓었다.

―신께서 정녕 하벨 공이 신의 아들이라 알리고 싶으셨다면 이 장소가 아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림하셨어야 했습니다.

엘라힘이 꺼냈던 신의 아들이라는 말.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에른스트의 입에서도 나오고 말았다.

신을 끌어내려 신이 되려는, 신이었던 자의 입에서.

'어쩌면 놈은 나를 본 순간부터 나의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몰라.'

자신의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를.

하.

자신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저 이상한 모습을 띤 에른스트의 모습을 보고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귀찮음'이었다.

"그게 마지막 발악인가?"

"…바다의 수호자여. 신이 너를 만들었다."

"신은 없다."

자신은 더 많은 파도를 만들어내 에른스트를 덮쳤다.

"하지만 신이… 너를 버려 네가 이렇게 고통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거다!"

"신은 없어."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자신에게서 흘러나왔다.

신이 있고 없음은 지금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바닥이라 생각했던 마음에 또 구멍이 나서 슬픔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니.

눈 속에 묻혀 잠들고 싶다.

바닷속에 떠내려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더는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

절망, 좌절, 우울.

그 모든 감정 속에 허우적거리면서도 무엇도 놓지 못했다.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세계가 걱정되어서.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에 슬피 울 모든 물이 걱정되어서.

참 겁쟁이이지 않은가.

"내게 오거라! 너를 구원해주지 않는 신을 버리고!"

그저 저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파도 속에 묻히다시피 했음에도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은 엉망이었다.

"널 만든 신은 네가 괴로움을 느끼는 이 상황에서도 그저 멀리 바라보고 있을 뿐, 네가 이토록 흘리는 눈물 한번 닦아주지 않는구나."

"…녹아내리는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구나."

괴기했던 모습마저 이제는 사라지고 있음에도 에른스트는 계속 입을 놀려댔다.

거슬렸다.

지금까지 용케도 버티고 있는 에른스트를 향해 자신은 힘을 살짝 더 넣었다.

그저 휩쓸기만 하던 바다가 멈췄다.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근처에 있던 모든 바다가 일어나 에른스트를 향한 검들이 되었다.

존재 자체를 말살해버릴 정도로 엄청난 위협에도 자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어들어 갔다.

"이만, 죽거라."

조용해지고 싶었다.

다시 침묵 속에 묻혀버리고 싶었다.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살릴 수 있다!"

에른스트가 마지막 발악처럼 내리는 소리에 물로 된 수만 개의 검이 날아가다 그대로 멈췄다.

살았다며 숨을 짧게 내쉬는 소리가 에른스트에게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건 지금 자신에게 있어 아주 사소했다.

가슴이 일렁거렸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때, 자그마한 꽃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신이 된다면 죽어버린 이들까지 다시 살릴 수 있다. 약속하지."

에른스트는 정령왕이었던 이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약속'을 들먹였다.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해. 그게… 아직 적용되고 있는 나의 제약이니까."

마치 에른스트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 * *

볼을 누르는 말랑한 촉감이 전해졌다.

여기저기 쓰다듬어주는 작은 손길까지 느껴졌기에 하벨은 자신의 정신이 깨어나고 있는 걸 알았다.

마음이 스르르 편해졌다.

어쩌다가 과거 속 에른스트를 만나고야 말았다.

자신의 상태는 생각한 것보다 더 엉망이었고, 에른스트는 정말로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에 내가 에른스트를 봤다는 말은 사실이었어.'

하벨은 도중에 정신을 차리게 돼서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쭉 이어서 봤다면 정말로 슬펐을 테니까.

바보 같았던 자신도, 죽이지 못했던 에른스트도, 이 모든 게 전부 후회로 남아 있었다.

[있지, 아라야.]

정령이 속닥거리며 아라를 불렀다.

[으응?]

[하벨은 왜 맨날 이렇게 누군가에게 업혀서 오는 거야? 이런 거 좋아해?]

호기심만 가득 묻은 말에 하벨은 모든 감정을 떠나 그대로 기침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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