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움직인다
* * *
[그, 그건 이 몸이 잘못했어. 이 몸이… 대장 말에 홀딱 넘어가 버렸어.]
날아오른 아라는 하벨의 입술에 앞발을 올렸다.
[무서운, 히끅, 입. 이 몸은 대장의 입이 제일 무서워.]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라는 하벨이 꺼낸 말마다 귀가 쫑긋 열리고 눈이 번뜩 뜨이고, 막 상상이 되는 상황에 도저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실제로 엄청, 정말 많이 즐거웠기에 뒷일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밤에 피는 꽃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아라는 앞발을 내리고서는 레디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미안해, 레디나! 이 몸은 대장의 입을 이길 수가 없어어! 이 몸은 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 버렸어! 잘못했어!]
"아라 님은 잘못 없어요! 다 도련님의 입이 잘못하신 거죠."
레디나는 밀려오는 촉감에 행복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뭐야? 너 아라 말이 들려?"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느낌이 전해오잖아요. 아라 님은 정말로 다정하니까요."
눈을 동그랗게 뜬 하벨의 표정에 레디나는 키득거렸다.
[이 몸도 진짜 놀랐어. 레디나가 이 몸의 말에 대꾸한 줄 알았어.]
아라는 레디나의 얼굴에 비비적거리자 그녀는 더욱 실실 웃었다.
하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으니.
"어쨌든, 도련님께서는 혼날 걸 각오했다는 거죠?"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 다른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거든."
"왜요?"
"샤넬리움이 에른스트라서."
레디나는 하벨이 던진 말이 웃음부터 터트렸다.
"와. 이건 좀 웃겼어요. 진짜 제가 들어본 농담 중에 제일 웃긴데요?"
"일단, 간단히 말하자면 에른스트가 나를 영웅으로 만들 셈이야.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붙잡아두려고 할 텐데, 기왕 그렇게 하는 거 일단 놈의 힘을 빌리면서……."
"자, 잠깐만요. 농담… 아니에요?"
레디나는 자신도 모르게 하벨의 말을 끊어버렸다.
"농담 아니야, 레디나. 나는 지금 되게 진지해."
살짝 서늘해진 하벨의 눈빛에 레디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요?"
"그래."
"계속 말씀해보세요."
쿵쾅쿵쾅.
레디나는 격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억누르려 숨을 짧게 쉬었다.
"나는 원래라면 레놀드 왕국에 있는 내 영혼을 흡수해서 자잘한 일을 처리한 뒤에 엘라힘을 데려준다는 명목으로 신성 국가 시엘느로 가려고 했어."
"영혼은 이미 흡수하셨잖아요."
"그래서 대충 비위나 맞춰주고 슬쩍 코스모피안 왕국 이야기를 들먹여 자극해서… 뭐, 어쨌든 계획은 다 무너졌어."
"계획만요? 다른 건 무너지지 않았어요? 이건, 음, 제가 갑자기 정령사가 되는 사실이랑, 아니다, 이것도 한참 모자란데."
[이, 이 몸이 갑자기 사람이 되는 거랑 비슷해!]
아라가 앞발을 번쩍 들며 말하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정도의 충격이라 할만했다.
"계획이 무너졌으니, 다른 계획을 생각했지. 에른스트가 나를 영웅으로 만들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처럼 나도 에른스트가 원하는 걸 해주면서 뒤통수칠 준비를 하려고.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그거야, 도련님이라면 여기저기 다니실 테니까 당연히……."
레디나의 눈이 커졌다.
"…아니죠?"
"약간 비슷해."
"저, 도련님을 죽이겠다는 말은 했지만, 사실은 도련님께 단검을 들이미는 것도 싫어요. 습격을 받았다고 위장하겠다는 건 빼세요."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갑자기 일이 잘 풀린 거 기억나?"
"그 레바놈 새끼와 관련된 일이요?"
"그래. 그거 에른스트가 던져준 거야. 옜다 먹으라고."
"으. 그걸 놈이 던져준 거라고요? 과정이야 어쨌든 바안 전하께 던져줬고 결국, 그 새끼는 겉으로는 안 먹고 가셨잖아요."
"그래서 나한테 제안을 하더라고. 지금 밥상을 잘 차려줄 테니 얼른 와서 먹으라고. 애초에 왜 에른스트가 레바놈을 버렸겠어?"
"아까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그 영웅이랑 관련되어서요? 도련님을 암살하려고 했잖아요."
레디나는 말하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마.
에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맞아. 아주 정확해. 그래서 이제 왜 내가 널 불렀는지 알겠지?"
"네. 아주 잘 알겠어요."
레디나는 레바놈의 사건을 통해 하벨이 에른스트를 이용해 검은 달을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가짜로 일을 벌여서 말 한마디에 검은 달이 사라지면 얼마나 효율적인가.
사실 저게 맞았다. 하지만 속에서 불만이 샘솟았다.
"검은 달을 이렇게 처리할 셈이에요?"
"레디나. 수장의 목을 네가 베는 건 변하지 않아. 그저 검은 달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에른스트가 건드리는 건 검은 달이라는 단체가 아니야. 검은 달을 고용하고 있는, 검은 달의 가장 큰 후원자나 다름없는 신성 국가 시엘느야."
[왜에? 에른스트가 어, 검은 달을 건드리는 게 더 빠르잖아?]
아라가 의문을 느끼며 묻는 말에 하벨은 싱긋 웃었다.
"레디나 너한테 정말 미안하지만, 에른스트가 보기에 검은 달이라는 단체는 머릿속에 없을 거야. 그래서 나도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어."
에른스트에게 검은 달이란 시엘느가 고용한 단체.
어쩌면 그것조차 되지 않을 만큼 흐릿할 수도 있었다.
하벨 자신이 바라는 건 바로 검은 달이 시엘느에게서 버려지는 순간이었다.
"잘됐다고요?"
비꼬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에 '잘됐다'이기에 레디나는 오히려 하벨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레디나. 나는 너의 어머니가 유지했던 검은 달을 존중해. 하지만 이름이 없는 단체는 사라지는 게 당연해."
"고마워요, 도련님. 왜 조심하는지 알지만, 저는 엄마의 방식에 반대해요. 그 결과가 어떤지 직접 봤잖아요?"
세상을 위해 일했지만, 우습게도 돈 문제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로 엄마의 부하가, 지금 현재 검은 달의 수장인 레이엘느가 그녀는 죽였다.
아무도 그 죽음을 알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사람은 명예만으로 먹고 살 수가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은 달은 알려져야 해요. 이름만으로 벌벌 떨 만큼 크게요."
"그러니, 네가 새로운 검은 달에 수장이 되어줘."
기다리겠다는 말과 다른 말이 하벨에게 흘러나왔다.
레디나는 차분히 물었다.
"검은 달이 필요한가요?"
"필요해. 검은 달이 가진 그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가 필요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나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제일 위험한 자는 바로 내부자야."
욱신.
괜히 대신들에게 찔렸던 곳이 아팠다.
내부자의 위험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그러니 에른스트가 뿌린 자들을 죽여야지. 그 어떤 방해도 할 수 없게."
"할게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대답한 레디나의 눈빛에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흩어진 검은 달이 한곳에 모이고, 그들이 전부 내부자를 죽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빼앗긴 걸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데 왜 기쁘지 않겠어요?"
레디나는 미소를 지었다.
당장이라도 춤을 추고 싶다는 즐거움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드디어 때가 왔다.
* * *
"…습격 때문에 몸이 근질거리시겠지만,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하벨은 바안을 다시금 단속했다.
<아니, 전쟁이라는 말은 다시 올리지 않기로 했잖아요. 솔직히 말해보세요. 나 놀리려고 연락했습니까?>
발끈하는 바안의 말에 하벨은 키득거렸다.
연락용 아이템에 귀를 대고 있던 아라 역시 웃음을 흘리다 하벨의 시선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 지금 바안이 대장을 기다리고 있어. 어서 말해야지. 이런 실례라구.]
아라의 재촉에 하벨은 잠깐 숨을 돌렸다.
'요새… 놀리는 재미가 뭔지 알아간단 말이지.'
뭐가 됐든 귀여우니 됐다 싶었다.
"당연히 걱정돼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래도 몸이 근질거릴 수 있잖습니까."
<몸이 근질거리는 건 내가 아니라 하벨 공이 아닙니까? 뭘 그렇게 많이 움직이는 겁니까? 그 반지도 아주 잘 활용하고 있고요.>
"…그, 도움이 됐습니다."
절대로 안 쓰겠다고 했던 반지가 너무도 유용하게 쓰이는 바람에 하벨은 잠깐 당황했다.
<대단한데요? 나라면 못 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렇죠. 저도 전쟁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텐데요."
<…지금 어딥니까? 레놀드 왕국에 도착한 건 아는데 왜 바람 소리가 납니까?>
딱 봐도 말을 돌리려는 정성이 보여 하벨은 기꺼이 대답해주었다.
"밖인데요?"
하벨은 잠깐 시선을 돌렸다.
칼리우스가 주변을 살피며 발을 동동 굴리는 게 보였다.
이러다가 들켜.
입 모양으로 열심히 말하지만, 하벨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이미 에른스트가 자신을 찾아온 직후였기에 다시 올 가능성은 극히 드물었다.
<산책하는 겁니까?>
"네. 산책 왔어요."
[아니야, 바안. 이건 산책이 아니야.]
아라가 힘차게 말했고, 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조금 격렬한 산책이요."
아라와 칼리우스의 시선이 이어지자 하벨도 양심이 찔려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참 이상하게도 에르티안에 있는데 여기저기서 속이 터지는 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전하."
하벨의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리 무거워졌다.
<그렇게 부르면 무섭네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럽니까?>
"이번에 전하를 습격한 놈을 심문하면 어차피 '코스모피안 왕국'만 부를 겁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나라의 이름이 나올 수도 있죠."
<…예언입니까, 아니면 공께서 또 뭔가를 쥐었습니까?>
"쥐었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말해오던 세상의 흐름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자의 정체를 알아버렸습니다."
<내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습격한 놈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십시오. 그리고 마법사 협회와 티에라 가문과 손을 합쳐 나라에 있는 오미너스를 싹 정리해야 합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라에 있는 오미너스는 이제 불안요소를 떠나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게 되어버렸다.
헤레스가 이미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인 헤일리스에게 임시지만, '보름달'을 만드는 방법을 넘긴 후였다.
아마 만들어지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리라 생각했다.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바안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정령들이 슬쩍 두고 간 '반영구 정화제'도 말씀드렸죠? 그거 막 이상하게 판단해서 치우면 안 됩니다."
반영구 정화제를 사방에 퍼트리려는 계획 역시 잘 진행되고 있었다.
<가끔 느끼는 건데, 공께서는 나를 어린아이 취급합니다.>
"그만큼 물가에 내놓은 심정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하벨 공.>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진심으로요. 다행입니다, 전하."
<…그거 압니까?>
"모릅니다."
<공이 제일 어려우면서도 또 제일 쉽습니다.>
"상대방이 내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요. 아, 아버지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협회가 하나 생길 겁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해줄 것 같습니까?>
"예."
하벨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자 바안의 웃음이 터졌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하벨 공께 무슨 일이라도 터진다면 정말로 많이 슬플 겁니다.>
겨우 웃음을 멈춘 바안이 급히 마무리를 지었다.
"이러면 훈훈한 걸로 포장이 됩니까?"
<진심입니다. 공께서 내게 레바놈을 줬잖습니까. 아주 잘 받았습니다.>
"그놈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더는 쓸모 없으니까요."
<그러니 왜 마음이 안 쓰이겠습니까? 무사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관직을 드리죠. 골골거리면서 일하는…….>
"조금 전 훈훈한 마무리로 끝내겠습니다. 그럼."
뚝.
하벨이 연락을 끊자마자 숨을 깊게 내쉬었다.
'…와아, 진짜 무서웠네.'
관직이라니.
그런 끔찍한 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왕이 되더니 머리가 커졌어.'
새끼 새가 자라 어느덧 독수리가 되어갔다.
"도련님. 있잖아, 나 진짜 무서운데 이래도 되는 거야?"
칼리우스가 성큼 하벨에게 다가가 물었다.
샤넬리움이 에른스트라는 걸 카샬에게 들었다.
그때부터 가슴이 떨려왔다.
―가자, 용용아. 형님이 그러는데 클로저의 수장? 아니다. 클로저의 대표가 날 보자고 그러네? 봐야지.
하벨이 에른스트의 정체를 밝힌 뒤로 충격도 가시지 않던 상황에서 자신을 데리고 갔다.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니 무언가를 대비하고자 하벨이 자신을 데려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여러 번 확인했어도 에른스트가 하벨을 보고 있으면 어쩌나 싶어서 방을 떠난 순간부터 불안했다.
"나, 괜히 들었어. 너무 긴장돼. 샤넬리움을 보면 표정을 이상하게 지을 것 같아. 아, 아니. 내가 도련님의 방을 지키고 있어야 했어."
"진정해, 용용아."
하벨은 불안에 떠는 칼리우스를 다시 진정시켜야 했다.
"도련님은 왜 이렇게 괜찮은 거야? 마, 만약에 들키면 어떡해? 그럼 도련님이 위험해지는 거잖아."
"지금 이 방법뿐이니까. 에른스트가 신이 될 방법을 막지 못하면 뭐가 됐든 끝이야."
이미 에른트스와 눈치 싸움에 돌입했다.
이건 에른스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면 끝인 싸움이었다.
"용용아. 내가 너에게 부담을 준 건 미안해. 하지만 나는 너를 속일 마음은 없고, 이건 너도 알아야 하는 부분이라서 말했어."
사실 에른스트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사람은 의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자신은 저들을 설득해야 했고, 사실을 알려야 했다.
"…알아, 도련님."
칼리우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는 걸 알아. 고마워, 도련님. 나, 다시 노력해볼게. 다시 참아볼게."
하벨은 칼리우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기특하네, 용용아. 하지만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참지 말고."
[이 몸은 잘 숨어다니면 되는 거지?]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물었다.
"그래. 에른스트는 정령들을 볼 수 있으니까."
하벨은 잠깐 칼리우스가 손에 쥐었던 달 무늬 가면을 썼다.
* * *
"오래 기다렸습니까?"
하벨은 달님으로서 클로저의 대표 앞에 섰다.
그 역시 반쪽짜리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자신을 보며 싱긋 웃었다.
"반갑습니다, 달님. 꼭 뵙고 싶었습니다. 저는 클로저의 대표인 크로니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호의적일 줄은 몰랐는데요?"
하벨은 정말 놀라며 말을 내뱉었다.
"원래 어떻게 보셨나요?"
"되게 재수 없다? 이렇게 봤죠."
하벨이 싱긋 웃는 만큼 라르웬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