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너였다니(3)
* * *
카샬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대체 언제 알게 됐습니까?"
"조금 전? 아까 전하를 뵙고 피 토하기 전에."
"알겠습니다. 또 말씀하시죠."
카샬은 숨을 삼키며 각오했다. 지금까지 겪어본 많은 경험을 통해서 하벨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레놀드 왕국 전체에 세뇌가 걸려 있다는 사실은 너의 스승님을 통해 들었잖아?"
"예."
올 게 왔다 싶은 마음에 카샬은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물이었어."
[…지금 물이라구 했어, 대장?]
나른한 표정을 짓던 아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아라야. 물이야. 오염된 물을 통해서 놈은 힘을 불어넣은 거야. 그래서 마법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던 거지."
"아니, 그럼 왜 하필 레놀드 왕국입니까?"
"여기가 용의 고향이니까. 너도 알다시피 용은 세상의 수호자야. 그런 용에게 당연하게도 권능이 있었어."
하벨은 무날과 태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카샬에게도 언급했다.
[오오, 맞아! 용용이한테 권능이 있어! 이 몸은 알고 있지.]
"세상의 수호자로서 무언가를 심판할 권리 말이야."
"심판… 이요?"
카샬의 눈빛이 의구심으로 물들자 하벨은 칼리우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용들 사이에 토론해서 안건을 들고 온대. 그 안건을 각 종족의 대표에게 서명을 받으면 마법 말고 세계의 수호자로서 힘을 낼 수 있다고 그래.
"용이 안건을 제시하고, 이 안건을 바탕으로 각 종족의 대표에게 서명을 받아야 하나 봐. 이게 조건인 거지. 내가 알기로 이 세계에 있는 종족은 둘이야."
"인어족하고 사람이겠네요."
"맞아."
하벨의 손가락이 아래를 가리켰다.
"우습게도 일단 사람의 대표는 바로 지금 레놀드 왕국이지 않을까 싶어."
제1 왕국, 레놀드.
이 사실을 누가 부정할까.
"물론, 이 대표라는 게 어떤 식으로 되는지 몰라도 보통은 투표로 뽑히는 거잖아? 그렇다면 레놀드 왕국이 빠질 수가 없어. 적어도 가장 큰 나라들이 모여야만 해."
하벨이 손가락을 모두 뻗었다.
"인간의 나라에서 다섯 나라를 꼽을 수 있어. 레놀드, 코스모피안, 헤스트리아, 신성 국가 시엘느. 그리고 놀랍게도 에르티안."
[에르티안 왕국은 어, 다들 약소국이라고 하는 걸 이 몸이 들었는데?]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티안 왕국은 약소국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 자리에 낄 자격이 충분하다고 봐."
―바안 전하께서 습격을 당하셨대. 물론, 괜찮으셔. 정확히 말하자면 습격을 당하기 전에 이걸 알아내셨으니까.
넬시아가 조금 전 자리를 떠나기 전에 말해주지 않았던가.
바안이 습격을 먼저 알아냈다고.
예전 같았으면 분명 엄청나게 끔찍한 결과를 불렀겠지만, 이번 기회로 달라졌다는 게 증명된 셈이었다.
"바안 전하께서 습격을 당하셨는데 버텼어. 이 상황에 누가 바안 전하를 건드렸겠어?"
하벨이 싱긋 웃자 카샬은 얼굴을 더 구겼다.
"에른스트… 밖에 없잖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니야? 게다가 누님께서 추진한 회담이 이렇게 큰 결과가 되어 돌아왔잖아?"
물의 오염과 관련된 세계 협회.
이미 코스모피안 왕국과 헤스트리아 왕국이 이곳에 가입한 상태였다.
바안은 자동 참여였고.
"자, 이제 여하를 불러줘."
여하는 인어족의 왕자였기에 인어족을 대표할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
"…끔찍합니다."
카샬이 얼굴을 구겼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뇨. 도련님께서 남은 나라를 돌아다닐 생각에 벌써 속이 쓰라려 끔찍합니다."
"에른스트가… 끔찍하다는 거 아니었어?"
하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놈은 끔찍하다는 말로 되겠습니까?"
카샬의 입가에 지독한 혐오가 걸려 있었다.
"어쨌든, 말씀부터 전하겠습니다. 그다음 일은… 커피를 마신 후에 찬찬히 생각해봐야겠네요. 저도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카샬은 벌써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하벨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 간식부터 챙기겠습니다."
"그럼 좋지! 오늘은 브라우니로 줄래? 머릿속이 복잡해서 달달한 게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벨은 카샬이 나간 뒤, 아라를 쓰다듬으며 잠깐 눈을 감았다.
지금은 머릿속을 텅 비우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엔 샤넬리움이 에른스트라는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 일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들 중 복수를 속에 품지 않은 이들이 있던가.
과거를 다시 바로 잡을 수 없지만, 적어도 에른스트의 미래를 막을 기회가 생겨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라의 보드라운 털 촉감이 평온함을 불러 들여주었다.
똑똑.
문이 제법 크게 울린 뒤, 여하가 걸어왔다. 그제야 하벨이 눈을 떴다.
"나를 불렀다 들었소."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불렀어."
해줄 말이라는 사실에 여하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기대해도 괜찮아. 아,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
"물어봐도 되오."
"물은 조용하지?"
"그렇소. 사실 귀인이 이곳에 들어설 때 이상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소?"
"그랬지."
"말을… 번복하기가 살짝 그래서 다시 알려주지 못했지만, 재잘거리는 소리가 바로 끊어졌소."
여하는 살짝 하벨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이 이상하지 않다고 그렇게 말해버렸으니. 말을 다시 번복하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껄끄러웠다.
하지만 이 사실을 흠잡지 않았다.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하벨은 재차 확인한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사실을 위해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지만, 가설이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기분이라 웃음이 저절로 났다.
[하지만 대장. 지금 같이 따라온 정령들은 다 괜찮은데?]
레놀드 왕실 근처에 정령들이 없었다. 그 이유를 몰랐지만, 하벨이 방금 알려준 말을 토대로 그 이유를 알아냈다.
에른스트의 힘 때문이라는 걸.
그렇기에 아라는 계속 생각한 의문을 털어냈다.
[막 부정한 것들처럼 무섭다거나 이상한 느낌은 없었어.]
"잠깐만, 여하야."
하벨은 여하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답해주었다.
"이 세뇌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을 거야. 불길한 느낌이 있다는 걸 정령들도 몰라야 했으니까. 그게 정령과 정령의 입을 통해서 새어나가면 안 되잖아? 이곳에 있던 정령들은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함을 느끼다 떠났을 게 분명해. 어쩌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라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아!]
아라가 그제야 눈을 크게 뜨며 반짝거렸다.
[이 몸은 이제 이해했어! 지금 어, 우리 때문에 그 못된 힘도 낮춰놨을 거야!]
"맞아. 그거야, 아라야."
하벨이 아라의 배를 쓰다듬자 여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허공에 손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정령사야. 그리고 용왕이지. 또 물 마법사이기도 해."
"……?"
여하는 갑자기 꺼내는 하벨의 말에 적응할 수 없었다.
"너희 인어족은 원래 어인족이었고, 이건 알고 있지 참. 어쨌든 그들이 따르는 왕이 바로 나였어."
"가,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오?"
"바다를 구해줄게, 여하야."
툭 치고 들어오는 말에 여하는 숨마저 삼켰다.
이 말을 정말로 들을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웠다.
"아니. 나는 바다를 구해야 해."
"구해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꼭 당연한 사실처럼 들려와 여하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바다를 되돌려 달라는 자신의 부탁이 얼마나 터무니없다는 건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간절했다.
그곳에 사는 모두가 걱정됐으니까.
"비록 왕이 아니더라도, 나는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야. 물은 내가 가족이고, 바다는 내 모든 것이야. 그들이 에른스트에게 유린당하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참겠어?"
"하지만 저번에는……."
"내가 아주 크게 배신당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 물이 너를 소개해줬기에 네가 내 뒤통수를 치지 않겠지만, 내 상황상 갑자기 다가온 너를 의심하는 게 맞잖아?"
"…미안하오. 내 서투름으로 또 실수할 뻔했소."
얼마나 오래 혼자였는지도 모를 만큼 계속 혼자였다.
사람이란, 아니, 살을 부대낄 수 있는 누군가는 지금까지 불편한 존재였으니까.
"여하야."
"말씀하시오."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부탁이오?"
"그래. 부탁이야."
여하는 간절함을 담은 하벨의 표정에 눈동자를 살짝, 살짝 굴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았다.
"왜 내게 명령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널 보았듯이 너도 날 보고 있었잖아?"
"그렇소. 지켜보고 있었소."
"어땠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여하는 수많은 표현 중이 하나를 콕 집었다.
"귀인은… 불나방 같은 사람이오."
[불나방?]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벨을 보았다.
"그건 아주 무모한 사람한테 쓰는 말인데, 보기보다 보는 눈이 없네, 여하야?"
[아니야! 여하는 눈이 엄청 좋아! 대장한테 딱 맞는 말이었어! 이 몸도 대장한테 불나방이라고 말해줄래!]
하벨의 손가락이 아라의 옆구리를 스치고 가자 아라는 발을 동동 굴리며 웃었다.
"불나방이라니. 그런 소리 하면 이렇게 간지럽혀 줄 거다?"
[히힛, 아, 알았어! 하하! 이 몸은 안 할게! 헤헤헤, 항복!]
하벨은 항복 소리를 받은 뒤, 아라의 배를 통통 두드리며 여하를 다시 보았다.
"어쨌든 내가 너한테 함부로 명령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 텐데 왜 그렇게 놀라?"
"귀인이 내게 질문하지 말라고 했소. 그래서 나는 솔직히……."
"미안해."
하벨이 사과하자 여하는 또 얼어붙었다. 당황스러웠다. 그저 당황스러워 자신이 잘 아는 부분을 언급해야만 했다.
"귀인은 왕… 이라고 했소?"
"왕이었지."
"왕은 사과하지 않는 자라 알고 있소. 왜 자존심을 깎는 행동을 하는 것이오?"
"잘못했으면 왕이든 뭐든 사과해야지. 내가 잘못한 건 네가 이곳으로 오지도 못하게 외부인 취급했다는 거야."
자신이 여하와 자신들 사이에 선을 그어버렸다.
"너를 외롭게 했어. 많이 외로웠지? 미안해."
"…귀인은."
여하는 정말로 당황해 말이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여하야. 왕은 감정을 내비치면 안 된다. 다 숨겨야 한다. 너는 인어족의 자존심이자 그들의 모든 것이니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라 자신이 아는 왕이랑 너무도 다르다는 건 확실했다.
"귀인은 나를… 자꾸 당황하게 하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네가 너이듯 나는 나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다르게 들렸기에 여하는 왜인지 마음이 울렸다.
"내가 너를 인어족이 있는 곳까지 길을 열어줄 테니,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
"무얼 할 셈이오?"
"에른스트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인어족의 힘이 필요해."
"…인어족은 사람을 싫어하오. 아주 증오하오. 우리의 이 치유력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한 적이 있소. 그래서 우리는……."
대체 왜 이 말을 하벨에게 하는지도 모른 채로 여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갔소.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오죽했으면 그렇겠소?"
"고마워. 나를 걱정해줘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저 말에 여하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하겠다는 것이오?"
여하가 놀라며 물었다. 순간, 볼에 느껴지는 폭신한 감각에 다시금 깜짝 놀랐다.
[잘한다, 여하. 이 몸이 쓰다듬어줄게. 빨리 대장 좀 말려줘!]
"해야지. 이건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해볼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어쨌든 여하야."
하벨의 미소를 본 여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참 강직하다 싶었다. 자신이 원했던 모습이기도 했기에 여하는 부러움을 느끼며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이오?"
"어떤 걸 말하는 거야?"
"무섭지 않소?"
"무섭지. 하지만 또 당할 순 없잖아?"
여하는 저 당당함을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과부하가 오고 말았다.
달랐다.
자신이 겪었던 사람 중 가장 달랐기에 오히려 낯설었다.
"넌 외부인이 아니야."
하벨은 인어족을 위해 자신에게 다가와 이렇게 직접 부딪힌 여하의 노력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나 얽히고, 앞으로 더 얽혀야 하는 여하이기에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고맙소."
여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겨우 대답했다.
"밖에… 나가 있어도 되겠소? 조금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하오."
"얼마든지. 혹시 레디나가 밖에 있으면 이제 들어와도 된다고 전해줄래?"
"알겠……."
여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저 부르셨어요?"
레디나가 뒤늦게 '똑똑'하고 노크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도련님한테 혼났어요?"
"아니오. 나는… 나가겠소."
여하는 여전히 당혹감이 어린 표정으로 다급히 나가자 레디나는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상황을 다 보진 않았지만, 하벨이 또 훅하고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그는 참 다정했고, 다정함이 낯선 만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레디나."
하벨이 놀랄 걸 기대했던 레디나는 그가 활짝 웃자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나하고 일 하나 할래?"
장난스레 건네는 말에 레디나는 소름이 우수수 돋아나는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동시에 흥미를 느끼자 레디나는 의자를 들고 와 침대 옆에 앉았다.
"혹시나 묻는 건데요. 언니한테 허락 맡으셨어요?"
[아니야!]
"아니."
아라와 하벨이 동시에 대답했다.
"혼나도 괜찮아요? 저랑 언니랑 방금까지 도련님을 어떻게 묶을지 의견을 나누고 있었는데요?"
레디나가 실실 웃자 하벨은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농담이지?"
"아뇨. 진담인데요? 아. 말이 나온 김에 하자면 그중에서 제일 좋았던 말은요, 칼리우스 님을 꼬시는 거였어요."
"치사하네, 진짜."
사실 칼리우스가 제일 피하기 어려웠기에 하벨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먼저 치사하게 하신 건 도련님이잖아요. 아라 님하고 몰래 밤놀이도 가신 거 아는데요."
[…히끅!]
아라가 딸꾹질하며 다급하게 앞발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