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55화 (355/415)

355화. 너였다니(2)

* * *

'하지만 분명히 뭔가 더 있을 거다.'

레놀드 왕국이 사라지고, 오미너스가 진짜 적으로 등장하는 건 앞서 절망감을 굳히기 위한 부차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앞에 무엇이 더 있다고 확신하며 하벨은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샤르비에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전달해줄 게 있다면 말하세요."

시간이 없었다.

이 이상 시간을 더 끄는 건 괜한 의심을 살 수가 있었다.

"이 나라에… 신관이 왔네. 정확히 무얼 하는지 몰라도 기억하고 있네."

'그렇지 신관이 엮이는 게 당연하지.'

하벨은 샤르비에의 말에 속으로 긍정했다.

애초에 에른스트가 신이 되고자 하니 신성 국가와의 관계를 게을리하겠는가.

"신관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네. 신관이 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니. 나머지는 이 세뇌가 풀려야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거라 생각하네. 아직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좋습니다. 일단 그것만 약속하십시오."

"약속이라니?"

"전하와 나의 적인 놈의 이름은 에른스트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쓰러트려야 할 적이죠. 그러니 레놀드 왕국 역시 어떤 희생을 낳더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대신 나는 이 세뇌를 풀어주겠습니다.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어떤 계약서도 없는 구두였지만, 샤르비에 자신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놀랐고, 당황스러워서 미처 알지 못한 부분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저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가 자신의 세뇌를 풀어주지 않았던가.

그럼 무얼 망설일까.

"약속하겠네."

"예. 그럼 저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하벨은 처음 그랬듯이 샤르비에의 눈을 가렸다.

다른 손으로 가면을 쥐었다.

칼리우스가 어서 들어가라는 하벨의 신호에 깜짝 놀라더니 여전히 아라가 만들어 놓은 물의 길로 몸을 반 이상 집어넣었다.

"그럼, 나중에 뵙죠."

하벨은 아라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은 뒤 가면을 썼다.

저주를 막지 마.

이미 하벨에게 들었기에 아라는 그가 보내는 말을 눈치챘지만, 그래도 망설여지는 걸 어떡하겠는가.

[이 몸은… 어. 으음.]

하벨이 손가락을 올리자 아라는 말을 더는 이어가지 못했다.

3.

2.

1.

아라가 먼저 저주를 막는 물을 거두자 하벨이 그 뒤를 이어 샤르비에를 감싼 물을 지워버렸고, 칼리우스가 마지막으로 마법을 거두며 안으로 들어갔다.

콱.

다시 하벨이 다른 손으로 샤르비에의 손목을 붙잡았고, 아라는 힘없이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이게 무슨……."

샤르비에의 말이 멈췄다.

무언가 바닥을 적시고 있지 않던가.

'…어라?'

하벨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영혼을 네 번째로 얻은 뒤에 독단적으로 용왕의 힘을 사용한 건 처음이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코피 정도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주의 반동으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셨다.

하벨은 놀란 표정 그대로 샤르비에를 바라보았다.

욱신.

아주 잠깐 가슴팍이 아플 뿐이었다.

'저주가… 이 정도였다니.'

하벨은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대로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의, 의사를 불러오거라!"

샤르비에는 당황한 행동 그대로 목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 * *

"…미안합니다."

샤넬리움이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왜 사과하십니까?"

하벨은 속에서 올라오는 온갖 역겨움을 참아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너무 공을 몰아붙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타고난 체질이 이랬을 뿐입니다. 아니면 공기 중을 타고 오염된 물이 제게 흘러왔을 수도 있고요."

하벨은 '오염된 물'을 대놓고 언급하며 샤넬리움의 반응을 살폈다.

샤르비에 앞에서 피를 쏟은 뒤 자신은 다급히 방으로 옮겨졌다.

헤레스가 놀라 달려왔고, 이 소식을 듣고 누구 할 것 없이 자신의 방에 우르르 와서 한마디씩 말을 꺼냈다.

순서 상관없이 꺼낸 말이 불협화음을 냈지만, 적어도 하벨에게는 최고로 듣기 좋은 음악과도 같았다.

―이제 다들 여기까지 하시죠. 더 말씀하셨다가 도련님께서 어지러움을 느낄지도 몰라요.

이제 에른스트의 정체가 누구인지 말하려던 참에 헤레스가 다 돌아가라며 모두를 쫓아내고 말았다.

―저는 잠깐 이 보름달을 어떻게 빠르고 쉽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생각해보려고요. 도련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이세요. 지금 제가 나가는 건 그러니까 조용히 있을게요. 괜찮죠?

헤레스가 오미너스의 움직임을 빼앗을 수 있는 액체인 '보름달'의 대량생산 방법을 생각하며 무언가를 적는 '사각사각' 소리를 배경 삼아 하벨은 생각해야 했다.

에른스트가 세뇌를 이용해 레놀드 왕국 전체를 없앨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은 세뇌가 풀린 샤르비에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에른스트가 오기 전까지 계속 생각했던 건 바로 어떤 방법으로 레놀드 왕국을 세뇌를 시켰느냐였다.

마법이 아니라는 건 칼리우스를 통해 연거푸 확인했으니까.

"…오염된 물이요?"

샤넬리움은 살짝 당황한 모습을 그려냈고, 하벨은 저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하벨 역시 가증스러운 가면을 덩달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에 '독'임에도 독으로 인정되지 않는 수단이 있질 않던가.

'…오염된 물이었다.'

에른스트가 오염된 물을 만들었으니,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레놀드 왕국으로 한정된 걸 본다면 그 힘이 완벽하다 할 수 없었다.

이는 이 땅에 깃든 물을 통해 다 살펴보면 되는 일이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예. 저는 오염된 물에 내성이 없습니다."

하벨은 '하벨 티에라'가 가진, 이미 모두가 아는 약점을 샤넬리움에게도 털어놓았다.

샤넬리움이 에른스트라는 걸 안 그 순간부터 왜 그렇게 물 마법사라는 존재에 집착을 드러내는지 알 수 있었으니.

'저놈이 나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다. 나를!'

하벨은 속으로 웃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가.

세상에 절망감을 안겨주기 위해서 영웅이라는 수단이 필요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만큼 손쉽게 절망감을 안겨줄 방법이 어디 있을까.

그 뒤에 레놀드 왕국이 사라지고, 오미너스가 진짜 적으로 등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래서 네놈이 레바놈을 버렸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첫째 왕자인 레바놈이 자신한테 암살자를 보냈다는 사실을 듣고 해코지하지 못하게 버렸겠지.

그냥 버리기에 아까우니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에르티안 왕국에 벌어진 왕 암살사건을 해결할 거리를 던져 사회적 신분을 높이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마법사 협회도, 오미너스도 다 그 속에 포함된 계획 일부였다.

'이거 즐겁게 됐네.'

하벨은 이제 에른스트가 무얼 원하고 무얼 바라며 무얼 두려워하는지 알게 됐다.

'내가 용왕인 걸 모르고, 나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한다니. 참, 재미있어.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됐으니 하벨은 느긋하게 이곳에 뿌리를 잡아 여러 가지를 할 셈이었다.

일단, 놈이 이 땅에 뿌리 박은 세뇌를 없앨 방법을 찾는 게 먼저였다.

"…으음. 아무래도 정화 작업에 더 신경 써야겠습니다."

샤넬리움의 눈동자에 곤란함이 내비쳤다.

오염된 물이 하벨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다니.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당분간 아무 걱정하지 말고 쉬세요. 모든 일정은 뒤로 미뤄두겠습니다. 전하께도 잘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그럼 마법사 협회는……."

"하벨 공의 몸이 먼저입니다. 오히려 생각할 시간이 길어져 다행이다 싶네요. 내가 공을 몰아붙인 게 아닐까 싶어 굉장히 걱정했습니다."

샤넬리움은 활짝 웃었다.

덩달아 하벨은 샤넬리움과 다른 의미를 띤 웃음을 입가에 달았다.

이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고, 지켜야 하는 에른스트로서는 물의 오염을 낮추는 방법밖에 없을 테지.

다르게 말하자면 자신한테 기회가 찾아온다는 의미였다.

특히 자신이 머무는 왕실에 세뇌의 힘을 더는 사용하기 곤란해졌을 테니까.

'고맙다. 이렇게도 내가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어주니.'

이 병신아.

하벨은 입이 너무도 간지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런, 얼굴만 잠깐 보러 왔는데 이렇게 자꾸 말이 길어지네요."

샤넬리움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젠 정말 가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하벨 공."

"이렇게 찾아와줘서 감사합니다, 저하. 정말로 어떤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벨은 자신을 잠깐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샤넬리움을 향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담았다.

'네 뒤통수를 내가 어떻게 치는지 두고 보거라.'

샤넬리움이 나갈 때까지 하벨은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천천히 닫히는 문과 함께 여러 마음이 교차했다.

과거와 상황이 바뀌었다는 게 느껴졌다.

과거에는 놈이 몸을 납작 엎드려 자신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는 걸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놈이 자신을 모르니 이제 놈이 가진 모든 걸 부서트리는 건 자신이었다.

'이미 합쳐버린 세상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다른 것들은 가능하지.'

이미 여러 개를 부서트리지 않았던가.

특히 최근에 부서트려버린 건 헤스트리아 왕국에 있던 오미너스였다.

―그, 그래서 오미너스가! 오미너스가아 필요했습니다! 신이 되고자, 시, 신이 되려고요!

자안이 알려주지 않았던가.

오미너스는 신을 부르기 위한 여러 조건을 부합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절망감도, 세상의 위기도, 서로를 향한 갈등까지.

이토록 완벽한 존재가 있을까.

'…다만, 하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창문 너머로 몸을 숨긴 아라에게 걸어갔다.

'왜 네가 직접 손을 쓰지 못하는가.'

자신을 죽일 때부터 에른스트는 제 손을 직접 더럽히지 않았다.

지금처럼 누군가를 앞세워 하나씩 무너트리지 않았던가.

'직접 움직이면 편할 텐데.'

유렌에게 틈의 세계를 묶었던 것부터 시작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드르륵.

창문을 열자 아라가 하벨에게 달려와 그를 힘껏 안았다.

[대장! 이 몸은 왜 샤넬리움이 올 때 숨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놈이 에른스트니까."

싱긋 웃는 하벨의 표정에 아라는 고개를 올려 눈을 깜박거렸다.

천천히 고개가 기울어지고 여전히 깜박거리던 눈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버렸다.

입을 벌리고는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으어어…….]

아라는 앞발로 자신의 머리를 잡았다.

[이, 이, 이 몸은 지금 어. 어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중심조차 잡지 못하고 바닥에 픽 하고 쓰러질 뻔한 아라를 하벨이 붙잡아서는 조심스레 안았다.

"이거 들으면 다들 반응이 좋겠는데?"

하벨은 아라의 반응을 보며 흡족했다. 얼빠진 그들의 표정을 보며 얼마나 배를 잡고 웃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대, 대장!]

아라가 순식간에 날아서는 하벨의 볼을 붙잡았다.

"왜?"

[이, 이 몸의 눈을 보고 말해줘어어!]

"말하고 있어."

[에, 에, 에른…….]

"맞아. 에른스트야."

하벨은 키득거렸다.

"사실 아까 말하려다가 기회를 놓쳐버렸거든."

[우, 우, 우와아아. 이 몸은 지금, 너무 놀라서, 쓰다듬어줘. 어서…….]

아라는 축 늘어져서는 하벨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원하는 대로 아라를 쓰다듬어주자 표정이 편안하게 변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카샬이 안으로 들어오자 하벨은 말문을 열었다.

"여하만 불러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사실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해야 했는데 왕의 꼬락서니가 마음에 무척 들지 않아 이것저것 하다가 미뤄지고 말았다.

"아, 그리고 조금 뒤에 레디나도 불러줘."

"뭔가 수상하십니다."

카샬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의심에 찬 표정을 보니 하벨은 놀려주고 싶었다.

아라를 쓰다듬던 손을 흔들었다.

"수상할 거 없어. 잠깐 이리 와줄래, 카샬."

"왜 그러십니까? 거기서 말씀하시죠."

오라고 하니까 카샬은 가고 싶지 않았다. 아주 수상했다.

가뜩이나 도멘이 꺼낸 사실 때문에 괜히 신경이 더 쓰이고, 하벨이 무슨 말을 꺼낼까 두렵기도 했다.

장난기가 어린 하벨의 미소에 카샬은 마지 못해 걸어갔다.

"제발, 얌전히 계십시오. 여기저기 쏘아 다닌다는 말씀만큼은 하지 마십시오."

"되게 중요한 이야기야."

"도련님께서 꺼내시는 말 치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카샬은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하벨 앞에 서자 괜히 몸이 뻣뻣해졌다.

"마음의 준비는 됐어?"

"제가… 뒷덜미를 잡을 이야기입니까?"

"샤넬리움이 에른스트야."

"……."

카샬은 침묵했고, 아라의 귀가 쫑긋 섰다.

[나가자, 대장! 이 몸은 당장 레놀드 왕국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 어서! 빨리!]

쉬잇.

하벨은 손가락을 입술에 올렸다.

"내가 왜 너한테 말했는지 알겠지? 전달해줘. 조용히. 너라면 나보다 더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을 테니까."

이미 자신이 레놀드 왕국의 왕인 샤르비에를 만나다가 쓰러졌다는 소리에 우르르 몰려온 뒤였다.

여기서 또 모인다면 오히려 더 시선을 끌지도 몰랐다.

카샬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조용히 뜬 눈은 크게 흔들리며 정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나, 이런 걸로 장난 안 치는 거 알잖아?"

"…이런, 망할!"

카샬은 말을 퍼부었다.

샤넬리움이 에른스트라니. 그렇다면 에르티안 왕국에 왔을 때부터 하벨이 물 마법사라는 사실을 들먹여 조심하지 않았다면 바로 들킬 수 있었다는 게 아닌가.

아니.

멍청하게 이미 적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 밀어버렸다.

이런 엄청난 일을 하벨은 대체 언제부터 알게 된 걸까.

"……망할!"

말보다, 숨보다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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