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너였다니
* * *
"허락하겠네."
샤르비에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벨은 다시금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모두 물러나게."
샤르비에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물러서자 하벨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샤넬리움이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무엇이 우습다는 건지 몰라도 비웃음처럼 보였다.
시선을 마주쳤다.
조금 전 짓던 미소와 다른, 활짝 웃는 모습에 하벨은 이제 오싹하기까지 했다.
그 오싹함 속에 어딘가 익숙한 느낌마저 몰려왔다.
혹시.
'아니, 생각하지 마라.'
하벨은 머릿속에서 밀려오는 생각을 누르려 숨을 짧게 쉬었다.
지금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샤르비에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후."
하벨은 짧은 숨을 내쉬며 눈을 잠깐 깊게 감았다가 떴다.
어제 카샬한테 이야기를 들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꺼낸 이야기인 만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척이나 컸다.
―스승님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멈췄다.
―도련님의 직감이 맞았습니다. 레놀드 왕국은 이상한 게 맞았습니다.
다들 나가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께서 용을 찾으러 떠나신 것도 다 이 이유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벨은 샤르비에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 더 다가갔다.
―알 수 없는 힘이 이곳에 퍼져 사람들을 세뇌했다고 합니다.
무날과 태련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 말을 듣고서 대체 왜 저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혼이 나고 말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 힘이다.'
이 힘이 레놀드 왕국을 에워쌌던 용의 결계를 부순 그 힘이라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용의 결계를 부수지 않았으면 이 나라를 세뇌할 수 없을 테니까.
―그 사실을 스승님한테 말해준 사람이 바로 이 나라 샤르비에 레놀드 전하십니다. 샤르비에 레놀드 전하께서는 이 땅에 남아 있던 용의 힘으로 가까스로 버텼지만, 결국…….
그게 아니라면 카샬이 '용의 힘'이라는 말을 대놓고 쓰지 않았을 테지.
두근두근.
하벨은 가슴이 설렘으로 물들어갔다.
나라를 세뇌로 물들일 힘을 가진 존재가 누가 있겠는가.
―에른스트에게… 무기를 받았습니다. 그걸 받은 뒤에, 하나씩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안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무기를 받은 뒤에 세뇌를 당했다고. 놈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이곳에 있다.'
하벨은 샤르비에를 바라보았고, 당장 입꼬리가 올라올 것만 같아 서둘러 입술을 열었다.
"…콜록, 콜록!"
하지만 하벨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말이 아니라 기침이었다.
"왜 그러는가?"
샤르비에가 걱정을 담아 물었다.
"죄, 콜록, 죄송합니다, 전하. 알레르기가 있어서……."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샤르비에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는 하벨 티에라의 이미지를 이용한 것뿐이었다.
"내 의사를 불러오겠네."
"창, 문을, 콜록, 콜록. 창문만. 콜록!"
"잠시만 기다리게!"
샤르비에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하벨의 상태에 노쇠한 몸으로 다급히 뛰어 창문을 열었다.
마치 하벨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처럼 보였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콜록……."
하벨은 여전히 기침하며 바람을 따라 스르르 들어오는 아라를 보았다.
[이 몸이 들어가도 되는 거 맞지?]
아라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하벨이 사람들을 물려달라 요청한 건 샤르비에가 정령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 몸은 이제 들어간다?]
아라가 기어가듯이 앞발만 허우적거리며 샤르비에 뒤로 움직였다.
당당하게 와도 되건만, 죄를 지은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이제 좀 어떤가? 안색이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하네."
샤르비에가 하벨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다.
이게 원래 성품인 건지, 아니면 세뇌 때문인지 헷갈렸지만, 뭐가 대수일까.
"감사합니다, 전하. …하."
하벨은 일부러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도 몸에 남은 헤스트리아 왕국의 후유증이 도움이 되다니.
"바람을 쐬니 한층 낫습니다."
"다행이네. 나는 정말로 큰일이 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샤르비에는 안도하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참 따스해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레놀드 왕국에서 혹여나 물 마법사인 자신이 죽을까 봐 외교적으로 걱정하는 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장.]
아라가 소곤소곤하며 하벨을 불렀다.
크게 말해도 샤르비에는 모를 텐데.
[이 몸은 이제 여기서 용용이를 부른다? 부르면 되는 거 맞지, 대장?]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로 아라는 여전히 엉금엉금 기어가듯 샤르비에 뒤로 움직였다.
"예. 저도 놀랐습니다."
아라는 '예'에 힘을 준 하벨의 저 말이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
[…후우.]
크게 숨을 쉬며 아라는 꼬리를 한 번 잡아서는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좋아! 이 몸은 준비됐어!]
아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서는 익숙하게 앞발을 흔들며 물의 길을 열었다.
허공에서 나타난 물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스으윽.
물의 길에서 팔이 보이자 하벨은 태연하게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몸이 이렇게 갑자기 나빠질 줄은 몰랐습니다."
"혹 그대만 괜찮다면 내일 다시 말해도 된다네.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없어."
"아뇨. 꼭 오늘이어야만 합니다."
하벨은 구태여 샤르비에의 시선을 끌 이유가 없기에 아라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이러는 건가?"
심각해진 샤르비에의 표정을 보며 하벨은 말을 막 던졌다.
"코스모피안 왕국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카샬에게 세뇌라는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웃기게도 코스모피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장인 셴에게 조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티안의 마법사 협회장 헤스트리아는 세뇌에 걸렸고, 시렌의 세뇌에 걸리지 않은 협회장은 지금으로서 셴이 유일했으니까.
―세뇌는 도중에 멈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뇌가 멈췄다고 해도 그게 완벽히 멈춘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오류니까요. 그래서 자각을 못 할 겁니다. 어차피 세뇌가 멈췄다는 사실도 세뇌를 했던 사람이 물어서 알아낼 수도 있으니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건 왜 물으시죠?
칼리우스가 물의 길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소리를 죽여버렸는지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칼리우스의 마법이 먼저 펼쳐지자 하벨은 샤르비에에게 더 다가갔다.
"코스모피안 왕국이라니."
샤르비에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레놀드 왕국과 코스모피안 왕국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 만약에 하벨 자신이 샤르비에의 세뇌를 멈춘다면 이 구간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코스모피안 왕국.
샤넬리움이 먼저 언급한 모든 사태의 원흉이지 않은가.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살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탁.
하벨은 손을 뻗어 샤르비에의 손목을 붙잡았다.
샤르비에가 놀라자 하벨은 다른 손을 들어 샤르비에의 눈을 가렸다.
하벨이 용왕의 힘을 끌어올리면서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자마자 바로 샤르비에를 물로 감쌌다. 지금으로서 세뇌를 멈출 유일한 방법이었다.
몽글몽글.
하벨은 손목을 놓고 가면을 뒤집어썼다.
"전하."
하벨이 손을 내리며 샤르비에를 부르자 그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보글보글.
물속에 있다는 사실에 기겁했지만, 하벨이 차분히 말했다.
"숨 쉴 수 있습니다. 말도 할 수 있고요."
찬찬히 숨을 쉰 샤르비에는 적응하다 말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조금 전과 눈빛이 달랐다.
세뇌가 멈춘 게 확실했다.
"용을 기억하십니까?"
"무슨 짓이지?"
샤르비에가 주춤거리며 뒤로 움직이려고 하자 하벨은 그를 말렸다.
"안 됩니다. 다시 알 수 없는 힘에 잠식될 겁니다. 그 물속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그래서 용을 알고 있습니까?"
"…대체 누구한테 그 말을 들은 건가?"
샤르비에는 소름이 돋아났다.
이미 세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도멘이 어떻게 됐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시잖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말씀해주시죠."
샤르비에는 달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남자의 재촉에도 여전히 의심하며 바라보았다.
상황이 어떤지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대를 어떻게 믿고 내가 말을……."
"내가 용이야."
칼리우스가 말문을 열자 샤르비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본 시선 속에 천이 흔들리고 있었다.
샤르비에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천을 어떻게 잊겠는가. 용의 알을 감싼 천인데.
"도멘은 지금 어떻게 됐느냐?"
"잘 있습니다."
하벨의 대답에 샤르비에가 발끈했다.
"도멘을……!"
"진짜 그냥 무사히 있다는 의미입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고, 의심스럽다는 건 이해합니다. 그래서 용과 함께 왔습니다. 이제 말씀해주시죠. 대체 이 세뇌를 건 놈이 누굽니까?"
"그래. 말해줘. 밖에서 눈치챌 거야."
칼리우스의 부탁까지 이어지자 샤르비에는 찬찬히 떠오른 기억을 되짚어갈 새도 없이 결정해야만 했다.
저 천은 분명히 알을 덮인 천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이곳에 있으면 위험하다며 들고 가지 않았던가.
그 누군가가 저 달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사람이었을까.
"레놀드 왕국을 구하고 싶지 않습니까.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건방질 대로 건방진 말이었지만, 샤르비에는 이상할 정도로 신뢰가 느껴졌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로 큰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예감이 들자 샤르비에는 도멘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을 꺼내 놓았다.
"내겐 자식이 넷뿐이네. 모두 하나같이 제 잇속만 탐내는 것들이라 왕위를 함부로 물려주질 못했지."
하벨은 방긋 웃었다.
샤르비에의 자식은 현재 다섯이었다.
"나에게 없는 자식이 하나 더 늘어났지. 그 누구보다 완벽한 왕자로서 말이야."
"이름은… 샤넬리움 맞습니까?"
"그래. 그놈일세."
"…하."
하벨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이전에는 나의 삼촌이었다가, 지금은 내 아들이 된, 괴물 새끼가 이곳에 들어와 앉았단 말이네."
샤르비에는 얼굴을 가득 구기며 두려움과 분노로 이를 악물어 볼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에른스트와 유렌. 이 둘은, 쿨럭.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에른스트는 몸이… 없습니다. 이 세계에 살아 있을 수 있게, 이걸 유지해주는 매개체 같은 존재가, 바로 유렌입니다.
하벨은 샤르비에가 방금 꺼낸 말과 자안이 알려준 말을 조합하며 확신했다.
육체가 없기에 존재가 없으며 세뇌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샤넬리움이…….'
하벨은 가슴 속에서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바로 에른스트다.'
몸이 없는 에른스트에게 머리카락 색이 검정이든 아니든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에른스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애초에 레놀드 왕국이라는 이름이 되기 전부터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혹시 용의 결계를 부순 것도 놈입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기록되었으니까."
'…역시 용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결계를 부수는 데 성공했지만, 용의 결계를 박살 내는 데 시간이 걸린 건지 알은 이미 왕실 내부로 옮겨졌고, 이를 얻기 위해서는 왕실 사람이 되어야만 했겠지.
'그러나 알이었던 칼리우스를 류아가 구함으로써 허탕이 되고 말았을 거다. 그래도 놈은 기다렸다.'
이곳이, 레놀드 왕국이 바로 용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언젠가 돌아오리라 생각한 게 아닐까.
정말로 칼리우스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나는 이 나라를 둘러싼 힘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네. 하지만 용의 알이 사라지니 더는 저항할 수 없었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샤르비에는 이어가던 말을 삼켰다.
그 이유를 외부인에게 들먹여봤자 무얼 하겠는가.
하벨도 샤르비에가 꺼낼 말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궁금한 건 하나였다.
"지금 놈이 레놀드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아니, 뭘 노리고 있는 겁니까?"
"레놀드 왕국은 알다시피 제1 왕국이지. 그런 왕국이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어떨 것 같은가?"
샤르비에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천천히 올라가는 눈동자에 절망이 드리웠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마지막 조건이 바로 절망감입니다.
'…엘라힘이 신을 부르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절망감이라고 했다.'
하벨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레놀드 왕국이 사라지는 것 역시 저 절망감을 위해서가 아닌가.
"놈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려는 겁니까?"
"그건 모른다네. 지금 기억이 온전하질 않네."
샤르비에가 고개를 가로젓자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 나라를 한 번에 지울 수 있는 수단이 뭐가 있는가.'
하벨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다 아라가 슬쩍 다가오자 어깨를 흠칫거렸다.
[어어엇. 이 몸은 그냥 대장이 생각이 많아 보여서 살짝 찌르러 온 거야.]
아라는 당황했고, 하벨은 여전히 생각했다.
'바보 같으니라고. 있긴 뭐가 있겠어?'
하벨은 자신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세뇌다.'
이 나라 사람들이 한 번에 죽을 수 있는 명령은 바로 '죽어라'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오미너스.'
이미 세뇌로 다 죽었어도 오미너스가 레놀드 왕국을 얌얌 먹는 걸 보여준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