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깜짝 놀랐다
* * *
* * *
"…환영합니다."
활짝 웃는 얼굴로 하벨 일행을 볼 때마다 누구든 상관없이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졸졸 따라오면서 구시렁거리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던 코스모피안 왕국과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레놀드 왕국의 기사들은 제대로 된 호위와 더불어 꼭 필요한 말만 건넸고, 지나가다가 마주했던 사람들은 속닥거림과 말을 잊은 것처럼 험담이나 뒷말은 일절 하지 않은 채로 은은한 눈빛만을 드러냈다.
'진짜 소름 끼치네.'
하벨은 마냥 짜증이 났던 코스모피안 왕국과 달리 이곳은 뭔가 모를 찝찝함이 계속 돋아나 마음이 불편했다.
친절하고, 밝고, 온화한 분위기는 이해하나 무언가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받은 대우 때문은 아니겠지.'
두 나라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도 뭔가 달랐다.
그게 뭔지 하벨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말 상황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저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몰랐기에 상황을 파악하고자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저기……."
착.
그저 '저기'라고 부른 작은 소리에 기사단장이 걸음을 멈췄고, 이윽고 기사들이 이를 따라 제자리에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상황을 파악하려는 눈빛이라기에는 어딘가 달랐다.
걱정이 어려 있었다.
'이거 역시 너무 이상한데?'
하벨은 다시금 돋아나는 닭살에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왜 자신을 극진하게 대우하는지 몰라도 하벨은 이 배경에 어울리는 주인공이 될 생각이었다.
"편안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기사단장이 다독이자 하벨은 입을 열었다.
"제가… 음. 얼마 전에 거길 다녀왔잖습니까."
코스모피안 왕국.
하벨은 그 말을 생략하며 머뭇거리고 또 일부러 말을 질질 끌었다.
솔직히 답답할 만하지만, 기사단장의 반응은 달랐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주겠다는 의지를 가득 품으며 눈마저 초롱초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잘해주십니까? 저는 솔직히 이런 대우를 받을 입장이……."
"절대 아닙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당신은 세상에서 유일한 물 마법사가 아닙니까?"
섬뜩.
하벨은 순간 닭살을 넘어선 어떤 섬뜩함을 느꼈다.
'…내가 잘못 봤나?'
기사단장이 '물 마법사'를 말할 때 뭔가 이질적인 눈빛을 지었다.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기사단장은 말을 이어가는 듯하다가 잠깐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어떤 대우를 받으셨는지 압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더 신경 써서 하벨 공을 맞이하라는 왕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셨든 잊어주십시오. 우리 레놀드 왕국은 다르니까요."
부드러이 웃던 기사단장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하벨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환영합니다!"
시종들의 인사도, 정성이 담긴 귀족들의 인사도 보는 내내 무얼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기사단장이 멈춘 곳은 궁에서 살짝 안쪽에 있는 복도였다.
'그럼 그렇지.'
하벨이 이제야 마음을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이거였다.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목덜미를 노리던 암살자부터 시작해 매번 절벽에 놓인 줄을 타고 건너는 아찔함이 뒤따라왔는데 이게 빠질 수가 있겠는가.
'이제 어떤 걸 보여줄 셈이지?'
하벨은 기대가 됐다.
하지만 복도를 돌자 머릿속에서 예상했던 허름하고 방치된 공간이 아닌 어제 막 공사를 끝낸 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하며 심지어 반짝반짝하기까지 한 공간이 드러났다.
'…이게 아닌데?'
"여기부터 저기 안에 있는 방 전부 여러분들이 쓰실 곳입니다. 데리고 오신 기사분들은 여기부터 경비가 허락됩니다."
"경비가… 허락된다고요?"
하벨이 놀라며 물었다.
"예. 외부 경비는 우리 왕실 기사들이 맡겠지만, 내부 경비는 부담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이 되어 서지 않는 방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벨 공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내부 경비를 설 테니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시도 하지 않겠다고?'
하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벨 공께서 이곳 왕실에 허락을 구하며 들릴 장소는 알현실, 전하와 왕자, 공주님의 방과 창고, 그리고……."
기사단장이 허락된 장소를 늘어놓았지만, 대부분 왕족이 사용하는 시설이니, 사실상 거의 다 된다는 말이랑 다를 게 없었다.
'이거 뭐야?'
하벨은 기사단장이 고개를 숙일 때까지 잠깐 얼어붙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자, 잠시만요."
하벨이 놀라며 기사단장을 붙잡았다.
"예. 말씀하십시오."
"전하를 먼저 봬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전하께서 하벨 공의 상태를 익히 들었기에 내일 아침을 먹은 뒤, 편한 시간에 언제든지 들리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기사단장은 더는 시간을 빼앗는 게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용건만 말하고는 얼른 자리를 비켰다.
우르르 나가는 모습에 하벨은 슬그머니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왜, 막내야?"
"저 볼 좀 꼬집어줄래요?"
"아파도 난 모른다?"
라르웬은 이때다 싶어서 하벨의 볼을 꼬집었다.
손가락을 비틀자 하벨의 볼이 빨개졌다.
찰싹.
넬시아가 깜짝 놀라며 라르웬의 팔을 때렸다.
"너, 하벨 볼을 그렇게 세게 꼬집으면 어떡해?"
"아니. 꼬집어달라던 건 막내였잖아?"
"그래도 여기 봐봐. 빨개졌잖아. 괜찮아, 하벨?"
넬시아가 하벨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볼이 빨갛다 못해 얼얼한 느낌이 이어지자 하벨은 말문을 열었다.
"…진짜 이상해요."
"아니. 이상한 건 너인데?"
라르웬이 하벨의 말을 부정하며 낄낄 웃었다.
"대체 왜 이렇게 잘해주죠?"
멍하니 입을 연 하벨의 말에 라르웬이 흠칫 놀랐다.
싸늘하고 차가운 시선이 이어지자 라르웬은 하벨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미,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 * *
탁.
유자차를 하벨 앞에 내려놓은 카샬이 말문을 열었다.
"…이상합니다."
"바로 그거지!"
유자차에게 본능적으로 손을 뻗던 하벨이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진짜 이상하지? 내가 괜히 느낀 게 아니지?"
"예. 이상합니다."
카샬이 긍정했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예법을 죽어라 익혔던 기억들이 있기에 저들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어떤 위화감이 눈에 보였다.
"너무 완벽합니다."
"너무 친절해!"
칼리우스가 카샬의 말을 뒤이었다. 구겨진 카샬의 표정과 달리 칼리우스는 배시시 웃었다.
"뭔가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레디나는 살짝 기운이 빠진 채로 뒤꿈치를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 이런 느낌을 어디서 봤는데 말이죠."
열심히 생각하고자 레디나는 벽에 기대어 한쪽 발을 까닥거렸다.
분명히 언제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잘 모르겠소. 이런저런 나라가 있는 게 아니오? 다만, 레놀드 왕국이 생각보다 이렇게 협조적일지는 몰랐소."
여하는 눈을 깜박거렸다.
"맞아요. 저는 친절해서 좋았어요. 이렇게 협조적인 게 얼마 만인지 몰라요."
헤레스가 활짝 웃었다.
방금 일어난 일만 생각해도 가슴이 설렜다.
"주방장이 저한테 먼저 와서 도련님께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물어보더라고요. 아, 왕실 집사도 저한테 와서 앞으로의 일을 준비하려면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야 한다며 알려달라고 무려 '부탁'을 했어요. 어떤 시간을 줄이는 게 좋을지 조금 있다가 같이 상의하기로 약속도 잡았고요."
하벨의 상태가 '좋다'와 '좋지 않다'로 구분하자면 당연히 좋지 않다 쪽에 가까웠다.
최소, 정말 최소한으로 잡자면 1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 정도였기에 제발 그만 좀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다.
"혹시 푸른 돌이 많이 생겼어?"
하벨이 넉살 좋게 물어보자 헤레스는 숨을 길게 내쉬며 안경을 붙잡았다.
"예. 저주가 강해지면서… 푸른 돌이 점점 늘어나네요. 하지만 그래도 많이 늘어난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헤레스는 링거를 살피며 말을 삼켰다.
[있잖아, 대장. 이 몸은 정령들이 없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려. 꼭 뭔가로부터 도망친 느낌이 들어.]
아라가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그 말을 귀에 담았다.
"걱정하지 마, 아라야. 나도 알 수 없는 이질감이 신경 쓰이던 차니까."
"맞아. 여기에는 마법이 없는걸."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우스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런데 불길해. 선배랑 같이 이리저리 가봤는데도 모르겠어. 엄청 잘 숨겨서. 일부러 막 이상한 길로도 갔는데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그 불길함이 뭔지 모르겠어."
'용용이와 아라가 어떤 다른 감각을 느끼지 않았다면 내 기분 탓이라고 넘겼을 텐데.'
하벨은 유자차를 홀짝거렸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기에 사람의 호의에 익숙해질 틈이 없었다.
누구든지 자신을 노리고, 이용하려는 자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아.'
하벨은 잠깐 잔을 내려놓았다.
하벨 티에라가 매번 느끼던 감각이 이랬을까.
과거를 보더라도 누군가 계속 하벨 티에라를 노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겠네.'
이렇게 하벨 티에라가 느끼던 상황을 자신도 느끼게 될 줄이야.
하벨은 자신과 마주한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느긋한 자태로 차를 홀짝거리는 모습을 보자 다행이다 싶었다.
원치 않게 많은 일에 휘말려서 주눅 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 음, 하지만 나는 엄청 친절해서 진짜 좋았어."
"네가 좋았다면 됐어. 어차피 무슨 일이 있다면 내가 기폭제가 되어서 알아서 터질 테니까."
하벨은 칼리우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건 별로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랬고, 계속 그랬지만, 카샬은 하벨이 그렇게 본인을 생각하는 게 별로 좋게 들리진 않았다.
"사실이긴 하잖아? 처음부터 순탄했던 적은 없었는데. 그렇지 않아?"
하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카샬의 모습에 태연하게 웃으며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신관님."
"예, 하벨 공."
"갑작스럽겠지만, 하나 묻겠습니다."
무겁게 나온 하벨의 말에 칼리우스가 슬쩍 그를 바라보며 마법을 사용했다.
"혹시 신을 죽이면 신이 될 수 있습니까?"
"……어."
엘라힘은 하마터면 손에 쥔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말이 하벨의 입에서 가볍게 나왔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혹시 하벨이 저들에게 미리 무슨 말을 꺼낸 걸까.
아니면 신과 관련된 일이 정말로 생겨버린 걸까.
엘라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대답해주세요."
하벨의 재촉에 엘라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게 신이란 존재는 세상의 모든 것이니까요. 세상을 죽이면 세상이 될 수 있냐는 물음으로 들립니다."
"그럼 신을 이 땅에 강림하게 하는 조건을 알고 있습니까?"
이미 방 주변을 다 확인했다.
도청이나 어떤 마법적 함정 역시 없었다.
"…이건 알고 있습니다."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날카로운 하벨의 눈빛에 엘라힘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번에 제가 하벨 공께 말씀드린 걸 기억하십니까? 시엘느에서 신의 종인 저희가 신을… 부활시키려 한다고요."
"죄송합니다, 신관님."
"아뇨. 기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기억합니다. 그 말을 어떻게 잊겠습니다. 다만, 거짓이라 판단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벨이 고개를 숙이자 엘라힘은 당황하며 손을 가로저었다.
참 고마웠다. 이 일마저 기억해주다니.
"아닙니다.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죠."
하벨이 고개를 들자 엘라힘은 본격적인 말을 꺼냈다.
"신은 전지전능하나, 그만큼 많은 제약이 있어 무능합니다. 그래서 신관이라는 대신 일해줄 자가 필요한 겁니다."
"…와.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신을 무능하다고 말하다뇨."
레디나가 신기해하며 물었다.
"사실입니다. 이건 감히 거짓으로도 고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신이 뭔가 행동을 하지 않는 거였어요?"
세계가 엉망이 되었어도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엘라힘은 레디나가 이를 비꼰다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신과의 소통도 무너져 내렸습니다. 저희와 연결마저 끊어졌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엘라힘의 눈빛에는 신을 향한 그 어떤 원망이나 기대를 볼 수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믿고 있을 뿐.
레디나가 입을 다물자 엘라힘은 다시 하벨을 바라보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어나갔다.
"신께서는 세계에 혼란이 일어나야 강림한다고 합니다. 혼란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대표적으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의 멸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그 혼란이라는 조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하벨이 무언가를 불안해하자 아라가 유자차를 슬쩍 밀며 말했다.
[대장. 이거 마시면서 해. 불안함이 좀 사라질 거야. 뜨거울 때 마셔야 좋아.]
걱정이 담긴 아라의 표정에 하벨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유자차를 홀짝거렸다.
"과거의 기록을 보자면, 신이 강림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카르밀도 그렇게 말했다. 신이 강림했다고.'
하벨은 카르밀의 말을 주목하며 엘라힘이 꺼낼 뒷말을 기다렸다.
"여러 종족의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으로 세상이 휘청거렸을 때 신의 힘마저 손에 넣으려다가 오히려 신께서 모든 걸 정화시켰다는 이야기죠."
'저 이야기는 세계가 합쳐지기 전 이야기이다. 카르밀이 살아 있었을 때일 테니.'
하벨은 잠깐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카르밀이 언급한 만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조건입니다."
엘라힘이 손바닥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