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두근두근(3)
* * *
하벨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어디 갑자기 아파?"
넬시아가 다급히 묻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장 이마가 아직도 뜨거워!]
아라가 하벨의 이마를 짚더니 깜짝 놀랐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 속에 무슨 냄새가 났다.
킁킁.
"아뇨. 아픈 게 아니라 내 영혼이 공명하고 있습니다. 마차를 멈춰주세요."
[마, 맞아! 대장의 냄새가 나! 바람이 이 몸한테 전해주고 있어!]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갑자기?
이렇게 빨리?
아라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쾅쾅.
라르웬이 마차 벽을 우선 다급히 쳤다.
마차가 다급히 멈췄지만, 흔들림은 크지 않았다.
뒤에서도 급히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보통 왕실이라고 하지 않았어?"
라르웬이 창문을 밖을 보며 물었다. 아직 마을도 보이지 않았고, 좌우를 살펴도 숲이 펼쳐져 있었다.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레놀드 왕국으로 넘어오는 국경에서 이 마차를 넘긴 건 레놀드 왕국이었다.
구태여 마차를 바꿀 이유는 없었지만, 마차 내부에 온도 유지가 잘 되어 있었고, 레놀드 왕국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허락했다.
칼리우스가 괜찮다고 했지만, 찝찝함을 안고 출발한 지 얼마나 됐던가.
'…기껏해야 2시간 정도 흘렀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이 느낌은 맞습니다."
하벨 역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국경 지대에 가까웠고, 옆에는 숲이 무성했다.
아니, 깨끗한 물이 느껴졌다.
호수라도 있는 걸까.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물이 있기에 영혼이 공명하는 게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용왕님. 레놀드 왕국에서는 무날과 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벨은 류아의 말을 떠올렸다.
'기다리고 있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왜 레놀드 왕국만 다른 건지. 어째서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지 하벨은 궁금해졌다.
똑똑.
마차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라르웬은 아래를 보더니 마차 문을 열었다.
"도련님, 도련님!"
칼리우스가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칼리우스. 놀랐겠지만, 무슨 일이 있거나 아파서 멈춘 게 아니야. 여기에……."
"그거 아니야, 둘째 도련님. 여기에서 막내 도련님의 힘이 느껴져."
칼리우스가 고개를 가로젓다가 하벨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도련님도 그것 때문에 마차를 멈춘 거지?"
"…맞아."
하벨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류아. 너는 대체 어디까지 본 거지?'
각 나라에 자신의 육체를 퍼트린 건 류아였다. 육체가 한곳에 모여 있으면 에른스트가 잊었던 사실을 떠올릴 수도 있고, 자신의 존재가 바로 들통이 나기에 류아 입장에서는 흩어놓는 방법이 제일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식이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막고, 하벨 티에라라는 새로운 몸이 자신의 영혼에 적응할 시간을 벌어주는 게 목적이었을 테니까.
'내가 어떤 순서로 향할지는 몰랐을 테지만, 사실상 용용이가 있다면 상관없었을 테지.'
하벨은 그제야 류아가 왜 칼리우스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는지 이해했다.
일단 칼리우스가 과거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고, 자신의 힘을 알아차릴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될 수 있기에 그토록 강조한 게 틀림없었다.
에른스트도, 류아도, 하물며 정령왕인 이안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아라라는 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류아가 계획한 대로 흘러간 모양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벨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류아야. 대체 왜 무날과 태련이 날 기다린다고 말한 것인가?'
하벨은 창문 너머에 펼쳐진 숲을 바라보았다.
'…사실, 나는 좀 두렵다.'
* * *
탁.
에른스트는 판 위에 장기 말을 놓았다.
'레바놈이 퇴장하고 뭔가 또렷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살짝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레바놈을 손에 쥐여줬더니 하벨은 싱겁게 코스모피안 왕국을 떠나지 않았던가.
'에르티안 왕국이 가진 힘을 너무 뺏었던가?'
에르티안 왕국의 힘을 뺏은 건 자신이었다.
으흠.
에른스트는 턱밑을 쓰다듬었다.
에르티안 왕국은 지금 그 규모에 비해, 티에라 가문을 품은 것치고 약소국이 아닌가.
'티에라 가문이 내 계획에 걸림돌이 될까 봐, 이것저것 빼앗아봤는데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네. 아쉬워. 아쉽네.'
툭.
에른스트는 말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힘없이 판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괜찮아. 네가 레바놈을 손에 넣지 못한다면 내가 줄게, 하벨.'
하벨의 여정이 편하도록 여러 가지 신경 써줬는데 소득이 없으면 되겠는가.
'레바놈을 네가 가지고, 이제 에르티안 왕을 죽인 시해범을 당당하게 밝히면 될 거야. 그리고 에르티안 왕국과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범도 밝혀낼 수 있다면 다들 널 주목하겠지?'
에른스트는 판에 올려진 말 중에 가장 아름답게 빛이 나는, 왕관을 쓴 말을 조심스레 만졌다.
'아, 오미너스도 밝힐 수 있게 도와줘야지.'
하벨이 오미너스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몰라도 이번에 확실히 드러낸다면 단 한 명의 물 마법사와 오염된 물로 만들어진 사랑스러운 오미너스, 이 사이에서 사람들이 품을 기대감이 얼마나 높을까.
에른스트의 시선이 한순간 변했다.
차갑고, 싸늘해졌다.
'…아니, 대체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거지?'
헤스트리아 왕국에 뿌려뒀던 오미너스를 슬슬 회수할 때가 되지 않았던가.
'자안이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뭔가 미심쩍었다.
'용이… 살아 있는 건 아니겠지?'
자신의 모든 걸 망칠 수 있는 존재는 일찌감치 없애지 않았던가.
그때, 에른스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에른스트 님."
틈의 세계가 열리며 그 속에서 누군가 나왔다.
"누가 불렀지? 감히… 누가 나오라고 그랬지?"
에른스트가 풍기는 기세에 남자는 허리가 저절로 앞으로 휘었다.
"유렌이 움직였다는… 보고를……."
"뭐라고? 지금 유렌이, 유렌이 움직였다고?"
"…으흑!"
에른스트는 비명만 지르는 모습에 기세를 거두며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말해. 유렌이 움직였다는 게 맞아?"
"예. 예… 허억, 맞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는 에른스트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자안이 늦어졌네.'
에른스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렌이 정말 움직였다면 상황을 살피러 며칠간 그곳에 꼼짝하지 않을 테지.
"물러… 아니, 그런데 누구지?"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기분도 묘하게 이상했고.
에른스트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남자는 계속 숨을 헐떡거리며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름!"
에른스트의 단호함에 남자는 말문을 열었다.
"…류아입니다."
류아.
에른스트는 저 이름을 들어도 어딘가 익숙할 뿐,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물러가."
에른스트가 손을 휘저었고, 그에게 고개를 숙인 뒤 틈의 세계로 들어가던 류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였구나, 에른스트.'
류아의 손에 있던 부적이 불타올랐다가 사라졌다.
이 세계에 마법과 다른 주술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리 에른스트라고 해도 이걸 기억할 리가 없었다.
우선, 시간은 벌었다. 곧 자신의 이름도 에른스트의 기억에서 사라질 테지.
'용왕님. 에른스트를 조심하십시오.'
에른스트를 다시 만난 류아는 확신했다.
용왕이라면 에른스트가 누구인지 알아챌 거라는 걸.
* * *
―…여기다! 여기란다, 칼리우스!
"어?"
칼리우스가 카르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눈을 동그랗게 떠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에게 강제로 업힌 하벨이 덩달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왜 그래, 용용아?"
"카르밀이 여기래."
"아직 아닌데? 조금 더 가야 해."
"그게 아니라… 어."
말문을 이어가던 칼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응?"
곧 칼리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카르밀. …어? 응?"
"잠깐만, 용용아. 지금 카르밀하고 무슨 말을 나누는 거야?"
하벨은 혼잣말을 이어나가는 칼리우스의 말에 궁금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맞아. 이 몸한테도 알려줘. 이 몸은 지금 되게, 아주 궁금해졌어.]
아라가 눈을 초롱초롱 뜨며 앞발을 꼬옥 쥐었다.
칼리우스가 손을 뻗어 아라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있지, 카르밀이 그러는데. 내가 여기에 있었대."
칼리우스의 손가락이 바닥을 향했다.
"여기부터 카르밀하고 용들이 만들었던 결계가 있었다고 그랬어."
"결계?"
하벨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거기에 내가 여기서 있었대. 날 보호하고 있었대. 하지만 나는 레놀드 왕국은 처음인걸. 계속, 어, 에르티안 왕국에 있었어. 내가 눈을 떠서 기억하는 장소가 에르티안 왕국이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카르밀이 용용이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
하벨은 볼 안쪽을 잠깐 물었다.
―갓 태어난 용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칼리우스를 보호하고자 만들어 놓은 마법조차 틈의 세계에 빨려 결계가 일찌감치 풀려버렸다.
하벨은 카르밀이 칼리우스의 몸을 억지로 차지하고 했던 말을 생각했다.
칼리우스를 보호하고자 만들어 놓은 결계가 틈의 세계 때문에 풀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는 건 여기에 틈의 세계가 나타났고, 그게… 무날과 태련이하고 관련 있다는 말인가.'
하벨은 애초에 왜 이곳에 결계를 만들었는지 궁금해 입을 열었다.
"카르밀. 왜 여기에 용용이를 보호하는 결계를 만든 거지?"
지금쯤 마차는 계속 출발하고 있을 테고, 칼리우스와 아라 둘만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인 만큼 하벨은 마음이 조급했다.
[이 몸이 보기에 대장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 말고는 뭔가 특별한 게 없어 보여.]
아라는 칼리우스를 바라보며 그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카르밀이 말하는데 여기가 원래 용의 결계가 있던 나라였대. 그런데 결계가 사라져서 그곳이 그곳인지 몰랐다고 해."
"레놀드 왕국에 원래 용의 결계가 있었다고?"
"잠깐만. 내가 비켜줄게. 기분이 좀… 그렇긴 한데, 이게 더 빠를 거라 생각해."
칼리우스는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때 눈빛이 한층 차분해져 있었다.
"나다."
건방진 목소리에 하벨은 바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계속 말해봐."
"하. 이래서 인간의 아이란. 적어도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안녕. 이제 됐지? 말해봐."
"…하."
카르밀은 깊게 한숨을 내쉬다가 칼리우스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말문을 열었다.
"여기에 용의 결계가 있었지. 이름이 레놀드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긴 용의 축복을 받은 나라였으니까."
"그 용의 결계라는 게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 건데?"
카르밀은 하벨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었다.
"그토록 궁금한가?"
"대답해. 지금, 용용이도 얽혀 있으니까."
"핵심적인 건 용의 결계 안에서 누구도 용을 해칠 수가 없게 되지. 그게 마나와의 약속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상 보아하니, 용의 결계가 먼저 억지로 깨지고, 칼리우스를 보호하던 결계마저 버티지 못하고 깨진 모양이구나."
숲을 살피는 카르밀의 눈동자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누군가 공격하지 않으면 용의 결계가 먼저 부서질 리가 있겠는가.
"인간들이… 배신했을지도 모르지. 용이란, 무릇 귀한 존재이니. 그래서… 틈의 세계를 견디지 못했어.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하벨은 카르밀의 심정을 이해했다.
칼리우스를 보호하던 결계뿐만이 아니라 용의 결계까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왜 험한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용용이한테 준 그 천을 기억해?"
"천이 아니라 이불이다. 갓 태어난 새끼 용을 보호하기 위해서 용들이 마법으로 짜낸 천이지."
카르밀의 대답에 하벨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도멘이… 나한테 이걸 넘겼다는 건 도멘이 레놀드 왕국 출신일 가능성이 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승님께서 용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카샬이 그러지 않았던가.
도멘이 용을 찾으라는 임무를 내렸다고.
'그러니까, 원래 용용이는 여기에 있었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두 결계가 풀려버렸다는 건데. 하나가 틈의 세계 때문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하나는 대체 뭐지?'
하벨의 머릿속이 계속 움직였다.
―이게 정확한 게 아니기에 아직 말을 하기가 어렵지만,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네. 그러니까 휩쓸리지 않게 미리 오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네.
분명 이전에 도멘이 레놀드 왕국으로 오지 말라며 그 이유를 슬쩍 말해주지 않았던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지? 이상한 일? 이상한 일이 뭐지……?'
최근에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폭파 사건뿐이지 않은가.
레놀드 왕국이 그냥 일반 왕국도 아니고 제1 왕국이라 불릴 만큼 강대한 왕국에 일이 터졌다는 전제 자체가 참 이상하다 싶었다.
"왜 혼자만 생각하는가?"
하벨이 계속 침묵하자 카르밀이 불만을 담아 말했다.
"상황이 불확실해서. 어쨌든, 레놀드 왕국에서 무슨 일이 터진 건 확실하네."
하벨은 앞을 가리켰다.
"저기에 내 사람들 있어. 네가 말한 용용이를 보호하던 결계에 있던 장소에 말이야."
이런 의문들을 해소하려면 역시 나아가는 방법뿐이었다.
"그럼 우리의 결계를 이용하고 있는 누군가가 바로 너의 사람인 모양이구나. 무엇이 되었든 부디, 칼리우스를 부탁하지."
카르밀이 눈을 감았고, 칼리우스가 눈을 떴다.
"그래. 이제 어렴풋이 마법이 보이기 시작하네."
하벨은 입꼬리를 올리며 용왕의 힘을 끌어올렸다.
마법이 드문드문 드러나는 와중에 깔린 자신의 힘을 느꼈다.
하벨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자 허공에 물결이 일어났다.
"바, 방금 물이 움직이는 것 같았어!"
칼리우스가 기겁했다.
[물이 움직인 거 맞아, 용용아.]
아라 역시 침을 꼴깍 삼켰다. 저번에 헤스트리아 왕국처럼 하벨의 힘이 주변에 깔려서 전혀 알아보질 못했다.
그때와 뭔가 비슷했다.
"놀라지 마. 지금 용들이 만든 결계하고 내 힘이 섞였으니까."
하벨은 저들에게 짧게 설명해주었다.
마법과 자신의 힘의 조화가 적절하게 이뤄진 상태였어도 하벨은 거리낌 없이 손을 뻗으며 물에게 명령을 내렸다.
"길을 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