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두근두근(2)
* * *
넬시아는 하마터면 자리에서 엉덩이를 뗄뻔했다.
바안에게 대체 누가 손을 댔단 말인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 자리에서 일당을 붙잡았단다.>
"저, 전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예전이었다면. 이전의 에르티안 왕국의 경비였다면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렸을 수도 있으나 지금은 끄떡없구나. 정확히 습격이 벌어지기도 전에 붙잡았으니.>
"아버지하고 하벨이 전하께 얼마나 신경 썼는지 들었는걸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마법사들과 가면단, 그리고 바안이 새로 뽑은 신인 기사들, 정령 기사들까지 모두 바안을 지키고 있었으니.
"아버지."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많이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지만, 사태는 뭔가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어요. 하벨이 막아도, 막고 또 막아도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나도 그런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단다.>
"그러니까 아버지."
넬시아 문을 열자 그곳에 라르웬이 서 있었다.
뛰었는지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막내가 깨어났어."
기쁜 소식에 넬시아는 까치발을 들어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활짝 웃었다.
"저, 당분간 집에 가지 못할지도 몰라요. 막내, 챙겨야죠."
* * *
"…아니, 그."
하벨이 랜턴이 달린 팔찌를 착용한 손을 뻗어보려고 해도, 담요로 똘똘 감긴 터라 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담요 밖으로 나온 손은 링거 맞는 손뿐이었다.
헤헤.
그 모습이 웃긴지 아라가 방실거리며 꼬리를 흔들기 바빴다.
[대장, 꼭 책에서 나오는 눈사람 같아.]
"아라 네가 좋다니 다행……."
"좋다니 다행이네. 계속 그러고 있자."
휘어지는 하벨의 눈웃음을 따라 라르웬 역시 입꼬리를 위로 휘었다.
"…아니, 형님. 몇 번을 말해야 해요? 하벨 티에라가 회귀 전 기억을 보여준다니까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그래서 몸에……."
"과부하가 일어나서 어쩌고저쩌고했지만, 그러니까 더 쉬어야지. 오늘부터 계절이 완전히 겨울로 접어들었는지 밖이 추워. 감기에 걸리면 안 되는 거잖아?"
라르웬이 뭔가 말에 박자를 타자 하벨은 얄미운 터라 담요를 벗으려 했다.
"그거 벗고 기침 한 번이라도 한다면 그대로 방 잡아서 침대에서 못 벗어날 테니까, 그래도 괜찮으면 풀어봐."
자신 있으면 해보든지.
당당한 저 표정에 하벨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이 마차 레놀드 왕국에서 줬잖습니까."
그건 솔직히 뜻밖이었다.
레놀드 왕국의 영토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냥 마차를 줬다.
"그래서? 이 마차를 타자고 한 건 너잖아?"
라르웬의 한쪽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이게 더 큰걸요. 푹신푹신해 보이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그 속에 얌전히 있어."
"용용이도 여기에 무슨 온도를 유지하는 마법이 있니 뭐니 하면서 감기 걸릴 일이 없겠어라고……."
"그러니까 자신 있으면 풀어보라니까? 난 강요 안 했어."
손바닥까지 내보이며 라르웬이 시치미를 떼자 하벨은 당장 넬시아를 구슬프게 바라보았다.
"라르웬. 아라가 하벨한테 온도를 조절해주고 있으니까, 풀어도 되지 않을까? 저건 내가 봐도 너무 갑갑하겠는데? 링거도……."
"잘 달려 있는데? 누님. 적어도 레놀드 왕국의 수도에 도착하는 때까지 하벨이 얌전히 있어야 하지 않겠어? 저거 되게 가벼워. 최고급 담요가 괜히 최고급이겠어? 상처 부위에도 닿지 않아. 아니면 진짜 묶어? 나 밧줄도 있어. 그냥 밧줄 아니고, 마법이 치덕치덕 발린……."
"얌전히 있을게요."
하벨이 넙죽 말하자 넬시아는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음, 하벨. 이건 어쩔 수가 없겠네. 그간 '얌전히'라는 단어를 모른 벌이라고 생각하자?"
넬시아까지 돌아서 버리자 하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벨 티에라가 치사하게 과거 기억을 보여준다는 핑계로 자신을 기절시키고 눈을 떴을 땐 꼼짝도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을 감시하는 당번을 만들고, 이미 룬델에게 보고까지 싹 마친 상태였다.
―헤스트리아 왕국은 순조롭게 복구가 이뤄질 겁니다. 아가씨께서 가주님과 연락을 취하신 뒤, 3~4일 뒤에 티에라 가문이 움직일 예정이라 지금보다 더 빨리 복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령님들도 무사히 아벨로 도착했습니다. 아주 좋고, 완벽하고, 예쁜 곳이라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아, 마지막 말은 아라 님이 잠들기 전에 부탁하셨습니다.
혹시 자신이 물을까, 카샬은 헤스트리아 왕국이 어떤 상태이며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예정이고, 그 외에 자잘한 부분까지 다 보고하지 않았던가.
"…진짜 치사해요. 다, 그냥 다 치사해요."
이러니 울분이 쌓이질 않겠는가.
자신이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뭘 했다고.
'아니 조금 뭘 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잖은가. 그래도…….'
하벨의 속에서도 갈등이 생겨났다.
몸에 비해 조금 과하게 움직였다는 생각과 그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빙그르르 움직였다.
[…이, 이 몸도? 이 몸도 치사한 거야?]
꼬리를 흔들며 하벨 옆에 창문을 바라보던 아라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라 너 빼고. 아니, 용용이도 빼고."
하벨은 화가 난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삐쳐 있는 모습에 넬시아는 웃음을 터트리며 잠깐 손을 뻗어 하벨을 쓰다듬었다.
"이게 우리 욕심인 거 알아.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싶을 뿐일 텐데. 미안해, 하벨. 하지만 네가 조금만 이해해줄래? 나는 네가 오래, 건강하게 그렇게 행복하길 바라니까."
"아니, 이건… 이건 진짜 치사하잖아요."
하벨은 넬시아의 다정한 손길에 정말로 당황했다.
이렇게 말하는데 여기서 뭐라고 할까.
"아. 헤레스가 만든 그 약 이름은 '보름달'로 하기로 했어."
"왜 달이 들어가요? 오미너스를 없애는 거랑 달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하벨이 살짝 빨개진 얼굴로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고 하는 게 보여 넬시아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네가 달님이니까."
"……."
하벨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한 표정이 드러나다가 곧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정말 너무나도 고마워요."
하벨의 눈동자에 잠깐 그리움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더 많은 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고 아껴줬을 텐데.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형님, 누님."
하벨은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두 사람을 부른 뒤에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하벨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저 기다려 주었다.
"상황이… 앞으로 많이 변할 겁니다."
"나도 짐작하고 있어."
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트리아 왕국이 그렇게 무너져내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누군가 헤스트리아 왕을 꾸준히 유혹했고, 그 상황에 넘어간 결과가 어땠던가.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가 열리고 남은 건 헤스트리아 왕국이 재가 되어 사라질 뻔한 일뿐이었다.
―다, 다시 오겠다고 그랬어요. 오미너스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고는 데려가겠다고 그랬습니다. 오미너스가 무, 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놈이 그랬어요!
넬시아는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틈의 세계가 나타났고 대신들을 언급했던 사람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널 죽인 대신이 오미너스를 가지고 사라졌겠지. 어떤 원인도 밝혀내지도 못한 채 헤스트리아 왕국은 그저 '쇄국 정책'을 펼치면 안 되는 나쁜 역사의 예시로 자리 잡았을 거야."
"에른스트가 노린 건 그게 아닙니다."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도 자안에게 듣지 못했다면 넬시아처럼 생각할 게 뻔했다.
하지만 자안에게 여러 사실을 듣고야 말았다.
"그게 아니라니?"
라르웬이 묻자 아라가 불안함을 드러내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진정해, 아라야.]
루룸의 위로에도 아라는 하벨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대장이 또 아프면 어떡해.]
하벨은 잠깐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끄아악! 신이… 되고자 합니다아!
아직도 자안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남았다.
신.
―신의 종에 불과한 신관들이, 신을 부활시키려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엘라힘이 먼저 꺼냈다.
그때는 저 사실이 그저 어느 시절에나 있는 허황한 소리라 치부했다.
누구도.
그 누구라도 신은커녕 죽은 자도 살릴 수 없는데 부활이라니.
그걸 어떻게 진짜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살리는 게 시간의 법칙을 어기는 일보다 더 무게가 있는 것을.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벨은 입에 담았다.
"에른스트가 이런 일을 벌인 건 모두 신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하벨은 이 침묵을 이해했다. 얼마나 기가 찰까.
그럼에도 하벨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하루빨리 신성 국가 시엘느 왕국으로 가야 합니다."
"…자, 잠깐만."
라르웬은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신이라니? 그게 무슨. 아니, 그게 애초에 가능한 일이야?"
라르웬의 시선이 루룸에게 향했다.
[당연히 불가능하지!]
[하지만 저번에 용용이가 그랬어. 그렇지, 대장?]
아라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용의 지식이 말하는데, 신이 땅에 내려온 적이 실제로 있었대.
용의 수장인 카르밀이 칼리우스에게 꺼낸 말은 세계가 합치기 전 이야기였다.
"용용이가 말하길, 정확히 세계가 합치기 전에 강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우스의 말을 전했다.
"그렇다는 건 에른스트가 노리는 건 '강림'일 확률이 높잖아?"
잠깐 생각한 넬시아는 주장을 털어놓았다.
"맞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긍정하는 하벨의 말에 넬시아는 밀려오는 말 역시 토해냈다.
"하지만 하벨. 강림은 신이 내려오는 것일 뿐, 신이 되는 거랑 거리가 멀어."
"신이라는 게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몰라도, 왕을 죽여 왕위를 가져가듯 이곳에 있는 신을 죽이면 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벨은 엘라힘이 언급하던 '신'이라는 존재에 초점을 맞췄다.
"이 행동들이 신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을 강림하기 위해서라고 가정한다면 여러 가지가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된다고?"
라르웬은 팔짱을 끼며 하벨을 지그시 보았다.
"나를 죽여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던 점이나, 굳이 두 세계를 하나로 합친 점이나, 이제 와서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있겠죠? 이 모든 건 신의 강림을 위한 조건에 도달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래서 이걸 확인하고자 시엘느에 가야 한다는 거지?"
"맞습니다. 결국, 신과 관련된 일은 이 신과 얽혀 있는, 신관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막내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만약에 이 가설이 맞다면 에른스트가 눈여겨보는 곳은 바로 시엘느일 거야. 너, 들킬 수 있다고."
하벨이 라르웬을 보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손가락 세 개를 왜 펼치는 거야, 대장?]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티안 왕국, 코스모피안 왕국, 헤스트리아 왕국."
하벨은 씩 웃었다.
"여기에는 에른스트가 없습니다."
많은 나라를 거쳐 간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에른스트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만약에 있다면 헤스트리아 왕국 때, 그딴 식으로 나오지 않았겠지.
코스모피안 왕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고.
―에른스트와 유렌. 이 둘은, 쿨럭.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에른스트는 몸이… 없습니다. 이걸 유지하게 해주는 매개체 같은 존재가, 유렌입니다.
"자안이, 날 죽인 대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벨은 목소리를 낮췄다.
"에른스트에게 몸이 없었다고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모두가 눈가를 좁혔다.
[지금 누군가의 몸을 빌렸다는 소리잖아.]
루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애초에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지.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가 유렌입니다. 에른스트에게 유렌은 몹시 중요한 존재임이 틀림없죠."
"유렌이라면… 틈의 세계에 지배자를 말하는 거 맞지?"
넬시아가 턱밑을 쓰다듬었다.
"맞아요. 아마도 에른스트는 모종의 이유로 육체조차 유지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겁니다. 나는 예전에 놈을 죽이기 직전까지 갔고 이걸 제대로 보지 못해서……."
하벨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라르웬이 딱밤을 때리려고 하는 게 아닌가.
"자책하는 게 아니에요, 형님."
"아, 그래? 난 또 네가 자책하는 줄 알았지. 그러면 됐어."
라르웬은 씩 웃으며 다시 팔짱을 꼈다.
"어쨌든, 내 공격에 회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걸로 봐서는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이미… 사람을 벗어났다고 보이지 않아?"
라르웬은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응했다.
"사람이라는 범주에 벗어났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사람과 다른 무언가인 건 확실합니다."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예측했나 본데?"
라르웬이 묻자 하벨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사람은 신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흔히 '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소위 사기꾼들이라 사람들을 자신 발밑에 두고 왕의 지위를 누리려는 것뿐입니다."
이전에도 많이 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엘라힘이 꺼낸 말을 흘려들은 이유가 되어버렸고.
"하지만 에른스트는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진짜 신이요. 얼마나 준비를 철저하게 했습니까?"
하벨이 말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마차 안에 있는 이들 모두 에른스트가 준비한 개같은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놈은, 에른스트는 신이었을 겁니다."
[어……?]
아라가 입을 벌렸다.
신이라는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몰라도 아라는 거대한 말을 느꼈다.
"신이었던 자가 다시 신이 되려면 무슨 방법이 필요한지 몰라도 그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하벨은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시선이 쏠리자 다시 말을 내뱉었다.
"원래 있던 신을 끌어내리면 됩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을 짓던 하벨이 잠깐 멈췄다.
지이이잉.
갑자기 가슴이 떨렸다.
"…자, 잠깐만요."
하벨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느닷없이 영혼이 공명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