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한 놈 더(3)
* * *
자안에게 닿은 자신의 발등이 어쩐지 간지러웠다.
하벨의 시선은 잠깐 흙먼지가 가득한 주변으로 향했다.
새삼스럽지만, 자안이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았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간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간 얼마나 멍청하게 바라본 걸까.
"아직도 모든 걸 희생하고. 모든 걸 내놓고, 모든 걸 감싸주는 그런 병신 같은 너의 왕으로 보여?"
하벨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 순간, 하벨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조차 마른침을 삼키게 되었다.
"자안."
하벨이 자안의 이름을 부르자 아득한 감각이 그를 깊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영혼이 울리는 것만 같았기에 자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게 모든 걸 말하거라. 거짓은 허락하지 않겠다!"
하벨에게서 아주 강한 명령이 떨어졌다.
에른스트와 마주하면서 느꼈던 불길함과 달랐다.
과거에 용왕에게 매료되었던, 영혼과 육체를 휘감는 바로 그 힘이었다. 그렇기에 자안은 용왕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유렌과 에른스트의 상황은……."
자안은 헐떡거리며 입을 열었다.
"용왕님께서, 으윽, 생각하신 것과 다릅니다!"
"말해. 대체 어떻게 다른지."
"유렌은 그날 이후, 용왕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멈춰버렸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을 할 줄 모르는가?"
하벨이 검을 살짝 움직이자 자안의 말이 빨라졌다.
"너,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냥 식물인간이 되,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에른스트가 이번 일에 유렌과 얽혔다는 걸 믿지 않을 겁니다."
'…유렌.'
빠드득.
하벨은 절로 이가 갈렸다.
'해연도 몰랐는데, 저들도 몰랐다니.'
자신의 딸인 해연도 속이고, 저들 몰래 뒤에서 움직였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마치 정말로 자신을 위해 모두를 속인 행동처럼 보여 당장 토악질이 나올 만큼 역겨웠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결코, 결코, 용왕님을 무시하거나, 낮추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제, 제가 에른스트를 막겠습니다!"
"네가?"
하벨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곧 비틀어졌다.
웃기는 소리였다.
"예! 제가, 콜록, 콜록. 제가 용왕님을 위해……."
"에른스트의 목적이 뭐야? 대체 왜 세상을 이런 꼴로 만든 거지?"
하벨의 눈빛이 어쩐지 더 싸늘하게 느껴졌지만, 자안은 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말해."
"그게……."
"말하거라. 당장!"
하벨은 다시 자안의 복부를 찌른 검을 비틀었다.
단 1초라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끄아악! 신이… 되고자 합니다아!"
말을 내뱉은 자안은 곧 얼굴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
하벨이 내뱉어지는 숨과 함께 주변이 차가워졌다.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신?'
에른스트의 목적이 신이라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 그래서 오미너스가! 오미너스가아 필요했습니다! 신이 되고자, 시, 신이 되려고요!"
"…하하."
하벨은 이어진 자안의 말에 웃었다.
"하하하!"
너무도 기가 찼고,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니까.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야. 그러니 이번 일은 나중에 내가 다 보상해주지.
'그래서 그런 말을 했다고?'
정령왕 이안한테. 자신의 배를 꿰뚫기 전에. 그토록 오만한 말을 건넨 거라니.
'오미너스가 고작, 그따위 일을 위해서 만든 거라니……!'
―용왕님! 분노하지 마세요!
―진정해야 해요.
―맞아요! 지금 용용이가 엄청 힘들어한다고요!
물이 하벨의 주변에 나타나 그를 진정시키려 말을 걸었고, 아라가 깜짝 놀라며 하벨을 불렀다.
[대장, 대장!]
주변이 얼어붙고 있지 않은가.
아라는 하벨의 시야 앞으로 가 하벨의 양 볼을 꾹 눌렀다.
[대장! 이 몸을 봐봐.]
아라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하벨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대장이 얼마나 속상할지 이 몸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대장을 생각해야 해. 대장이 화내면 또 아플 거야.]
아라의 리본 끝자락이 살짝 얼어붙는 걸 보며 하벨은 분노를 삼켰다. 자신의 분노에 아라가 휩쓸리게 할 순 없었다.
"…미안해. 놀랐지?"
하벨은 그제야 자신이 과하게 반응했음을 알았다.
영혼이 아직 몸에 정착하지 못했기에 또 불안정함이 발생해 벌써 손과 발끝이 떨리고 있었으니.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어떤 불안정함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 몸은 괜찮은데, 대장이 저번처럼 큰일이라도 난다면 이 몸은 너무 슬플 거야. 정말로… 무서워서 사라져버리고 싶을지도 몰라.]
아라의 귀가 접히고, 눈꼬리가 내려갔다.
하벨은 아라를 끌어안고는 숨을 몇 번 내쉬었다.
"…미안해."
말과 달리 다시 생각해도 울분이 차올랐다. 에른스트의 목적이 이토록 허망할 줄이야.
신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되고 싶다고 마음먹어서도 안 되는 존재가 아닌가.
하벨은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이미 붙잡은 정령왕 이안의 상태를 재차 확인할 정도로 의심이 많은 에른스트가 자안에게 말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듣거나 추측하거나 그랬을 테지.
"자안아."
하벨은 피를 꾸역꾸역 흘리며 어느새 창백해진 자안을 바라보았다.
"너는 무얼 위해 나를 배신했어?"
"…죽기 싫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웠, 쿨럭, 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어, 자안아?"
하벨의 부드러운 질문에 자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행복.
그 단어를 무척이나 오랜만에 귀에 닿아보았다.
무엇 때문에 시작했나 싶었는데, 금세 기억 속에서 올라왔다.
말라비틀어졌을 거라 생각했던 눈동자에서 다른 의미의 눈물이 차올랐다.
"…아뇨."
이건 서글픔이었다.
"행복, …하, 행복하려고. 죽음을 피하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요."
자안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따라 여러 감정이 떠내려왔다.
"행복하지… 않았어요."
미안해서.
부끄러워서.
아주 깊숙이 묻어두었던 죄책감이 터져버려서.
자안은 용왕과 함께했던, 그때 그 청년의 표정이 되어 울었다.
행복을 위해 선택한 결과가 결국 모든 행복을 부서트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노라고 묻는다면 바로 눈앞에서 아주 밝게 눈웃음을 짓고 있는 저 존재와 함께했을 때였다.
웃는 일이 많았다.
기쁜 일이 무수히 펼쳐진 그 세계에서 자신은 행복함에 묻혀 행복함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자안아.
자안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생각이 났다. 이따금 귓가에 맴돌던 저 목소리가 누구인지.
―울지 말거라. 네 행복이 곧 내 행복이니 내가 널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제야 왜 자신이 그동안 울지 않았는지를 기억했다.
왜 감정을 죽였는지를 떠올렸다.
손이 자신에게 내려왔다.
그때는 분명 다정한 손길이었거늘, 이번에 맞닿는 손길은 달랐다.
싸늘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으로 그때와 다른 말을 꺼내고 있었다.
"다행이야."
용왕은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여와 자안은 가슴이 미어졌다.
혼자 저지른 일이 아니었기에, 용왕이 죽고 난 뒤에 세상이 변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변했기에 몰랐던, 아니, 외면하기만 했던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제가,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결코, 용왕을 배신하면 안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하지만 그 유혹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죽음이 무섭지? 그래. 이해해. 왜 죽음이 무섭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그 두려움을 없애줄 수 있어. 영원히 말이야.
용왕처럼 아니, 더 달콤하게 귀를 찌르는 에른스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배신이라는 건, 쓰디쓴 초콜릿과 같지. 배신하는 순간 가슴이 아플 거야. 아주 많이. 그래도 그건 잠깐이야. 결국, 너한테 남을 건 달콤함 뿐이라는 걸 알잖아? 물론,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너한테 주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건 알아둬.
웃으면서 꺼낸 에른스트의 제안에 모든 걸 팔아넘긴 건 자신이었다.
"제가……."
자안은 목소리를 냈다. 말라비틀어져 버린 소리와 비슷했다.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무얼 잘못했는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날 죽였지."
하벨의 말이 배에 박힌 검보다 더욱 깊고 세게 심장을 찔러왔다.
후회해도, 후회해봤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가장한 행복했던 그 순간을 제 손으로 박살 냈다는 걸 인정한 순간,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
용왕을 향한 자안의 눈빛이 바뀌었다. 흐리멍덩하던 눈빛에 빛이 어렸다.
'…아.'
자안은 하벨을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았다.
어렸고, 상처가 많이 보이는 얼굴 속에 신기하게도 여리고, 눈물이 많았던 용왕이 보였다.
다시 뜨거운 눈물이 밀어닥쳤다.
'바로… 그때였다.'
수족을 없앴을 수 있다는 무기를 누군가에게 받았을 때, 그 이후로 자신의 모든 게 달라졌다.
설마하니 무기를 넘긴 그자가, 그놈이 에른스트였을 줄이야.
에른스트. 에른스트. 에른스트!
자안은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그대로 터트렸다.
"…세, 뇌를. 제가 그놈에게 세뇌를……."
"널 믿으라고? 내가 너를?"
업신여기는 듯한 목소리가 하벨에서 튀어나왔다.
"아닙, 쿨럭.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
자안은 하벨을 설득해보려고 하나, 이미 눈빛에서 어떤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맞는 거였다.
이렇게 자신을 바라봐야만 했다.
"…용왕님."
자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지만, 그래도 슬펐다.
"에른스트에게… 무기를 받았습니다. 그걸 받은 뒤에, 하나씩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놈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라도 더.
"에른스트와 유렌. 이 둘은, 쿨럭.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에른스트는 몸이… 없습니다. 이 세계에 살아 있을 수 있게, 이걸 유지해주는 매개체 같은 존재가, 바로 유렌입니다."
자안은 하나라도 더 하벨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하벨은 자안의 변화에 이상함을 느꼈다.
눈빛도.
말투도.
자신에게 품는 감정도.
마치 원래 자안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나를… 능멸하는 것인가."
"더는 자세히, 쿨럭! 쿨럭!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준비가 다 되어갑니다."
자안은 잠깐 말을 멈췄다. 창백하던 얼굴에 입술마저 퍼렇게 변했다.
"신이 될… 하악, 준비,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습니다. 놈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자안이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기에 하벨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만약에 저 말이 진짜라면.
에른스트의 세뇌에 당한 거라면.
다시 생각해본다면 너무도 무섭지 않은가.
'아니. 이건. 이건…….'
하벨은 또 시작된 흔들림에 숨을 잠깐 참았다.
애초에 지금까지 상식적인 일이 있었던가. 이번에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를, 죽이십시오."
자안은 흔들리는 하벨의 눈빛에 삶을 갈구하지 않았다.
"잊으… 셨습니까? 저는, 당신을, 쿨럭, 죽였습니다!"
자안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려고 애를 썼다.
"이 손으로! 당신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다고요……!"
마지막 발악처럼 느껴지는 저 말에 하벨은 마음이 흔들려 그만 검을 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불안했다.
진짜 자안이라면. 정말로 세뇌당한 거라면.
물로 된 검이 사라지자 자안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사실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용왕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이 원망스러울 텐데도, 용왕의 마음속에 자신이 있었다.
그걸로 됐다.
기억됐다는 사실만으로 영광스러웠으며 얼마나 위대한 태양을 자신의 손으로 떨어트렸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기억하십시오, 용왕님."
타의든 자의든 이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자안은 용왕이 품은 마음을 다잡도록 말을 꺼냈다.
"저희가 당신을… 죽였습니다. 저는, 행복하지, …쿨럭, 않았고. 에른스트에게 개처럼 부려지다가 지금 당신 손에 죽는 겁니다."
이토록 비참했으니 알아 달라는 소리에 하벨은 가만히 자안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과거의 자안이었기에 입술이 저절로 바짝 말라 갔다.
"이 얼마나 개 같은 삶입니까?"
자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삶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말이 없었다.
"저는… 죽습니다. 죽음이 느껴집니다. 아니, 어차피… 수명을 넘겼습니다. 류아를… 만나셨습니까?"
"……."
하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류아는 세뇌… 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한테 쫓겼죠. 뭔가를 꾸미는 건 알았는데……."
자안은 새어 나오는 미소를 막지 못했다.
이렇게 용왕을 살리는 일이었다니. 알았더라면. 이 세뇌가 깨져 그 사실을 도왔더라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을 텐데.
"후회해?"
하벨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누그러졌다.
두려웠던 푸른 눈동자에 깃든 살기마저 여려진 게 보였기에 자안은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후회… 합니다."
"다행이야."
"예. 다행입니다."
"네가 후회하고 행복하지 않아서."
하벨은 무엇이 되었든 기뻤다. 이건 진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뻐. 너희가 날 죽인 건 변하지 않으니까. 너희가 내게 무엇을 했든, 이 사실을 뒤집을 수 없으니까."
하벨의 손에 다시금 물로 된 검이 만들어졌다.
"아주 오래됐지만, 내가 너한테 해줬던 그 말을 기억해?"
"…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말씀 말입니까?"
"맞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 아주… 기뻤습니다."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기에,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위로였기에 자안은 기억하고 있었다.
"진심이었어. 정말로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수족에게 너희 부모님을 지키지 못한 건 내 탓이었으니까."
"알고 있… 습니다. 용왕님께서는 거짓말을 모르잖습니까."
자안이 웃었다.
하벨 역시 웃었다.
"그랬지."
"…감사합니다."
자안의 미소는 부드러워졌고, 하벨은 자안의 심장을 향해 검을 박았다.
푹!
심장을 찌르는, 검을 타고 오는 그 감각이 그렇게 쓰라릴 수가 없었기에 하벨은 미간을 가득 찌푸렸다.
"무기를… 조심……."
자안은 말을 끝내지 못한 채로 눈에 빛이 꺼졌다.
발끝에서부터 스르르 사라지는 자안의 눈을 하벨은 감겨주었다.
가슴이 타들어 가듯 아팠다.
목놓아 울면 속이 후련해질 테지만, 하벨은 울지 않았다.
제 손으로 숨통을 끊고, 마지막을 보내주었다.
타닥.
죽은 이들을 제 손으로 태울 때 놓였던 커다란 모닥불도 없건만 그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타닥.
모닥불 소리를 들으며 하벨은 다시 눈을 떴다.
"…안녕."
숨을 토하며 작별을 고했다.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본 뒤에 하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