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한 놈 더
* * *
라탄은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조금 전 아라의 신호에 맞춰서 정령들이 아라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자신 역시 힘을 끌어모아 아라에게 주었다.
그때, 처음 느껴본 감각이 몰아닥쳤다.
지금까지 정령사들에게 무수히 많은 힘을 주었음에도 정령들과 다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울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라에게 넣었던 힘이 하벨에게로 흘러들면서 낯선 느낌을 느끼고야 말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꼭 햇살 같은 느낌을.
'이렇게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라탄은 뚝뚝 눈물을 흘렸다.
말도 안 될 만큼 다정한 감정이 흘러드는 그때 알아버렸다.
하벨이 자꾸 자신에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지금까지 자신들이 무얼 잘못했는지를.
라탄은 너무 미안해 울음소리를 냈다.
[제가 잘못했어요오. 감정을 나누지 않고 일방적으로 받을 수 없는데. 사람들의 감정을, 그걸 멋대로 휘둘렀어요.]
정령사란 존재가 정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걸 알기에 그걸 이용하고 말았다.
정령사에게 상처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당연하게 여겨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울지 마, 라탄. 괜찮아. 뚝.]
아라의 목소리에 라탄은 더 서럽게 울었다.
"이리 와봐, 라탄."
하벨이 손짓하자 라탄이 눈물을 뚝뚝 쏟아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벨은 라탄을 안아주며 토닥거렸다.
[…으흑.]
라탄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았다.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살면서 단연코 저 모습은 처음이었다.
정령이 울다니. 아니, 정령사가 정령을 부른 것도 기가 찰 노릇인데 저렇게 아무 불만 없이 다가가는 모습이라니.
물론, 자신들 역시 저 정령사가 내보이는 엄청난 힘에 매료가 되어 본능적으로 홀린 듯이 움직이지 않았던가.
정령들도 그랬던 걸까. 자신들처럼 저 힘에 반한 걸까. 그렇다면 너무도 이상했다. 자신들의 왕조차도 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바로 근처에 서 있는 기사들이 너무나도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면 설마.
혹시나 왕이 저 정령사를 보낸 게 아닐까 싶었다.
가슴이 희망으로 물들어갔다.
"호, 혹시 전하께서 보내주신 겁니까?"
누군가 묻는 말에 그제야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려고 하자 레디나가 태연하게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입 닥쳐.
그보다 더 위협적인 신호가 어디 있을까.
"아뇨. 외부인입니다."
넬시아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이거, 섭섭하네요."
뒤이어 하벨이 말문을 열었다.
[시작한 거 맞지?]
루룸이 속닥이자 라르웬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짚었다.
'시작하고말고. 아주 놀려 먹을 준비가 됐는데.'
실실거리는 하벨의 웃음이 라르웬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던 당신들의 기사들 안 보여요?"
이제야 하벨은 데리고 온 기사들을 써먹었다.
"외부인인 우리가 정령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렇게 찾아와 구해줬는데 집 나간 당신들의 왕은 대체 왜 여기서 찾습니까?"
하벨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일단 외부인과 내부인의 선을 명확히 그었다.
"오죽하면 이곳 정령이 외부인인 우리를 부르러 왔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나한테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먼저일 텐데요."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다.
이미 하벨이 꼬집지 않아도 나라의 꼴이 엉망이었다.
"대체 뭘 기대한 겁니까? 이 꼴이 되도록 왕에게 거는 기대가 있단 말입니까? 대단하네요. 정말로요."
"저 말이 맞습니다. 왕은… 우리를 버렸습니다. 다들 알지 않습니까?"
사람들 속에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어도 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답이 나오는 결과가 아닌가.
언제까지 부정할 순 없었다.
"정령님들도 사라지셨고. 남은 거라고는……."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황폐해진 나라의 꼴에 기가 차고, 화가 났다.
"하지만 이제 정령님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한테는 새로운…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희망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시선이 모조리 하벨에게 쏠렸다.
'…아. 그래서였구나.'
하벨은 왜 오미너스 하나에 나라 꼴이 이렇게 됐는지 알았다.
"꽃님아."
하벨이 목소리를 낮추며 카샬을 불렀다.
"예, 달님."
카샬은 탐탁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막 날뛰어도 돼?"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관심 없습니다. 그저 달님께서 어서, 지금 당장 편안한 침대에 누워 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다는 거지?"
하벨은 카샬에게 동의를 받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자, 들었죠? 이제 다들, 그 눈 내리까시죠? 기분 더럽거든요."
말과 달리 하벨의 목소리는 해맑았다.
애초에 자신의 나라를 지킬 마음이 없는 자들을 위해 자신이 애를 쓸 필요가 없기에 속이 다 후련했다.
자신을 향한 눈빛에 '영웅'이라는 기대감이 한껏 어리지 않았던가.
진짜 재수 없었다.
"나는 악마라 불리는 오미너스를 없애러 왔지 당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닙니다. 대체 뭘 기대한 건데요?"
기대를 바로 저버리는 하벨의 말에 사람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니.
그럼 조금 전 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곳을 지키고 당신들을 보호해야 하는 건 일차적으로 왕의 몫일 텐데, 그걸 왜 나한테 떠맡기는 건지 모르겠네요. 눈빛 좀 치우라니까요. 꼭 뭘 부탁할 것 같잖아요."
하벨은 본격적으로 저들을 향해 질타하며 왕을 내리깔기 시작했다.
저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자리 잡은 왕에 대한 두려움을 깨부숴야지. 저게 깨져야 자신이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었다.
왕과 백성,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 힘이야말로 최선의 도구가 될 테니까.
"진짜 저 입 좀……."
한숨이 섞인 카샬의 말에 헤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닥거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부디 누가 저 입 좀 멈춰줬으면.
헤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사기를 벌써 두 대나 놓았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는 진심으로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렇게 저희를 구해주셨는데. 그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서 놀라서 오해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고맙겠죠."
하벨은 사람들의 말을 끊어냈다.
"그럼 여기서 끝내세요. 고마움을 앞세워 내게 어떤 부탁을 하지 말란 소리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 하지만 저희는 지금 다 무너져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기 보세요. 멀쩡한 곳이 없잖습니까."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더는 부탁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도움을 바라지 말라는 하벨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고, 거기서 간절함과 측은함을 섞어나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과거라면.
이전에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진 무거운 왕관이 있었으면 상상도 못 할 말을 꺼냈다.
"아. 이거 그거죠? 구해줬더니 뭐 내놓으라는 양심이라고는 볼 수 없는 버러지 같은 행동 말이에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예상치도 못한 말에 다 같이 뒤통수를 맞은 모양이었다.
저들에게 흐르는 분위기가 무겁든 말든 하벨은 신이 났다.
어차피 스스로 일어날 생각도 없는 이들을 왜 도와줘야 하는가.
"내가 이곳을 박살 낸 오미너스를 없앴습니다. 그런데 또 도와달라니, 그럼,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요? 나는 비싸요. 정말 많이요. 감당할 수 있어요?"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뭘 드릴 수가 없어요."
"아니, 없는 걸 빤히 다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냐고요? 웃겨서요. 기가 막혀서요."
하벨은 방긋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당장 손가락을 뻗어 그들을 날카롭게 가리켰다.
"왕이 하지 않으면 당신들이 해야 하는 겁니다. 이 나라는 왕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당신들의 나라인 거 잊었어요?"
"정령님들이 사라진 걸 어쩌란 거지? 당신이 도와준 건 고맙지만, 지금 선을 세게 넘고 있다는 거 몰라?"
"맞아! 도와줄 거면 끝까지 도와줬어야지."
"하지만 맞는 말이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조금만, 제발 조금만 도와주세요."
"…하. 저 개새끼들."
계속 웅얼거리는 저들의 말에 카샬은 이를 갈았다.
[이 몸은 선이라는 게 잘 모르겠지만, 저 사람들이 뻔뻔하다는 건 이 몸도 알겠어. 너무해!]
흥.
가만히 듣고 있던 아라도 짜증이 날 만큼 저들이 뻔뻔했기에 콧방귀를 끼었다.
"선? 지금 누가 그 선을 넘었는데?"
라르웬이 근질거리던 입을 참지 못했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덤빌 거야? 해보든지. 당장 쥐어 패주지."
두 손가락을 펼친 라르웬이 얄밉게 손가락을 까닥거렸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그냥 죽일까요, 달님? 여기서 몇 놈 죽여봤자 피해도 없을 텐데요."
레디나가 단검을 만지작거리다 저들을 바라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달님이 만만해서 덤비는 거라면 얌전히 목이나 닦고 있어. 너희가 잘 때 몰래 뜯어버릴 수 있으니까."
키득키득.
레디나가 웃자 사람들은 섬뜩함에 더 뒤로 물러섰다.
"왜? 설마 하하호호,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뭐, 이런 분위기를 예상했어? 애초에 말이야, 정령들이 없다고 아무것도 못 했다는 건 핑계지."
하벨은 레디나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배신당한 것처럼 보이는 저들의 표정이 너무도 우스웠다.
"멀쩡하게 팔다리 다 달려 있으면서 무서워서 피하고, 두려워서 숨어 있으면 이 나라는 이미 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걸 나보고 구해내라고? 네놈들은 이미 썩어버린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어? 아니잖아? 너희가 나한테 기대한 게 바로 그거야. 썩어버린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는 거 말이야."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꺼져, 이 쓰레기들아. 나한테 빌붙어서 뭘 뜯어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너희를 구했으니 그거나 감사하게 생각해."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처럼 보였기에 하벨은 손가락을 돌려 기사들을 가리켰다.
진짜 욕을 얻어먹어야 할 건 쟤들이니 잘 써먹어야지.
"원망은 말이야. 저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네놈들의 기사들에게 해야지. 진짜 멋지네. 나 같으면 말이야. 저 기사들을 죽이고, 이런 와중에도 숨어서 호의호식하는 귀족과 왕족들을 싹 쳐낼 텐데."
하벨은 사람들을 살살 긁었다.
"잘 생각해봐. 이제 오미너스도 사라졌고, 사라진 정령들은 이곳에. 아니, 내가 데려갈 테니까 왕족이고 귀족이고 힘이 없어진 건 똑같잖아? 지금 누구든 왕만 죽인다면 왕이 될 기회가 찾아온 거야."
[…데려간다니?]
훌쩍이고 있던 라탄이 놀라며 물었다.
"너희가 한 만큼 굴린다고 말했잖아? 굴려야지. 내가 너희를 구한 만큼. 안 그래?"
하벨이 정령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말한 건 지켜야지.
[이 몸도 그렇게 생각해.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아라가 앞발만 내밀며 흔들었다.
"너희는 어때? 이곳에 있을래? 날 따라올래?"
하벨은 이미 정령들의 마음이 아라 쪽으로 확 꺾인 걸 알기에 당당하게 제안했다.
나올 답은 뻔했다.
[따라갈래!]
정령들은 한 입으로 소리쳤다.
자신들의 왕이 여기에 있는데 왜 따라가지 않을까.
"정령들이 날 따라오겠다는데 이건 어떻게 말리게? 자, 어서 뭐라고 말해 봐봐. 조금 전처럼 날이라도 세워보든지."
하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약육강식이라는 건 언제든 써먹기 좋았다.
"아, 도망친다."
하벨이 갑자기 도망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가리켰다.
"왕한테 이르러 가나 봐. 뭐해? 쫓아가 봐야지.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왕의 얼굴을 보겠어?"
하벨의 비웃음에도 기사들은 걸음을 멈추질 않았다.
이 분위기는 지금 몹시 위험했다.
저 정령사가 사람들을 부추기고 방향을 자신들에게 돌려버렸다.
모든 신뢰가 깨어버린 지금 '무정부' 상태나 다를 게 없었다.
이건 너무도 위험했다.
[너희들.]
라탄이 기사들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기사들은 걸음을 다급히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너희한테 정말 실망했다.]
아예 모든 게 다 깨져버리자 이제야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왕을 이곳으로 데려와. 외부인을 제외한 너희 모두! 왕이면 당연히 이 사태에 대해 책임져야지!]
라탄이 치는 호통을 따라 정령들 역시 그간 오미너스에게 쫓겨서 하지 못했던 말을 터트렸다.
[이번 일은 우리가 잘못했어. 그래서 우리도 책임을 다할 거야.]
[맞아. 이곳을 떠나 저 인간을 따라가기로 했잖아? 이게 우리한테 얼마나 큰일인지 너희도 알 거야.]
[우리도 책임을 지려고 저들을 따라가는 거니까, 왕도 너희도 책임져. 도망은 허락할 수 없어!]
'이런 건 바로 익히네?'
하벨은 정령들이 '책임'을 언급하자 속으로 감탄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양심이라는 게 존재할 줄은 몰랐다.
타다다닥!
한 소년이 부모의 손길을 뿌리치고 달리다 기사를 덮쳤다.
드드드드.
기사와 같이 땅에 굴러 얼굴이고 팔꿈치고 다 까졌지만, 소년은 속에서 들끓는 마음을 토했다.
"저 말이 다 맞아!"
조금 전 달 문양이 가득한 가면을 쓴 남자의 외침에 자신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이 땅을 누가 지켜야 했는가. 이 땅은 자신들의 땅이었다.
"기사인 너희가 우리를 지켜야 하잖아?"
"이거 놔! 이 빌어먹을 새끼야!"
기사가 발버둥 치며 소년을 팔꿈치로 후렸다.
퍼억!
얼굴을 맞아 코피가 흘러내렸지만, 소년은 끝까지 소리치며 호소했다.
"빌어먹을 새끼는 너야! 너희가 우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우리를 지킬 거야! 왕을 데려와! 죽어간 사람들한테 사과하라고! 사과……."
쿵!
여하의 달리기와 함께 땅이 울렸다.
그는 기사의 머리를 잡더니 그대로 땅에 박아버렸다.
콰앙!
"빌어먹을 자식. 어른이 어린아이를 때리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벨은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땅에 얼굴을 박은 기사를 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저 소년이 보여준 용기에 기사들이 이전과 다르며 숫자도, 힘도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왕을 데려와!"
"왕은 어디에 있는데? 앞장서라고!"
'드디어 깨졌네.'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에 하벨은 왕이 가진 절대권력과 왕에 대한 환상이 비로소 깨졌음을 알았다.
왕도 무너뜨릴 수 있는 게 바로 백성들의 힘이라는 걸 안다면 지금의 헤스트리아 왕국은 사라지고 새로운 헤스트리아 왕국이 탄생하겠지.
'이제 이걸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인데.'
하벨은 기사들을 데리고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람들과 일부의 정령들을 보며 생각했다.
[대장, 대장.]
아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하벨의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지금 사람들도, 정령들도 다 반성한 거 맞지, 대장?]
"뭐어, 반성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이 몸은 오늘 하나 알았어.]
"하나를 알았다고?"
[누구든 달라질 수 있어. 이 몸은 변화의 힘을 믿어.]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렇지? 이제 그 변화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너무 궁금하지?"
아직 한 걸음 더 남았다.
여기서 멈추기엔 아쉽지 않겠는가. 이 흐름을 이용해 왕에게 아주 많이 뜯어내야지.
"아뇨. 달님, 이제 여기서 멈출 때입니다."
카샬은 하벨의 말에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진짜 내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옳은 소리네."
라르웬은 언성을 누르며 카샬과 같이 하벨을 말려보았다.
지금 힘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몰랐다.
"어때? 하벨의 상태는 괜찮아?"
넬시아가 헤레스에게 묻자 헤레스는 바로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뇨."
말을 꺼낸 건 하벨이었다.
"옵니다."
물들이 속닥거리기 시작하자 하벨은 첫 번째를 우선 건너뛰고 두 번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몰랐다.
조금의 쉴 틈을 줬으면 했는데.
"…마, 맞아. 뭔가 와."
달라진 마나의 흐름에 칼리우스가 반응하자 하벨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쩌어어억.
허공에서 불길함이 감도는 틈의 세계가 나타났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