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37화 (337/415)

337화. 부메랑(2)

* * *

"말해도 돼, 달님."

칼리우스는 크게 심호흡하며 하벨의 지시를 기다렸다.

"내 힘을 막아줘."

"…달님의 힘을?"

칼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하벨이 가슴을 두드리자 그제야 알아챘다.

저주를 막아달라는 말이었다.

"그래. 내가 신호를 보내면 잠깐 사람들의 시야를 가려줬으면 좋겠어."

정령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문과 소문이 이어져 새어나갈 게 분명했다.

자신이 오미너스를 무찌르는 일이 소문이 나도 상관없지만, 대신들이 나왔을 때는 달랐다.

"알았어. 내가 해볼게."

칼리우스는 조금 전 하벨의 저주를 막은 마법을 기억했다.

류아가 준 해결법으로 만든 반쪽짜리일 뿐이라도 효과는 엄청났다.

"구름아."

"네."

레디나가 하벨의 부름에 대답했다.

"저놈들 감시해줘. 덜떨어지더라도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놈들이니까."

"물론이죠. 여차하면 다리라도 자를게요. 괜찮죠?"

"그럼."

하벨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기사들은 사실상 필요가 없었다. 단 하나만 제외한다면.

외부인과 내부인.

이 명확한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감정을 헤스트리아 왕국의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줄 테니.

"가자."

하벨은 움직였다.

헤스트리아 왕국의 왕은 이다음이었다.

* * *

화르르륵!

넬시아가 휘두른 거대한 망치와 함께 오미너스 주변에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헤레스는 이중 마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구슬에 움직임을 부여하며 동시에 다른 마법을 담았다.

오미너스가 가진 '움직임'을 없애버리는, 자신의 마법을.

왼쪽과 오른쪽 뇌가 따로 움직이는 기분을 느꼈지만, 헤레스는 오미너스를 증오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오미너스의 물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역겨웠다.

쉬익!

날아간 구슬이 불꽃을 뚫고 오미너스를 향해 돌진했다.

구슬 뒤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넬시아가 땅으로 살포시 내려와서는 헤레스가 준 병을 내밀었다.

"정말, 정말 엄청나."

넬시아는 이 병에 들었던 액체에 대해 더 감탄하고 싶었지만, 오미너스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쿠쿠쿵.

넬시아가 구른 발과 함께 땅이 일어나 날카롭게 찔러오는 검은 물줄기를 막았다.

[이걸로는 안 돼, 넬시아.]

톰톰이 말하자 넬시아는 액체가 발린 검을 꺼내 바닥에 꽂았다.

파사사삭.

무언가 굳어지는 소리와 함께 오미너스가 놀라며 물러났다.

조금 전에도 병 속에 든 액체를 던진 순간 오미너스를 이루는 물이 지금과 같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헤레스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모든 '움직임'을 빼앗아버린 것만 같았다.

헤레스가 날린 구슬 뒤로 또 다른 바람이 한층 더 보태졌다.

휘이이익!

번개로 뒤덮인 창이 오미너스의 중심부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파지지직!

번개가 퍼져가는 자리부터 시작해 그을림까지 이어져서는 딱딱하게 굳어버리자 오미너스는 그 부위를 버려버렸다.

"아직 네 몸뚱어리가 더 많다 이거지?"

라르웬이 비웃음을 품었다.

날을 세운 오미너스의 물줄기가 라르웬을 덮쳤지만, 이미 바람의 힘을 몸에 두른 라르웬은 한 끗 차이로 오미너스의 공격을 피했다.

파파파.

물줄기가 괜한 바닥을 찍었고 다시 라르웬을 공격하고자 위로 올라왔다.

[저리 꺼져!]

루룸이 계속 달라붙는 검은 물줄기의 흐름을 아예 꺾어버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보글보글.

루룸의 얼굴을 두른 하벨의 물에서 거품이 일어났다.

라르웬은 키득거리며 바람을 손아귀에 가득 모았고, 머리카락을 세차게 때릴 무렵 오미너스를 크게 베어버렸다.

'어차피 다시 붙긴 하지만 뭐어, 이 정도는 해줘야지.'

라르웬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가다 자신의 앞으로 튀어나오는 구슬을 향했다.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헤레스가 날린 구슬이 오미너스가 갈라진 몸을 붙일 사이에 파고들었다.

팍!

구슬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이 오미너스를 이루는 물로 퍼져나갔다.

부르르르르.

헤레스는 눈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마법이 오미너스와 맞닿는 순간부터 오미너스를 이루는 마법을 속에서부터 갉아먹어 치우는 게 보였다.

와르르.

오미너스를 이루는 마법의 한 축이 떨어져 나가자 헤레스는 마법을 유지하며 구슬을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하늘을 에워싸던 오미너스가 갑자기 한곳으로 모였다.

구슬이 허공을 떠돌았고, 헤레스는 눈을 찌푸렸다.

'오미너스가 어디로 간 거지?'

분명히 모였던 오미너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눈으로는 오미너스를 좇을 수가 없었다.

주변마저 조용해지자 헤레스는 긴장했다.

"…위험해!"

라르웬이 불로 된 그물망을 던졌지만, 오미너스가 그 사이로 빠져나가고, 넬시아가 반응해 검을 휘둘렀지만, 오미너스를 살짝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히쭉.

사람으로 형태를 바꾼 오미너스가 웃으며 헤레스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콰직!

헤레스의 뒤에서 단숨에 튀어나온 여하가 오미너스의 목덜미를 쥐고 땅으로 패대기를 쳤다.

"미친 괴물 새끼!"

여하는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여하의 손에 액체가 가득 묻어 있었기에 오미너스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일부를 버리고 도망치는 꼴에 여하는 발로 바닥을 굴렸다.

"놈이 또 사라졌소."

"…고마워요, 여하 씨. 그런데… 하. 사람들은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섬뜩함에 가슴을 진정시키던 헤레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아직 있소. 그런데 물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서 튀어나왔소."

여하는 손을 옷에다 문지르며 말을 꺼냈다.

"저기 안쪽에는 난리가 났소. 시끄러워서 다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을 정도요."

가면을 쓰고 있어도 여하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 게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에 담긴 짜증이 가득했다.

"신의 저주니, 악마가 강림했느니, 별 지랄들을 다 떠는데, 그걸 들어주고 있는 저 신관이 진짜 답답할 지경이었소."

여하는 입구 쪽에 서 있는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 라탄이라는 정령이 엘라힘을 지킨다고 하는데 보여야 믿든지 말든지 할 텐데.

여하는 어느새 사라져버린 오미너스의 행방을 눈으로 좇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조심해. 지금 오미너스가 땅으로 들어가서 주변에 퍼져 있어.

―닿으면 안 되는 거 알지? 저건 위험해.

"놈은 땅에 있소!"

여하가 외치자마자 '피해!'라는 물의 말이 들렸다.

땅에서 입을 벌리며 오미너스가 튀어나왔다.

여하가 헤레스를 밀며 뒤로 물러났지만, 오미너스는 한 번 더 돌진해 여하의 팔을 뜯어버릴 기세로 물어버렸다.

콰직!

"…으윽!"

여하가 비명을 질렀고, 팔이 녹아내렸다.

치이이익.

헤레스가 손을 뻗자 여하가 외쳤다.

"물러나시오! 닿으면 녹소!"

구슬을 튕기며 헤레스가 마법을 시전하자 뒤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끈적한 물소리를 이어 목덜미에서 통증이 느껴지자 헤레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히히.

웃음이 은은하게 들려왔기에 헤레스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번쩍!

갑자기 빛이 쏟아졌다.

"그건 안 된다, 이 괴물아!"

엘라힘이 이를 악물었다.

신의 은총에 닿자 오미너스가 가루가 되어 스르르 떨어졌고, 갑자기 바람이 몰아쳤다.

휘익!

바람이 가루를 쓸어버리자 헤레스는 멈췄던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오미너스는 또 숨어버렸다.

마치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짐승처럼 천천히 자신을 조여오고 있었다.

"괜찮아?"

넬시아가 다가와 묻자 헤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닿은 거 말고는 괜찮습니다."

헤레스가 목덜미를 만지자 피가 묻어났다. 겨우 닿은 것만으로 살이 녹아내렸다.

"망할. 이건 진짜 왜 이렇게 숨어버리는 건데."

라르웬이 바닥에 착지하며 신경질을 냈다.

키득키득.

어디선가 웃음이 들려왔다.

"위에 있소!"

상처가 회복되고 있는 여하가 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위를 쳐다보았다.

위에서 오미너스가 성인 정도의 크기를 유지한 채로 웃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고 있으나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미너스는 손가락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하였다.

너희 다 죽어.

[저거… 지금 뭐라는 거야?]

루룸은 기가 찬 목소리를 내며 오미너스를 바라보았다.

오미너스는 방긋 웃고는 하늘에서 흩어졌다.

넓고 넓게 번져가자 꼭 먹구름이라도 몰려온 것만 같았다.

사사사사삭.

물방울 크기만큼 작아진 오미너스가 비처럼 하늘에서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꼭 수많은 화살이 떨어지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허."

라르웬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막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금 헤레스가 오미너스에게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피부가 녹아내리지 않았던가.

"가자! 버텨보자고!"

라르웬이 각오하면서 루룸을 재촉했다.

[멋진 척하지 마. 나도 아니까!]

정령수를 박박 긁어와서는 바람을 넓게 펼쳤다.

하지만 라르웬의 눈동자가 곧 커졌다. 갑자기 바위가 나타났으니까.

라르웬은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같이 해야지. 안 그래?"

넬시아 역시 정령수를 끌어모아 충격에 대비했다.

오미너스가, 재앙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신이시여."

엘라힘이 마지막을 예감한 듯 기도를 올리자 건물에 숨어 있던 이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여러 말이 헤스트리아 왕국을 감쌌다.

살려달라.

도와달라.

절망밖에 느낄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부드러이 무언가 하늘을 감쌌다.

[…물이다.]

루룸이 말문을 열며 눈을 크게 떴다.

물이 앞으로 나아가듯 헤스트리아 왕국 전역을 감쌌다.

찰랑.

청아한 소리가 퍼지며 이 땅에 깃든 절망이 싹 걷어냈다.

"…너. 너어, 미쳤구나?"

라르웬이 힘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기겁했다.

이 힘은 세상에서 하나뿐이었다.

짝짝.

누군가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쾌하십니다."

카샬이 감탄하며 말했고, 레디나가 양손을 흔들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라 그런가, 속이 뻥 뚫리는 그런 기분이에요."

"에이, 왜 그러세요?"

두 사람 뒤에서 걸어오던 하벨이 키득거렸다.

숨어 있던 이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걸어 나왔다.

하벨 뒤로 우르르 정령들이 따라오지 않던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기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다행히도 제때 도착했네요."

하벨은 으쓱거리며 위를 바라보았다.

치이이익.

저 물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걸 감지한 오미너스가 다시 사람의 형태를 띠어서는 허공에서 둥둥 떠 있었다.

―이러지 마. 나는 네가 좋아.

오미너스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 전보다 더 또렷해진 말투에 하벨은 소름이 돋았다.

화르르륵.

랜턴에 검은 불꽃이 아주 아주 높이 피어올랐다.

"내가 좋다고? 왜?"

하벨은 그 말이 우스웠다.

―몰라. 네가 좋아.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널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 그러기에는 네 꼴이 참, 대체 얼마나 잡아먹었는지 모를 만큼 엉망이잖아?"

―쟤들이 나를 아프게 했어.

"아니. 네가 먼저 건드렸겠지."

―그렇지만, 배가 고픈걸.

오미너스의 시선이 정령들을 향하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두려움에 다급히 서로를 안으며 벌벌 떨었다.

―배가 너무 고파.

오미너스는 힘없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우린 안 된다는 거야. 아쉽네."

하벨은 손가락을 튕겼다.

아라가 하벨의 망토 속에서 움직이며 정령수를 넣었다.

[얘들아!]

아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령들이 하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흐읍.

기합을 넣는 소리 이외에 누구 하나 무어라 말하는 정령들이 없었다.

―밖에 나오면 아무 말도 하면 안 돼. 지금 사람들한테 여러 가지로 들키면 대장이 엄청, 엄청 곤란해져. 이 몸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명령을 내려도 되는 아라가, 자신들의 왕이 '부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가.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정령들은 거의 처음 듣다시피 한 말이었기에 아라가 '대장'이라 부르는 자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어쩌면 하늘에 넓게 펼쳐진 저 물을 보자마자 밀려드는 그리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양심이 있어서 너희가 사람들을 굴린 만큼, 정령사가 아닌 존재를 업신여긴 만큼, 이곳에 감히 왕을 두고도 왕으로 군림한 만큼만 딱 굴려줄게.

웃기게도 진짜 왕이 나타나자 그간 보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씩 보여와 왜 달님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됐다.

왕이 있음에도 왕으로 군림했다는 말은 사실이었고, 잠깐이지만, 달님이 아라한테 대하는 모습을 보자 이곳에 있는 정령사들이 정말로 자신들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니.

어쩌면 좋아했던 맞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득과 실이 얽힌 관계였을 뿐이었다는 것 역시.

저자의 등장으로 갑자기 많은 게 바뀌었다.

'…부럽다.'

정령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라의 신호가 끝날 때까지 정령수를 멈추질 않았다.

하벨이 순환의 길에서 회전하는 정령수를 느끼며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넬시아는 하벨에게 다가오다가 잠깐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고 보니 숫자가 늘어났는데?'

결코, 기분 탓이 아닌지 하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머뭇거려? 딱 좋을 때 기록해야지?"

하벨은 셴을 향해 말했다.

"자, 자, 잠시만요. 지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셴의 뒤에 레디나가 서서는 등을 쿡쿡 찔렀다.

"맞아요. 어서 준비해야죠. 달님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금방… 금방 됩니다."

셴은 집중하려 숨을 몰아쉬었고, 하벨에게 달려온 라르웬이 물었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데리고 왔어?"

"아, 처음 보죠?"

하벨은 태연하게 반응하며 반영구 정화제를 꺼내 놓았다.

반짝거리는 빛깔을 보자 잠잠하던 오미너스가 날뛰었다.

―저건 싫어! 너도 날 아프게 할 거야? 너도?

"협회장이요."

하벨은 목소리를 낮춰 라르웬과 넬시아에게 알려주었다.

"…뭐?"

둘이 동시에 놀라며 카샬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데려오셨습니다. 말렸습니다. 정말 뜯어말렸지만, 실패했습니다."

조금 전 하벨은 아라에게 부탁해 마법사 협회에 물의 길을 열어 셴을 데려왔다.

"내버려 두면 뭐 하겠어요?"

동영상을 만들 수 있는 마법이 있는데 놀게 둘 수 없었다.

데려와야지.

하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정화제에 물을 집어넣었다.

"시작은 무난하게 가자고."

아라에게 부탁하며 하벨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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