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36화 (336/415)

336화. 부메랑

* * *

"…모릅니다."

하지만 류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니.'

하벨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벨 티에라를 찾고, 그에게 이 모든 걸 다시 되돌릴 제안을 한 뒤에 세계가 한 차례 멸망했다는 기억은 있지만, 자세히는 나지 않습니다. 애초에 이 기억을 준 것도 유렌일 겁니다. 아무리 살펴도 제 기억 속에 회귀했다는 게 없습니다."

"유렌이 널 건드린 거야. 유렌이… 네 기억을 지워버렸을지도 몰라."

하벨은 손을 뻗어 유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온기가 느껴지질 않았다.

"아마 유렌이 무슨 짓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틈의 세계에 있는 이들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유렌의 마음이니까요."

류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불안함이 왜 없을까. 지금 기억이 진짜라는 보장이 있을까.

하지만 류아는 등을 돌리고 자신이 나왔던 틈의 세계로 발을 들이밀었다.

지금 믿어야 할 건 용왕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 기억 속 큰 사건이라고 한다면, 신성 국가 시엘느. 세계가 멸망하기 전, 그곳에 있던 신관들이 다 죽어버린 사건이 있습니다. 아마도 에른스트의 짓이겠지요."

류아는 다시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용왕님. 용왕님께서 미래를 빼앗아버린 게 아닙니다. 하벨 티에라에게는 이미 새로운 영혼이 있었고, 새로운 삶이 있었습니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다고 해도 그릇이었을 뿐,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영혼이… 콜록, 하벨 티에라에게 제대로 계승이 되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죄책감이 어린 하벨의 표정에 류아는 마음이 미어졌다.

"그건 아닙니다. 용왕님의 영혼을 죽어버린 몸에 넣은 건 에른스트니까요. 완벽한 영혼이 아니면 계승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호소하듯 말하던 류아의 표정이 차차 일그러졌다.

"용왕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가 영혼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그 커다란 영혼을 다 가져갈 수가 없어 이렇게 용왕님을 고생시키고 있는 걸 보면 알지 않습니까? 애초에 계승은 불가능했던 겁니다."

콜록.

하벨이 또 피를 쏟자 류아는 당장이라도 그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하벨이 소개한 칼리우스와 카샬이 그를 부축하는 걸 보며 저절로 미소가 날 것만 같았다.

류아는 2분이라는 시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대신들이 용왕님의 육체를 찾고 있습니다. 아마도 에른스트가 불안한 모양입니다. 살아 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하겠죠. 죄송합니다, 용왕님. 저는 때가 되면 아마도 용왕님의 육체를 이용할 것만 같습니다."

짧은 사실은 하나라도 더 하벨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제가 틈의 세계와 이어져 있어서, 용왕님의 육체를 만지면 다른 대신들에게 신호가 갑니다. 그래서 옮기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죠. 도중에 여러 번 옮긴 적도 있습니다. 왜 이전 육체를 한곳에 두지 않았는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욱신.

하벨은 욱신거리는 가슴팍에 옷자락을 쥐었다.

이렇게 신체를 흐트러트리지 않았으면 에른스트한테 들킬 테니까, 에른스트가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랬던 거야 왜 모르겠는가.

"제가 유렌에게 쫓기는 게 아니라 쫓기는 척하는 겁니다. 물론, 실제로 쫓기는 중이긴 합니다. 빙의와 회귀에 있어 유렌의 입김이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류아는 틈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갔다.

뭘 더 전해야 할지 마음이 급해졌기에 류아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 멍청한.

류아는 하벨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금 전 하벨의 눈동자에 나타난 죄책감을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용왕님. 제발, 본인이 아니라 저를 원망하십시오."

류아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깊은 간절함을 섞었다.

"다음 계승이 이어진다는 건 저도, 용왕님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혼을 가져갔습니다. 그러니 부디, 용왕님 본인이 아니라 이렇게 용왕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멋대로 일을 벌인 절 원망해주세요."

"그럼 왜… 하벨 티에라와 똑 닮은 그 아이가 죽었어야 했지?"

하벨은 몸을 부들거리며 물었다.

룬델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고통을 받았어야 했을까.

"…미안합니다, 용왕님."

하지만 대답은 사과로 들려왔다. 그대로 틈의 세계가 닫혀버렸다.

마치 해연이 자신이 이 땅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라고 말했을 때와 표정이 같았다.

"…쿨럭!"

하벨이 피를 토하며 몸뚱어리가 땅으로 축 늘어졌다.

카샬.

하벨은 눈으로 카샬을 불렀다.

지금 쓰러질 수 없었다.

아직은 쓰러지면 안 될 순간이 아닌가.

'만들어야 할 게 있는데.'

두 번째와 달랐다. 저주가 갑자기 커진 게 느껴졌다.

[이 몸이… 끄응, 이 몸이 잡았어!]

아라의 앞발을 따라 땅이 움직여 하벨을 붙잡았다.

"칼리우스. 이걸 보고 저 망할 저주 좀 막아봐!"

카샬은 류아에게 받은 저주를 해제할 방법이 적인 종이를 내밀고는 품에서 주사부터 꺼냈다.

"자, 잠깐만, 선배! 도련님! 지금 힘을 해제해야 해!"

칼리우스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주가 강해진 만큼 하벨 주위로 나오는 얇은 실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아졌다.

[맞… 마, 맞아. 이 몸도 이제…….]

아라가 숨을 헐떡거렸다. 저주가 더 커져서는 지금 자신이 내는 물로는 너무 힘들었다.

자연의 힘이 텅 비어버릴 것만 같았다.

[얘들아, 도와줘!]

아라가 외치자 뒤돌아 있던 정령들이 아라에게 다가와 다급히 아라를 향해 힘을 건넸다.

아라는 그 순간 고갈되었던 힘이 빠르게 차는 걸 느꼈다.

[…우와아.]

우드득.

이상하게, 신기하게도 무언가 벗겨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게 무슨 감각인지 몰라도 아라는 조금 전보다 더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하벨을 향해 손을 뻗는 저주를 막아섰다.

"하……."

그 많던 얇은 실들이 금세 줄어드는 게 보였기에 칼리우스가 숨을 잠깐 돌렸다.

카샬이 하벨에게 링거를 다는 모습을 보며 칼리우스는 잠깐 카샬이 자신에게 넘긴 종이를 보았다.

"…우와."

그냥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깔끔한 풀이법에 칼리우스의 머릿속에 설계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빛의 줄기가 서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 괜찮다.'

하벨은 무거워진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손을 뻗었다.

아라한테 힘을 주는 정령들의 힘은 정령수였다.

그 힘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자 하벨은 손을 뻗었다.

정령들의 힘이 담긴 아라의 힘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주를 멈추고, 순환의 길에서 회전했다.

하벨이 순환의 길에서 춤을 추는 힘을 밖으로 빼내자 정화제가 나왔다.

빙글빙글 돌며 빛을 내뿜는, 반영구 정화제에 정령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벨은 반영구 정화제를 보며 눈빛을 바꿨다.

그 속에 다양한 힘이 맴도는 게 이제는 보였다. 그래서 이토록 예쁜 빛을 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내가 저걸 움직일 수 있겠는데?'

하벨은 본능적으로 드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보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반영구인 정화제에 자신의 물로 감쌌다.

마치 '무엇이 되면 좋을까요?'라고 묻듯이 정화제가 더욱 반짝거렸다.

[…대장. 이 몸의 귀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정화제에서 소리가 들려.]

아라가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뭐가 됐으면 좋겠냐고 그러는데? 이 몸은 지금 좀 이상해. 저건 분명히 정화제인데.]

아라의 말에 하벨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나도 그렇게 보여. 그럼, 한 번 해볼까? 물은 어때?"

[이 몸은 지금 정말 가슴이 두근거려. 정화제가 달라졌어. 정화제가 마치 하나의 힘처럼 느껴져.]

아라가 신이 난 채로 물을 부르자 반영구 정화제가 모습을 바꾸며 하벨의 손에 맴도는 물이 되었다.

[혹시, 혹시 너는 불도 될 수 있어?]

아라가 조심스레 묻자 이를 의식한 듯 바로 모습을 바꿔 불이 되었다.

[우오, 오옵!]

아라는 깜짝 놀라며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대장! 이건 이 몸도 모르는 힘이야. 그냥 자연의 힘이 저기에 다 모인 것 같아!]

하벨이 자신의 물을 빼내자 반영구 정화제는 다시 마름모 모양의 보석이 되어서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돌며 빛을 냈다.

'…내 영혼이 강해졌기에 저 정화제까지 내 힘에 반응하는 건가?'

하벨은 정령 속에 깃들어 있는 자신의 힘이 정화제에서도 고스란히 숨어져 있다는 걸 알았다.

좋은 발견이지 않은가.

하벨은 에르티안 왕국과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그랬듯이 정화제 속에 자신의 힘 일부를 놓아두었다.

'아라가 힘의 방향을 잡을 수 있으니 만약에 아라가 실체화를 한다면 얼마나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하벨은 용왕의 힘을 꺼트렸다.

이전에 반영구 정화제를 만든 후에 자신의 힘이 조금은 강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영혼을 반 정도 얻은 이제는 왜 그런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반영구 정화제로 물이 정화되고, 물이 정화될수록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물이 늘어나고 이게 결국, 자신의 힘이 강해지는 구조로 돌고 있었다.

'앞으로 반영구 정화제 역시 많이 만들어야 놔야겠네.'

하벨은 다시 가면을 뒤집어썼다.

"아라야, 용용아. 너무 고생 많……."

하벨은 말을 멈췄다.

자신의 몸뚱어리에 마법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 마법을 만든 칼리우스 역시 기겁했다.

"우… 우와아."

[왜, 왜 그래, 용용아?]

아라는 하벨과 칼리우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두 사람이 말이 없자 잠깐 정화제에 시선을 두는 정령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이건 정화제야.]

[하지만 정화제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가루에요.]

[맞아요. 휘날려야 하는데, 이건 보석처럼 생겼는데요? 빙글빙글 돌고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기에 원래 있던 그 물건이랑 느낌이 비슷해요.]

[맞아. 그거랑 비슷할 거야. 봤지? 대장은 약속을 지켜. 그러니까 너희도 약속을 지켜주면 좋겠어.]

아라가 흐뭇함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급히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직 하벨의 내부에 자신의 물이 남아 있었기에 활발하게 움직이던 저주가 멈춘 게 느껴졌다.

'저주가…….'

아라는 입을 가렸다.

저주가 멈춰버렸다.

"……용용아?"

하벨이 놀란 눈으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칼리우스 역시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아직 임시인데 이 정도라니 그럼……."

칼리우스는 말을 하다 말고 곧 어깨를 떨었다.

"어……?"

"왜 그래, 용용아?"

하벨이 입을 열자 칼리우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헤레스가 마나로 나한테 신호를 보내고 있어. 그런데 여기선 마나의 흐름이 잘 안 보여."

아마도 하벨의 힘 때문이 아닐까.

쿠구구궁.

갑자기 주변이 흔들리자 하벨은 오싹함을 느꼈다.

"…오미너스다."

조금 전 작았던 오미너스와 다른 크기라는 게 느껴졌다.

하벨이 일어서자 카샬이 그를 말렸다.

"지금은 안 됩니다. 조금만 있다가 움직이십시오."

"아니. 괜찮아. 용용이가 마법을 쓰기 전까지는 나도 그 생각했어. 하지만 마법이 살아 있는 지금은 움직일 때야."

하벨은 카샬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링거를 달고는 밖으로 나갔다.

"달님!"

레디나의 목소리부터 들렸다.

이윽고 그녀에게 붙잡힌 헤스트리아 왕국의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하벨은 그들보다 오미너스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오미너스가 나타났어?"

"저기 보세요."

레디나가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가로지를 것처럼 거미줄 모습을 띤 검은 물이 가득했다.

"너무 큰데?"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헤스트리아 왕국 전체를 덮을 것만 같았다.

저들이 왜 오미너스를 보며 '악마'라고 했는지 공감이 갈 정도였다.

"조금 전에 갑자기 나타났어요. 그리고 저쪽 북서쪽을 공격했고요."

레디나는 손가락을 옮겨 조금 전 자신이 언급했던 북서쪽을 가리켰다.

"저기야!"

칼리우스가 말을 소리쳤다.

"저쪽에서 신호를 보냈어!"

"어떤 신호를 보냈는데?"

하벨이 빠르게 되묻자 칼리우스는 조금 전 활기차던 모습과 달리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대신'이라는 말로 보여. 마나가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그 외에는 모르겠어."

"아니. 확실히 도움이 됐어."

하벨은 이를 악물었다.

'날 괴롭히는, 왕국에 내린 눈은 틈의 세계 때문에 일어난 게 맞았다. 그것도 대신들이 나왔던 틈의 세계였고.'

왜 대신들이 나왔겠는가.

'오미너스가 대신들의 짓거리라는 거지.'

하벨은 하나씩 머릿속에서 이어져 나갔다.

대신이라는 말을 재차 꺼낸 걸 본다면 저쪽에서 대신들이 나왔다는 정보를 얻었고 어떻게든 자신한테 전해주기 위해서 애를 쓴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건 오미너스가 지금 이렇게 날뛸 걸 예측했다는 거고, 이걸 회수하러 오겠다는 건데.'

하벨의 시선이 기사들을 향했다.

"당신들 전부 따라오세요."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네놈들이 이러고도……."

"잔말 말고 따라와. 거부는 없어."

하벨은 코웃음을 쳤다. 존댓말을 써주니 아직도 대접받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진짜 데려가시겠다는 겁니까? 저 덜떨어진 놈들을 말입니까?"

기사들을 보던 카샬은 혀를 찼다.

어차피 백성들을 다 버리고 왕의 옆에서 기생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저들이 대체 왜 필요하다는 건지.

"아니 지금……."

[입 다물어. 누가 지금 반박하래?]

아코가 단호히 기사들에게 경고했고,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벨은 고개를 돌려 아라를 바라보았다.

"부탁해. 이건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해. 정령들을 다 모아줘."

대신들이 오기 전에 끝내야 했고, 대신들이 와서도 대치하려면 정령들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이 몸만 믿어.]

하벨은 아라의 힘찬 대답을 들으며 칼리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햇님아."

"응."

"내가 지금부터 굉장히 어려운 부탁을 할 거야."

하벨은 미안함을 드러냈다.

"이미 너무 많은 부탁을 해서 미안해."

"아니야. 이건 나밖에 못 하는 거잖아?"

칼리우스는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자신이 해내야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