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탐색(2)
* * *
"그런데요, 카샬."
레디나가 구멍으로 내려가기 전에 묻자 카샬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래됐긴 했지만, 누군가 파놓은 흔적이 보이는데요? 입구가 좀 조잡해요."
"내가 팠어."
"…다, 다시 보니까, 완벽한데요?"
레디나가 다급히 말을 바꾸자 하벨이 낄낄 웃었다.
웃음을 죽이며 웃는 모습이 그렇게나 얄미울 수가 없었다.
"원래는 입구가 없는데, 내가 팠지. 여기가 너무 싫어서. 그 마음으로 팠는데, 진짜로 이곳으로 탈출할 줄은 몰랐어."
구멍을 바라보며 카샬은 슬픔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어린 손으로 이렇게 단단한 흙을 어떻게 파냈을까.
[울어, 카샬?]
아라가 카샬의 뺨을 쓰다듬자 아코가 코웃음을 쳤다.
[카샬은 이런 걸로 안 울어.]
"카샬. 있잖아요. 왕자님이라고 부르면 화내겠죠? 왕자님하고 부르면 안 되는 거 맞죠?"
말과 달리 레디나의 눈빛이 너무도 반짝였다. 드디어 놀릴 걸 잡았다는 눈빛이었다.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카샬이라도 왕자님이라는 말에는 화낼걸? 왕자님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왕자님이라고 불리는 걸 꺼릴 거라 생각해. 왜냐하면 왕자님이라는 호칭이 싫을 테니까."
하벨이 슬쩍 끼어들자 카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련님. 제가 이제 용왕님하고 불러드릴까요? 그럼 레디나 넌 간부님하고 부르고?"
"그래도 되는데? 난 맨날 들었는데?"
하벨이 낄낄거렸고, 레디나가 감동하며 말했다.
"와. 카샬이 처음으로 간부님이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저 오늘을 기념하면 되는 건가요?"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시죠."
카샬이 구멍을 두어 번이나 가리켰다.
긴장을 풀라는 의도는 알지만, 레디나나 하벨이 너무 즐거워 보이니 아니꼬웠다.
"아래는 깊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카샬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먼저 갈게."
하벨이 신이 난 채로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아라가 뒤따라갔다.
[같이 가, 대장!]
"저도 갈게요. 이게 보니까, 혼자 들 수 있는 무게더라고요."
레디나가 실실거리며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칼리우스만 남자 카샬은 여전히 나무 밑동을 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 들어가?"
"선배."
"왜?"
우물쭈물하던 칼리우스가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나는 이런 걸로 놀리지 않을 거야. 나도 '괴물'이라고 사람들이 그랬거든. 그래서 싫은 별명이 뭔지 알아."
키나 덩치나 하벨보다 더 컸지만, 아직 작았을 때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왠지 기특했기에 카샬은 칼리우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칼리우스."
"내가 마지막으로 들어갈게."
"아니야. 먼저 들어가. 여길 연 것도 나니까, 닫아야 하는 것도 나야."
"잘 따라와야 해."
"그래. 어서 가."
카샬은 칼리우스가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 숨을 깊게 내쉬었다.
[착잡하지? 많이 슬프지?]
"사실, 내가 여길 다시 찾아올 거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이 구멍에 다시 들어갈 거라 생각한 적도 없어. 여길 나와야 내가 살 수 있었으니까."
카샬의 시선이 아코를 향했다.
[맞아.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여길 나왔어야 했어.]
"아코. 내가 여기서 나올 때, 네가 날 도왔어?"
지금이야 자신이 컸고, 이 밑동을 들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었다고 하지만 과거에는 아니었다.
[…맞아.]
아코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대답했다.
[미안해. 나는 네가 여길 탈출한 기억에 오점을 찍으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너를 도와주고 싶었어.]
"고마워, 아코."
카샬은 아주 환하게 웃으며 아코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슬플 때도 네가 있었고, 내가 자유를 얻었을 때도 내 옆에 네가 있었어. 이제 네 옆에 내가 있을게."
아코의 작은 눈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하지만 내 존재는, 너의 아픔이야, 카샬. 내가… 너의 슬픔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어.]
"괜찮아."
카샬은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 속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 그거? 한 정령이 막아서서 지체됐대.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고 그랬대. 진짜 웃겨. 정령님께서 그럴 리가 없잖아?
누군가 자신을 스쳐 가며 꺼냈던 그 말이 사실이길 빌어봤지만, 현실은 너무도 잔인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그 사실에 머릿속에 있던 모든 게 지워지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너였을 줄이야.'
대체 얼마나 자신을 지켜준 건지 몰랐다.
지금은 아코에게 한 걸음씩 나아갈 때이기에 카샬은 말을 돌렸다.
"나보다 더 큰 아픔을 삼키는 분도 계시잖아?"
[가끔 생각하는데, 하벨을 어디에다가 묶을 수 없어? 네가 너무 고생해. 이러다가 네 머리카락이 전부 하얗게 변하겠어!]
"그게 됐으면 내가 벌써 했겠지? 나도 진심으로, 정말, 도련님의 움직임을 막을 마법이라도 배워봤으면 좋겠다 싶어."
갑자기 커피가 먹고 싶어지자 카샬은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보여, 헤레스?"
넬시아가 헤레스에게 물었다.
"아뇨.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오미너스의 흔적을 쫓을 수 있는 사람은 헤레스뿐이었다.
[하벨이 이거 안 해줬으면 진짜 무서워서 덜덜 떨뻔했어.]
톰톰의 얼굴이 아라처럼 물로 감싸 있었고, 톰톰은 넬시아 옆에 꼭 붙어서는 지금도 덜덜 떨었다.
[이거 맛도 좋아.]
루룸은 라르웬의 머리에 엎드려 물을 할짝거려보았다. 이것만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헤스트리아 왕국 내부는… 이랬군요. 그냥 보통 마을이네요."
헤레스는 나라였던, 마을이었던 장소를 바라보며 씁쓸함을 드러냈다.
무너진 집 근처에 무언가에 먹힌 시체나, 움푹 팬 바닥에 머리가 터지거나, 사지 중 일부가 날아간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딜 보아도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건 시체와 건물 잔해였다.
"이봐, 라탄. 네가 떠나기 전에도 이랬어?"
라르웬이 묻자 라탄은 훌쩍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러진 않았어. 정말이야. 그냥… 모두가 도망치고 있었다고. 이런 상황은… 나도 몰라.]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즉, 라탄이 이곳을 떠나고 새로운 문제가 터졌다는 게 아닌가.
"…부디, 신께서 따뜻한 손길을 뻗어주시길."
엘라힘의 조용한 기도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싸운 모양인데, 굳이 여기서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있소? 저기 밖으로 나가면 되는 거 아니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건 문이라 생각하오."
여하는 딱 봐도 정문으로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맞아. 저건, 문이야. 하지만 정령의 힘이 없으면 열 수가 없어."
넬시아의 대답에 여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유를 말해주겠소?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한 문처럼 보이니 말이오."
"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저건 돌이야. 정령의 도움 없이 일반 사람이, 아니, 여하 너라도 힘들걸? 저 문 하나에 정령이 수십이나 붙었으니까."
넬시아는 처음 헤스트리아 왕국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문이 저렇게 무겁고, 정령들의 도움이 없으면 열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정령들의 환대라 생각해 얼마나 행복했던가.
왠지 부끄러운 기억에 그녀는 괜히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그냥 짐승이 가득한 우리가 되어버렸다는 거네?"
코웃음을 흘리며 라르웬이 말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시체들의 흔적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예상이 됐다.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되는지 클로저로서 이런 일을 많이 보곤 했다.
남은 식량을 가지고 다투거나, 이때다 싶어 내내 앙심을 품었던 자들을 죽이거나, 혹은 재물을 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비유가 너무 적절하네."
넬시아가 쓰라림을 담아 주변으로 시선을 두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이 내부를 이렇게 볼 줄이야.
오미너스라는 존재 하나가 나라를 이렇게까지 휩쓸 수 있는 건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어쨌든, 흔적으로 본다면 생존자는 있어.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면 왕실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네."
라르웬은 주변 흔적을 조사하고 있는 헤레스와 기도를 이어가는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그럼, 오미너스는 어디로 갔을까? 넌 어떻게 생각해, 라르웬?]
루룸이 가장 큰 의문을 던졌다.
이곳 왕국은 하나의 거대한 수도인 만큼 너무 넓었다.
라탄이 알고 있는 비밀 장소가 그나마 왕실과 가까워서 망정이지.
"그러니까. 내 생각과 너무 달라. 온천지 오미너스로 도배가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꼭 틈의 세계라도 나온 것처럼 보이는데."
"지금 오미너스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하벨이 없기 때문이 아니오? 그때, 오미너스가 귀인의 물에 반응했소. 어쩌면 오미너스가 하벨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오."
여하가 던진 말에 라르웬은 불안함을 드러내다가 당장 검을 꺼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무너진 건물 너머를 향한 라르웬의 검 끝에 누군가 있었다.
목에 닿는 검에 누군가는 손을 든 채로 오들오들 떨었다.
"…자, 잠깐만요!"
"누구지?"
라르웬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쪽은 위… 험해요."
남자는 시선을 어딘가로 두었다.
정확히 라르웬의 뒤쪽이었다.
라르웬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루룸이 상황을 알려주었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 …적어도 지금은.]
"이제 곧 놈이 이쪽으로 올 시간입니다. 제발, 절 믿어주세요."
"놈이라니?"
라르웬이 여전히 날을 세우며 묻자 남자는 숨부터 가다듬었다.
콰드득.
여하가 일부러 벽을 부수자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아, 악마가… 이곳에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보지 못했습니까?"
[악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라탄이 남자를 재촉하자 그는 라탄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을."
남자는 조금 전보다 더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들을 잡아먹는 악마요."
'오미너스다.'
라르웬은 저 남자가 말하는 존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잠시만."
넬시아가 라르웬에게 다가왔다.
서로 가면을 쓴 상태에서 이름을 부르기가 어려웠다.
정령들이야 외관상 겹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아라처럼 혼자 튀어 보이는 정령이 아니라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넬시아는 자신의 외투 안으로 들어간 톰톰을 토닥거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넬시아는 단번에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정화제를 받을 때, 전체적으로 관리 감독하던 관리자가 아닌가.
"검 내려."
넬시아가 라르웬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는 숨을 짧게 내쉬더니 검을 내렸다.
"악마 이야기는 가면서 해주시겠습니까? 그것보다 생존자가 있는 곳을 아십니까?"
넬시아의 물음에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관리자는 넬시아를 포함한 저들을 살짝 낯설게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저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혹시 외부에서 왔습니까?"
"우선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외, 외부에서 왔다면 제발 도와주세요! 지금… 저 악마 때문에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나가는 입구도 열 수가 없습니다. 정령님들의 도움이 필요한데 다들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일그러진 얼굴 너머로 무능함이 떠올랐다.
헤레스는 관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령을 잃은 정령사의 모습이 저럴까. 자신도 몇 년간 티에라 가문에서 일해왔기에 저 무력감은 몹시 낯설었다.
"판단은 우리가 합니다."
넬시아는 상당히 냉정한 말을 뱉었지만, 관리자의 눈빛은 달라졌다.
희망이 어려 있었다.
"어서 절 따라오세요. 어서요!"
* * *
'…기분이 이상한데.'
하벨은 카샬이 지나왔던 통로를 걸으면 걸을수록 밀려오는 느낌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불길함과 함께 자신의 영혼이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두 가지 느낌이 겹쳐와 하벨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대장?]
"왜 그러십니까?"
아라와 카샬이 하벨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속이 안 좋아."
하벨의 숨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여러 가지 상황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왜 하필 눈이 내렸으며, 오미너스와 함께 자신의 영혼이 공명하는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몰랐다.
"업혀, 도련님."
칼리우스가 하벨 앞으로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지금 여기에 여러 힘이 느껴져서 그래. 내가 없애줄게."
"아니야. 버틸 만큼 버텨볼게."
하벨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어지러움이 몰려와 벽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 봐, 대장.]
아라가 앞발을 꼬옥 쥐다 울상을 지었다.
[안 되겠어. 이 몸이 지금 물을 줄게. 지금 대장의 몸에 여러 가지가 막 난리가 났어!]
"이곳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이미 힘들게 버티고 계십니다."
카샬이 품에서 주사기와 조금 전에 헤레스에게 받은 링거를 꺼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왕실이 나옵니다."
"…왕실이요?"
하벨을 부축하고 있던 레디나가 깜짝 놀랐다.
"내가 왕자라고 말했잖아?"
"아, 맞다. 잠깐 깜박했지 뭐예요. 제가 보기에 집사가 진짜 잘 어울려요."
"이제 와서 왕자 노릇 할 생각은 없어."
카샬은 코웃음을 치며 하벨을 일단 앉혀서는 주사부터 놓았다.
"링거는 나중에… 하, 모르겠습니다. 일단 달고 봅시다. 이러다가 더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못하시겠습니다."
분명 하벨은 비를 대비해 가면이며 옷이며 여러 가지 대비를 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토록 약해지다니.
"…레디나 너는 괜찮아? 너도 정화제 하나 먹는 게 어때?"
하벨이 묻자 레디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련님. 제가 여기서 도련님 빼고 내성이 제일 낮은 건 맞는데요, 도련님하고 비교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직 끄떡없어요. 언니한테 받은 정화제도 많아요."
"양심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실 생각이라면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카샬마저 하벨을 비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하네. 내 양심은 바다 같은 거 몰라?"
하벨은 주저 없이 용왕의 힘을 끌어왔다.
일단 숨 좀 돌리고, 영혼이 어디 있는지 방향이라도 알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대, 대장? 대장 지금 아픈데 대장 힘까지 끌어오면 또 아픈데?]
아라가 바로 놀라며 허둥지둥거렸고, 하벨은 당장 힘을 껐다.
"…와. 이거 큰일인데? 내가 사고쳤어."
하벨이 머쓱한 목소리를 냈다.
"사, 사고요?"
카샬은 그대로 손을 멈췄다. 하벨 입에서 '사고'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설마, 오미너스가 온다는 거 아니죠?"
레디나가 키득거렸다.
"맞는데?"
하벨도 덩달아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