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29화 (329/415)

329화. 헤스트리아 왕국으로(3)

* * *

"…뭐?"

라르웬이 허탈한 목소리를 냈고, 넬시아는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너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루룸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라니. 이게 당최 무슨 소리인지.

<…하, 하벨아?>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하벨 티에라가 제 다음 용왕이었어요. 그걸 알고 이 몸에 절 빙의시켰나 봐요."

하벨은 말을 덧붙이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라를 쓰다듬었다.

놀란 모습이 보였다.

"저번처럼 안 그래, 아라야."

[이 몸은 방금 놀랐어. …다행이다. 대장이 울지 않아서.]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때처럼 또 우는 건 아닌지, 그때처럼 또 괴로워하는 건 아닌지 무서웠지만, 하벨은 지금 웃고 있었다.

"하벨 티에라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빙의시켰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시죠?"

하벨의 물음과 달리 다들 굳어 있었다.

울었다는 사실과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떤 의문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든 하벨 역시 해결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해결하고 싶은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저 지금은 자신이 처음과 달리 자책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럼 갔다 올게요, 아버지. 저, 잘하고 올게요."

하벨은 실실 웃었다.

* * *

"…자, 다들 들어주세요."

하벨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과 눈을 한 명씩 마주하다가 마지막으로 라탄을 바라보았다.

라탄은 이전보다 더 힘이 없었고, 시름시름 앓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벨은 라탄의 어리광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행실이 결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괜찮아, 라탄?]

아라가 라탄을 토닥거려주었고, 라탄은 자신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모두가 도와줬기에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떠나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벨은 다시 말을 꺼냈다.

현재 여관을 통째로 빌린 상태였기에 여관 주위에 정령들과 정령 기사들을 배치했다.

이곳은 코스모피안 왕국의 국경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었고, 여전히 드란트의 힘이 닿는 곳이었다.

하여 드란트는 아예 마을 주변을 에워쌀 정도로 기사들을 배치해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페트리오가 가면단을 불러 사람들 틈에 섞여 마을 내부를 감시했고, 기사들보다 더 멀리 마법사들까지 배치된 상황이 왜 든든하지 않을까.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그 일을 해결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겠지만, 의심을 피하고자 한 번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미리 헤스트리아 왕국을 조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간만 부족하지 않았어도."

넬시아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나도 그래. 사전 조사를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게 불가능할 시에 적어도 그곳에 갔다 온 누군가가 정보를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라르웬은 은근히 라탄을 압박했다.

이미 하벨한테 여러 가지 말을 들었기에 라탄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너무 놀란 건 이해해. 하지만 적어도 우리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는 줘야 하는 게 맞지. 그렇지 않아, 라탄?]

루룸은 대놓고 라탄을 지목했다.

라탄은 입술을 깨물었고, 루룸은 슬쩍 다가가 라탄을 바라보았다.

[너도 알다시피 정령에게는 망각이라는 게 없어. 그러면 지금 이렇게 움츠러들 게 아니라 뭐라도 말하는 게 맞잖아?]

[그건 맞지.]

톰톰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다가 라탄의 시선에 괜히 눈에 힘을 줬다.

[내가 말해도 다 들어주지 않을 거잖아.]

라탄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하자 이 상황을 재미있게 상황을 바라보던 아코가 입을 열었다.

[네 태도는 문제가 없고? 애초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 생각하면, 아니지, 네가 헤스트리아 왕국을 구하고 싶다면 뭐라도 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내가… 몰라서 그랬어. 어디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하지만 너희는 마치 내가 벌인 일인 것처럼 몰아세우고, 그랬잖아.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라탄은 자신의 태도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만, 화가 나면서도 억울했다.

[잠깐만. 다들 싸우면 안 돼. 지금 엄청 중요한 순간이라구.]

아라가 점점 격해지는 목소리에 그들을 말리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 이 몸은 그렇게 생각해.]

아라는 여전히 이 상황이 너무 어려웠다. 조금 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잠깐 하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장은 이런 상황을 맨날맨날 겪었던 걸까?'

아라는 하벨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벨은 정말로 남을 설득하는데 아주 큰 재능이 있었으니까.

"다들 알다시피 아라가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향하는 문을 열 겁니다."

하벨은 조금 전 일어난 소란을 흘리며 자신의 옆에 선 아라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라탄에게 헤스트리아 왕국과 관련된 모든 일이 고스란히 쏠리는 건 안타깝지만, 라탄이 마냥 피해자라는 위치에 설 수 없는 것도 맞았다.

카샬이 헤스트리아 왕국의 실체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저 라탄의 말에 의지해 사태를 더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을 테니까.

물론, 개인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은 건 아니나 보다 더 정확한 건 헤스트리아 왕국의 상태를 봐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미너스는 내가 없앱니다."

하벨은 단호하게 말하며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꺼냈다.

"잠깐만, 막내야."

라르웬이 기겁했다.

하지만 하벨은 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오미너스를 없앴습니다."

이미 헤스트리아 왕국에 오미너스가 있을 수도 있다고 짐작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앞서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영혼을, 힘을 되찾은 뒤 오미너스를 없애보았다.

결국, 헤스트리아 왕국에 오미너스가 있었고, 현실이 되어버렸지만.

"그러니까 왜 또 네가 하는 건데? 정화제라면 충분할 정도로 가지고 있고, 헤레스가 방법도 찾았잖아?"

라르웬이 당장 언성을 높이자 하벨은 침착하게 말했다.

"가장 빠른 방법을 말한 겁니다. 형님이 말한 것 역시 해결법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네 저주가 너를 갉아 먹고 있어. 언제까지 이 균형이 유지될지도 모르고, 네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라르웬이 얼굴을 구기며 말하자 헤레스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 균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불안정합니다. 저는 이 균형이 언제 무너질지 몰라 너무도 불안합니다."

'…저주라니?'

여하가 깜짝 놀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전개였다.

몸이 약한 건 너무도 잘 보여 알고 있었는데 설마 저주에 걸려 있을 줄이야.

분명 시선을 마주쳤지만, 조용히 웃는 하벨의 모습에 여하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압니다.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오미너스는 더 진화했고 결국, 내가 하는 게 맞아요.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잖습니까."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입니다. 이건 '왕'이라는 사실을 떠나 내가 물을 원래대로 돌려놔야 해요."

"그러니까 왜 너냐고."

라르웬은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바다는, 물은 나의 모든 것이자, 내 존재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가족이니까요."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한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움직일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힘을 얻었으니 내가 저 아픔을 해방해주는 게 맞잖아요?"

"너를 이해해."

넬시아가 하벨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하벨은 그 모습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일단 헤스트리아 왕국에 도착하면 조사부터 해주세요. 나는 따로 갈 때가 있으니까요."

"넌 어딜 가려고?"

넬시아가 물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에 챙겨야 할 게 있잖습니까? 그것부터 챙기고 오겠습니다."

하벨은 굳이 '영혼'이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도 가슴이 아팠으니.

"레디나, 헤레스, 그리고 엘라힘 씨."

하벨은 세 사람을 불렀다.

"물의 내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걸 압니다. 이걸 잘 생각하세요."

"여기서 물의 내성이 없으신 분은 도련님입니다. 가장 조심하셔야 하는 분 역시 도련님입니다."

카샬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헤레스 역시 말문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 그대로 부디, 제발, 물의 내성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제발요."

"그렇지. 헤레스 잘한다. 막내야. 솔직히 방금 말은 진짜 양심이 없었다?"

라르웬이 옹호했고.

[헤레스 말이 맞아. 대장은 오염된 물에 닿기만 해도 큰일이 난다구!]

아라가 하벨의 뺨에 발바닥을 올려서는 아랫입술을 올렸다.

"아쉽게도, 도련님께서 양심을 챙기시기에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카샬은 비웃음을 담았고, 레디나는 놀란 듯이 반응했다.

"무슨 소리예요, 카샬? 이런 일에 도련님께서 양심을 챙긴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아, 내가 착각했네."

"그……."

하벨은 잠깐 당황했다.

어느 정도 반발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돌아올 줄은 몰랐다.

"대체 어떻게 도련님을 가둬야 하나 고민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르시죠?"

레디나가 싱글벙글 웃었다.

"아, 아니. 날 왜 가둬? 아니, 그런 생각은 왜 하는 거야?"

"저희를 이렇게 만든 건 도련님이에요. 필사적으로 말려보라면서요? 그 해답인 거죠."

레디나가 키득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디나가 그렇게 말하자 하벨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레디나. 뭐가 됐든, 너는 이제 중요한 일을 앞뒀으니까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간부를 죽였으니 힘의 논리로 운영이 되는 검은 달의 상황에 맞춰 레디나가 간부가 되어야 했으니까.

"배에 구멍이 난 채로 돌아다니는 도련님께서도 자제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중요한 일이라면 아주 많고요."

카샬이 하벨의 논리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와. 방금은 좀 따끔했다, 카샬?"

하벨은 장난기가 가득 담긴 표정을 짓고는 카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영광입니다, 도련님."

카샬이 고개를 숙이자 하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마디를 안 지려는 모습이 참.'

하벨은 생각을 멈췄다.

사실 카샬이 헤스트리아 왕자였고, 거기서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괜히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가 어떤 마음으로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되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카샬. 너는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아."

"아닙니다, 도련님. 저도 갑니다. 오히려 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카샬은 산뜻함을 담아 웃었다. 아주 낯선 미소였기에 하벨은 어쩐지 소름이 돋아났다.

"…너도 느꼈어?"

목소리를 낮추며 라르웬은 하벨에게 속닥거렸다.

"느꼈죠. 소름이… 장난 아닙니다."

하벨 역시 고개를 끄덕이다 카샬의 시선에 실실 웃었다.

"그럼 출발하죠. 대충 다 알아들었을 거고, 더 필요한 건 현장을 보고 말하겠습니다."

하벨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출발하자, 아라야!"

[응!]

아라가 물의 길을 열고자 앞발을 흔들었다.

* * *

물의 길 밖으로 하벨이 발을 디디자마자 숨이 탁하고 막혔다.

오미너스가 있기에 아라가 좌표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헤스트리아 왕국 근처로 물의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숨이 막힌다고?'

하벨은 앞으로의 상황이 걱정되었기에 주변을 바라보았다.

나무가 울창하게 둘러싼 그 사이에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

하벨은 천천히 나아갔고, 뒤에서 발소리가 점점 늘어났다.

화르르륵.

갑자기 랜턴에 검은빛이 나타났다.

'그래. 여기서 또 무슨 일이 벌어졌다 이거지?'

하벨은 콧바람을 내쉬었다.

[나무야. 길 좀 열어줄래?]

아라의 목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나무로 가려졌던 호수, 그 너머의 풍경이 드러났다.

호수를 앞에 둔 거대한 성이 웅장함을 자랑하며 자신들을 누르려는 것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벽이 다른 성과 달라. 그냥 아주 커다란 돌을 옆으로 두른 것 같잖아. 그리고…….'

소복하게 내린 눈이 성벽 위에, 지붕 위에 쌓인 게 보였다.

'여기에 비가 내린 후인가?'

하벨은 그제야 왜 숨이 막혔는지 알았다.

[대장, 대장, 괜찮아? 여기에 비가 내렸나 봐!]

아라가 뒤늦게 물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깜짝 놀랐다.

"어쩐지. 들어오자마자 기분이 나쁘더라니."

라르웬은 구시렁거리며 하벨에게 다가가 정화 장치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거품이 일어날 것처럼 불안 불안해 보였다.

"막내야. 너 진짜 괜찮겠어?"

시간에 쫓겨 미리 살피지 못했다고는 했지만, 설마하니 비가 내릴 줄은 몰랐다.

최악이었다.

"이미 여기에 왔습니다. 되돌아가기에는 늦었습니다."

"늦진 않았다고 생각해. 레놀드 왕국에서도 다시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올 수 있으니까."

넬시아는 밀려오는 반가움을 누르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지금 하벨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오염된 물로 인한 괴로움이 얼마나 심한지 알고 있었다.

"아뇨."

하지만 하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시기엔 목소리가 떨리십니다, 도련님."

"카샬 말이 맞아. 하벨. 너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

넬시아는 카샬의 말에 동의하며 다시 하벨을 말려보았다.

"솔직히 레놀드 왕국에서 코스모피안 왕국처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벨은 여러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레놀드 왕국의 막내 왕자인 샤넬리움 레놀드, 줄여서 샬룸이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 때문에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그 편지 내용 중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이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과 같다는 걸 명시해놓은 부분이 있었다.

어떤 폭탄을 썼는지 이미 조사 결과가 있기에 빨리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여러 증거'를 모으겠다고 적은 점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이 사건이 이미 벌어지는 걸 아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냥 예감이 좋지 않네요."

하벨은 말을 던지며 라탄을 바라보았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처럼 라탄의 시선에 반가움이 엿보였다.

"라탄. 오미너스는 저 안에 있는 거 맞지?"

성 밖은 너무도 고요하고, 조용했기에 하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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