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헤스트리아 왕국으로(2)
* * *
"화가 나? 벌써? 으음, 이러면 안 되는데."
꽤 진지하게 꺼내는 하벨의 말 그렇게나 얄미울 수가 없었다.
레바놈은 부들거리며 하벨을 쏘아보았다.
"네놈. 네놈이……."
짜악!
카샬이 레바놈의 뺨을 다시금 후렸다.
"그 더러운 입 놀리지 말고, 도련님께서 말씀하시니 가만히 듣고 있어."
하벨은 눈을 깜박거리며 너무도 초롱초롱하게 레바놈을 바라보았다.
"너 팔렸어, 바보야."
"……?"
장난이라기에는 레바놈은 이 이상한 상황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자신을 납치해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던가.
커튼으로 주변이 가려져 있어서 밤인지 낮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날이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왕실 기사들이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이게 너무 이상했다.
"이제 네가 어디로 갈 건지 알려줄게."
하벨이 친절히 꺼내는 말에 레바놈은 그제야 알았다.
아무도 몰래, 하벨이 일을 꾸민 게 분명했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는가? 내가 왕자다! 내가 코스모피안 왕국의 왕자란 말이다!"
"에르티안 왕실."
하벨의 입에서 내뱉어진 그 말에 레바놈은 잠깐 숨을 멈췄다.
에르티안이라니.
아니, 왜 왕국이 아니라 왕실인가.
"바안 에르티안 앞으로."
하벨은 크게 내쉰 레바놈의 숨소리를 듣자마자 놈의 두 뺨을 한 손에 쥐었다.
"네가 죽였잖아. 바안 전하의 아버지를. 그렇지?"
키득키득.
하벨이 웃었고, 레바놈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서는 짙은 절망에 잡혀갔다.
"자, 이제 갈까, 레바놈?"
"자, 자, 잠깐만!"
"쉿."
하벨은 레바놈의 입에 물을 만들었다.
보글보글.
"남의 눈에 눈물을 내면 그놈의 눈에는 피눈물이 나야지. 그러면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면 어떻게 될까?"
하벨은 레바놈이 무어라 지껄이는지 듣지 않았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나중에 바안 전하한테 물어봐야지."
진짜 피눈물을 흘린 사람은 바로 바안이었으니.
"이제 됐어. 데리고 가도 돼, 좀도둑."
하벨은 옆에 있던 페트리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우리는 가자."
그리고 하벨은 그들을 재촉했다.
이제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갈 시간이었다.
* * *
"…아니. 그게 진짜야? 그게 진짜라고?"
지쳤던 라르웬이 마차 의자에서 당장 등을 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뭐야. 헤스트리아 왕국이 그런 곳이었어? 나는 지금 좀 화가 나려고 하는데?]
루룸이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세게 쥐었다.
조금 전에 라탄과 카샬의 입에서 나왔던 말을 넬시아가 라르웬과 루룸에게 전해줬다.
"사실이고, 나도 아주 많이 놀랐어."
넬시아는 하벨에게 기댄 아라를 잠깐 바라보았다.
[으응?]
아라가 꼬리를 잡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박였다.
[왜 그래, 넬시아? 이 몸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곧 아라가 눈을 살포시 감으며 배시시 웃었다.
아직 저렇게나 어린데.
아라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은 이미 하벨한테 들었다.
이전과 똑같이 대해달라는 부탁도 받았지만, 정령들의 일이 곧 아라의 일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이 쓰이지 않을까.
"미안해, 아라야."
[이 몸은 괜찮아. 이 몸이 보기에 라탄한테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이 몸도 라탄한테 사과했어.]
[시간? 아니, 아라야. 내가 보기에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머리가 깨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루룸은 앞발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루룸. 라탄은 지금 다른 마차로 옮겨 타서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건데. 머리가 깨지면 아파.]
[그래도 이건 안 돼. 헤스트리아 왕국에 오미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다고 해도 나는 진짜… 기가 막힌다.]
루룸은 인상을 가득 썼다.
넬시아를 겨우 도구로 생각했다는 것도 화가 났고, 룬델이 정화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춰준 행동 자체도, 그냥 다 화가 났다.
[좋아, 좋네. 아주 속이 뻥 뚫려.]
아코가 활짝 웃었다.
[나도 그건 마음에 안 들어.]
톰톰은 말을 꺼낸 뒤 넬시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 잠깐만 있어 봐봐."
라르웬이 그들 모두를 말린 뒤에 카샬을 가리켰다.
"카샬이 왕자라잖아. 카샬이. 나는 이게 제일 충격적인데?"
"나는 용왕인데요?"
하벨은 뭘 새삼스럽냐는 듯 손에 연락용 아이템을 쥔 채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이 몸은 정령왕이구!]
아라가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으쓱거렸다.
"보셨습니까, 둘째 도련님? 두 분에 비하면 저는 별거 아니잖습니까?"
카샬은 하벨과 아라를 가리키며 가볍게 웃었다.
자신은 고작해야 두 왕 사이에 낀 초라한 왕자에 불과했다.
"고맙다, 막내야. 놀라던 마음에 확 식어버리네."
라르웬은 콧바람을 세게 내쉬며 하벨의 손에 든 연락용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까부터 왜 만지작거리고 있어?"
"아버지께 연락해야죠."
이동 중이나, 아직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룬델과 연락 시간이 있었다.
"잠깐만……."
"늦었어요."
라르웬이 말리기 전에 하벨은 이미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출발했더냐, 하벨아?>
연락용 아이템 너머로 룬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르웬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
하벨은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러더냐? 뭔가 화난 것 같구나.>
"방금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온 정령한테 여러 말을 들었습니다."
<…오미너스가 헤스트리아 왕국에 나타난 모양이구나.>
룬델의 목소리가 차차 가라앉자 하벨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레놀드 왕국으로 간다고 발표한 참이 아니더냐? 공식적인 일 속에서 두 가지 활동을 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울 텐데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이 부분은 드란트 전하한테 부탁했습니다."
<드란트 전하가?>
룬델은 정말 놀랐는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허, 아주 대단하구나. 정말로 네가 자랑스럽단다, 하벨아.>
따뜻하게 밀려오는 룬델의 기쁜 목소리에 하벨은 금방이라도 미소가 나올 것만 같았지만, 오늘만큼은 룬델의 칭찬을 잠깐 뒤로 미뤄뒀다.
"아버지."
<그래, 하벨아.>
"저는 아버지께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합니다. 분명 오염된 물이 더욱 심해지고 이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당장 헤스트리아 왕국밖에 없었겠지요. 아니면, 어쩌면, 선조 때부터 그렇게 해왔을 수도 있고요."
<…그것도 알았더냐?>
"예."
<넬시아와 라르웬도?>
"예. 다 알았습니다."
<…하.>
룬델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깐 말을 잇지 못하던 룬델은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너희가 나한테 얼마나 실망했을지 안다.>
"실망한 적 없습니다. 원래 손해는 무언가를 더 사랑하는 쪽에서 벌어지니까요. 아버지는 그저 이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하셨기에 그런 겁니다."
자신도 그랬기에 하벨은 룬델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요, 헤스트리아 왕국을 도울 생각이 없습니다."
하벨은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저들은 티에라 가문을 모욕하고, 세상을 능멸했어요."
라탄이 헤스트리아 왕국과 티에라 가문이 거래 관계라고 둘러댔지만, 하벨은 주종관계와 같음을 알고 있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이 티에라 가문에게, 룬델에 무엇을 했는지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하벨은 헤스트리아 왕국에 알리고 싶은 게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주종관계는 없다는 사실을.
"저는 이게 용서가 안 됩니다. 그러니 오미너스와 별개로 헤스트리아 왕국은 구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말씀드리려고 연락했어요."
<하지만 헤스트리아 왕국에 있는…….>
"아라가 있습니다. 정령들은 이제 괜찮으니 아버지께서도 당당해지실 순간입니다."
[맞아! 이 몸은 어디가 더 옳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아라가 연락용 아이템에 얼굴을 파묻듯이 기대다 힘차게 말했다.
[이 몸은 세상을 위해 정화제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구, 룬델이 정령들을 못되게 할 사람이 아닌 것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대장 말대로 룬델은 이제 하기 싫은 거 하지 않아도 돼!]
<고맙구나… 아라야.>
아라는 들려오는 룬델의 목소리에 뿌듯함을 담아 활짝 웃었다.
[이 몸은 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하지만 오늘 기뻐. 이 몸이 룬델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니까. 이 몸은 룬델이 좋아. 정말 좋아.]
하벨과 같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고 경험하고, 겪었던 일을 기억하기에 아라는 룬델이 얼마나 정령들을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게 되었다.
세렌이 정말로 좋아하는 룬델이 왜 정령들에게 사랑을 받는지가 더 보여 아라는 기뻤다.
"하벨."
넬시아는 하벨에게 잠깐 손을 뻗었다.
하벨에게 연락용 아이템을 받으며 넬시아는 자신에게 미안함을 담아 바라보는 카샬을 향해 살며시 웃었다.
"나한테 그러지 않아도 돼, 카샬. 오히려 내가 미안하니까."
카샬한테는 그저 미안했고, 내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채로 마냥 옹호만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헤스트리아 왕국의 왕자임에도 그곳을 나와야 했던 카샬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간 어떤 마음으로 참아냈는지 넬시아는 물을 수가 없었다.
카샬은 자존심이 아주 강했으니까.
"아버지."
넬시아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그래, 넬시아.>
"모르는 건 부끄러움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배우면 되니까요. 그럼 알 수 있으니까요."
<넬시아. 미안하구나. 널… 속이려던 게 아니었단다.>
"알아요. 아버지께서 방황하는 제가 헤스트리아 왕국에 마음을 둔 모습 보시고 차마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셨을 거라는 걸요."
넬시아는 하벨의 팔찌에 달린 랜턴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마치 '힘내'라는 의미로 다가왔기에 넬시아는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틈의 세계가 자신의 세계를 부순 그 날 이후.
자신이 셋째의 목을 조른 이후, 룬델에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을 넬시아는 꺼냈다.
"헤스트리아 왕국이 아무리 제게 중요하다고 해도 결코, 아버지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셋째에게 용서를 받았으니, 조금 더 당당해져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룬델하고 생긴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는 말.
"저는 아버지의 딸, 넬시아 티에라잖아요?"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그리고 용서한다는 말이 포함된 소리가 넬시아에게서 흘러나왔다.
잠깐이지만, 룬델이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넬시아의 눈시울 역시 뜨거워졌다.
고마워.
넬시아는 차마 목소리를 더는 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며 하벨에게 다시 연락용 아이템을 건넸다.
"들으셨습니까, 아버지?"
하벨은 미소를 가득 지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얼마나 울음을 삼키는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제 아버지께서 두려워해야 하는 건 정화제의 부족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한 정령들을 잡아먹는 괴물, 오미너스입니다."
적이 점점 줄었기에 하벨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벌써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버지. 이제 슬슬 끊어야겠어요.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가려면 하루를 묵어야 하는데 마지막 마을이 보이네요."
<하벨아……!>
룬델이 다급히 하벨을 불렀다.
"네?"
<내가, 몇 번이라도 말할 수 있으니 들어주렴.>
룬델답지 않게 흔들리는 목소리에 하벨은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아직도 나한테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제발 버려주렴. 내가 너한테 느끼는 감정 중에 원망은 단 한 번도, 단 한 번이라도 품은 적이 없단다.>
랜턴이 다시 흔들렸다.
<오히려 너로 인해 우리는 변했고, 더 단단해졌고, 슬픔을 이겨내고 있단다. 보렴. 네가 우리를 이렇게나 변화시켰으니까.>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버지 말이 다 옳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라르웬이 툭 하고 던진 말에 하벨은 잠깐 숨을 멈췄다가 다시 내쉬었다.
정말로?
그런 물음이 머릿속에 닿기도 전에 아라와 카샬의 긍정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하벨. 네가 우리를 하나로 모아주었어."
넬시아가 하벨의 손을 꼭 잡았다.
아.
너무 따뜻했다.
요새 눈물샘이 고장이 났나 싶을 정도로 또 울컥했다.
하지만 하벨은 가볍게 웃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괜찮아지고 있어요."
정말이었다.
이제는 마냥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노력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아니잖아."
라르웬은 하벨을 걱정하며 말을 꺼냈다.
"너는 계속, 계속 우리한테 미안해하고 있어. 진짜 미안하고, 사과하고, 그래야 하는 건 우리인데. 정말로 모든 다 뺏긴 건 너인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냐고."
"아니에요, 형님. 정말 괜찮아지고 있고, 그런 생각 하지 않기로 노력하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고 있어?"
라르웬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하벨은 살짝 당황했다.
"막내 너를 보면 내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우리한테 욕하고 화내야 하는데 그걸 왜 미련하게 참냐고."
라르웬이 꺼낸 말에 랜턴이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흔들렸다.
"형님.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의식 속에서 하벨 티에라를 만났을 때, 뭐라고 하긴 했어요."
<힘들어하지 말거라, 하벨아.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데 지금 얼마나 힘들겠더냐. 하지만 너의 잘못을 어디에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렴. 나는 그저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단다.>
"나도 그래. 네가 행복했으면 해. 매일 우리 말을 안 들어도 괜찮으니까, 네가 하루마다 기뻤으면 해."
넬시아의 말을 이어 카샬까지 목소리를 냈다.
"다음에 만나면 셋째 도련님의 멱살을 쥐고 다시 욕지거리 내뱉으십시오. 제대로 말입니다."
"제가… 그렇게 신뢰감이 없나요?"
아니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자 하벨은 도중에 잠깐 고민했다.
"아. 이거 들으면 생각이 바뀔걸요?"
하벨은 이참에 큰 걸 터트리기로 했다.
어차피 다 알아야 하는 사실이기도 했고, 자신이 얼마나 내적으로 변했는지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지 않은가.
"…도련님?"
카샬이 불안해하며 하벨을 말리자, 그는 오히려 더 신이 난 채로 활짝 웃었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