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22화 (322/415)

322화. 이럴 수 없어!(2)

* * *

'개소리다! 저건 개소리야!'

하벨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저 말에 하벨은 모든 게 무너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 될 수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자신이 해왔던 그 행동들은 다 무엇이 된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참고, 또 참으며 그토록 긴 세월을 버텨냈는지.

'나는 대체…….'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손끝부터 파르르 떨려오고 짧은 숨만 밖으로 나왔다.

하벨은 자신의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하벨의 눈동자에 어린 푸른 기가 점점 거세졌다.

"너는 내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시선만으로 온몸이 비틀어질 정도로 강한 압박이 몰려와 그녀는 당장 무릎을 꿇었다.

"거, 거짓이 아닙니다! 맹세코 거짓이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가 지켜야 했던 당신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하벨을 아득하게 바라보았다.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이신 용왕님입니다……!"

'내가… 용왕이다!'

하벨은 그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은, 유일한 세계에 희망이십니다. 당신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당신을 지키지 못한 그 사실이……."

"지… 금? 지금이라니?"

"당신이 용왕이기 전에 이 세계를 구하신 용왕님이 존재했습니다. 이 세계를 잡아먹었던 수족을 무찌르고 평화를 이룩하신 분이 계십니다."

'모두가… 나를 잊었을 텐데.'

하벨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대체 그녀는 어떤 시절의 사람이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너……."

욱신.

가슴에 갑자기 격렬한 통증이 일어나자 하벨은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렀다.

[미, …미안해, 대장.]

아라가 사과하며 땅으로 떨어지자 하벨은 다급히 아라를 받아 품에 안았다.

욱신욱신.

가슴에 일어나는 통증이 단숨에 거세지자 하벨이 신음을 흘렸고, 헤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더는 안 됩니다. 멈추세요."

삐삐!

정화 장치가 크게 울리자 헤레스가 다시 하벨을 말렸다.

"안 됩니다! 멈추세요! 멈춰야 합니다!"

"아니……."

하지만 하벨은 버텼다.

여기서 저들을 보내버린다면 허망할 정도로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마음이, 지금 잿더미가 되어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제발. 잠깐만. …잠깐만."

하벨은 울먹이듯 그들에게 부탁했다.

지금이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자신도 앞으로가 어떻게 될지 너무 무서울 정도였다.

환상이 또 슬금슬금 올라올 것만 같았고, 하벨은 그냥 자기 자신이 무서웠다.

그렇기에 하벨은 그녀를 바라보며 그저 물었다.

"이름이, 이름이… 무엇이지?"

왜 자신을 알고 있는지.

모두가 잊어버렸던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하벨은 가느다란 실에 온몸을 매달았다.

"저는 '해연'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지니고 있던 이름이나……."

"해연… 이라고?"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입은 어느덧 묻고 있었다.

"혹시, 유렌의 딸… 이야?"

"그걸 어… 떻게 아십니까?"

해연은 입을 가렸다.

자신은 유렌이라는 말도 꺼낸 적이 없었고, 설령 꺼냈다 한들 이미 그 사실은 과거의 흔적에 묻혀 사라졌을 텐데.

곧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세상에."

해연은 조금 전 하벨이 보였던 반응을 떠올리며 이게 무슨 일인지를 이해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아주 강인하고, 심지가 굳어 꼭 태양 같던 존재.

자신의 영웅.

해연은 그 이름을 불렀다.

"…용왕님."

해연은 어릴 때와 비슷한 눈빛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용왕님이세요? 저, 저, 정말 용왕님이세요?"

해연이 묻는 '용왕'은 그녀가 계속 언급하던 용왕이라는 말과 달랐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감정이 복잡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하벨에게 안기려 한 걸음 내디디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갑자기 물이 사라졌다.

"…콜록!"

하벨의 입에서, 코에서 피를 쏟아냈다.

몸이 무너져내렸다.

바닥을 짚었던 자신의 손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하벨의 눈에 어렸던 푸른빛도 사라져버렸다.

하벨은 피가 묻은 손을 해연에게 뻗었다.

무얼 말하고 싶은지 해연은 하벨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닥에 퍼져가는 하벨의 피를 보자 공황이 자신을 덮칠 것만 같았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대체 용왕님께서 왜 이러는 거예요?"

해연은 칼리우스를 바라보며 간절히 물었다.

"너희는 이제 가야 해."

하지만 칼리우스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해연과 어인족들을 보며 명령하듯 말을 꺼냈다.

하벨에게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도 된다는 허락도 없었고, 무엇보다 하벨의 힘이 멈추자마자 마나가 다시 저들에게 향하려고 하자 곤란했다.

이러다가 에른스트에게 들킬 지경이었다.

"지금 마나가 다시 움직이고 있어. 이러면 너희도 위험하고, 도련님도 곤란해져."

해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뒷걸음을 쳤다.

"결국…….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해연의 눈에 눈물이 떨어졌다.

"우리의 존재는 이렇게 해만 될 뿐이니까요."

해연은 바로 등을 돌렸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하벨에게 가까워졌지만, 자신들의 존재는 언제나 세상에 위험이 된다는 걸 다시금 알아버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 미안해, 대장. 으흑…….]

해연과 아라가 울먹이는 소리에 하벨은 정신을 붙잡았다.

자신을 붙잡은 헤레스와 카샬, 그리고 레디나를 보며 가슴팍을 찌르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하벨, 티에라."

하벨은 입을 움직였다.

"그게 내… 이름이야."

용왕.

그건 이름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름이란 한 번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누가 왕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은 이름을 얻었다.

하벨 티에라.

룬델에게도 하벨 티에라에게도 허락받은 이름이었다.

"…다음에."

다음에.

또 만나.

하벨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 *

"…유렌."

자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하벨은 깜짝 놀랐다.

너무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가.

왜.

그런 의문이 들기가 무섭게 시선이 어느새 서류가 아닌 유렌에게 향했다.

"예, 용왕님."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자신을 향한 눈빛에 충성심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렌…….'

이미 자신이 꿈을 통해 과거를 본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더 오래된, 결코, 떠올리기도 싫은 그런 과거였다.

'네놈이 만든 끔찍한 현실이 너무도 무섭구나.'

하벨은 그저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아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지 그런가."

하지만 자신의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저기 보거라."

자신의 시선은 문틈 사이로 빼꼼히 내민 한 아이에게 고정되었다.

탁.

유렌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손에서 서류 더미를 손에 떨어트렸다.

끼긱!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거리며 문으로 달려나갔다.

그 꼴이 자신은 우스운지 키득거렸다.

"해연아!"

유렌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뚝뚝한 표정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놀라면서도 반가운 표정이 드리웠기에 자신 역시 일어났다.

"어떻게 여길 왔어?"

유렌이 문을 열려고 하지만, 해연이 문을 잡았는지 더는 손을 대지 못했다.

"아빠는 치사해."

"아, 아빠가?"

"오늘 일찍 온다고 그랬잖아! 매일 매일 일찍 온다고 그랬는데 오지도 않고!"

"오, 오늘은 일찍 가려고 했어. 정말이야."

"진짜요, 용왕님?"

해연의 부풀어진 볼이 자신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거짓말이다."

"요, 요, 용왕님?"

유렌의 눈동자에 원망이 가득했다.

"왜 그리 보는 것인가. 거짓말을 한 건 그대이지 않은가."

"아빠는! 바보야! 바보!"

타타타.

물거품과 함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해, 해연아!"

당장 문을 열고 해연을 쫓으려던 유렌의 어깨를 자신이 붙잡았다.

"내가 가보마. 해연은 날 더 좋아하니까 말이야."

"용왕님……."

유렌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았다.

"너는 잘하고 있다. 아니면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짐을 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제가 아직 미숙해서 그럽니다. 용왕님께서 지금 얼마나 힘겹게 이 나라를 이끌어주시는지 알면서 그럴 순 없습니다."

유렌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제가 힘이 닿는 한, 열심히 해야겠지요."

복잡해 보이는 저 얼굴이 하벨은 그저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저렇게 말했으면서 나를 배신했는가.'

하벨은 어서 빨리 꿈에서 깨어나길 빌었다.

"해연을 데리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하고 있거라."

자신의 주변에 물거품이 일어났고, 장소가 바뀌었다.

짧은 다리로도 열심히도 도망가는 해연 옆에 나타나 조용히 불렀다.

"해연아."

"…아아악!"

해연이 깜짝 놀라며 쓰러지려고 하자 자신은 물을 불러 조심스럽게 감싼 뒤에 땅에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많이 놀랐는가?"

"…요, 용왕님?"

해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마도 유렌을 찾는 모양이었다.

"내가 미안하다."

"아니에요. 저 방금 별로 안 놀랐어요."

"그것도 미안하고, 유렌을 내가 너무 붙잡아두었다. 네가 이리 슬퍼할지 알았으면 내가 더 강하게 집으로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해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용왕님이 힘들다고 그랬어요."

"유렌이?"

"네. 아빠가 그러는데요, 용왕님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 엄청 많이 일을 한 대요. 그래서 도와줘야 한 대요."

"나는 괜찮다. 오늘은 유렌과 함께 보내야 해연이가 기쁠 테니, 나는 그걸로 됐다."

"정말요?"

"그럼. 돌아갈까, 해연아?"

자신은 해연한테 손을 뻗었고, 해연은 작은 손을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용왕님."

"응?"

"저는요, 커서 류아 오빠처럼 될 거예요."

"왜… 하필 류아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무날을 닮은 게 어떤가?"

"그것도 좋아요!"

해연은 즐거움을 담아 자신과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저는요, 아빠만큼이나 용왕님이 좋아요. 다정하고, 예쁘고, 제 영웅이니까요. 그러니까요, 엄청 엄청 크게 자라면 꼭 용왕님을 도울래요."

해연이 걸음을 멈추고 앙증맞은 손을 내밀었다.

"약속해요! 약속!"

"고맙다."

보글보글.

갑자기 물거품이 일었고, 조금은 굵어진 해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왕님. 아버지께서 일을 꾸미십니다."

하지만 자신은 해연을 보지 않았다.

그저 소용돌이치는 절망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류아가, 모두가… 수족의 폭발에 휘말려 죽었다고 생각한 그 이후구나.'

하벨은 익숙한 절망감에 단번에 알아차렸다.

"용왕님, 제발요! 아버지께서 너무 달라지셨습니다! 대체 누굴 만나고 온 건지 몰라도 지금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해연은 간절히 소리치며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 나라는 용왕님 겁니다. 왜. 대체 왜… 우리를 봐주지 않으십니까?"

해연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물이 고여가는 것만 같았다.

"류아 오빠도, 무날 오빠도, 태련 언니도, 그곳에 있던 모두가 용왕님께 얼마나 특별했는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걸 놓아버리면 어떡합니까?"

그제야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해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용왕님, 제발요."

간절함을 담아 자신을 보았으나,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연은 당장 크게 울어버릴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울음을 참았다.

"괜찮아요."

해연은 심호흡했다.

"…저는 그래도 용왕님을 도울 겁니다. 죽어버린 모두를 대신해서라도, 아버지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저는 용왕님의 편입니다."

해연은 자신의 손을 꼭 잡았다.

"모두가 안 된다고 그랬지만, 당신은 수족들에게서 절 구해주셨잖습니까. 그러니까 저도 해내겠습니다. 제 유일한 영웅이시여."

꽉 잡은 손을 해연은 이마에 맞대고는 그대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눈을 뜬 하벨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과거의 꿈을 꿀 때마다 꼭 벌을 받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오늘도 그 기분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

하벨은 뜬 눈을 다시 감아서는 이를 세게 악물었다.

말랑한 감각이 뺨에 느껴져 하벨은 깜짝 놀랐다.

"…아라야."

[혹시 나쁜 꿈을 꿨어, 대장?]

걱정을 가득 담은 아라의 눈동자를 보자 하벨은 아라를 꼭 안았다.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맞아. 나쁜 꿈을 꿨어."

[많이 슬펐어?]

"아주 많이 슬펐어."

하벨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내가. 세상에서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때도 자신을 바쳐주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것도 모르고 슬픔에 빠져 있었다니. 그 사실이 너무도 비참했다.

[대장은 혼자가 아니야. 이 몸도 있구, 용용이도 있구, 카샬도 있구, 레디나도 있구, 헤레스 있구…….]

"알아. 지금은 잘 알고 있어."

하벨은 잠깐 다시 눈을 감았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자리 잡았다.

'해연이…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이전 대신이었던 서황은 분명 멀쩡했는데 해연을 포함은 다른 이들의 모습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는 유렌의 편에 선 대신들과 한눈에 보아도 다른 모습이었으며 해연이 말했던 것처럼 척을 진 게 분명했다.

'…아버지와 적일 될 정도로 나를, 아니 용왕이라는 그 존재가 그리 소중했는가.'

하벨은 다시 해연을 만나 그렇게 묻고 싶었다.

'빌어먹을…….'

눈시울이 쓰라렸다.

해연이 지키고 있던 건, 틈의 세계에 살던 어인족이 지키고 있던 건 용왕이었다.

자신이 죽고 새롭게 태어난, 용왕.

그들은 나라가 사라졌음에도 어인족으로서 용왕을 지키는 임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었다. 하벨 티에라가.'

하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렇기에 하벨은 하나씩 모든 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