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16화 (316/415)

316화. 짠. 함정이었습니다(3)

* * *

하벨은 정령이 꺼내는 간절한 말에 당장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저 정령이 정령사 왕국인 '헤스트리아'를 언급하지 않았는가.

'…빌어먹을.'

제발 그런 일은 없기만을 빌었지만, 기어코 저 정령의 입에서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제가, 으흑, 이곳에서, 이곳에서 흘러나온 왕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찾아왔는데…….]

정령은 어느덧 결계처럼 취급하던 창문을 넘어 아라에게 다가왔다.

'최근이라면… 아라가 실체화를 했을 때인가.'

하벨은 실체화 역시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아라가 실체화를 하면서 정령왕의 힘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사실과 이걸 조절할 수 있는 건지 아닌지 몰랐기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 역시 알았다.

[대장. 헤스트리아라면 정령사 왕국을 말하는 거 맞지?]

"맞아."

하벨의 대답에 아라는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헤스트리아에 무슨 문제가 터졌다는 건 그곳에 사는 정령들이 많이 아프고, 넬시아가… 많이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잖아.]

아라는 곧 울적해졌다.

넬시아가 얼마나 헤스트리아 왕국의 평온함을 바랐는데.

[그곳은……. 저희의 낙원이었던 헤스트리아는 이제, 갑자기, 더없이 끔찍한 곳이 되었습니다!]

하벨은 절망이 깊게 밴 정령의 말에 문득 셴의 말이 떠올랐다.

―최근에 오미너스를… 준 적이 있습니다.

'…설마.'

하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셴이 누군가에게 주었다던 오미너스가 헤스트리아 왕국으로 간 걸까.'

만약에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어떻게 오미너스가 헤스트리아 왕국에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화한 오미너스가.'

오미너스가 같은 오미너스를 뜯어 먹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변화한 그 오미너스가. 에른스트의 손에 쥐어진다면 세상을 파멸할 그 어떤 무기보다 끔찍한 무기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세상을 멸망으로 밀어버릴, 아주 끔찍한 무기로.

[그곳은……!]

목에 힘을 주던 정령이 비틀거렸다.

[헤스트리아… 헤스트리아를…….]

정령의 몸이 무너지고, 뒤로 쓰러졌다.

하벨이 다급히 받아냈지만, 의식이 없었다.

아라가 정령을 만졌다.

[…뜨거워.]

그럴 리가. 아라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왜 뜨겁지? 정령은 병에 걸릴 수가 없는데?]

아라가 계속 정령을 더듬거리다 말고 곧 꼬리를 바짝 세웠다.

[대장의 힘이 필요해. 이 정령이 아무래도 오미너스… 한테 물렸나 봐.]

아라는 정령의 등 뒤를 가리켰다.

하벨이 슬쩍 보자 꼭 짐승한테 물린 것처럼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

'…미치겠네.'

헤스트리아 왕국에 오미너스가 있는 건 이제 분명했다.

아마도 자신이 봤던 오미너스보다 더 많이 진화한 오미너스가 있을지도 몰랐다.

* * *

[…미안해.]

아라가 정령들을 바라보며 사과했다.

이름 모를 정령 옆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하벨을 따라 자신도 가야만 했다.

[이건 사과할 필요가 없는데, 아라야?]

[우리가 잘 돌봐줄게.]

정령들은 의식을 잃은 정령 옆에 모여서는 아라를 쳐다보았다.

이미 아라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도 기쁜데.

[아마 깨어나면… 엄청 놀랄 거야. 무서운 일을 당한 모양이었어. 이 몸은…….]

아라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벨이 기다리는 거 아니야?]

[그래, 그래, 아라야. 어서 서둘러야지. 하벨이 너를 기다리니까.]

[하지만 이 몸은 너희한테도 이 정령한테도 너무 미안해.]

아라는 고양이를 닮은 정령을 쓰다듬었다.

발소리가 들리자 아라는 움찔거렸다. 하벨이 걸어오고 있었다. 준비를 다 했는지, 비를 대비한 옷들을 입은 상태였고.

[아앗! 이 몸이 너무… 늦었지?]

"금방 올 거니까, 너무 시무룩하지 마. 응, 아라야?"

아라를 쓰다듬어주자 하벨은 갑자기 시선을 느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령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니겠나.

하벨은 잠깐 자신의 손을 쳐다보다 활짝 웃었다.

"이리 와, 얘들아."

[정말? 정말 가도 돼?]

정령들이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에게 달려드는 정령들의 모습에 하벨은 키득거리며 누구 할 것 없이 정령들을 쓰다듬어주었다.

찌르르.

교감과 함께 하벨은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끼며 동시에 아라의 입이 삐죽 튀어나온 걸 보았다.

'질투 나지, 아라야?'

딱.

하벨은 그 모습이 귀여워 키득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나도 네가 헤레스한테 편지를 줄 때 그랬어.'

아라가 반사적으로 정령수를 집어넣으려다가 정령들의 머리 위에 떠도는 물을 보는 순간 눈을 반짝거렸다.

[우와.]

정령들 역시 물을 보며 밀려드는 그리움과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물을 향한 신기함이 쏠려 있었다.

하벨은 자신의 물에게 집중하는 정령들의 모습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물을 내려 고양이를 닮은 정령을 감쌌다.

"이러면 되겠지, 아라야?"

[응! …어, 어엇. 그러면 대장은? 이, 이 몸이 어서 저주가 대장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

"아니야, 아라야. 원래 이 정도는 괜찮았어."

하벨은 아라를 조심스레 안고는 정령들을 보았다.

"깨어나면 잘 달래주면 좋겠어. 여기는 무서운 곳… 은 맞는데, 이제 무서운 건 끝났다고 전해줄래?"

[물론이야. 꼭 그렇게 전할게.]

[여기가 무서운 곳은 맞지. 마법사 협회니까! 하지만 이젠 하나도 안 무서워.]

[조심히 갔다 와.]

정령들은 꺄르르 웃으며 하벨과 아라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푸욱!

검이 검은 옷을 입은 자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어휴. 맨날 사서 고생이십니다."

페트리오의 호위인 타냐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았다.

"내가?"

페트리오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누굽니까? 여기 멍청이가 누가 있어요?"

타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페트리오는 가만히만 있어도 돈이 굴러오고 사람이 구르고, 정보도 굴러올 텐데 뭐하러 이렇게 코스모피안 왕국까지 온 건지.

아니, 애초에 왜 검은 달까지 처리하고 있는 건지.

이건 그냥 뒤치다꺼리가 아닌가.

'나야 그분께서 주머니를 채워주시니까 하는 건데.'

타냐는 페트리오가 참 멍청해 보였다.

쾅.

거대한 소리가 나자마자 타냐가 소리쳤다.

"야! 조용히 해! 이렇게 소란 떨면 그냥 꺼지라고 그랬지?"

"네가 더 시끄러운데, 타냐?"

"어쨌든, 이렇게 하면 페트리오 님께 대체 뭐가 돌아갑니까?"

"으음. 기쁨? 아니면, 사명감?"

페트리오가 진지하게 말하자 타냐는 당장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팔을 싹싹 문질렀다.

"…미쳤어요, 진짜로? 아니지. 이 말도 이젠 좀 물린 것 같아요."

"그렇지? 그냥 적응해. 입으로는 나보고 미쳤냐고 하면서 검은 언제나처럼 부지런히 휘두르잖아?"

"제 주머니는 채워야죠. 원래 일이란 그렇잖아요."

"돈도 많으면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아… 이젠 화내는 것도 귀찮아졌어요."

"이렇게 해야 도련님이 오시기가 편하지. 그리고 솔직히 너도 짜증 나잖아?"

"짜증 나죠. 예전에는 페트리오 님 옆에 서서 오는 암살자만 죽이면 되는 꿀 같은 자리였는데, 이제는 아예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니. 제 게으름을 되찾고 싶단 말이에요!"

"하지만 받는 돈은 훨씬 많아졌고."

"제가 예? 의리 때문에 참는 겁니다. 알고 있죠?"

"그럼. 네가 의리 하나 끝내준다는 건 알고 있지."

페트리오는 타냐를 바라보며 손에 쥔 검을 투박하게 휘둘렀다.

투박한 손놀림과 달리 바닥에서 몰래 꿈틀거리던 검은 달의 목이 깔끔하게 분리가 됐다.

"나한테 다시 돌아와 줬잖아?"

페트리오가 웃자 타냐는 징그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옮겨져 갔다.

"오시나 봐요. 도련님 보시면 잔소리 장착하지 말고, 예? 좀 너그럽게 봐주시라고요. 얼마나 고생하셔요?"

"배가 뚫린 채로 돌아다니시는데? 그대로 계속 움직이시다가 큰일이라도 난다면 우린 쫄딱 주저앉는 거라고."

타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전투력을 올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물의 길이 열리고 달 무늬가 가득한 가면을 쓴 하벨이 걸어오자마자 타냐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침대로 꺼지세요. 당장!"

"……?"

하벨은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고, 레디나는 바로 감탄했다.

"와아! 너무 예쁜 말인데요? 그렇죠, 언니?"

"그게, 음, 듣기가 영 나쁜 말은 아니야."

헤레스는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아주 멋진 말이었다.

"저는 예? 제 주머니를, 아니, 물주, 아니, 도련님을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어요!"

이어지는 타냐의 말에 카샬 역시 깊게 공감하며 손뼉을 마주쳤다.

"훌륭한데? 태도는 별로지만."

"좀도둑……?"

하벨은 기가 차 페트리오를 불렀다.

"어서 오세요, 도련님.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페트리오는 오히려 뻔뻔하게 하벨을 반겼다.

"뻔뻔한 거 봐라. 야. 네가 대체 타냐한테 어떻게 말했길래 그래?"

카샬이 훅 치고 들어옴에도 페트리오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사실인데 뭘 그래?"

"뭐어, 이 정도는 예상했지."

하벨은 여유롭게 타냐를 보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저번에 코스모피안 왕실 밑에 싸악 긁어온 금화 여러 개를 꺼내 살포시 쥐여줬다.

"많이 힘들었지, 타냐?"

타냐는 바로 하벨을 가리켰던 손을 내렸다.

"아닙니다. 도련님이야말로 더 고생이시죠. 도련님을 감시하려던 더러운 검은 달은 싸악. 아주 싸악, 처리했습니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타냐의 태도에 페트리오의 눈 밑이 잠깐 흔들렸다.

자신 역시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타냐가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꿀 줄은 몰랐다.

"고마워, 좀도둑."

하벨이 싱긋 웃자 페트리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이라도 하벨을 이겨보려고 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느꼈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페트리오 역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좀도둑. 밤중에 미안해.

어젯밤에 하벨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벨에게 언제 연락이 오건 간에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이미 하벨은 자신에게 '간부들이 클로저들 사이에 숨어 있을 거다'라는 말을 한 뒤였으니까.

―형님한테 장소가 어디로 정해졌는지 듣고 난 후에 너한테 바로 연락했어. 가면단들은 준비가 됐어? 헤일리스 역시 도울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추가로 여기 마법사들도 준비가 된 상태야.

하벨이 당당하게 꺼내는 '마법사'라는 말에 페트리오는 그날을 떠올렸다.

가뜩이나 하벨이 걱정되어 자신은 그날, 마법사 협회 근처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마법사의 탑이 '뚝'하고 부러져버리니 정말 바보처럼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한 치의 의심도 할 수 없을 만큼 하벨이 벌인 일이라 확신했다.

평소에도 마법사의 탑을 부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진짜…….'

페트리오는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찼다. 진짜 한다고 할 줄이야.

―그러니까, 좀도둑. 장소를 말해줄 테니까, 쥐덫만 만들어줄래?

마법사의 탑을 이야기하면서 화를 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저 '쥐덫'이 몹시 신경 쓰이고 말았다.

하벨에게 장소를 듣자마자 자신은 바로 크라마한테 알렸다.

―…좋았어! 내가 이날을 위해서 그간 빈둥빈둥한 거였지. 이제 내 큰 뜻을 이해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지만, 코스모피안 왕국 여기저기 퍼져 있는 가면단에게 가장 빨리, 가장 빠르게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크라마밖에 더 있겠는가.

"상황은?"

하벨이 물었다.

"가면단과 마법사들을 적절히 조합해 검은 달을 없애고 임시지만, 결계를 설치한 뒤입니다. 도련님께서 신호만 보내주신다면 언제든 쥐덫을 작동시키겠습니다."

"내 신호는 번개야."

하벨은 손을 펼쳤다.

파지지직.

번개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새로 얻은 힘이 아닌가.

"용용아."

"응?"

칼리우스가 하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계를 한번만 확인해줄래?"

"알았어. 금방 확인할게."

하벨은 이어 우두커니 서 있는 여하를 보더니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오?"

"인사해. 여긴 페트리오 비발체야. 그리고 여하라고 해."

"반갑습니다, 페트리오입니다."

페트리오는 하벨한테 들었던 인어족 여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대의 주인을 해칠 마음은 없소. 그러니 악의를 보내지 않아도 되오."

여하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페트리오의 입꼬리가 그저 길어졌다.

"저놈은 원래 그래, 여하.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지. 음흉하고, 계산적이거든."

카샬의 공격에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죠."

"여하 씨. 저 말고 쟤를 조심해야 할걸요? '아군'이라고 판단하는 조건이 무척 까다로워 아직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자다가 목이 잘리는 거죠."

페트리오가 여하를 보며 싱긋 웃자 그는 카샬과 페트리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알겠소. 서로 악우 사이요?"

"아……."

"맞아!"

카샬과 페트리오가 부정하기 전에 하벨이 얼른 말을 꺼냈다.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 사이지. 하여튼 이럴 때는 어린아이 같으니까, 이렇게 해야 해."

하벨은 페트리오와 카샬의 팔을 잡더니 서로 악수하게 했다.

카샬과 페트리오는 잠깐 넋을 잃어버렸다.

"알겠지, 여하야?"

하벨이 웃었고.

"알겠소."

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

"쉿."

카샬과 페트리오가 당장 손을 떼서는 기겁하려고 하자 하벨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나는 이제부터 레디나를 간부로 만들기 위해서 간부들을 곤죽으로 만들 셈이거든. 세상에 받아도 되는 의뢰와 받으면 안 되는 의뢰가 있다는 걸 알려줄 기회잖아?"

하벨은 언제 장난기를 드러냈냐는 듯이 눈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걸 위한 화해라고 생각해. 알겠지?"

말도 안 되는 억지라 카샬과 페트리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안녕하세요, 여러분!"

하벨은 당당하게 손을 흔들며 클로저들에게 다가갔다.

그곳에 브란스와 라르웬을 포함한 눈에 익은 클로저들도 보였고 아닌 자들도 꽤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라가 먼저 출발해 정령들을 이끌고 소풍을 온 것처럼 미리 도착해 있었고, 페트리오와 가면단의 준비는 다 끝난 것을.

"내가 바로 당신들이 그렇게나 애타게 찾던 '달님'입니다."

하여 하벨은 당당히 자신을 소개했다.

이미 검은 달은 함정에 걸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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