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15화 (315/415)

315화. 짠. 함정이었습니다(2)

* * *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막내야?>

라르웬은 머리가 어지럽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나는 네가 오미너스를 처치하고 난 뒤에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몸은 괜찮아, 하벨?>

넬시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자 하벨은 괜히 눈웃음이 났다.

라르웬하고 넬시아가 연락용 아이템을 차지하러 몸싸움하는 게 막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가.

랜턴까지 흔들리자 하벨은 더욱 흡족했다.

"물론이죠. 나 엄청 튼튼하잖아요?"

<그건 아니야, 하벨.>

넬시아가 딱 잘라서 말하자 하벨은 슬쩍 눈동자를 돌려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이러다가 아라 님이 거짓말부터 배우시겠어요."

<어쨌든, 하벨. 나도 마침 할 말이 있던 참이었어. 일단 용건부터 끝내고 이야기할게. 괜찮겠지?>

"당연히 괜찮죠. 형님처럼 팍팍 하셔도 돼요."

<라르웬은 너처럼 귀엽지 않아. 라르웬은……, 아니야. 바꿔줄게.>

넬시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라르웬에게 연락용 아이템을 넘겼는지 심통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귀여운 형님 바꿨다.>

"내가 그렇게 말한 거 아니니까 삐지지 마세요."

<누가 삐져? 그래서 이제 '준비'라는 게 왜 나왔는지, 검은 달의 간부 이야기는 왜 튀어나온 건지 말해 봐봐.>

"방금 레디나한테 그란덴의 쪽지를 받았어요."

<그래. 거기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지부의 위치가 적혀 있겠지.>

"그리고 간부의 약점을 적어놓았네요?"

<뭐……?>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죠?"

<당연하지. 이래서 네가 간부가 나온다고 말한 거네?>

"내일 제가 만나러 온다고 클로저들에게 전해주세요."

<내일?>

"내일요?"

라르웬을 이어 레디나마저 놀라며 말했다.

"네. 내일이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을 수가 없잖아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에 이 이상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 떠날 때가 맞았다.

<그건 맞는데. …후.>

라르웬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약속 장소는 네가 먼저 정해. 간부가 나올 거잖아?>

"아뇨."

<아니라니?>

"너무 티가 나잖아요. 나는요, 간부를 잡을 겁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나만 불리해요."

<에른스트 때문에 그러는 거야?>

"네. 맞아요. 결국, 뒤에 에른스트가 있어요. 하지만 나는 에른스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요. 뭘 노리는지,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이상 내가 턱없이 불리하죠."

하벨의 눈동자가 잠깐 가라앉았다.

검은 달도, 신성 국가 시엘느 역시 에른티안 왕국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형님. 나는요. 다 깨부술 겁니다. 놈의 흔적이 닿은 그 어디든 다 파괴해버릴 거예요."

<그래. 다 부숴버려. 장소는 내가 정해지면 알려줄 테니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라르웬이 화를 내지 않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수프가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먹어.>

"아주 잘 넘어가는데요? 이제 누님 바꿔주실래요?"

<왜? 벌써?>

"아쉬워요? 나 더 쫑알거릴 수 있어요."

<아니. 둘이서 잘 먹고 잘살아라. 둘째는 이래서 서럽네.>

넬시아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꿨어. 둘째가 삐졌네? 라르웬이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거야 알고 있죠. 내가 인기쟁이거든요."

<아니라고. 나 말고 막내가 날 더 좋아하는 거지.>

라르웬이 꿍얼거리는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 삐진 둘째는 내버려 두고 일단 말부터 전할게.>

'안 삐졌다니까?'라고 옆에서 말소리가 작게 들려와 하벨은 웃음을 꾹 눌렀다.

"네."

<왕실에서 기사들을 마법사 협회로 보냈어. 널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기로 전하께서 약속하셨거든.>

"그런 것 같아요. 적어도 기사들이 나한테 온 적은 없거든요."

"아니에요, 도련님. 이미 기사들이 왔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흉내만 내고 갔지만요."

레디나가 하벨의 말을 정정했다.

"오. 혹시 들었어요, 누님? 드란트 전하가 약속을 지켰네요?"

<그럼 이제 너하고 어떻게 입을 맞추면 될지 말해줄래? 내가 그 방향으로 더 이끌어볼 테니까.>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와 코스모피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가 손을 잡았고, 저들 뒤에 진짜 협회장이 존재한다고 알고 계셨으면 해요."

<…그 이름은 '시렌'이고?>

넬시아의 대답에 하벨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웃었다.

"맞습니다. 이미 죽었던 시렌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적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나도 그렇게 알고 있을게. 시렌이 뒤에서 수작질한다고.>

넬시아는 말을 끝낸 뒤에 잠깐 숨을 깊게 내쉬었다. 꺼내기 힘든 말을 언급하는 것처럼 느껴져 하벨이 먼저 말을 걸었다.

"왜 그러세요, 누님?"

<있잖아, 하벨. 화내지 말고 들어줘.>

"화요? 내가 누님한테 화를 낼 일이 어딨어요."

하벨이 가볍게 웃어도 이어지는 넬시아의 목소리는 다소 무거웠다.

<이번에 암살 사건하고 레바놈 건하고 포함해서 너한테 뭐가 제일 도움이 될지 생각해봤어. 그래서 물의 오염과 관련해서 임시지만, 협회를 추진할까 해.>

"협회요?"

하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 협회에 협회장은 음, 너로 하려고 해. 네가 이런 자리를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네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크잖아?>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넬시아의 말에 하벨은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몰랐다.

<내가 너무 멋대로 생각했다면 미리 말해줄래? 아직 드란트 전하께 운만 띄워놓은 상태라 얼마든지 철회할 수 있어.>

"아니에요. 나도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건 언제가 됐든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일 테니까요. 고마워요, 누님. 날 이렇게 생각해준 게 너무 좋은데요? 계속 진행해주세요."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죠. 아, 대신 임시라는 말에 꼭 힘을 줘서 말해주세요. '임시'요."

<물론이야. 만약에 이걸 출범시킬 수 있게 된다면 무조건 '임시'라는 걸 아예 조항에 넣을게.>

"예. 그건 필수입니다. 저는 어딘가에 얽매일 생각이 없으니까요."

<고마워, 하벨. 너한테 미움받는 게 싫은데 이번에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어.>

"에이, 누님. 진짜 싫었으면 도중에 멈췄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진행할게. 그러니까, 하벨. 이제 좀 쉬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너무 많이 움직였어.>

"저 되게 건강해졌어요. 배에 있는 상처도 많이 나았고요."

<막내가 또 거짓말하는 거 봤지? 이래도 누님은 '허허'하며 웃을래?>

라르웬이 불만을 담아 꺼내는 말이 슬쩍 들려왔다.

도련님이?

레디나 역시 이런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웃음을 삼키고 있었고.

'아니. 대체 왜 아무도 안 믿는 거야?'

하벨은 또 억울했다.

<거짓말은 필요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 나쁜 거야. 나는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넬시아가 조금은 단호한 목소리를 내자 레디나가 그제야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누님."

<밥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헤레스가 쉬어야 한다고 말하면 꼭 지켜줬으면 좋겠어. 혹시 내 부탁이 너무 부담스러울까?>

"…아뇨. 그렇지는 않죠."

하벨이 말을 흐리자 넬시아가 잠깐 웃음을 흘렸다.

쫑긋.

불만이 담긴 채 하벨은 수프를 거칠게 먹다 말고 아라의 움직임이 달라지자 아라를 바라보았다.

아라는 눈을 깜박거리며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귀족들이 잡혀 오고 있어. 널 비난했던 귀족들 말이야.>

"와. 좋은데요?"

하벨은 넬시아가 건넨 소식에 당장 콧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왕실로 돌아가면 그 면상들은 꼭 봐야겠어요."

<그래, 그래. 어쨌든 네가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 됐어. 많이 먹어, 막내야.>

라르웬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그새 장난을 쳤다.

"이제 삐진 거 끝났어요?"

<안 삐졌다니까.>

"뭐, 그렇다고 해줄게요. 그럼, 형님이랑 누님도 나 없다고 막 밥 굶지 마세요."

<지금 고기랑 포도주가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올 만큼 먹고 있으니 안심하고. 아, 그리고 틈의 세계를 조심해.>

"말이 씨가 된다고 했어요. 불안하게 왜 그래요?"

<불안하라고 한 말인데? 그럼 나중에 보자, 막내야. 그동안 제발 얌전히 있어. 알겠지? 얌전히…….>

뚝.

하벨은 연락을 끊은 뒤에 잠깐 웃었다. 지금쯤 라르웬은 성질이 나서 뭐라 뭐라 할 거고, 루룸은 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대장.]

"그래, 아라야?"

하벨은 잠이 깬 아라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아라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이 몸은 꿈에서 엄청 예쁜 금화를 봤는데. 아아! 이 몸이 다시 손에 넣은 금화 말구.]

아라는 금화를 꼬리에서 꺼내서는 그대로 꼬옥 껴안아서는 행복하게 웃었다.

'이제 다시 에르티안 왕국으로 돌아가면 아라가 엄청 기뻐할 모습을 보겠네.'

하벨은 덩달아 행복하게 웃었다.

"아! 아라 님!"

금화가 허공에 둥둥 떠다니자 레디나가 마법사 협회를 돌아다니면서 봐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저 이거 아라 님 주려고 샀어요."

레디나가 꺼낸 건 금화였다.

[우오오옵!]

아라가 당장 레디나의 손아귀에 찰싹 붙자 레디나는 키득거렸다.

"이건 아라 님 거예요. 여기 봐봐요. 꽃무늬가 들어갔죠? 아라 님이 꽃을 좋아한다고 그래서 눈길이 갔어요."

[너무너무, 이 몸은 지금 너무너무 기뻐!]

"아라 님이 뭐라고 하세요?"

"너무너무 기쁘대. 아라가 너무 기뻐해서 당장 눈물을 흘릴 것 같고."

하벨이 조금은 탐탁지 않게 말하자 레디나는 오히려 치사하게 바라보았다.

"매일 아라 님의 예쁨을 독차지하면서도 질투가 나세요?"

"아라가 그냥 예쁜가? 실체화했을 때 너도 봤잖아?"

"예! 정말, 정말, 정말로 귀여우셨어요! 정말 왜 도련님이 매일 같이 아라 님을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는지 더 이해했다니까요?"

헤헤헤헤.

아라는 두 사람의 대화에 눈마저 포근하게 감길 정도로 웃다가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앗, 이게 아니야! 지금 누가 막 이 몸을 불러. 그래서 이 몸이 잠에서 깼어.]

"너를 부른다고? 누가?"

[그건 이 몸도 모르겠어. 막 도와달라고 되게 서럽게 부르는데, 이 몸이 잠깐 갔다 와도 될까?]

"어디에서 부르는데?"

하벨의 물음에 아라가 당장 창문에 매달렸다.

[아래에서 이 몸을 부르고 있어.]

"내가 같이 따라갈게."

하벨은 아무래도 아라가 걱정이 됐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라 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래에 누가 아라를 부르고 있대. 걱정돼서 혼자 보내기가 그래서."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아라가 얽혀 있는 탓인지 몰라도 레디나의 허락이 아주 쉽게 떨어지자 하벨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아라가 하벨을 말렸다.

[대장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

"진짜?"

하벨의 물음에 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향해 다가가 두드렸다.

[응.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어! 창문 좀 열어주면 좋겠어.]

"그래, 알았어."

하벨은 아라가 말한 존재가 '정령'이라는 걸 눈치챘다.

정령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라가 있는 곳을 알고 다가오고, 아라도 어떻게 다가오는 걸 알아챘겠는가.

"창문을 왜 여시는…… 나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하벨이 바람을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자 외투를 손에 쥔 레디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네?"

하벨의 대답에 레디나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가 온다는 건지 몰랐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

[아아앗!]

아라가 깜짝 놀랐다. 누가 온다는 생각에 뭔가 가슴이 설레서 몰랐지만, 하벨이 지금 바람을 고스란히 다 맞고 있지 않던가.

[쉬쉬. 바람아 멈춰봐 봐. 대장이 감기 걸리겠어!]

아라가 바람을 멈추자 하벨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시야를 가리던 머리카락이 내려앉자 하벨은 창문에 매달려 고개를 빼꼼히 내밀던 한 정령과 시선이 마주쳤다.

고양이를 닮아있었다.

덜덜.

왜인지 몰라도 정령은 자신을 보자마자 무척 겁에 질려서는 동공마저 커졌다.

[왔어, 대장! 이 정령이 나를 불렀다.]

아라가 어깨를 잠깐 흔들며 정령에게 다가가자 정령은 그대로 창문 밖으로 숨어버렸다.

[우와아아아! 안녕! 나는 아라야. 네가 날 불렀어?]

해맑은 아라의 모습에 하벨은 웃음이 절로 나와 입가를 잠깐 가렸다.

[…진짜로 내 목소리를 들은 거야?]

무척이나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응. 그래서 이 몸이 대장한테 창문도 열어 달라고 했어.]

[왜에!]

정령이 갑자기 소리치자 아라가 흠칫 놀랐다.

[왜. 대체 왜 인간을 믿는 거지? 왜 인간이랑 같이 있는 건데?]

[그야 대장이니까. 대장을 나쁘게 말하는 거라면 이 몸은 화낼 거야. 이 몸한테 대장은 아주아주 소중하다구!]

아라가 힘주어 꺼낸 말에 하벨은 흡족함을 숨기지 못했다.

[저 인간이.]

정령이 앞발을 뻗어 당장 아라의 앞발을 붙잡았다.

[저… 더러운 인간이 너를, 너를 세뇌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갑자기 왜 그래? 이, 이 몸은 조금 무서워!]

아라가 곤란해 보이자 하벨은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당장 아라를 끌어안고는 정령을 쳐다보았다.

"진정하지 그래?"

[그 손 놔! 당장! 명령이야!]

정령은 사납게 으르렁거렸고, 하벨의 주변에 불꽃이 피어났다.

[안 돼!]

아라가 불꽃을 꺼트려 버리며 화를 담아 정령에게 소리쳤다.

[이 몸은 분명히 대장을 공격하는 행동은 안 된다고 그랬어!]

[…어. 어?]

정령은 놀란 눈으로 아라를 바라보았다.

'방금 저 정령 머리 위에 무언가 피어났다가 사라진 것 같았는데.'

하벨은 잠깐 눈을 찌푸렸다.

[공격이… 되질 않아.]

가슴 속에 가득 차는 따뜻한 감각과 함께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정령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와, 왕이시여…….]

왕.

자신들의 위대한 왕.

정령은 아라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바뀌었는지, 왜 이 모습인지 그런 생각은 정령의 머릿속에 싹 지워졌다.

[왕이시여. 부디, 도와주세요. 부디… 도와주세요.]

그저 빌었다.

[헤스트리아에 있는 저희를… 살려주세요!]

도와달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