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짠. 함정이었습니다
* * *
너무도 단순한 명령이 또 떨어졌음에도 레이엘느와 그란덴을 제외한 간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니.
언제 이렇게 간부들이 같이 모인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이 모임 자체는 은밀함을 내세웠던 검은 달이 하기에는 부적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작 '달님'이라는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자신들을 모으다니.
간부들을 불만에 휩싸였고,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알아들었으면 그란덴만 남고 다들 물러나."
하지만 레이엘느는 간부들의 의문을 달래주지 않았다.
어차피 명령이 내려졌고, 이를 따르는 게 중요했으니까.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간부들은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
레이엘느는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갑작스럽고도 급진적인 일로 허리가 뜯겨나간 기분이 가득했다.
"왜 나는 남겼지?"
그란덴이 묻자 레이엘느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내렸다.
"그란덴."
"말해봐."
"네가 에르티안 왕국에 갔다는 걸 알아."
"그래."
"뭐하러 간 거야?"
"하벨 티에라를 죽이러 갔다 왔고, 실패했어."
"레디나를 보러 간 게 아니고?"
"겸사겸사지."
"그 아이는… 어쩌고 있어? 요새 그 아이를 둘러싼 소문이 좋지 않아."
레이엘느는 소문을 떠올리며 금세 비웃음을 그렸다.
"레디나가 배신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긴 그 아이의 집이자 모든 것이야."
"레이엘느."
"왜?"
"꼭 이전 수장님을 죽였어야 했나?"
콰앙!
레이엘느는 거칠게 책상을 두드리다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
"왜? 그 아이가 너한테 이제 와서 죽음을 물었어?"
"왜 이렇게 흥분하지?"
"너는… 너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분을 죽였는지 알잖아."
레이엘느의 얼굴이 구겨졌다.
"진심으로… 사모했어. 존경했고, 그래서 너무나도 아꼈지."
레이엘느 자신을 꿰뚫던 전 수장의 싸늘하고도 낯선 시선이 기억이 났다. 죽기 전 모습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그녀는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아직도 이렇게나 마지막 얼굴이 선명한데.
"하지만 내가 더 사랑한 건 검은 달이었어. 이대로, 다른 것도 아닌 가난으로… 조직이 무너지는 걸 어떻게 볼 수 있었겠어?"
"그게 검은 달의 정의였다는 건 생각해보지 못했어?"
"그래서 검은 달이 무너지는 걸 보라고? 검은 달에 소속해 있던 암살자들이 그간 믿었던 정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던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라고?"
레이엘느는 주먹을 꽉 쥐어서는 부르르 떨었다.
"아니! 나는! 나는 절대로 그런 꼴은 볼 수 없었어! 그란덴 너는 내가 레디나를 어떤 마음으로 품었고, 키웠는지 알잖아?"
"레이엘느."
"개소리 지껄일 거라면 너도 꺼져."
"너는 지금의 검은 달을 사랑하고 있나?"
"……."
레이엘느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사랑한다고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삼켜졌다.
"간다."
그란덴은 비로소 마음의 노선을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검은 달을 사랑했던 레이엘느는 더는 없다는 걸.
레이엘느가 사랑했던, 그리고 자신이 모든 걸 바쳐왔던 검은 달 역시는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그란델."
레이엘느가 그란델을 부르지만, 그의 걸음은 멈추질 않았다.
"나는……."
레이엘느 역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으니.
* * *
"…오. 일어나셨어요?"
레디나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을 떴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하벨은 아라부터 찾았다.
왼쪽 겨드랑이 쪽이나, 오른쪽 겨드랑이 쪽에도 없자 하벨은 위를 쳐다보았다.
배를 내보이며 발라당 누워 잠이 든 아라의 발바닥이 꼼지락거리는 게 보이자 만지작거렸다.
"오미너스를 없애신 후에 칼리우스 님한테 업혀서 온 건 기억이 나죠?"
"…조금 나긴 해."
마법사 협회로 돌아오려고 아라가 만든 물의 길을 넘은 뒤에 의식이 끊어졌는지 그 뒤에 기억은 없었다.
"언니가 말하는데, 과로래요."
"과로라고? 내가?"
하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내가'가 아니라 저도 힘들고, 카샬도 힘든데 도련님은 오죽하겠어요?"
"그럴 리가. 별로 한 게 없는데? 코스모피안 왕국에 왔고, 마법사의 탑을 부쉈고, 오미너스를 없앴잖아."
"네네. 개수만 따지면 적죠.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도련님께서 코스모피안 왕국에 오신지 3일 안에 벌어졌다는 거죠. 아, 검은 달을 건드린 건 왜 말씀 안 하세요?"
레디나가 말로써 자신을 찌르자 아라의 발바닥을 만지작거리는 하벨의 손이 잠깐 멈췄다.
"뭐어, 그것도 있지."
"추진력이 끝내주신다는 건 이미 충분히, 아주 잘 알았으니까요. 오늘은 이만 쉬세요."
"왕실에서 사람들이 왔어?"
"도련님?"
레디나는 저 멈추지 않는 하벨의 입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란덴한테 연락이 왔지, 레디나?"
이어지는 하벨의 물음에 레디나는 '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래?"
"저 카샬이 매번 느끼는 감각이 뭔지 이제 알았어요!"
"어떤데?"
"속이 쓰린데요? 아주 많이요. 갑자기 솜사탕이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사줄까?"
하벨이 싱긋 웃자 레디나 역시 싱긋거렸다.
"아뇨. 지금 도련님께서 움직이신다면 솜사탕 파는 놈들이 보일 때마다 죽여버릴지도 모르겠어요."
"와. 내가 아무래도 오래 잤나 보네?"
"네. 지금 20시간쯤 주무신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레디나의 대답에 하벨은 이상하게도 기뻐했다.
"그래도 하루는 안 넘겼네. 나 되게 튼튼해졌다?"
하벨은 놀라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가진 힘을 여러 번이나 꽤 썼음에도 며칠간 잠에 빠지지 않은 것만 생각한다면 엄청난 발전임이 틀림없었다.
'이게 다 용용이하고 아라 덕이지.'
하벨은 실실 웃으며 아라의 발바닥을 다시금 만져주었다.
"그래서 왕실에서 사람이 왔어?"
"역시 이상한데요, 도련님."
"뭐가 이상해? 무슨 일이 터졌어?"
하벨이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레디나가 슬쩍 하벨의 어깨를 잡았다.
"그게 아니라요. 마치 본 것처럼 물어보잖아요."
"에이. 나 여기 누워 있었잖아. 다 봤으면서. 그나저나 셴이 대응을 잘했어?"
"저는 안 따라갔고요, 카샬이 도련님을 대신에 그 자리에 갔어요. 아무래도 카샬이 집사니까요."
카샬이 따라 들어갔다는 말에 하벨은 안도감을 느꼈다.
카샬이라면 셴이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것들까지 다 파헤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카샬은 어디 갔어?"
하벨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레디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카샬도 좀 쉬어야죠. 저는 원래 잠이 없는 편인 거 아시잖아요."
"그건 알지. 그럼 헤레스는 어때? 오미너스를 보고 많이 놀랐을 거야."
"언니는 음, 방법을 찾았다며 칼리우스 님하고 같이. 아니지, 헤일리스랑 되게 많은 마법사랑 광장이라고 해야 하나? 바닥에 종이들을 막 깔고는 뭔가를 다 같이 적던데요? 솔직히 좀 무섭긴 했어요."
"괜찮다는 거네?"
하벨이 안도하며 웃자 레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미너스가 정령과 같은 방향으로 진화했다.
'아니, 더 끔찍한 모습이었다.'
오미너스가 같은 오미너스를 먹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떨칠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헤레스가 멀쩡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강했을 줄이야.
"어쨌든, 식사하세요. 갓 나온 것처럼 따끈따끈할 거예요."
레디나가 상에 담은 스프를 잠깐 내려놓은 뒤에 하벨을 일으켰다.
"여기가 마법사 협회니까, 마법 물품이 정말 많더라고요. 여러 가지 가져오고 싶었는데, 마법 물품을 함부로 가질 수가 없잖아요?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마법사 협회에서 마법 물품을 불법으로 소유하거나 제조하는 걸 막고자 이를 쫓는 마법사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레디나는 상을 침대에 살포시 올린 뒤 접시를 덮었던 뚜껑을 열었다.
"저야 불법 마법 시술자니까 절대로 그런 짓은 안 했죠. 이미 존재 자체가 불법이니까요."
실실 웃는 레디나를 보며 하벨은 숟가락을 쥐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끝까지 불법 마법 시술이 뭔지 안 물어보시네요?"
"뭐,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숟가락을 쥐는 하벨의 모습에 레디나는 그가 지금도 자신을 배려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레디나는 어쩐지 입이 가려웠다.
"…음. 일단 마법사들의 피가 필요해요. 아주 많이요. 왜냐하면, 마법사들의 피에는 소량에 마나가 섞여 있거든요."
레디나는 수프를 떠먹는 하벨을 보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걸 잉크처럼 모으는 거예요."
아주 많은 마법사가 죽었다. 그래서 칼리우스가 마나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말했겠지.
레디나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했던 행동들을 하나씩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을 달리 짓지 않았다.
"어느 정도 양이 모였다 싶으면 문신처럼 원하는 부위에다가 마법진을 새겨요. 보통 두 개 정도?"
"오."
하벨은 눈을 반짝거렸다.
수프가 맛있어서인지, 자신의 말이 신기해서인지 몰라도 레디나는 마음이 편했다.
솔직히 이걸 누구한테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하벨의 눈동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나는 사용하고 싶은 마법하고, 다른 하나는 이 마법이 움직일 수 있게 마나 일부를 문신에다가 저장할 수 있는 마법이요. 안 되는 걸 억지로 해버리니 위험한 거죠."
"너는 여러 가지 중에 바람을 선택한 거야?"
"네.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레디나는 대답과 함께 얼굴을 잠깐 일그러트렸다.
이제 점점 검은 달의 수장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복잡했다.
마법 시술을 새기기 전 무슨 마법을 새기고 싶냐는 말에 자신은 고민도 없이, 바람을 선택했다.
부러워서.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어서.
레디나는 옷자락을 잠깐 쥐었다.
"…사실은요, 도련님."
"응, 레디나."
"저는, 검은 달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많이 괴로웠어?"
하벨은 숟가락을 놓고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그저 걱정이 담겨 있었다.
레디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밀려오는 여러 감정에 일그러졌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네. 괴로웠어요. 벗어나는 것도 못 하고, 벗어날 용기도 없는 제가 너무 싫어서요."
"이제는 벗어났잖아?"
"…예?"
레디나는 잠깐 놀란 표정을 하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아직도 검은 달에 있다고 생각했어? 슬슬 이 연극도 집어치울 때가 됐잖아?"
"그렇… 네요?"
레디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실실 웃었다.
아, 맞다.
여기가 집이었지.
하벨이 자신의 집이었다. 자신을 언제든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하벨이, 집이었다.
"레디나. 그란덴한테서 연락이 왔지?"
"왔어요. 오늘 새벽에요."
레디나는 그란덴이 보낸 쪽지를 하벨에게 내밀었다.
"이미 사본을 만들고 크라마한테 보냈으니 페트리오가 확인했을 거예요."
"좀도둑이 나한테 뭐라고 안 했지?"
하벨은 페트리오의 이름이 나오자 문득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말했어요."
"뭐… 라고?"
"일단 레바놈을 아예 발라버릴 자료를 가지고 오겠다는데요?"
"여기서 또 나온다고?"
"국고에 손을 댄 흔적을 발견했나 봐요."
"…우와. 진짜 레바놈은 파면 팔수록 대단하네."
하벨은 놀라며 아공간 주머니를 열고 있었다.
"그런데 도련님. 갑자기 아공간 주머니는 왜 여는 거예요?"
레디나가 묻자 하벨은 눈웃음을 지었다.
"형님한테 말해야지."
"그건 다 드시고 하시죠."
"내 손은 두 개라서. 원래는 여러 개였는데."
"여… 러 개였다고요?"
"물이 곧 내 손이라서 말이야."
하벨은 키득거리며 웃다가 잠깐 웃음을 멈췄다.
배가 욱신거렸다.
"아프시죠? 여기 진통제 있어요. 수프 드시고 먹으라고 언니가 그랬어요."
레디나는 헤레스에게 받았던 약을 빈 그릇에 몇 개 담았다.
"레디나."
"네."
"이제 간부들이 나를 잡으러 올 거야."
"간부… 들이요?"
"그래. 그만큼 내가 쑤셔댔잖아?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지부를 다 박살 냈고, 이번에 코스모피안 왕국의 지부장들을 죽이기까지 했고. 정확히는 달님을 잡으러 오는 거지만."
레디나는 숨을 짧게 쉬었다.
하벨이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정말로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어 긴장됐다.
"그러니까, 레디나 너도 준비해. 마음의 준비든, 간부를 상대할 준비든."
"네. 여러 가지로 준비할게요. 고마워요, 도련님."
레디나가 웃자 하벨은 손에 쥔 연락용 아이템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눈 좀 감아줘."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치사하시죠."
레디나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하벨을 말릴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하벨이 하고자 한 일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레디나는 투덜거렸다.
"…도련님은 진짜 사람을 갈등하게 만들어요. 막 보면 제 감정하고, 상황을 놓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해보라고 강요한다니까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설득할 수 없으니까. 지금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해 너희를 설득하는 거야. 만약에 내가 틀린다면 너희가 날 더 막아줄 거잖아?"
자신의 눈이 과거 살았던 삶으로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다고 자만하진 않았다.
그건 분명 아집에 불과할 테니까.
"이러면… 음, 더 치사하신데요? 저 이런데 약하단 말이에요. 아시면서."
레디나가 기쁨을 담아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을 믿는다는 게 아닌가.
여기서 어떻게 뭐라고 더 말할 수 있을까.
"더는 모르겠어요. 그냥 오늘 눈 감아드릴게요."
하벨은 그 말에 얼른 연락용 아이템을 작동시켰다.
라르웬 티에라.
<막내…….>
"형님 저 준비됐습니다."
<뭐?>
"준비됐습니다."
<준비라니?>
"코스모피안 왕국에 간부가 나올 겁니다. 전 그렇게 예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 날 죽이지 못한다면 진짜 죽는 걸 저놈들이 알아버렸을지도 모르겠거든요."
하벨은 그란덴이 가지고 온 쪽지를 보면서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