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오미너스가 달라지다(3)
* * *
금방이라도 거칠게 밀어붙이는 파도의 흐름에 여하는 넋을 잃었다.
꼭 아버지가 말하던 옛날의 바다를 보는 것만 같았다.
투명하고 아름다워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털 같은 모습이었다고.
'…그 말 그대로다.'
콰콰콰콰콰!
소리는 거셌지만, 물살은 아무것도 삼키지 않았다.
나무들도, 돌멩이도, 그곳에 있던 생물들까지 다 피해서는 오직 오미너스를 향해 돌진했다.
뺨을 세차게 후리듯 오미너스와 바닥에 남은 잔해를 휩쓸었고 녹이고, 또 녹이는 장면이 여하 눈에 보였다.
이건 기적이라고밖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여하는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이 물을 끌어온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은 오미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물을 향해 찌르고, 할퀴고,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인 어린아이처럼 오미너스가 발악하는 게 느껴졌다.
'발악이라니. 우습구나.'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물을 빠르게 압축해 오미너스를 짓눌렀다.
"얌전히 있거라."
물의 지배자인 자신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는 물은 세상에 없었다.
녹아내리던 오미너스가 한순간 부르르 잔 떨림을 보이더니 그대로 멈췄다.
주르륵.
하벨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는 생각했다.
'지금은 여기까지네.'
오미너스에게 명령을 내려도 완전히 듣질 않았다.
일부분은 놓쳐버렸고. 이게 현재 자신의 상태였다.
―용왕님!
다급히 들리는 물의 소리를 듣자마자 우산을 펼쳤다.
용케도 도망쳤던 오미너스의 일부분이 하벨을 공격했다.
투투투!
띄워놓았던 우산이 빙그르르 돌아가며 오미너스의 공격을 튕겨내고는 다시 하벨의 머리 위에 둥둥 떠다녔다.
'역시 우산은 언제든 튼튼한데?'
고슴도치 가시처럼 뾰족하게 선 오미너스가 침을 뱉듯 쏘아댔다.
일부는 헤레스에게 향했고, 대부분은 하벨에게 쏟아졌다.
"어……."
"내가 하오!"
여하가 칼리우스를 대신해 소리쳤다.
조금 전, 결계를 부탁하니 마니 소리를 들었으니까.
화악.
여하가 헤레스에게 쏟아지는 오미너스를 몸을 받아내자 칼리우스의 마법이 한 박자 늦게 발동했다.
헤레스와 하벨을 동시에 마법이 감쌌다.
챙그랑!
작은 소용돌이처럼 다가온 오미너스의 잔해가 칼리우스의 방어 마법을 다시금 깨트렸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이번에는 사과하지 않았다.
―시간만 벌어주십시오.
엘라힘이 부탁하지 않았는가.
반짝!
그리고 빛이 번쩍거렸다.
엘라힘이 꺼내는 신의 은총이었다.
사르르르.
신의 은총을 맞은 오미너스가 모래처럼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억, 헉."
엘라힘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감에 아직도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공격이… 효과가 있다고?'
예상하지 못했던 수확에 하벨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성 국가 시엘느.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떠올랐다.
하벨은 다른 물을 꺼내 오미너스의 잔해까지 스으윽 쓸었다.
이번에는 훨씬 손쉽게 녹아내렸다.
치이이익.
하벨 주변에 물이 계속 일렁거리자 아라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대장 이, 이제 안 돼. 이거,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이 움직였어! 안 돼!]
아라는 하벨의 몸속에 자신의 물로 막고, 막아도 저주가 뿌리처럼 뻗어오는 걸 느꼈다.
"…이제 됐어. 다 끝났어."
하벨은 자신을 재촉하는 아라를 쓰다듬으며 여하의 몸을 물로 부드러이 감쌌다.
"이러지 않아도 되오."
"아니.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하벨은 여하의 몸이 회복되는 걸 본 뒤에야 물속에 갇힌 오미너스를 바라보았다.
거의 다 녹아내려서 손바닥만큼 남은 오미노스의 모습은 꼭 해진 옷자락 같았다.
'이제 끝…….'
―왜… 에, 안 돼?
갑자기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리에 하벨은 흠칫 놀라며 미간을 찌푸려졌다.
'지금… 오미너스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고?'
질퍽한 검은 물의 외형과 달리 목소리는 어리고, 순진했다.
어쩌면 조금 슬프게 들리기도 했다.
―이거, 이거 지금 말을 한 거예요?
―아니지. 말할 수가 있지. 얘도 물인데.
―하지만 이건 좀 갑작스러운데?
물이 갑자기 웅성거렸다.
'물도 모르는 사실이고.'
하벨 계속 생각했다.
[이 몸은… 끄응, 지금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아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꺼냈다.
'아라조차 못 듣는다는 건가.'
정령왕인 아라가 듣지 못한다는 말은 곧 자신 이외에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벨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더는 왕이 아니라도 용왕이었던 자신의 힘은 남아 있지 않던가.
물이 말한 것처럼 오미너스의 근원이 일단 물이었고, 자신의 힘은 그들을 지배하는 힘이었으니.
하벨은 땅과 여기저기를 적셨던 물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나… 도.
오미너스가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겨우 손톱만큼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나도…….
뒤에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몰라도 하벨은 가슴팍을 찌르는 통증이 시작되자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권능을 멈췄다.
"…커헉!"
반발력이 몰려오듯 하벨은 피를 토하며 몸이 무너질 뻔했지만, 칼리우스와 아라가 붙잡았다.
"도련님, 괜찮아? 헤레스!"
칼리우스가 헤레스를 부르자 그녀는 겨우 마법에서 벗어나 하벨에게 뛰어왔다.
[대장, 대장… 괜, 어어, 저거 봐봐!]
"저기… 보시오."
여하와 아라가 거의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이 사라지자 오미너스가 있던 자리에서 새싹이 자라났으니.
[이건 이 몸이 해야 해. 이 몸이. 잠깐만 있어 봐, 대장.]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벨을 쓰다듬다가 새싹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저기에 물을 줘야 한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들었다.
아라가 물을 만들어 조심스레 물을 주던 차 하벨의 물이 그 위를 덮었다.
[대, 대장! 그러면 안 돼! 안…….]
아라가 깜짝 놀라며 언성을 높이다 말고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물을 머금은 새싹이 거침없이 자라나서는 사람 한 명은 될 정도로 정말 커다란 몽우리를 피웠다.
꽃이 잎을 펼치자 그곳에 정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라의 오통통한 볼살이 금세 올라갔다.
[얘들아. 다들 정신 차려 봐봐. 얘들아.]
아라가 정령들을 하나씩 흔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정령들은 아라를 바라보더니 누구 할 것 없이 울먹였다.
[우리… 살았어?]
[응! 대장이 구해줬어!]
아라가 활짝 웃자 정령들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포근한 이불에 돌돌 말린 기분이 들어 당장 아라를 안으며 엉엉 울었다.
[무서웠어. 진짜 무서웠어!]
[정령사… 같은데, 우리를 잡았어!]
[머리카락은 검고, 눈도 검고, 너무 두려웠어!]
정령들이 울면서 소리치는 그 말에 하벨은 숨을 짧게 몰아쉬었다.
이미 알고 있어도 또 에른스트가 언급되자 열 받았다.
'…하지만 다행이다.'
하벨 역시 정령들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빠졌다.
지금 침식이 작용하는지 가슴팍이 계속 욱신거렸다.
"용용… 아."
하벨이 칼리우스를 부르자 그는 하벨을 자리에 앉히고는 대답했다.
"도련님 지금, 침식이 조금 진행됐어. 더는 힘을 쓰면 안 돼. 알고 있지?"
"그건 아는데… 결계는 안 부서졌지? 내가 좀 조심했어."
"대장은 결계에 손도 안 댔어. 내가 봤어. 엄청 대단했어."
다행이다.
하벨은 그렇게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헤레스."
"예, 도련님."
"봤어?"
"…봤습니다."
헤레스는 겨우 말을 이었다.
사실 오미너스의 잔해가 하벨에게 닿으려고 했을 때 자신이 막을 수 있었다.
막을 수 있었음에도 자신은 오미너스를 보는 걸 택했다.
분명히 하벨에게 다음 수가 있을 거라 생각해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목적을 달성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헤레스는 후회했고.
"혹시 방법을 찾았어?"
그래서 하벨이 저렇게 다정하게 묻는 말에 가슴이 욱신거려왔다.
"예, 덕분에 찾았습니다."
"그럼 됐어. …하. 도움이 됐다니 너무 기쁘네."
하벨이 환하게 웃었다. 비가 갠 뒤 하늘처럼 예뻤다.
"도련님. 저는……."
"알아."
하벨의 말에 헤레스는 어깨를 흔들었다.
"이건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나를 믿었잖아."
"…예. 믿었습니다."
"그럼, 됐어."
하벨은 활짝 웃었다.
"혹시 마음에 걸리면 오늘 일은 부드럽게 넘어가 주면 돼."
"방법은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도련님. 왜 이렇게 빨리… 끝내셔야 했나요?"
헤레스는 하벨의 부탁과 별개로 무모함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잡아야 할 게 하나 더 남아 있잖아?"
하벨은 손가락 하나를 올렸다.
이번 일은 조금 전에 아라한테 말했듯이 자신의 힘이 오미너스에게 얼마나 통하는지 알아야 했기에 벌였다.
앞으로 오미너스를 상대하려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를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자, 잠시만요, 도련님."
헤레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하나 더라뇨……?"
[이, 이 몸은 알 것 같아!]
아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검은 달!]
"설마, 검은 달이요?"
아라와 헤레스가 거의 동시에 대답하자 하벨은 정화제가 든 주사를 맞으며 실실거렸다.
"맞아. 일단 검은 달은 에르티안 왕국의 주요 고객을 잃어버려서 엄청 초조한 상태일 거야."
검은 달은 신성 국가 시엘느에서 죽어가는 사람과 사체를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로 배달하는 임무를 겸했다.
이때 얼마나 많은 돈을 받았을까.
돈줄이 끊어진 상태에서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지부가 거의 다 박살이 났다.
"이러니 지금 검은 달이 나를 얼마나 찾고 있겠어? 아까도 들었지? 형님한테 그렇게 연락이 올… 정도라고."
여기서 클로저에게 접근해 '검은 달'을 알린 존재가 바로 자신이자 '달님'뿐이니 검은 달 입장에서 그 일을 벌인 건 누가 봐도 자신이었다.
'게다가 코스모피안 왕국에 지부장들이 동시에 죽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얼마나 눈이 돌아갈까.'
자신이 검은 달에게 입힌 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반드시 간부가 나올 거다.'
그 정도의 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렸으니까.
'간부를 잡아야 검은 달 수장의 목을 쥘 수 있고, 나아가 신성 국가 시엘느 역시 휘어잡을 수 있는 틈을 발견할지도 몰라.'
오미너스에게 신의 은총이 통한 모습을 방금 직접 보지 않았던가.
* * *
"…자 어디 한번 지껄여봐."
그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결코, 웃지 않았다.
현 검은 달의 수장인, 레이엘느.
그는 간부를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입을 다물자 레이엘느는 앞에 펼쳐진 보고서들을 손으로 헝클어트리며 다시금 물었다.
"에르티안 왕국의 지부들이 다 부서질 동안 너희는 뭐했는데?"
그란덴은 자신들을 재촉하는 레이엘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야 레이엘느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대체 왜 저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왜 저렇게 괴물이 되었는지, 그란덴은 참담함이 밀려왔다. 자신들이 바라던 검은 달은 이게 아니었을 텐데.
"달님!"
레이엘느가 소리쳤다.
"대체 그 새끼가 누구냔 말이야!"
"가면단… 이라는 건 압니다."
간부 중 한 명이 입을 열자 당장 서늘한 날이 그의 목덜미 앞에 다가와 있었다.
레이엘느가 어느새 간부 앞으로 껑충 다가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그걸 몰라? 대체 어떤 새끼며 어떤 곳에 뿌리 잡았으며 정체가 무엇인지 묻는 거잖아!"
레이엘느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간부의 목에 피가 흘렀다.
"클로저에 잠입한 새끼들은 뭐 하고 돌아다니는데, 응? 그렇게 해줬으면 무슨 정보라도 알아내야 하는 거 아니야?"
"달님이 다시 클로저와 만나기로 약… 속했습니다."
"내가 또 그딴 희망에 찬 소리를 들어야 해? 약속하면 뭐 하는데? 라르웬 티에라를 데려오면 될 거 아니야. 라르웬 티에라를! 그 새끼를 말이야!"
"대체 라르웬 티에라는 무얼 잘못했는데?"
그란덴이 묻자 레이엘느는 그대로 단검을 감추며 활짝 웃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 내가 요새 예민해서 실수했어. 미안, 그란덴."
'…이렇게도 노골적으로 나를 병신 취급하는데 이걸 몰랐다니.'
그란덴은 진실에 눈을 돌린 자신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애초에 왜 나는 네가 클로저를 건드리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란덴, 너 왜 그래? 클로저들이 틈의 세계를 핑계 삼아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걸 알면서 이래? 클로저의 대표가 클로저라는 이름을 단 살인자 새끼들 때문에 억류된 상태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왜 라르웬 티에라가 나왔지?"
"실수라니까. 살인자 새끼들을 빨리 죽여야 클로저가 정상화될 수 있는데 이걸 눈앞에 두고도 하지 못했잖아. 그런데 달님이라는 이상한 새끼까지 껴들어서 화가 나서 그랬어. 됐지?"
레이엘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가 목에 피가 흐르는 간부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달님을 잡아. 걔가 우리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고."
"예. 이번에 정말로 클로저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다는 걸 들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가."
레이엘느는 그란덴을 제외한 간부들을 모조리 가리켰다.
이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음을 느꼈다.
"놈이 우리의 계획은 아주 박살을 냈으니까 여기서 반드시 잡아야 해."
이번에 코스모피안 왕국의 지부장이 갑자기 죽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도 같은 시간에, 같은 수법으로.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달님을 잡아야 이 모든 게 해결이 될 테지.
그렇지 않으면 검은 달은 휘청이 아니라 무너질 수도 있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그러니까 너희가 직접 달님을 잡아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