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11화 (311/415)

311화. 오미너스가 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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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엘라힘은 땅을 밟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령들에게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물의 길 역시 처음으로 체험했기에 얼떨떨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평범한 숲이었다.

'…진짜 숲인가?'

엘라힘은 옷자락을 꽉 쥐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고작해야 하벨 옆에 있을 뿐인데 놀랍고 신기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있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엘라힘은 웃기게도 지금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렇죠? 저도 그래요. 아주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이죠."

헤레스 역시 엘라힘을 따라 웃었다.

"신관님."

하벨이 엘라힘에게 다가가 그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하벨 공."

"이 앞에 뭐가 있든지 너무 놀라시지 마세요.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 뒤에 계시고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가 아니라 본인을 지키셔야 합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하벨 공을 도와주러 온 것이지, 짐이 되고자 따라온 게 아닙니다."

엘라힘은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이곳에 오기 몇 시간 전, 하벨은 자신을 불렀다.

방에는 카샬과 레디나, 칼리우스, 헤레스, 여하까지 다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기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일단 내가 이겼어요.

하벨은 장난스러운 말부터 꺼냈다.

카샬과 레디나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자 자신은 '아무래도 저들의 반대를 또 이긴 모양이구나'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하벨과 가까이하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주변 반대가 아주 격렬하다는 것이었다.

―나는요, 신관님께서 오미너스를 없앨 수 있는지 보고 싶어요. 오미너스가 무엇인지 들었으니까 지금 바로 결정해주세요.

하여 허락했더니, 오미너스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하벨에게 수없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또 비슷한 말을 하니, 이렇게나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오늘 또 느끼게 됐다.

엘라힘이 지그시 바라보자 하벨은 혹여나 그가 오해할까 봐 말을 꺼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신관님을 온실 속 화초처럼 대한 건 아니에요. 사람이 힘이 있고, 없고는 솔직히 타고난 것도 있으니까요. 저는 그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그럼 다행이네요."

하벨은 이어 여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으니 그만 말해도 되오. 제발."

여하는 마지막 말에 힘을 거세게 들였다.

"들은 거랑 다르다니까. 아, 헤레스 너도 마음의 준비했어?"

오미너스로 향하는 길목에 수십 개 이상의 결계가 보였기에 하벨은 그들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오미너스가 가진 끔찍함은 이로 말로써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는… 준비됐어요, 도련님."

헤레스는 꽉 쥔 주먹을 보여주었다.

오미너스를 몇 년 만에 다시 제대로 보는지 몰랐다. 마음의 준비는 확실히 한 상태였다.

"이제 풀어도 돼?"

칼리우스는 손에 쥔 물건을 흔들었다.

셴에게 받은 결계 통행증이었고, 이것만 있으면 결계가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깐만, 용용아."

하벨은 칼리우스를 멈추고 자신의 품에 꼭 붙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아라야. 데리고 와서 미안해."

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 몸이 오겠다고 그랬어! 이 몸은 이안한테 힘을 받아서 이제 막, 무섭진 않아. 조금, 아주 조금만 무서워.]

엣헴.

아라는 고개를 살짝 세웠지만, 하벨을 붙잡은 앞발은 그대로였다.

'그래.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지.'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치셨습니까? 왜 지금 바로 오미너스를 없애러 가시는 겁니까? 좀, 제발, 휴식 좀 하시고 가면 안 됩니까?

카샬이 무척 화내며 크게 반대했다.

하벨 자신 역시 카샬이 당연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마법사의 탑도 베어냈고, 검은 달의 지부장 일부를 죽였으니.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촉박했다.

에른스트의 의심을 덜고, 주변에서 자신에게 쏠리는 의심 역시 지우려면 같은 날, 비슷한 시간대에 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했다.

애초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이런 강행군을 해야 한다는 걸 예상하지 않았던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었고.

마침 이곳에 오기 전에 넬시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 코스모피안 왕실 내부의 흐름이 달라졌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레바놈을 옹호하던 기사들과 귀족들이 등을 돌려버렸거든. 꼭 누군가 뒤에서 손을 댄 것처럼 말이야.

푸렐 텔르나는 이미 자신을 습격한 일로 심문을 받는 상태였고, 레바놈은 근신 처분을 받지 않았던가.

'레바놈은 푸렐 텔르나가 심문을 받는다는 걸 모를 텐데.'

하벨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좀도둑도 아니니. 대체 누가 이 일에 끼어든 거지?'

시간이 없는 만큼 넬시아, 라르웬, 페트리오가 각자의 일을 하던 참이었다.

할 일도 바쁜 참에 여기서 누가 개입을 하겠는가.

'레바놈을 증오하는 어떤 세력이 저지른 일일까. 아니면 에른스트가 레바놈을… 버려버린 건가?'

무엇이 되었든 외부 세력이 간섭한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왕실 기사들이 거짓말을 꺼낼 리가 없을 테니까.

하벨은 일단 결론 하나를 내린 뒤에 칼리우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용용아. 시작하자."

이번에는 에른스트가 몰래 숨겨둔 오미너스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헤레스가 오미너스를 없앨 마법을 찾는 과정이 중요했다.

이렇게 거대 정화 장치 속에 몰래 오미너스를 숨겨왔다면 이미 다른 나라들 역시 이럴 가능성이 클 테니 오미너스를 없앨 방법이 더욱 중요해졌다.

"응. 시작할게."

고개를 끄덕인 칼리우스가 셴에게 받은 통행증을 내밀자 나무가 있던 그곳에 나무는 온데간데없고, 일부분만 오려낸 듯 길이 드러났다.

"들어가죠."

하벨이 앞서 걸었다.

가장 먼저 새빨간 단풍잎으로 온몸을 뒤덮은 나무가 자신을 반겼다.

[레디나가 단풍을 좋아하는데. 아까 이 몸이 봤을 때, 레디나가 화가 난 듯했어.]

아라가 단풍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하긴 그랬지.'

―…알아요. 저는 시녀 역할이 있고, 제가 가진 내성이 걱정스러워서 데리고 가지 않는 거죠?

레디나는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는 사실에 조금, 아니, 많이 실망하고 있었다.

―뭐, 좋아요. 대신 여기서 몇 놈을 죽일 거예요. 마법사 협회지만, 여기에 수상한 놈이 숨어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단검을 휙휙 돌리며 내뱉는 말 하나에 살기가 제법 짙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레디나가 가진 물의 내성은 카샬보다 부족했다.

오미너스와 가까이하면 할수록 몸속에 푸른 돌이 쌓일 텐데, 레디나는 주로 상대방과 초근접으로 싸우니 오미너스와 상성이 좋지 않았다.

하벨은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여기가 결계 안이오?"

여하가 입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안과 밖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맞아. 혹시 결계에 들어간 적 없어?"

칼리우스가 눈을 깜빡거리며 묻자 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소. 혼자 오래 떠돌아다녔소. 마법사도 솔직히 거의 처음 접하오."

여하는 단풍잎을 보며 다양한 발소리가 들리는 상황이 참 낯설다 싶었다.

"사과하겠소."

여하의 시선이 헤레스를 향했다. 그녀는 곧 당황해 단풍잎을 만지다 말고 손을 가로저었다.

"아뇨.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도 말했듯이 저는 잘못을 저질렀어요."

"아니오. 내 시선이 좁았소. 마법사를 거의 접한 적이 없어서 그렇소. 적어도 나는 세뇌에 걸린 자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러니 그때 언성을 높인 걸 사과하겠소."

여하의 단호한 말에 헤레스의 시선이 잠깐 하벨을 향했다.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그럼 고마워요."

헤레스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나중에 오미너스를 본 뒤에 저를 원망하셔도 괜찮아요.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죄니까요."

헤레스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오미너스가 존재가 있다는 걸 알리듯 불길함이 깔린 이 장소는 금세 마음을 뒤흔들었다.

꼭 자신의 잘못을 건드는 것 같아 헤레스는 마음이 울렁거려왔다.

저 너머에 더 큰 잘못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오미너스를 없앨 방법을… 찾는다고 들었소."

여하가 슬쩍 묻자 칼리우스가 대답했다.

"응, 맞아. 헤레스는 반드시 방법을 찾을 수 있어."

"음. 저번 일 때문에 내가 불편하다는 걸 알지만, 나도 도와주겠소. 적어도 나는 직접 닿은 적이 있소."

여하는 차차 굳어져 가는 헤레스의 표정에 살이 썩어갔다는 말은 삼켰다.

"고마워요. 도움은 언제든 좋습니다. 아, 피도… 좀 부탁드릴게요."

헤레스의 표정이 언제 굳었냐는 듯 '피' 이야기에 금세 눈을 반짝거렸다.

"알겠소."

그제야 여하는 편안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칼리우스나 모두가 무척 불편했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이 느낀 그 불편함은 혼자가 아닌 낯섦에서 시작한 게 아닐까 싶었다.

'경계심을… 낮춰도 되지 않을까?'

―그럼, 그럼. 경계심을 낮춰도 돼.

―네 얼굴 봐봐. 우리가 봤던 얼굴 중 제일 편해 보인다? 봐봐. 우리가 경계심 좀 내려놓으라고 그랬지?

―너는 어? 빚쟁이한테 쫓기듯 있었잖아.

―맞아. 딱 그 모습이 맞네.

물이 빈정거리지만, 여하는 이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많이 돌아다녔음에도 지상은 아직도 낯설게 다가오니 어쩌겠는가.

갑자기 하벨이 걸음을 멈추자 헤레스가 바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아니, 아니. 연락이 와서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하벨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라르웬 티에라.

이름이 보이자 하벨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헛기침하다가 최대한 밝게 말을 꺼냈다.

"형님."

말과 함께 하벨은 다시 걸어갔다.

<막내야. 너 지금 어디야?>

"밖이에요."

<…카샬이 안 말, 아니지, 말렸겠지. 그리고 네가 이겼겠지.>

"네. 정확하신데요?"

<그래서 지금 어딘데?>

"오미너스를 없애러 왔어요. 오미너스가 있는 결계 안인데요, 아직 오미너스가 있는 곳까지는 좀 걸어가야……."

<뭐어? 뭐라고 했어, 지금?>

라르웬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클로저에서 절 부르죠? 하긴 안달이 날만 하죠."

<내가, 갑자기 예감이 좋지 않아서 너한테 연락했는데.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막내야?>

'아, 방금 저 말은 레디나하고 반응이 비슷한데?'

―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도련님? 누굴 죽여요? 지부장을… 뭐라고요?

얼이 빠진 레디나의 표정은 상당히 드물어 하벨은 잠깐 그 표정이 생각이 나 낄낄 웃었다.

"에이, 사고라뇨. 그냥 검은 달을 잠깐 흔들어봤습니다."

<흔들어……?>

"지부장 좀 죽였습니다. 그래서 클로저에서 저를 재촉하는 거겠죠? 지금 '달님'이 너무나도 보고 싶을 테니까요."

<내가 진짜… 혈압이 올라 가지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마법사 협회에 너를 보내자고, 그렇게 누님이 믿어보자고 그랬는데. 역시 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형님 진정하시고요. 브란스한테 간다고 전해주세요."

하벨은 일단 라르웬을 달랬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닐지를 떠나 라르웬 덕에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건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제 슬슬 가려고 했거든요. 클로저한테 점수 좀 따야죠."

<막내야. 네가 이미 오미너스를 없애러 갔다니까 내가 더는 말을 안 할게. 하지만…….>

흠칫.

하벨은 피부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형님.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하벨은 그대로 연락용 아이템을 끊으며 얼굴을 구겼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이 정도로 서늘하지 않았는데.

영혼이 회복되었기 때문일까.

하벨이 잠깐 용왕의 힘을 끌어모으자 섬뜩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오미너스가 몰려서 아주 커다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달랐다.

오히려 범위가 좁고.

불길하고.

게다가 짙었다.

"달라."

하벨은 바로 알아챘다.

"오미너스가… 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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