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차곡차곡(2)
* * *
"도련님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카샬은 헤일리스에게 당부했다.
그녀가 칼리우스에게 이름을 바쳤어도 카샬은 믿지 않았다.
마법사의 탑이 부서진 상황 자체를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하벨을 이용하는 형태가 될 수 있었으니.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저는 이 모든 행동이 도련님께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다시 삶을 얻었는지 아시잖습니까?"
헤일리스는 옷자락을 잡으며 간절히 말했지만, 카샬은 귀담아듣질 않았다. 하벨을 그 높은 탑에서 떨어트린 건 그녀였으니.
그저 뒤쪽에서 들려오는 하벨의 목소리에 물러섰다.
"일단, 들어가시죠. 도련님께서 부르십니다."
"감사합니다."
헤일리스는 심호흡을 한 뒤로 하벨에게 다가갔다.
"…하벨 티에라 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하벨을 향해 헤일리스가 고개를 숙였고, 그녀는 이어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위대한 용이시여."
"저번에 칼리우스라고 불러도 된다고 그랬는데. 그런, 음, 딱딱한 말은 싫어."
칼리우스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헤일리스가 다시금 활짝 웃으며 칼리우스에게 인사했다.
"칼리우스 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말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안녕, 헤일리스. 나 진짜 많이 컸지?"
그제야 칼리우스가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예. 아주 늠름해지셨습니다."
"왔어?"
하벨은 자신에게 찰싹 붙은 아라를 힐끔 쳐다보다가 헤일리스를 반겼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텐데.
"되게 오랜만이지?"
"얼마 안 됐습니다. 겨우 2주 넘게 흘렀잖습니까."
카샬이 옆에서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오래된 거지."
하벨은 오히려 카샬에게 핀잔을 주며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오늘 마법사의 탑이 부서진 일 때문에 온 거야?"
"그렇습니다. 도련님께서 저를 부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맞아. 너를 부르려고 했어."
하벨은 싱긋 웃었다.
겉으로 봤을 때 전혀 모르겠지만, 사실 마법사의 탑 두 개가 칼리우스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오늘 일은 특히나 시렌이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더 수월하게 흘러갔고.
"방금 벌어진 일은 말이야. 별로 특별한 건 아니었어. 그냥 부서트리고 싶어서 부러트려 버린 게 전부야."
왜 별거 아닌 일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헤일리스는 꾹 참았다.
"그렇다는 말은 원래 에르티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의 탑을 부서트리려고 했습니까?"
"맞아. 그게 너무도 짜증 나 보였거든. 하지만 안심해. 거긴 부서트리지 않을 테니까. 너 때문이 아니라 헤레스가 바라지 않아서야."
"예. 뭐가 되었든 감사합니다."
하벨이 마법사의 탑까지 부러트릴 정도로 강한지 몰랐기에 헤일리스는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게 물 마법사일까. 무엇이 되었든 너무도 무서운 힘이 아닌가.
"혹시 칼리우스 님께서 셴을 지배하셨습니까?"
"아니. 혼자 자멸할 놈은 아닌 것 같아서 감시만 시키고 내버려 뒀어. 혹시 내키지 않아?"
"아뇨. 저는 도련님께서 어떤 계획을 실행하시든 여기에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까 보니까 구석에 서 있더라? 너도 협회장인데 말이야?"
"그 이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시렌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시렌을 죽일 수 없겠네."
"저 역시 그게 맞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부분을 감당하겠습니다."
"나는 이제 셴이 오면 이렇게 말할 거야. 오늘 일은 '시렌'이 시킨 마법을 연구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하벨은 자신이 무얼 할지 헤일리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실제로 셴은 시렌의 명령을 받고 오미너스를 연구했고, 심지어 누군가에게 오미너스를 넘기지 않았던가.
셴과 시렌이 얽힌 건 사실이었다.
레바놈이 왕이 되지 못하는 그 사실에 에른스트의 유혹에 넘어갔고, 시렌의 뒤에 에른스트가 있으니 결국, 셴이 멋대로 날뛰어 레바놈의 계획을 방해하는 거야말로 에른스트에게 엿을 주는 게 아니겠는가.
이렇게 자신이 한 행동들 모든 게 에른스트의 뒤통수를 때린 거라 마법사의 탑을 부수는 것 역시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는 시렌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거군요."
헤일리스가 어딘가 곤란해 보이자 칼리우스가 말에 힘을 주었다.
"만약에 마법사들이 반대하면 내 뜻이라고 말하면 돼, 헤일리스."
"그래도 되겠어? 말의 무게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무거울 텐데, 용용아?"
하벨이 살짝 놀라며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내 힘이 필요한 순간이기도 하고 도련님께 도움이 된다면 너무 기쁠 거야."
[이 몸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아라가 하벨의 손가락을 잡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라 너는 이미 충분해."
하벨은 아라가 옆에 있다는 그 자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으로 다가오는지 말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도련님께서는 지금 바로 오미너스를 없애러 가시겠죠?"
헤일리스의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카샬은 대답을 듣자마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조금 전에도 말을 끊은 터라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저는 하루, 아니면 이틀 뒤, 공식적으로 '협회장'으로서 이곳을 방문하겠습니다. 그리고 셴의 편에 서겠습니다. 시렌이 살아 있다는 걸 알리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생각인데?"
하벨은 헤일리스의 생각에 즐거움을 드러냈다.
"마법사 협회가 서로 뭉친다는 건 다른 나라들이 보기에도 아니꼬운 일이나, 남은 마법사 협회가 봤을 때 시렌이 살아 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잖아?"
마법사들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것이며 여러 가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 될 테지.
어쨌든 마법사 협회 세 개 중 두 개가 손에 들어왔기에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셴의 일은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더 빨리 보고해야 했는데 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헤일리스는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많이… 당황하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보였어?"
하벨이 오히려 여유롭게 묻자 헤일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도련님의 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헤일리스의 입가에도 자랑스러움이 그려졌다.
하벨이 시렌의 세뇌에 당했다고, 셴이 멋대로 착각한 사실을 하벨은 바로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마법사의 탑을 부숴주셔서……."
이런 말까지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헤일리스는 마법사의 탑이 무너진 순간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부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일리스는 잠깐 울컥했다.
꼭 시렌의 망령에서 벗어나는 것만 같았으니.
―시렌의 손길이 닿은 이 더러운 곳이 사라지고 하늘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도련님.
헤레스 역시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쪼개버렸는데 이렇게 좋아해 주니 더 힘이 났다.
"그럼 다음에는 더 가까이서 볼래?"
하여 하벨은 헤일리스에게 물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이제 하나 남았잖아. 이건 가까이서 봐야지. 탑이 부서지고, 하늘이 열릴 때 말이야, 진짜 예뻐."
[맞아! 이 몸도 입을 벌리고 봤어!]
아라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꼭… 보고 싶습니다."
헤일리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깜짝 놀랐다.
시렌이 저질렀던 일들을 다 없앤 뒤 죽겠다는 말을 뒤엎는 것 같지 않은가.
"기대 돼?"
하벨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기대… 됩니다."
"다행이다."
하벨은 의문스러운 말을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무엇이 다행이란 말일까.
꼭 다시 살아보자는 제안처럼 들려와 헤일리스는 궁금해하면서도 무서워 함부로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만 헤레스 씨를 도와주러 가겠습니다."
"그래. 헤레스한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헤일리스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카샬이 입을 털었다.
"헤레스 씨라면 오히려 도련님께 다가와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줄 겁니다."
"에이, 그냥 응원한 건데?"
"다르게 들립니다."
"오미너스의 해결법을 찾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헤레스는 너처럼 그렇게 배배 꼬이지 않아서 아니꼽게 듣진 않는다고."
"이제 누워서 눈 좀 감으십시오. 아무래도 레디나가 도중에 딴 길로 샜나 봅니다. 그게 아니면 디저트를 만들어오는 게 아닐 정도로 오래 걸리네요."
카샬은 하벨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시계를 꺼내 바라보았다.
헤일리스와 이야기를 할 동안 레디나가 올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너도 나가서 구경하고 싶으면 가도 돼. 나도 궁금한데, 이렇게 얌전히 있잖아."
"아뇨. 제가 그렇게 순진한 줄 아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아라도 있고 용용이도 있는데?"
"도련님께서 혀를 부드럽게 굴려주시면 금방 좋다고 도련님을 따라갈 겁니다. 그러니 절대 안 됩니다."
"빡빡하네."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뭐, 좋아."
하벨은 이불을 두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셴이 올 때가 다 되었으니까.
"일단 그것부터 말씀해주세요."
"어떤 거 말이야?"
"오미너스 말입니다."
"그것보다 아버지께 보고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니면 내가 하고."
"…하."
카샬은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원칙적으로 이게 맞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티에라 가문에서도 대비해야 하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카샬은 방을 나서기 전에 일단 가기 전에 칼리우스를 불렀다.
"칼리우스."
"응, 선배."
칼리우스가 해맑게 대답했다.
몸은 컸지만,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칼리우스말고 누가 있을까.
"누가 오거든, 함부로 방으로 들이지 마. 어떻게 하는지 알지?"
"누구인지 물어야 해. 이게 먼저니까."
"그래. 그걸 묻고 판단하기 어렵다면 도련님한테 물어봐. 혹 도련님께서 너 몰래 슬쩍 일어나시거든. 마법으로 눌러버려."
"그러면 도련님이 아프……. 아, 선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어. 좋아! 도련님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을게."
"좋아. 바로 그 태도야. 너도 훌륭한 집사가 되어야지."
"응! 나도 집사가 돼서 도련님을 모실 거야."
"…잠깐만?"
하벨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당최 이게 무슨 소리인지. 용이 집사라니.
"그럼,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카샬은 파문을 일으킨 후에 슬쩍 밖으로 나갔다.
하벨은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요, 용용아? 그거 진짜야?"
"그거? 어, 집사가 되고 싶은 거?"
"맞아. 진짜 집사가 되고 싶은 거야?"
"응. 사실 도련님처럼 되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 그러니까 선배처럼 멋진 집사가 돼서 옆에서 보고 배우면서 도련님처럼 될 거야."
"왜… 그러는 거야?"
활짝 웃던 칼리우스가 하벨이 꺼낸 말에 촛농이 녹아내리듯 천천히 웃음기가 지워졌다.
처음으로 하벨이 자신의 말에 부정하는 것만 같았기에 칼리우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어엇, 대장. 용용이가 집사가 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거야?]
아라가 놀라며 하벨의 얼굴을 잡았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용용이는 용이잖아."
세상의 유일한 용이자 수호자가 아닌가.
"나는 훌륭한 집사가 될 거야."
칼리우스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수호자는?"
"부업으로 하는 거지."
"부업?"
그 소리는 어디에서 들은 건지 몰라도 하벨은 웃음이 났다.
"그래.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해봐. 카샬은 너한테 잘 알려줄 거고."
"도련님은 내가 집사가 되는 게 싫어?"
"아니. 굳이 말하자면……. 음."
하벨은 이런 말을 꺼내도 될지 말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처럼 되지 말라고."
"싫어!"
[싫어!]
칼리우스와 아라가 동시에 말을 꺼내자 하벨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싫다고? 어, 있잖아. 나는… 음, 이미 실패한 삶을 살았어. 그러니까 나처럼 되지 말라는 말은……."
아라가 앞발로 하벨의 입을 막았다.
[이 몸은 대장처럼 따뜻한 왕이 될 거야. 언제든 용기 있게, 강한 대장의 모습을 이 몸은 닮고 싶은 거야. 이 몸한테 실패할 수 있다고 말한 건 대장이었잖아?]
아라는 화가 났는지 아랫입술을 올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어.'
하벨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나도 이제 도련님이 이제 용이 아니라는 건 알아."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같은 '용'이 들어간다고 해서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건 하벨의 진짜 힘을 느낄 때 알았고, 카르밀에게 몇 번이나 들어서야 인정했다.
"하지만 도련님은 내 가족이야. 가족을… 닮고 싶은 건 당연한 건데. 도련님이 그렇게 말하면 이건 나도 화가 난단 말이야. 나는 도련님이 좋은 거지 실패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아."
칼리우스 역시 이미 화가 났다는 사실을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다.
'어…….'
하벨은 밀려드는 감정에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실패의 기록이 너무도 크게 남아 아라와 용용이만큼은 자신을 닮지 않았으면 했다.
단지 그뿐이라 생각했지만, 저들에게는 아니었다.
사실 바안 역시 자신의 일부분을 닮아가지 않았던가.
알면서도 쭉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실패라는 건 수치상의 결과일 뿐, 자신을 나타내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라와 칼리우스를 보면 알지 않은가.
자신이 모르는, 어여쁜 부분을 바라봐주었고, 이렇게나 좋아해 주는데 왜 그렇게 말해버렸을까.
"미안해. 내가 나쁜 말을 했네."
하벨은 저들에게 사과했다.
저들이 자신을 닮고자 한 부분은 결코 실패의 부분이 아니었다.
아니, 그 부분을 만약 닮아가도 자신이 바로 잡아주면 그뿐이 아닌가.
"나를 닮아도 돼. 얼마든지."
자신 역시 아라와 용용이를 닮아갈 테니까.
아라와 용용이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하벨 역시 환하게 웃던 그때, 눈치도 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하. 셴 놈이 왔네."
지금 분위기가 훈훈하니 딱 좋았는데.
하벨은 셴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한테 전해줘야 할 게 있어서 왔으니까 문 열어줘."
레바놈과 이곳 마법사 협회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 좋은 기회가 아닌가.
'에른스트. 네놈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