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05화 (305/415)

305화. 부서트리고, 부러트리고

* * *

피의 연회 때 세렌이 실체화를 한 이후 아라도 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세렌을 조르고, 같이 시도해보기도 했다.

―실체화하려면 오랜 교감이 필요해. 나는 룬델이 정말……. 룬델 없는 거 맞지? 어쨌든, 룬델이 조, 조, 좋으니까. 그래서 나는… 에잇, 됐어! 더는 말 안 해!

그때마다 세렌은 부끄러움에 말을 하다가 말고 자리를 박차곤 해 좀처럼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간신히 세렌의 말을 들어본 뒤에 실체화를 시도해봐도 되지 않았다.

아라가 얼마나 좌절했는지 그 뒤로 말도 꺼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라는 이제 단지 정령이 아니었다.

무려 정령왕이지 않은가.

"무조건 해보자!"

그렇기에 하벨은 아라가 다시 제안해주어 정말 기뻤다.

[헤헤헤. 이 몸은 지금 엄청 기뻐.]

아라의 눈이 휘었다.

아라는 바로 하벨에게 매달렸다.

"자, 잠시만요."

카샬이 하벨을 말렸다.

"실체화라뇨?"

"자자, 진정해 카샬."

하벨은 씩 웃고는 당당히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정령사인 걸 잊었어? 너도 아코하고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미리 해보는 거지."

[그럼, 나도 봐야겠네. 나도 카샬하고 실체화를 하고 싶으니까.]

아코가 검에서 슬쩍 나와서 카샬에게 매달렸다.

기뻐하는 아코와 달리 카샬은 여전히 의문을 담아 물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습니까, 도련님."

"아닌데? 내가 계속 부수겠다고 말했잖아? 게다가 봐봐. 내가 이제 막 마법사 협회에 왔는데 마법사의 탑이 부서져 봐. 제정신이 박혔다면 내가 마법사들을 뚫고 탑을 부쉈다고 생각하겠어?"

하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니면 마법을 개발하던 중 거대한 실패가 벌어져 마법사의 탑이 부서졌다고 생각하겠어?"

"하지만 후자 역시 조금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카샬이 조금 더 신중히 다가가자 하벨은 한 가지 가설을 덧붙였다.

"그러던 중 오미너스와 얽힌 사건이 드러난다면."

하벨의 시선이 헤레스를 향했다.

그녀는 무언가 이끌리듯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 협회가… 오미너스를 실험하다가 마법사의 탑이 부서졌고, 도련님께서는 그저 휘말리셨다. …이렇게 될 게 뻔하겠네요?"

헤레스는 대답하며 의문으로 물들어갔다.

"맞아. 정확했어, 헤레스."

하벨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그럼, 제가 해야 하는 건 간단하네요."

레디나가 손을 흔들었다.

"협회장이 도망치지 않게 막으면 되는 거죠? 목숨만 뺏지 않으면 되는 거 맞죠?"

키득거리는 레디나의 소리에 엘라힘과 여하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평소와 같은 웃음이나 다르게 들려왔다.

"…저는 미흡하나, 만약에 탑이 정말 잘렸을 시 바다 쪽으로 밀도록 하겠습니다."

헤레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벨이 쓰러질 상황에 무조건 대비하지 않아도 엘라힘이 있지 않은가.

"카샬과 여하는 날 지켜줘."

하벨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그대만 지키면 되는 것이오?"

엘라힘과 대화가 끝이 나자 여하가 밀려오는 궁금증에 질문을 던졌다.

"맞아. 그냥 날 지켜. 혹시 마법에 약하거나 그래?"

"괜찮소. 마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말이오."

"그럼, 잘됐네."

하벨은 카샬의 한숨을 들으며 조금 전부터 자신을 빤히 보는 엘라힘을 쳐다보았다.

"저는 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엘라힘이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고 듣는 어떤 것도 입 밖으로 언급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내가 신관님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하벨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 속은 혼란스럽더라도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고마워요."

하벨은 씩 웃고는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용용아. 여기에 분명히 서류들이 모인 중요한 장소가 있을 거야. 그렇지?"

그간 마법사들이 열심히 모은 거라 바다에 빠트리기에는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자신이 가져가야 했다.

처리하든 말든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 할 문제였고.

"응응. 여기 아래에 있어."

칼리우스가 아래를 가리키자 하벨은 눈에 잠깐 반짝거림이 깃들었다.

아주 술술 풀리지 않는가.

"위에 사람은 있어?"

"음……."

칼리우스가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있어! 그런데 몇 명 없어. 다 아래쪽에 많아."

"그럼, 용용아. 네가 마나를 이용해서 위에 있는 자들을 아래로 보낼 수 있어?"

마법사의 탑을 부수러 왔지, 사람을 죽이러 온 게 아니었다.

"응. 물론이야! 내가 할 수 있어. 이제 이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칼리우스는 힘차게 말했고, 하벨 역시 활짝 웃었다.

"그럼, 내려왔다면 그렇다고 말해줘."

"응. 알았어, 도련님."

대답 끝에 칼리우스는 잠깐 눈을 감았고, 하벨은 짧게 심호흡했다.

상처 난 영혼이 살짝 복구되면서 영혼에 각인된 힘이 돌아왔다.

에른스트의 저주가 여전히 작동하지만, 아라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았던가.

"아라야. 이제 됐어. 설명해줘."

하벨의 재촉에 아라는 꼬리를 흔들며 말을 꺼냈다.

[실체화는 있지, 이 몸과 대장의 영혼이 서로 같은 파동을 맞추는 거야. 사실 이 몸은 파동이라는 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같은 음을 내면 되는 거래.]

아라는 어려운 용어에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데 이건 대장하고 이 몸하고는 아주 쉽게 될 거야! 왜냐하면 이 몸은 대장의 손에서 컸으니까!]

아라가 실실 웃으며 정령수를 밀어 넣었다.

"…정령수잖아?"

[응. 이건 정령수야. 정령사와 정령을 이어주는 유일한 물이구.]

하지만 하벨은 곧 생각을 달리했다.

원래 정령수가 물이 밀려오는 기분이라면 이건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몸이 만든 물까지 줄 거야. 놀라면 안 돼!]

순환의 길 밖에 아라가 만든 물이 천천히 감싸졌다.

순환의 길 내부는 정령수로, 순환의 길 밖에는 아라가 만든 물이 흘렀다.

[이걸 왜 해야 하냐면, 으음, 정령들이 힘을 쓰면 점점 자연에 가까워지잖아? 그걸 막기 위해서 정령사와 교감이 필요해!]

정령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아라가 꺼내니 새롭다 싶었다.

[순환의 길에 찬 정령수와 순환의 길 밖에 있는 이 몸의 물이 교감이랑 비슷한 역할을 거래.]

아라는 눈을 찡그렸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이걸 말하고자 하니 너무 어려웠다.

[그러니까, 엄, 대장이 가진 순환의 길에 차오른 정령수를 다시 이 몸한테 맞춰서 주려면 순환의 길 밖에 흐르는 이 몸의 물이 필요한 거야. 그 정령수가 바로 이 몸이 실체화할 힘이래!]

"그러니까, 네가 실체화하려면 내 순환의 길에 차오른 정령수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하벨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정령이 준 정령수와 정령사가 가진 순환의 길에 차오른 정령수는 본질은 다르지 않지만, 성질은 달랐다.

정령이 준 정령수라 할지라도 정령사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곧 교감을 넘어 정령을 실체화하게 하는 힘이었다니.

[맞아! 이제 이 몸이 대장이 가진 순환의 길 밖에 두른 물을 빙그르르 움직일 건데, 이건 이 몸과 영혼의 파장을 맞추는 거야. 갑자기 소리가 들릴지도 몰라.]

아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환의 길 밖에 물이 빙그르르 돌았다.

하벨의 눈동자에 연기처럼 옅은 물살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통. 통. 통.

갑자기 순환의 길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오자 하벨은 눈을 크게 떴다.

선명한 북소리처럼 들려오지 않는가.

[들려, 대장?]

"들려. 이게… 네가 말한 소리라는 거야?"

[응! 이 몸의 영혼하고, 대장의 영혼이 공명하고 있어.]

"하지만 아라야. 나는……."

하벨은 말을 삼켰다.

자신의 영혼은 불안정했다. 과연 이 박자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몰랐다.

[이제 이 몸이 대장의 정령수를 받으면 이 몸은 대장이 가진 가장 친화력에 의존해 이 몸이 '뿅'하고 나타날 거야. 영혼이 이어졌으니까!]

아라는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최대한 이해한 만큼 설명했다.

하벨은 불안했기에 잠깐 말을 아꼈다.

[원래 이 몸하고 대장하고 실체화할 교감이 조금 부족하긴 한데, 이 몸은 정령왕이구, 대장은 물 친화력이 너무너무 높아서 되는 거야! 원래는 어려운 게 맞구, 세렌에 대단한 거였어!]

아라의 흔들리는 꼬리가 하벨의 목덜미에 닿았다.

통. 통. 통.

박자가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 하벨은 자신의 영혼과 아라의 영혼이 이어진 어떤 선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순환의 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가지고 있는 정령수가 단번에 증발이 되듯 아라에게 향하고 있다는 게 선명하게 감지됐다.

통. 토, 통. 통.

이대로 순탄하게 흐르나 싶던 순간, 아니나 다를까, 박자가 달라졌다.

아라가 깜짝 놀라는 게 앞발을 통해 느껴졌다.

하벨은 멋대로 흐트러지려는 정령수를 붙잡고자 용왕의 힘을 사용했다.

"용용아."

눈동자가 파랗게 빛이 나자 칼리우스가 바로 눈을 뜨며 반응했다.

"으, 응!"

칼리우스는 하벨과 어딘가로 이어지는 얇은 실을 보았다.

실을 자르기 전에 칼리우스는 문득 밀려오는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헤레스, 있잖아."

"네, 칼리우스 님."

"혹시 이 실 보여?"

"실… 이요?"

칼리우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곳을 쳐다봤지만, 헤레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뭔가 있습니까?"

"도련님이 힘을 사용하면 에른스트로 향하는 실이 보여. 그래서 너무너무 싫어."

용인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실일지도 모를 만큼 칼리우스는 저 얇은 마나의 실이 아주 얄미웠다.

서걱.

칼리우스는 분노를 담아 바로 잘라버렸다.

"됐어, 도련님!"

하벨은 저주가 발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마자 정령수가 원래 가고자 한 방향인 아라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우, 우와아앗!]

아라는 갑자기 밀려드는 정령수를 느꼈다.

너무나도 이상했다.

[대, 대장!]

아라는 하벨을 느꼈다.

쿵쿵.

하벨의 심장 소리.

설레고 있는 하벨의 감정.

끝을 알 수 없는 검정으로 가득 칠해진 하벨의 저주.

영혼이 부족해 육체가 갉아 먹히는 소리.

그 모든 게 스며들었다.

그 순간, 아라는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시선의 높이가 달라졌고, 하벨이, 칼리우스가, 카샬이 너무도 작게 보였다.

"우와! 아라야! 아라야!"

칼리우스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 아라 님?"

레디나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물었다.

정확히 자신을 보자 아라는 배시시 웃었다.

[레디나!]

"아… 라 님이라고요?"

헤레스 역시 넋을 잃으며 아라를 바라보았다.

성인 두 명을 합친 만큼 큰데도 이상하게도 작고 아담하게 느껴지는 북극여우가 공중에 손 한 뼘 만큼을 남기고 둥둥 떠 있지 않은가.

저 푸른 리본이야말로 아라가 편지로, 마법 타자기로 때때로 자랑하던 리본이라는 걸 헤레스는 단번에 알아버렸다.

[헤레스!]

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어쩜, 어쩜 왜 이렇게 귀여우세요!"

레디나는 당장 아라에게 달려들려다 그대로 멈췄다.

"아, 아라 님을 만져도 되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도련……."

"푸하하핫!"

하벨이 갑자기 웃었다.

"그렇게 웃으시면 아프……."

헤레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벨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실체화했지만, 아라는 세렌과 전혀 다른 모습이질 않던가.

그냥 아라 평소 모습 그대로 거대화만 일어났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만져도 돼. 괜찮아."

하벨이 직접 아라에게 달려들었다.

"봐, 괜찮지? 얼른 만져 봐봐. 진짜 부드럽다고."

제일 먼저 카샬이 다가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우르르 아라에게 달려들었고, 엘라힘하고 여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쉿."

하벨은 여하와 엘라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뒀고, 곧 그들을 재촉했다.

"이런 기회는 잘 없어. 궁금하면 만져봐도 돼."

묻지 말고 그저 만져보라는 말에 그제야 여하가 먼저 발걸음을 뗐고, 엘라힘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라를 바라보다 천천히 걸어가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정령님이다.'

엘라힘은 하벨의 정체가 무엇인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에르티안 왕국에서 확인했던 물 마법사라는 호칭은 그냥 얻은 게 아니었으니.

"도련님. 이제 됐어! 마법사들이 움직였어."

칼리우스의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자자, 이제 여기서 끝."

하벨은 아라의 몸에 흐르는 자신의 정령수가 너무도 빨리 사라지는 걸 느끼며 그들을 말렸다.

아쉬워해도 어쩔 수 없었다. 다들 한 번씩 만지지 않았는가.

"이제 잘 봐."

[이 몸은 준비됐어.]

하벨이 물을 일으키자 용왕의 힘과 동시에 정령의 힘이 일어났다.

정령이 가진 힘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지만, 하벨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벨의 손에 물로 된 검이 나타났다.

"다들 휩쓸리지 않게 조심해. 헤레스와 용용이는 준비해주고."

검이 순식간에 앞으로 길게 뻗어갔다.

콱!

반대편 벽을 뚫어서야 하벨은 몸을 반대로 돌려서 다시 검을 쥐었다.

"가자, 아라야."

하벨은 아라를 다독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응!]

무겁던 물의 무게가 아라의 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우리가 도와줄게요, 용왕님!

물이 즐거워하며 날을 더 두껍게 만들었다.

하벨은 고개를 올려 탑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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