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03화 (303/415)

303화. 좋은 날(2)

* * *

마법사의 탑을 바라보는 하벨의 눈빛은 탐스러웠다.

어떻게 부서야 할지 이리저리 재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몸은 마법사의 탑이 부서지기 좋은 날이라는 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날씨는 좋아! 비가 당분간 내리지 않구!]

아라가 하늘로 앞발을 높이 펼치자 리본이 흔들렸다.

"그럼 헤레스. 너도 마법사의 탑이 부서지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해?"

하벨의 시선이 헤레스를 향했다. 그녀의 어깨가 흔들리고 시선마저 흔들렸다.

"…으음. 저는 적어도 도련님께서 침대에 있기에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기어코 하벨은 마법사의 탑을 부수러 마법사 협회로 향했고 도중에 마법사의 탑이 잘 보이는 곳에서 멈춰 지금 이렇게 감상하고 있었다.

헤레스는 하벨의 표정을 한 번 살피며 망설이고 망설이다 자신 역시 마법사의 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심 기대는 돼요."

이 또한 진심이었기에 그녀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어제 연락용 아이템을 통해 헤일리스에게 들었던 짧은 말이 문득 귀에 닿았다.

―…예상하셨겠지만, 여기에도 시렌의 의지가 닿았습니다. 시렌의 망령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당신과 저를, 그리고 수많은 마법사를 망쳤던 시렌이 말입니다. …하. 죄송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꺼낸 헤일리스의 말에 헤레스 역시 공감했다.

이러니 저 마법사의 탑이 곱게 보일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대장. 대장은 진짜 저 탑을 반으로 부서트릴 거야?]

아라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었다.

몇 번이나 하벨한테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반으로 쪼갤 수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마법사의 탑은 크고 넓었다.

"물론이지. 이걸 위해서 코스모피안 왕국에 왔는데?"

"말씀은 정확히 하셔야죠, 도련님."

카샬은 뒤쪽에 서 있는 기사들을 의식하다 칼리우스가 싱긋 웃자 이미 마법을 시전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진짜 맞는데? 일단 내 영혼을 얻었으니까 가장 큰 목적은 달성됐잖아?"

하벨은 손가락을 하나 펼쳐 으쓱거렸지만, 뭔가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에이, 괜찮아. 처음이 충격적인데 두 번째는……."

하벨은 말을 하다 말고 삼켰다.

괜찮다는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잘린 머리와 잘린 팔이 생각이 났기에 말을 돌려야 했다.

"레디나. 그란덴한테는 아직 소식이 없지?"

"네. 아직 연락이 오진 않았어요. 저도 기다리는 중인데, 혹시 검은 달까지 처리하려고요?"

레디나는 말을 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리라고 말하면 그렇긴 한데, 머리부터 없애게."

"머리를 어떻게 없애신다는 거예요?"

레디나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내가 이제 영혼을 얻어서 힘을 좀 쓸 수 있거든."

"안 됩니다."

카샬이 바로 하벨을 말렸다.

"아니, 카샬. 내 말 좀 들어봐봐."

[이 몸도 카샬이랑 생각이 같아!]

"나도 그래, 도련님. 도련님이 힘을 쓰면 아픈 걸 알잖아?"

아라와 칼리우스까지 이어지자 하벨은 그들을 진정시켰다.

"아니,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줘. 이게 평소와 다르다니까?"

"쓰러지지 않으시고,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저 역시 순순히 도련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말해볼 테면 해봐라.

여전히 눈을 감고 있어도 카샬의 단호함이 눈에 보였다.

"그건… 장담 못 해."

하벨이 우물쭈물하자 카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이상 부상을 늘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봐봐."

하벨은 등을 돌려 마차에서 앉아 있는 엘라힘을 가리켰다.

"든든한 지원군도 있는데?"

얼른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벨 공. 솔직히 마법사의 탑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마치 신을 향해 위협을 가하는 것 같아서요.

엘라힘은 그 이유로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거랑은 별개입니다. 고집부리지 마시죠, 도련님."

카샬이 이 또한 부정하자 하벨은 이어 자신을 가리켰다.

"일단 허락은 받았어."

마법사의 탑을 부서트리는 일은 이미 코스모피안 왕국의 왕인 드란트와 합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검은 달 일은 별개였다.

이는 코스모피안 왕국이 도와줘봤자 얻을 이점도 없기에 차라리 레놀드 왕국을 상대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게 나았다.

"게다가 나는 공식적으로 마법사 협회로 가는 중이니까 내가 검은 달에게 어떤 일을 벌여도 내가 했다는 걸 숨길 좋은 기회이기도 하잖아?"

하벨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가득 묻어날수록 카샬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짙어져 갔다.

"내가 검은 달을 건드려서 바로 이 사태를 끝낼 수 있지 않지만, 장담하건대 검은 달은 분명 겁을 먹을 거야. 어때? 내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궁금하지?"

하벨이 장난기를 가득 담아 웃자 아라는 주변 눈치를 보더니 앞발을 슬쩍 올렸다.

[이 몸은 엄청, 엄청 궁금해!]

아라가 처음 시작을 끊자, 칼리우스 역시 슬쩍 하벨에게 한 발 내밀었다.

"나도… 너무 궁금한데. 그런데 도련님이 걱정되는데."

칼리우스는 발을 뒤로 뺐다.

"그런데… 너무 궁금한데."

뺐던 발을 다시 내밀었다.

"아라와 용용이 너희의 도움을 받으면 지부장들을 암살할 수 있을 거야."

하벨한테서 '암살'이라는 말이 나오자 아라와 칼리우스는 얼른 손을 내렸다.

"피는… 저희가 묻히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카샬이 불만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건 내가 해야 해. 물로 적을 암살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을걸? 마침 오랜만에 힘을 써보는 셈이라 재활 훈련도 필요하고."

저번에 아라의 도움을 받았을 때, 멀쩡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번에는 더 큰 힘이 필요할 테니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하벨은 하고 싶었다.

힘이 돌아왔음을 체감해보고 싶었다.

[어음, 그, 검은 달의 위치 파악이라면 이 몸도 계속하고 있어. 아직 서툴러서 느리지만, 계속 연습하고 있어. 그러니까 대장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라는 꼬리를 쥐어서는 꼼지락거렸다.

"아라 너는 아직 힘을 다 받은 상태가 아니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사실 아라 네 덕에 이곳에 있는 지부의 위치도 파악하고 있잖아?"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었다.

마냥 그란덴만 기다리며 손가락을 빨고 있는 건 아니었다.

푸렐 텔르나의 정보를 얻음과 동시에 페트리오는 그 인원을 돌려 검은 달을 추격했다.

또한, 아라의 지시에 따라 정령들이 코스모피안 왕국에 퍼져 검은 달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손에 들어온 정보와 클로저들을 이용해 단숨에 검은 달의 모가지를 비틀 때가 아닌가.

"어쨌든, 위치를 전부 파악하려면 그란덴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고."

하벨은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어때, 레디나? 제법 괜찮지 않아?"

"저는 아직 괜찮을지 아닐지 모르겠어요. 머릿속으로는 상상이 가는데 그게 이뤄진다면 진짜 멋지긴 할 텐데, 음, 지금은 모르겠어요."

레디나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만약 정말로 하벨이 바라는 대로 된다면 지부장들이 동시에 죽는 게 아닌가.

검은 달 내부에 일어날 혼란은 얼마나 클까.

레디나의 시선이 슬쩍 헤레스를 향했다.

갈등하는지 헤레스 역시 안경테를 올린 상태로 괜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어디까지 계획일 뿐이지. 지금은 저게 먼저니까."

하벨은 마법사의 탑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 * *

"…도련님."

마차에 내리기 전에 카샬이 하벨을 붙잡았다.

"왜?"

"마법사의 탑을 부수겠다는 말씀은 계속 들었지만, 마법사의 탑으로 가셔서 어떻게 하겠다는 방법은 듣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하벨이 설명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편안하게 낮잠을 청하지 않았던가.

하벨은 슬그머니 칼리우스를 보았다.

아라의 시선 속에도 칼리우스가 있었다.

두 시선을 받은 칼리우스가 활짝 웃었다.

―도련님.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가기 전 칼리우스가 하벨 자신을 찾아왔다.

―마법사의 탑과 관련된 일로 이렇게 왔어. 혹시, 아라는 자?

그 사실에 무척 놀랐지만, 이런 중요한 일로 칼리우스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고마워 한없이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는 마법사 협회로 가기로 했잖아?

처음에 우물쭈물하던 칼리우스는 곧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눈빛을 달리하며 자신을 보았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내가 도련님이 자유로울 수 있게 할게. 뭐든 신경 쓰지 않게. 나만 믿어, 도련님. 나는 이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으니까.

'믿어달라고 그랬으니 믿어야지.'

하벨은 활짝 웃는 칼리우스를 따라 웃었다.

"…예?"

카샬의 눈썹이 올라갔다.

"저는 전혀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괜찮아. 마법사 협회로 향하는 길은 용용이가 뚫어줄 테니까."

"맞아. 이번 일은 나만 믿어."

마법사의 탑을 바라보는 칼리우스의 눈동자는 유난히 더 붉게 타올랐다.

본능적으로 마나가 느껴졌다.

마법사 협회에 흐르는 아주 짙고, 짙은 마나가 자신을 환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우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렇지. 용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나의 축복을 받은 자이니 무엇이 두려울까. 다만, 네가 그 힘을 하벨 티에라를 위해 쓰니, 씁…….

카르밀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내가 무어라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용은 마법사를 지배할 위대한 이름이라는 걸.

칼리우스는 카르밀의 말과 자신을 환영하는 마나의 모습에 행복함을 느꼈다.

"…뭐야. 하벨 티에라가 아닌데?"

"하벨 티에라는 푸른빛이 도는 은발인데 쟤는 검은 머리카락이잖아."

하벨을 기대했던 마법사들은 칼리우스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지만, 곧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이상하게 눈길이 가지 않은가.

게다가 마나가 요동치고 있어 이상했다.

마법사들이 낯선 감각에 웅성거릴 때쯤, 카샬의 도움을 받아 하벨이 마차에서 내렸다.

소란이 잠잠해졌다.

자신의 등장에 마법사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대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염탐하는 시선으로 관찰했다.

'나한테 뭐가 느껴지려나.'

하벨은 마법사들이 실망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무대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마법사들이 더 많이 모였으면 했는데.'

살짝 아쉬워하며 하벨의 시선이 움직였다.

에르티안에 있는 마법사 협회와 달랐다. 자신을 향한 선망은 볼 수 없었다.

그들 속,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들과 헤일리스를 보았다.

비록 비공개지만, 교류라는 목적으로 이곳 마법사 협회에 왔음에도 배척을 받고 있는지 뒤에 서 있질 않은가.

'역시 이곳 협회장은 헤일리스를 협회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적어도 헤일리스는 공개적으로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이었다.

―…헤일리스 씨가 분명 정체를 밝혔음에도 이곳 협회장을 만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뭘 의미하는지 뻔하죠?

하벨은 헤레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비로소 확신했다.

이곳 협회장은 시렌을 알고 있다는 걸.

'아주 흥미롭네.'

하벨의 눈동자에 즐거움이 어렸다.

"안녕하십니까."

누군가 걸어오며 하벨에게 인사했다.

마법사의 얼굴에 반점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이름을 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반갑습니다."

하벨은 이를 모르는 척하며 가볍게 인사했다.

"모두 물 마법사이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죠."

마법사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 있지 않았다. 하벨은 혹시나 해 물었다.

"협회장은 오지 않았습니까?"

"협회장님께서는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법사는 시선을 돌려 하벨 뒤에 있는 정령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기사님들은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왜요?"

하벨은 다 알면서 물어보았다.

―그래도 헤일리스 씨가 부정한 것들은 대부분 없앴다고 했어요. 솔직히 이걸 의식하지 않으면 확인할 길도 없으니 대충 부정한 것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몄다고도 말했고요.

이곳 마법사 협회에 부정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은 헤레스의 보고가 없었어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다만, 조금 의문스러운 사실이 있었다.

시렌이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를 지배했던 힘은 '세뇌'였다.

그렇다면 이번에 협회장이 가진 힘은 대체 무엇일까.

"이곳은 마법사 협회입니다. 마법사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죠."

마법사는 당당히 말했고, 하벨은 슬쩍 찔렀다.

"그렇다면 내 사람들은 데리고 들어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아뇨. 기사님들까지입니다."

명확하게 선이 갈린 마법사의 말에 하벨은 새어 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삼켰다.

그냥 대놓고 '부정한 것들을 들킬까, 정령과 함께 하는 정령 기사들은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나를 누가 지킵니까?"

하벨이 묻자 마법사는 불쾌감을 보였다.

"우리가 지킵니다. 당신은 우리의 소중한 분이니까요."

탐욕이 엿보였다.

시렌이 자신을 볼 때 보였던 그 탐욕이.

하벨은 장난기가 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

그 눈빛에 하벨은 대충 예상했다.

'내가 세뇌에 걸렸다고 생각하는구나.'

오미너스의 완성을 위해 자신에게 강한 집착을 보였던 시렌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헤일리스를 향한 대우도 당연하며 지금 터무니없는 이 요구를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

'좋다.'

하벨은 기꺼이 이 착각 속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아주 재미있을 테니까.

"좋습니다. 물리지요."

하벨의 말과 함께 마법사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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