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내가 줬으면 너도 줘야지
* * *
가장 먼저 내린 이는 집사로 보였다.
"…진짜 집사 맞아? 기사 아니야?"
안대를 착용한 기사가 옆에 수염이 난 기사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그만큼 집사의 생김새부터 귀티가 났고, 몸이나 걸음걸이에서 묻어나는 검의 흔적이 엿보여 범상치 않았다.
기사들은 이어 내리는 여성을 보며 저절로 입을 벌렸다.
아마도 넬시아 티에라일 테지.
'어떻게 저렇게…….'
하지만 기사들은 곧 살벌한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뭘 쳐다봐.
뒤이어 내린 남자가 시비를 걸듯 사나운 눈빛을 짓자 주변에 있는 공기가 어쩐지 따갑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방금 내린 여성과 무척 닮아있기에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둘째인 라르웬 티에라로 보였다.
"라르웬. 괜히 기사들한테 시비 걸지 말자. 내가 어제 서류 검토를 토가 나올 정도로 해서 그런가, 이젠 이런 행동도 서류 몇 장인지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나오네. 아니다, 우리 라르웬한테 맡기면 잘하겠지?"
가볍지만, 경고가 담긴 넬시아의 말에 라르웬은 당장 입을 다물었다.
어제 클로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진 사이에 넬시아가 서류 더미에 묻혀 있는 걸 보지 않았던가.
기사들은 둘이 무어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아도 사이가 좋은 건 확실해 보였다.
집사가 이전과 달리 마차를 향해 양손을 뻗자 기사들은 눈빛을 달리했다.
넬시아와 라르웬이 내렸다면 이제 누가 내릴 차례겠는가.
하벨 티에라.
소문의 바로 그 물 마법사였다.
밖으로 다리가 뻗어오기 무섭게 집사가 하벨을 번쩍 들고 땅으로 내렸다.
집사의 몸에 가려졌지만, 하벨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보였다.
아무래도 저번에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에 휘말려 크게 다쳤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카샬?"
하벨은 루룸과 아라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무리하면 안 되잖습니까."
카샬 역시 활짝 웃었다.
"아주 고맙다. 벌써 날 보는 시선에 묘한 동정심도 섞여 있고?"
"제가 도련님의 바람을 벌써 이뤄드렸습니까? 자랑스럽네요."
이곳에 오기 전 하벨은 마차 안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아프다는 걸 믿게 할 좋은 방법을 생각해봤는데요. 쓰러지는 거랑 내 힘을 써서 코피 흘리는 거랑 힘을 더 많이 써서 피를 토하는 것 중에 골라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하길래 참을 수가 없었다.
당최 왜 멀쩡한 방법은 생각도 안 하는 건지.
"이거 헤레스가 시킨 거야?"
"아뇨. 마차가 좀 높잖습니까. 아프시면 안 되잖습니까."
카샬은 웃음을 참으며 하벨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뒤로 물러났다.
"너……."
하벨은 입을 꽉 다물었다.
카샬에 가렸던 하벨의 모습이 드러나자 기사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고고함이 그냥 흘러넘쳐 사람이 맞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대열을 이탈하는 이가 생겨날 정도였다.
"지금 뭐 하는 건가?"
단장은 다급히 기사들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와. 이 소리 들려? 레디나가 뒤에서 아주 흡족하겠는데?"
라르웬이 하벨을 슬쩍 바라보며 낄낄 웃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오늘 주인공은 단연 하벨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엣헴.]
아라가 덩달아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동생이지만, 참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 진짜 최고네."
라르웬은 입에 가시가 돋는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예. 고맙네요."
하벨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오늘 좀 과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었기에 몰려오는 시선을 무시한 채 지팡이를 짊었다.
시선이야 익숙하지 않던가.
* * *
소곤소곤.
하벨은 걸을수록 밀려오는 이 소곤거림이 무척 신경 쓰였다.
한때 물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목소리에는 탐욕이 없었으니까.
하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회담 장소로 가는 도중이라 옆에 코스모피안 왕국의 왕실 기사들이 많았음에도 이 나라가 이상한 건지, 원래 그런 건지, 귀족들이 마치 같은 복도를 쓰는 척 따라왔다.
[으아아. 너무 시끄러워. 진짜, 짜증 나. 여기 가뜩이나 짓눌리는 기분 때문에 미치겠는데.]
루룸이 라르웬의 어깨에 기대어 입만 벙긋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곳은 마치 이전 에른스트 왕국과 비슷해 축 처졌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짜증이 난 건 하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마차에서 내려서부터 쫑알거리며 따라붙더니 설마하니 왕실 안까지 따라붙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에른스트 왕국이 하찮은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당장 저 쫑알거리는 입만 잘라버리면 어떨까 싶었다.
'…아.'
하벨은 곧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분명 기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말리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왕이 지시한 일이라는 거겠지?'
자신이 과한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그저 겉으로는 환대하되, 무시 받는다는 느낌을 주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 정도면 많이 봐주긴 했지.'
하벨은 자신의 주변을 스윽 살핀 뒤에야 먼저 나서 기사단장을 불렀다.
기사단장은 명백하게 들려오는 하벨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라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대들이 나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겠습니다."
하벨은 둘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신경 쓸 게 많았다.
코스모피안 왕국과 뒤에서 동맹을 맺었다고 하나 일반인이나 귀족이 아닌 무려 왕자가 적이 된 상황이기에 왕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하벨은 머릿속에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무시라뇨. 말씀을 왜 그렇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단장은 하벨의 항의에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귀가 먹었습니까?"
하벨은 날을 세우며 기사단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저 목소리가 안 들립니까?"
"저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죄송으로 끝날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그대의 일이지 않습니까?"
넬시아가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정식으로 '손님'으로 왔으니 응당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넬시아는 뒤를 쳐다보았다.
"눈이 있다면 보이시죠?"
기사들 뒤로 하벨을 보러 온 이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됐습니다, 누님. 지금까지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아하니 이곳 왕실 기사들의 입은 저들보다 못하나 봅니다."
하벨은 기사들을 도발하며 뒤를 돌아 자신들을 떠들고 씹는 저들을 바라보았다.
"다 큰 어른들이 내 꽁무니를 쫓아오며 이리저리 씹어대는 게 그리 재미있어요?"
하벨의 비웃음이 명백히 들려왔다.
수많은 사람 앞에도 주눅이 들지 않는 모습에 귀족들과 시종들의 눈빛이 차차 바뀌었다.
소문과 다르지 않은가.
"내가 신기한 건 나도 이해합니다.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내가 바로, 물 마법사니 말입니다."
물 마법사.
그 이름을 들먹이자 흥미로 가득하던 눈동자는 더욱 달궈졌다.
"당신들은 아마 내게 따로 만나자며 무수히 많은 초청장을 뿌리거나 직접 와 말하겠죠? 신기하고, 놀랍고, 어쩌면 이용하기 좋게 생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벨은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무시해도 된다는 전제가 깔린 이유가 하벨 티에라를 둘러싼 유약하고, 무능력하다는 소문과 에르티안 왕국이라는 약소국, 이 둘의 만남이겠지.
"하지만 나는 말이에요. 나를 무시하는 이들과 만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벨이 던진 말이 파문을 일으켰다.
여러 목소리로 가득하던 복도에 소리가 멈추자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예의도 없고, 저울질에 신이 나 돈놀음이나 하려는 네놈들한테 관심이 없다는 말이에요."
하벨이 하나하나 꺼낸 소리에 얼굴이 구겨지는 이들까지 있었다.
지금 몇 명이나 적을 만들었던가.
"내가 누구인지 잊었습니까? 아니면 내가 바보로 보입니까?"
하지만 하벨은 자신을 적으로 보든 말든 신경 쓰이지 않았다.
비록 약소국에 속해 있지만, 그건 지금 여기에서 필요 없는 배경이었으니.
"만만해 보였다고 한들, 내가 사절단의 대표이자 물 마법사이자, 하벨 티에라로 왔음을 잊으면 안 되지요."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가다 살짝 뒤틀렸다.
특히 '티에라'라는 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대들의 얼굴은 익히 잘 기억했습니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했어도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이 존재하며 쥐가 궁지에 몰리면 물 줄 안다는 것 역시 알아야지.
명백한 경고에 넋을 잃던 귀족 중 일부가 하벨을 붙잡으려 소리쳤다.
에르티안 왕국보다 티에라라는 이름이 더 무섭게 다가왔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하지만 하벨은 그들이 무어라 말하든 앞으로 걸어가 기사단장 옆에 섰다.
"무슨 일이 벌어져서도 놀라지 마세요. 다 그대가 감수해야 할 일일 테니까요."
* * *
회담 장소 앞에 멈춘 기사단장은 주변 기사들을 물리고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무례는 용서해주십시오."
"왜 갑자기 이러시죠? 하벨이 꺼낸 경고가 그리 무서웠습니까?"
넬시아는 기사단장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건 전하의 뜻이었습니다."
예상했고, 뻔한 대답에 하벨은 코스모피안의 왕이 어디까지 멀리 보는 사람인지를 알았다.
"어떤 뜻인데요?"
하지만 하벨은 빈정거렸다.
기사단장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상황이 펼쳐지든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내버려 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하. 이 정도 결례는 이미 예상했다는 거네요?"
떠보는 하벨의 말에도 기사단장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는 전하의 의도를 예측해서도 안 되고, 단언해서도 안 됩니다. 하여 제가 할 수 있는 건 조금 전 무례를 사과하는 일입니다."
"일단 알았습니다. 거짓으로 말할 리가 없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이제 와 이런 말씀을 꺼낸다는 게 무척 죄송하나, 저는 진심으로 물 마법사이신 하벨 티에라 공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고개를 올린 기사단장은 하벨은 존중을 담아 바라보았다.
거짓처럼 보이진 않았기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물러서자 라르웬은 콧바람을 깊게 내쉬었다.
"쓰레기 새끼들."
"잘 참았어."
넬시아가 라르웬을 토닥이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누님. 나 말고 언제 튀어나갈지 모르는 막내나 단속해야지, 왜 자꾸 나한테 그래? 방금도 봤잖아? 내가 하벨에 비하면 화도 잘 안 내고……."
[라르웬.]
루룸이 말을 끊었다.
[넌 진짜 거짓말쟁이야. 내가 머리카락 안 쥐었으면 출동했을 거잖아.]
"아니, 루룸. 이건 해야 하는 거지. 우리가 이런 거지 같은 취급을 받았는데. 이건 당연한 거야. 아무도 내 가족은 못 건드려."
라르웬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넬시아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라르웬. 오늘 왜 이렇게 기특할까?"
늘 무심하던 라르웬 입에서 저렇게 예쁜 말이 나오니 왜 기쁘지 않을까.
넬시아는 뒤를 돌아 멀찍이 서 있던 카샬, 레디나,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카샬이 걸어왔다. 하벨의 몸 상태를 들먹여 카샬만큼은 내부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
"레디나, 용용아. 잠깐만 기다려줘.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벨은 두 사람에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제일 걱정인 건 레디나였다. 제일 화가 난 게 보였으니까.
오늘 몰래 귀족들 몇 놈의 목을 잘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칼리우스 님을 잘 보고 있을게요."
"그럼 나는 레디나를 잘 보고 있을게."
레디나는 칼리우스를, 칼리우스는 레디나를 보기로 약속하며 둘은 마음을 맞춘 듯 방긋 웃었다.
하벨이 힐끔 아라를 보자 아라는 깜짝 놀라며 라르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 몸은… 같이 갈 거야.]
아라가 입술에 힘을 꽉 주자 하벨은 실실거렸다.
"그래, 그러자. 하지만 형님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해."
[응! 이 몸은 약속할게.]
그제야 아라는 배시시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넬시아가 문을 열자 안에 기사들이 또 다른 문을 지키고 있었다.
"넬시아 티에라 공, 라르웬 티에라 공, 하벨 티에라 공께서 들어가십니다."
순서대로 외쳐진 이름과 함께 미리 회담 장소에 와 있던 고위 귀족들의 차가운 시선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끝, 문과 제일 먼 곳에 왕이 앉아 있었다.
"왼쪽에서 4번째입니다."
카샬이 목소리를 낮춰 하벨에게 말하며 무언가를 보는 척했다.
'아. 저기에 푸렐 텔르나도 있다 이건가?'
하벨은 반으로 나뉘어 서 있는 귀족들을 보는 척하며 푸렐 텔르나를 쳐다보았다.
생쥐같이 생긴 자였다.
하벨의 시선이 이어 천천히 움직이다 제일 첫 번째, 그것도 왕과 가까운 이에게 향했다.
눈이 맞았지만, 하벨은 가볍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쳐다볼 뿐이었다.
'네놈인가, 레바놈 코스모피안.'
왕의 유전을 받아 주황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몸집이 왜소해 다른 왕자에 비하면 작았다.
드디어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얽혀 있던 사건을 하나씩 풀어가는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