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속마음 한 번(2)
* * *
하지만 하벨은 바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뜨겁게 눈시울을 건드는 모든 감정을 삼켜야 했다.
'…멈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러면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면서도 말을 내뱉고, 지금은 후회했다.
그래서 어떡할 건가.
'멈춰야 한다.'
룬델이 자신을 대신해 무얼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무얼 하든 이건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당장 이불 속에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미안합니다. 이럴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잊어주세요. 제가 잘못 꺼내버렸어요. 제가……."
<하벨아. 내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룬델은 조금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벨은 두 손에 꼭 쥔 연락용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내 삶이 너의 삶보다 감히 길었다고 말할 수도 없구나.>
천천히, 조용히 룬델은 말을 이어나갔고, 하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하벨아. 네가 말한 대로 너의 죽음 후에 무언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게 네 탓이라 생각이 들지 않구나. 너의 죽음은 애초에 도둑맞아버렸단다. 탓하려면 네 죽음을 가져가 버린 그놈들에게 해야 맞지 않더냐.>
"하지만 제가 용왕이었습니다."
답답함이 한 번 밀려오고.
"세상에 유일한 용왕."
답답함이 또 한 번 밀려오자 하벨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저는… 죽지 말았어야 했고, 아주 중요한 걸 지켜야 했습니다."
천장을 바라보는 하벨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런데 제가 망쳐버렸습니다. 그걸 에른스트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지니던 열쇠.
그 열쇠가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된 이유가 아닐까.
"아니라고, 제 탓이 아니라고 눈을 돌리려고 했는데, 그게, 정말, 생각하는 대로… 되질 않습니다."
하벨은 기껏 삼켰던 말을 다시 내뱉고 말았다.
<그래서란다, 하벨아.>
룬델은 열쇠가 무엇인지, 무얼 지켰어야 했는지 묻지 않았다.
<내 배움이 짧아 내 말이 너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구나. 하나, 네가 용왕으로서 살아 있던 그 시대, 그 사람들은 너를 버렸단다.>
"…예. 저를 배신했습니다. 그들은 절."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하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절 버렸습니다."
<그걸로 이미 너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생각한단다. 더는 네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단다. 오히려 너무도 억울할 네가 왜 그 뒤를 생각해야 하더냐? 나는… 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속상해 무척이나 화가 나는구나.>
"하지만……."
<하벨아. 네가 가진 책임감만큼은 나 역시 이해한단다. 얼마나 끔찍한 존재이더냐. 모든 순간을 갉아먹는 존재이니 왜 밉지 않을까.>
이건 저주였다.
풀리지 않는 영원한 저주.
하벨은 밀려오는 말을 또 삼켰다.
<그래서 네가 내게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더냐? 부디, 지금처럼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렴.>
하벨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걸… 기억하셨습니까?"
<당연하지 않더냐. 네가 한 말인데. 내 아들이 내게 했던 말인데.>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이걸 바로 버릴 수 없다는 걸 안단다. 내버리기에 기억과 습관이 손가락 지문처럼 남아 너무도 어렵겠지.>
"예. 이게 어렵… 네요."
<하지만 이 세계는 네 덕에 아직도 숨을 붙이고 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한단다. 하벨 네가 세상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치 자신이 세계를 구했다는 것처럼 들려왔다.
사실이었지만, 그간 외면했던 진실이었기에, 룬델이 말해주었기에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진심으로 나는 네가 더 많이 행복했으면 하구나.>
하벨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별것 아닌 말임에도 왜 이렇게 마음이 떨리는지.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구나. 내가 해답이 되지 못해서. 내 답변이 네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룬델은 침묵을 깨트리며 머뭇거렸다.
<내가 무어라 말했더라도 너는 그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행복해도 된다는 걸 잊지 마렴.>
"아뇨."
하벨은 목소리가 떨려왔다.
"혼란스럽지 않아요."
눈을 가렸던 손을 찬찬히 떼었다.
일렁거림이 아직 잔잔하게 남아 있었지만, 하벨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보다 더 가벼움에도 거친 파도가 밀려오던 마음을 토닥토닥해주었다.
―그래도 속은 시원합니다. 해결되는 게 없다는 건 압니다. 알아도, 때론 요란을 떨 필요가 있어요.
'네 말이 맞았다, 하벨 티에라.'
속이 정말로 시원했으니.
"그냥 이렇게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이 됩니다. 그냥 이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네요."
그냥 들어주기만 했을 뿐임에도 세상에 모든 두려움을 씻겨내려 줬으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카샬이 왔나 봐요. 밥을 가져다준다고 그랬거든요."
<어서 맛있게 먹으렴. 세끼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더냐.>
"예. 배가 너무 고프네요."
하벨은 배를 찬찬히 만졌다.
"…오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나야말로 고맙단다. 이렇게 나를 믿어주니, 정말로 온 세상을 가진 것만 같구나.>
목소리만 들어도 룬델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만 끊으마. 네 목소리도 들었고, 네가 깨어났다는 것도 알았으니 더 바랄 것 없는 행복한 아침이구나.>
룬델은 가볍게 웃으며 연락용 아이템을 끊었다.
하벨 역시 연락용 아이템을 바라보며 조용히 쓰다듬었다.
아버지.
그 말은 자신에게 있어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신이 입에 올릴 줄은 몰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이 몸이 카샬을 데려왔다?]
아라의 즐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발에 금화 초콜릿이 들려 있어 눈이 포근하게 감겨왔고, 행복하게 꼬리가 흔들렸다.
드르륵.
카트를 끌고 온 카샬이 하벨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깨어나셨습니까, 도련님?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없어. 오히려 개운한걸. 잘 잤어, 카샬?"
하벨의 시선은 곧 헤레스를 향했다.
"헤레스 너도 잘 잤어?"
"도련님의 안색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오늘은 정말 푹 잘 수 있겠네요."
"표정도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헤레스의 말을 이어 카샬이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안색이야 잘 자서 그렇다고 치는데 표정은 왜?"
하벨은 맛있는 밥을 기다리며 발가락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좋아하다 의문을 드러냈다.
"요새 미묘하지만, 표정이 굳어 있습니다."
[맞아! 이 몸도 이건 딱 보였어. 앗! 혹시 대장 마음이 아파? 루룸이 대장을 잘 보라고 그랬어! 대장 마음이 아플 수 있대.]
아라는 초콜릿을 입에 가득 묻힌 얼굴로 눈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안 그래."
하벨은 아공간에 넣은 연락용 아이템을 떠올리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을 내밀자 아라가 쪼르르 딸려왔고, 하벨은 아라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이제는 흔들려도 괜찮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존재했다.
무조건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만으로 정말 행복했으니까.
하벨은 활짝 웃었다.
* * *
통통.
맛있게 먹어 배를 가볍게 두드리다가 하벨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통증이 화악 밀려오자 하벨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발끝까지 몰려가는 아픔에 눈물이 저절로 맺혔다.
[으아앗! 거긴 대장이 아픈 곳인데!]
아라가 덩달아 아픔을 느끼듯 인상을 구겼다.
"마, 많이 아프십니까?"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헤레스가 황급히 앉았다.
하벨은 괜찮다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보이시죠?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겁니다. 제가 왜 식후에 배를 때리지 말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카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배를 가볍게 두 번 정도 두드려줘야 밥을 먹은 것 같다는 말을 하며 하기 시작했는데, 대체 어디에서 배워왔는지 몰랐다.
통통.
아라가 배를 때렸다.
[이 몸이… 괜히 알려줬나 봐.]
"아니야, 전혀.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하벨은 그제야 꼭 해야 할 말을 꺼냈다.
여기가 코스모피안 왕국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도련님께서 기절하시는 동안 잘 모셔와 코스모피안 왕국의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왕실에서 사람이 찾아와 직접 왕실 소유 저택을 내어줬습니다."
카샬이 대답하자 하벨은 이상함이 천천히 몰아쳤다.
"명목상 내가 물 마법사지만, 왕실에서 순순히 내어줬다고?"
"입궁 날짜는 내일입니다."
"아, 그럼 그렇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보였는데 이렇게 환대를 할 리가 없지."
하벨은 그제야 안심했다.
이 저택은 물 마법사라는 명분으로 얻어낸 거라 치지만, 자신이 기절했다는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이 저택은 더는 호의를 베푼 게 될 수 없었다.
그저 명분일 뿐.
"내가 왔고, 기절했다는 소문은 퍼졌어?"
하벨이 씩 웃었다.
"아주 넓게 퍼졌습니다. 마차에 떡하니 티에라 가문 문장이 찍혀 있고, 도련님께서는 업혀서 마차에 내리셨는데 이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형님이랑 누님은?"
"아가씨께서는 내일 입궁을 위해 필요한 일 처리를 하고 계시고, 둘째 도련님께서는 잠깐 클로저 일로 나가셨습니다."
"혹시 서류로 괴롭히는 거야? 법에 따라 직접 도장을 찍어오라는 명분도 챙겨오고 말이야?"
"…직접 보셨습니까?"
카샬이 의심하자 덩달아 헤레스의 얼굴에 미소가 생겨났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나 방금 일어났다니까."
"그럼 어떻게 아셨습니까?"
카샬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자 하벨은 엄지를 슬쩍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나, 왕이었어. 이 정도는 알고 있지. 이 서류 더미는 귀족들에게 '내가 저자들에게 이 정도로 막 대하고 있다'라는 걸 알리기 위한 수단이잖아?"
[우오오옵. 대장은 용용이처럼 똑똑해!]
아라의 칭찬에 하벨은 살짝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어쨌든, 누님이 이 연극에서 고생 좀 하겠네. 딱히 다른 일은 없지? 지금 굳이 우리를 찾아와서 괜히 꼬리 잡힐 멍청한 일은 하지 않았겠고."
"레디나가 푸렐 텔르나의 뒤를 조심스레 미행하고 있습니다. 가면단 역시 레디나의 명령을 따라 놈의 행적을 좇고 있고요."
"푸렐 텔르나가 첫째 왕자의 끄나풀이니 이쪽을 노리는 게 확실히 효과적이지."
하벨은 곧 무언가를 떠올리며 장난스레 물었다.
"마법사들은? 이곳 마법사 협회를 염탐하러 갔어?"
"맞습니다. 기어코 마법사의 탑이 부러지는 걸 보실 겁니까?"
"헤레스가 마법사의 탑이 반으로 뚝 부러지는 걸 보고 싶다고 그랬어. 맞지?"
"…제가, 음, 그렇게 말씀드리긴 했죠?"
헤레스는 슬금슬금 후회가 기어오자 눈을 살짝 피했다.
하지만 하벨에게 직접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우물쭈물하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무조건 부러트려야지."
하벨은 아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라가 바람의 길을 사용해 엘라힘을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령왕 이안으로부터 힘 일부를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정령들한테 미리 부탁해놔야겠네.'
하벨은 아라가 루룸을 표식 삼아 이동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라의 힘이라면 이제 왕실과 마법사의 탑, 그 사이를 가볍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테니.
하벨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크라마의 새가 창문 옆에 있자 하벨은 평소처럼 신호를 보냈다.
엄지, 검지, 중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법사들한테 부정한 걸 없애 달라는 신호였다.
부정한 걸 없애야 정령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제발 얌전히 계셔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 배에 구멍 난 거 잊으셨습니까?"
그 신호를 알아챈 카샬이 입을 열었다.
"에이, 엘라힘이 옆 방에 있을 텐데?"
"…직접 보신 거 맞으시죠?"
"오, 진짜 맞췄네?"
능청스러운 하벨의 대답에 헤레스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정말로 살짝 아물었을 뿐입니다. 뚜껑만 닫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쩔 수 없어, 헤레스. 여기 왕을 회유할 때 필요해서 말이야."
―…그리고 전하께서 오염된 물을 정화하길 원하십니다. 신하 된 도리로 이를 이뤄드리고 싶은 게 정상 아닙니까?
적어도 게리온의 말에 따르자면 코스모피안 왕국의 왕은 세계 평화를 위하는 쪽이라고 했다.
첫째 왕자인 '레바놈 코스모피안'도 왕의 시선에서 보자면 소중한 아들일 테지.
이를 손에 넣으려면 코스모피안 왕국이 가진 고민을 해결해주는 방법뿐이었다.
"자, 그럼 여하 좀 불러와 줄래? 아, 얌전히 있었어?"
여하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헤레스는 이미 조금 전과 다른 눈빛을 짓고 있었다.
아주 큰 기쁨이 가득했다.
"저를 도와줬어요. 준비된 피가 이렇게 한가득한 건 처음이에요."
"…미안."
하벨이 슬쩍 사과했다.
"아니에요. 이게 제 일인데요. 이제는 반쯤은 이해하고, 반쯤은 화가 나고 그래요."
"그, 재촉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오미너스 이야기라면 편안하게 하셔도 됩니다. 사실 방법을 바로 찾았으면 좋았겠지만, 좀 막혔어요."
"막혔어?"
하벨은 금세 헤레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저 시선이 자신이 아닌 하벨 본인을 향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헤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완전히는 아니에요. 저는 완성본에 가까운 오미너스를 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한 번 본다면……."
말을 이어나가던 헤레스가 도중에 자신의 입을 막았다.
말이 잘못 나갔다고 해야 하지만, 하벨의 표정에는 이미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헤레스. 이것도 왕을 회유할 때 쓸 생각이었거든."
하벨은 벌써 신이 나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