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속마음 한 번
* * *
"오늘은 생각보다 긴장되긴 합니다."
하벨은 마차가 포탈로 들어가기 전에 입을 열었다.
커다란 포탈을 보았고, 그간 포탈을 이용하면서 겪었던 후유증들이 있으니 왜 긴장이 안 되겠는가.
배에 상처까지 있는 터라 자칫하다가 터져버리면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큰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까지 있었다.
"이제 말하면 안 돼, 막내야. 혀 깨물 수도 있으니까. 알지?"
라르웬이 하벨에게 당부하자 하벨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내부에 그림자가 졌다. 커다란 입속으로 들어가듯 마차가 포탈 속으로 잠겼다.
몸이 또 멋대로 어딘가를 향해 튕겨가는 느낌이 들자마자 갑자기 뒤에서 속삭이는 말이 들려왔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하벨은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까만 세상이 펼쳐졌다.
커다란 형상을 한 누군가가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왜 도망쳐야 하는지 물으려 했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으어, 어,'라는 말뿐이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
그 말과 함께 커다란 형상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되었다.
그들 모두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자 하벨은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절한 건가? 아니면 이건 대체 뭐지?'
하지만 단언컨대 이건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애초에 태어났을 때도 '아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작진 않았다.
'…하벨 티에라. 그래. 너밖에 없지.'
자신이 지금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보고 있다는 걸 알자 새삼스레 낯설게 다가왔다.
랜턴에 붙은 검은 불꽃도 일어나지 않았고, '딸깍'하는 소리도 나지 않았으니.
―어서 가셔야 해요.
―오래오래 보듬어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안 됩니다. 들켜버렸어요.
커다란 형상은 자신을 안아주었다.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이 온기가 마지막이 될까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어디선가 헤어짐을 예상했는지 울고 있는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
'…부모님이라기에 너무 많은데?'
하벨은 점점 늘어나는 검은 형상에 굉장히 난감했다.
적어도 자신의 눈에는 마치 왕과 가신 사이에 벌어지는 일처럼 보였다.
―두두두두.
검은 형상이 말하는 도중에도 들려왔던 희미한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그거다…….'
하벨은 갑자기 나타난 존재들을 알아챘다.
저번에 마법사 협회로 가면서 포탈을 사용했을 때 보지 않았던가.
검은 연기가 쫓아오던 그 기억을.
―찾았다!
이전처럼 검은 연기가 자신을 보며 소리쳤다.
―…우리의 유일하신 분이여.
갑자기 커다란 형상들이 말을 바꿨다.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당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말입니다.
계속 주춤거리기만 하자 커다란 형상들이 손을 잡고 같이 뛰었다.
―죽여라! 저걸 죽여야 해!
사방에서 무언가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며 자신과 함께 달리던 커다란 형상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손을 꼭 잡고 가던 커다란 형상마저 바닥에 쓰러지자 자신의 시선이 돌아갔다.
검은 연기가 자신에게 뻗어왔고 커다란 형상은 자신을 꼭 감쌌다.
―푸욱!
따뜻한 온기를 박살 내는 소리에 자신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으, 으어어!
―…아가야. 아가.
손을 뻗으며 얼굴을 쓰다듬어주자 뜨거운 게 눈을 통해서 흘러내렸다.
―사랑했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죽지 말라고.
무섭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입 밖으로 말이 아닌, 괴성 같은 게 나왔다.
―으어어. 으어!
갑자기 주변에 들려오던 날카로운 소리가 멈췄다.
고개를 올리자 눈물 때문에 뿌옇게 변한 시선 끝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저 커다란 형태로 보이는 게 아닌, 너무도 또렷한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검은 형상과 다른 모습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하지만 하벨은 제 눈을 의심해야 했다.
단지 목소리만 똑같은 게 아니었다. 생김새 역시 똑같았다.
'…류아. 네가 왜?'
하벨은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류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밀려오는 당황함에 하벨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달렸다.
발바닥이 망치로 쾅쾅 두드리는 쓰라림이 몰려옴에도 계속 달렸다.
그리고 그 끝에 빛이 보였다.
'만약에 내가 보는 이 기억이 정말로 하벨 티에라가 맞다면, 이제 곧.'
곧.
보게 될지도 몰랐다.
빛으로 손을 뻗었고, 공기가 달라졌다.
하늘이 드러나고, 나무가 보였고, 피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귀를 후려치는 듯한 세찬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이 단번에 변하자 밀려오는 압박감이 너무도 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뭐해! 도망치라고! 죽고 싶어?
그때, 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같이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고 달려갔다.
대체 언제까지 달려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달리고, 달리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렸다.
―…하벨아!
강한 울림과 함께 시선의 끝에 룬델이 보였다.
지금보다 더 젊었던 모습이었다.
밀려오는 안도감과 큰 기쁨에 그의 눈동자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보석을 박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로… 룬델이다.'
하벨은 밀려오는 안쓰러움과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통해 느끼는 안도감에 혼란스러웠다.
'하벨 티에라는 이때 류아를 만났다.'
하벨은 그 순간 숨을 다급히 들이마셨다.
"…하악."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정신 차려, 하벨아."
"막내야. 막내야? 내 목소리 들려?"
[대장! 이제 포탈을 넘어왔는데! 이제 괜찮은데!]
"도련님.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주변에서 무언가 말을 하는데 하벨은 식은땀이 줄줄 흘렸다.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밀려온 기억에 머리를 쥐어짜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밖을 봐야 하지만,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향했다.
아.
또 코피가 흐르네.
* * *
낯선 천장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밝았고.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화아아아.
랜턴에 밝은 빛이 붙자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렸냐고? 그래. 아주 고맙다. 덕분에 또 링거 달았네."
자신의 옛 기억에 하벨 티에라의 옛 기억까지.
하벨 티에라의 의식이 아직 자신의 의식 속에 있다는 건 알지만, 설마 기억까지 공유할 줄은 몰랐다.
"……하."
하벨은 얼굴을 쓸어내리다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잡는 발바닥에 눈길을 돌렸다.
"안녕, 아라야."
[대장, 있잖아. 지금 누구랑 대화했어?]
아라가 걱정 반, 궁금증 반이 뒤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벨은 손을 올려 랜턴을 내보였다.
"여기에 하벨 티에라의 의식이 있다고 한 거 기억나지?"
[응! 기억해!]
아라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내가 쓰러지기 전에……."
[으아앗!]
아라가 갑자기 소리쳤다. 덩달아 하벨도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래?"
[이 몸은 어제 진짜, 진짜 너무 놀랐어. 계속 심장한테 튀어나오지 말라고 가슴을 토닥여줬어.]
"많이… 놀랐어?"
[대장이 포탈을 넘자마자 막 날뛰었어. 이번에는 소리를 더 강하게 질렀어!]
아라는 꼬리를 꽉 잡아서는 살짝 떨었다.
[갑자기 숨도 못 쉬고 그래서 넬시아가 바람을 이용해서 대장한테 음, 산소를, 음, 하여튼 숨을 쉬게 해줬어!]
하벨은 괜히 손을 배에 살짝 올렸다.
두툼한 붕대가 만져졌다.
[헤레스가 그러는데 배는 피가 살짝 나온 거 말고는 괜찮대. 그런데 이 몸은 피가 나왔는데 괜찮다는 말이 너무 이해가 안 돼!]
아라는 하벨의 배를 조심스레 만졌다.
[아직 많이 아파? 아앗, 잘 잤어, 대장? 지금은 아픈 곳은 없어?]
"아니. 이거 진통제인지 하나도 안 아픈데? 잠도 엄청 잘 잤지."
적어도 잠은 잘 잤다.
다른 건 아니었지만.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나자 아라가 키득거렸다.
[대장 엄청 배고픈가 봐. 헤레스가 그러는데 배가 고프다는 건 몸이 건강해지려는 신호랬어. 이 몸이 얼른 카샬한테 금방 다녀올게!]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여기 꼭 붙어 있어야 해 대장. 알았지?]
아라는 침대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손을 흔든 뒤에 문도 잘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
하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포탈을 타면서 보았던 일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룬델을, 하벨 티에라를 도와줬던 자가 류아였다.'
―나는 그 아이를 안고 넋을 잃고 말았단다. …두 번째에 열린 틈의 세계에도 사람을 닮은 괴물이 나올 때까지.
'두 번째에 열린 틈의 세계가 하벨 티에라가 나왔던 곳이며 류아가 지켰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첫 번째에 열렸던 틈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대신들이 되지 않던가.
하나가 풀렸지만, 곧바로 원래 있던 의문이 더 크게 남아 돌아왔다.
왜 하벨 티에라를 노려야 했는가.
'…왜 진짜 막내를 죽여만 했는가.'
하벨은 속이 탔다.
하벨 티에라를 꼭 닮은, 또 다른 인물.
그 두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은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이들이여. 세상은 본디 둘이었지.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같되 서로 다른 세상이 존재했다.
카르밀이 알려주지 않았던가.
―모종의 이유로 두 평행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 아주 순식간이었지.
세계는 원래 두 개였으며 이는 평행 세계였다는 걸.
평행 세계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다.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하벨의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만약에.
세계가 합쳐 똑같은 두 존재 중 하나만 그 세계에 남을 수 있다면 나머지 하나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이 세계에서 오염된 물보다 더 이질적인 존재가 무엇인가.
'틈의 세계…….'
하벨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애초에 에른스트 네놈은 왜 두 세계를 합친 건가?'
세계의 멸망을 바랐던 게 아니었다면 평행 세계를 하나로 합쳐봤자 얻을 이득이 대체 무엇인지 자신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두 세계가 하나가 되어봤자 일어나는 건 혼란과 절망, 그리고.
하벨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신.'
그 세계에 있는 존재들은 죽음을 피해 신을 바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신은… 없다. 신은 대답을 하지 않았어.'
하벨은 밀려오는 답답함에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답답함이 밀려오거나, 무슨 말이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연락하렴. 네 말이라면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 테니.
룬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하지만 말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말을 해봤자, 내가 해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는데.'
하벨은 알지만, 알면서도 눈앞에 룬델의 보드라운 미소와 다정한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냥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자신이 이제껏 하지 않았던 사실인 걸 알면서도 하벨은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했다.
"…아버지."
새삼 낯설다 싶은 말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자마자 룬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벨아. 깨어났더냐? 내 네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르겠구나.>
이 목소리였다.
자신이 듣고 싶었던 목소리는.
그냥 듣기만 해도 왜인지 가슴이 떨려와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아버지."
하지만 하벨은 마치 평소처럼 다시 목소리를 냈다.
<하벨아. 혹시 고민이 있더냐?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구나.>
어떻게 알았을까.
하벨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방금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봤습니다."
<…그래.>
룬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날, 아버지를 도와줬던 자가 바로 류아였습니다."
<십수 년 전, 나를 도왔던 자가 류아였다니. 어떻게, 어떻게… 인연이 이렇게 닿을 수 있단 말이더냐.>
룬델은 기겁했고, 하벨은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 틈의 세계에서 하벨 티에라가 나왔습니다."
<그럼… 첫 번째 틈의 세계는 누가 그랬던 것인가.>
"절 죽인 대신들입니다."
<하아…….>
룬델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괜… 찮더냐? 하벨아. 이래서 지금 네 속이 말이 아니구나.>
"타들어 가는 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니. 나보다 네가 더 걱정이구나. 나는 그나마 상처가 아물 시간이라도 있었지만, 너는 아니지 않더냐. 너는…….>
룬델은 잠깐 울컥했는지 목소리가 떨리다 기어코 말을 삼켰다.
하벨이 올린 입꼬리가 잠깐 떨렸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 감정이 고마웠다. 고마웠기에 하마터면 쓸데없는 말을 쏟아버릴 뻔했다.
"아버지."
여전히 낯설지만, 내뱉을수록 편안해지는 말이었다.
<…그래, 하벨아.>
"누님이나 형님한테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쳤다는 말을 들었죠?"
<들었단다.>
룬델은 짧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말이에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해보렴.>
"세계가 원래 평행했기에 하벨 티에라와 하벨 티에라를 닮은 아버지의 친자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자식이 죽은 건… 역시 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락을……."
<하벨아. 내 아들을 죽인 건 네가 아니란다. 너는 오히려 내게 많은 걸 안겨주었구나. 정말 많이.>
룬델은 설명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차마 연락용 아이템으로 할 수 없는 말인지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하지만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품는지 안단다.>
"…안다고요?"
<너를 짓누르는 책임감이, 네가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책임감이 너를 누르는 게 아니더냐.>
하벨은 그 말에 먹먹해졌다.
너무 티를 냈던 걸까. 어떻게 숨겨야 할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익숙하잖아.'
이럴 때는 얼굴에 어떤 근육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 채로 평범하게 말하면 그뿐이었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 아버지가 얼마나 충격일까 싶어서, 그게 더 마음에 쓰입니다."
<괜찮단다, 하벨아.>
정말로 포근하게 들리는 그 말에 하벨의 입가가 부들거렸다.
<내게 무엇이든 털어놓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그렇게 해버린다면…….'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룬델에게 연락하는 게 아니었다. 오늘 감정을 다 누른 뒤에, 그 후에 차분해졌을 때 이야기를 해야 했다.
"아버지. 오늘은 이만……."
<하벨아. 애초에 너의 죽음부터 네가 원하던 게 아니지 않더냐.>
하벨은 가슴을 관통하는 저 말에 고개를 숙이고 연락용 아이템을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죽고 싶었던 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배신당해서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빼앗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에르티안 왕국의 선왕처럼, 그렇게 모두의 묵례를 받는 마지막을 바랐다.
"…예."
하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 말해버리고 말았다.
"아니었… 어요."
<그러니 네 탓이 아니란다, 하벨아. 너는 오히려 모든 걸 원망해도 괜찮을 텐데, 왜 네 탓을 하는 것이더냐.>
"하지만 아버지.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어떡하죠? 제가……."
미뤄왔던 감정이 천천히 하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멈출 수가 없었다.
목구멍 너머로 흘러오는 말들을 삼키기가 어려웠다.
"제가 왕으로서 살아갔을 때,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용왕은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사실이 너무도 저주스러웠다.
왜 자신뿐일까.
왜 자신만 있는 것일까.
"하지만… 죽음마저 자유롭지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죽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간단하게 지워졌을 거라면 자신이 느끼는 이 슬픔과 가슴이 바스러지는 통증이 매번 따라오지 않았겠지.
죽음이라는 그 존재가 이제 와 자신에게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죽은 자들의 마지막 길을 같이 슬퍼하고 인도하지 않았던가.
참는 거라면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제 죽음만 없었다.
그 슬픔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면서 그림자처럼 쫓아오고 길어지고, 기어코 자신을 억눌렀다.
"아버지… 만약에 제 죽음까지 책임이 따랐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벨은 자신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룬델이 살아온 길의 시간을 자신은 이미 넘어버렸으니까.
얼마나 어려운 말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요. 숨이 막혀서 질식할 것만 같아요."
하지만 하벨은 가슴이 답답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게 너무 커서 버틴다고 버텨봤지만, 과거와 얽매여 나타나 죽을 것만 같았다.
책임.
그 무거운 걸 피했다고 생각해도 다시 자신을 찾아내 이렇게 잡아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