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88화 (288/415)

288화. 바다 너머로(2)

* * *

레디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하벨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내가 읽어봐도 되는 거야?"

"네. 저도 슬쩍 봤는데 이건 저보다 도련님을 의식해서 적은 것 같더라고요."

하벨은 벌써 자신의 어깨에 앉은 아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헤헤헤.]

아라는 꼬리를 흔들며 방긋 웃었다.

저 웃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벨은 편지를 펼쳤다.

―내가 얼마나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알게 됐다.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지. 미안해.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미안해. 그리고 기회를 주어 고마워.

'나한테 보낸 건 아닌 것 같은데?'

하벨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가 보아도 레디나한테 사과하고 있지 않던가.

―네 말이 다 맞았어. 나는 도망치고, 도망쳤지.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뻔뻔한지 알지만, 기다려봐. 네가 바라는 걸 이뤄줄 테니. 좋은 소식을 전해줄게.

'아. 나한테 보낸 게 확실하네.'

하벨은 그제야 확실히 보였다.

혹여 누가 볼 걸 생각한 건지 레디나한테 하고 싶은 말과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섞여 헷갈릴 뿐, 자신이 그란덴을 풀어주면서 직접 상황을 보라고 한 바로 그 대답이 적혀 있었다.

직접 눈으로 봤고, 그 결과 행동하겠다고 쓰여 있으니 왜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이 편지는 어떻게 왔어? 동물을 통해서 왔다면 크라마가 그냥 둘 리가 없는데?"

"그렇지 않아도 크라마의 새가 절 보더니 편지를 전해주고 갔어요. 그곳에 쥐가 죽어있던데요?"

"그 쥐를 기억하면 되겠네."

"그렇지 않아도 기억했죠."

"기분은… 괜찮아?"

"에이, 도련님. 저 이런 걸로 풀이 죽고 그러지 않아요. 그란덴을 죽일지 말지 선택한 것도 저니까요. 오히려 이 편지가 반갑죠. 페트리오 씨가 힘을 통해 진짜라는 걸 확인했지만, 그래도 저는 조금 더 지켜보려고요."

레디나는 손뼉을 마주쳤고, 하벨은 편지를 흔들며 물었다.

"카샬하고 용용이가 봐도 되는 거야?"

"네. 얼마든지요. 저도 도련님을 믿듯 카샬하고 칼리우스 님을 믿거든요."

레디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벨이 자신의 집이니 저들 역시 자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읽고 없애면 돼. 아, 혹시 간직할 거야?"

하벨이 씩 웃자 레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뇨. 도련님이 써주시는 편지만 간직할래요. 저한테 편지 안 써주신 거 아시죠?"

"그랬나……?"

하벨이 살짝 곤란한 표정을 하자 레디나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진짜 아쉽긴 해요. 누군가 뒤에서 수작을 부리고 이걸 제가 베야 '아, 이게 여행이구나'라고 할 텐데요. 비명이 들려야 진짜 여행이죠."

[지, 진짜야, 레디나?]

아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앞발을 보았다.

[연회는 꽃은 피고, 습격의 꽃은 독이고, 여행은 음, 베고, 비명이…….]

"아니야, 아라야. 그거 아니야."

하벨은 아라의 앞발을 잡았다. 자신의 손바닥 안에 아라의 발바닥이 꼼지락거렸다.

[그럼 여행은 어떤 거야? 대장이 말해줘! 이 몸은 너무 궁금해!]

"아주 즐거운 거지. 하지만 이건 여행이 아니야."

[여행이 아니었어……?]

아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탁.

칼리우스가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카샬이 잠깐 맡긴 가방이었다.

"여행이… 아니었어?"

아라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아주 구슬펐다.

"그, 여행은 맞지."

하벨은 일단 둘을 달랬다.

"여행이긴 한데, 음, 기존 여행하고 다르니까 평범한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알겠지?"

[응응! 이 몸은 평범한 여행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거야.]

"나도 성장해서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칼리우스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키와 덩치가 자란 만큼 어린 티를 벗겨내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하벨 눈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럼, 아라랑 용용이는 들떠도 돼."

하벨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라와 칼리우스는 서로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역시 어린애들이네.'

하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아, 용용아. 이거 받아."

하벨은 그제야 도멘이 넘겼던 천을 주었다.

카샬은 믿지만, 겨우 한 번 본 도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혹여나 이 천이 칼리우스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칼리우스가 성장했고, 카르밀이 남긴 마나까지 얻은 상태니 든든했다.

"이게 뭐야?"

칼리우스가 아름다운 천을 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나한테 선물 주는 거야?"

"내가 아니라 카샬의 스승님이 전해달라고 했어."

"선배의 스승님이?"

"스승님… 이요?"

칼리우스와 카샬이 거의 비슷하게 놀랐다.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카샬이 입을 열었다.

"네가 안 물어보기도 했고, 나도 다른 일 때문에 까먹고 있었어. 아까 도멘 씨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났지 뭐야."

하벨은 천을 흔들었고, 칼리우스가 천을 받았다.

도멘은 용의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용에게 이 천을 전해달라고 했고.

천이 칼리우스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몰라 하벨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칼리우스는 받은 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그대로 굳어졌다.

"뭔가 느껴져?"

하벨이 입가를 핥자 아라는 덩달아 입을 벌리며 긴장한 표정으로 칼리우스를 보았다.

하벨과 칼리우스를 번갈아 바라보던 레디나가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왠지 웃음이 났다.

"대체 저 천이 뭐길래 그래요?"

"잠깐만 있어 봐."

하벨은 긴장감을 풀지 않았다. 만약 칼리우스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바로 행동해야 했다.

칼리우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여기에 내 냄새가 나는데?"

[우오옵. 용용이 냄새가 난대!]

아라가 하벨을 올려다봤다.

"…뭐?"

하벨은 살짝 놀랐다.

"희미한데 내 냄새가 나. 히히. 되게 반가운데?"

칼리우스는 천을 바라보며 무언가 그립다는 얼굴을 했다.

"이거 선배의 스승님이 주셨다고 그랬지? 어디에서 얻었는지 몰라도 되게 고마우시다."

"카샬."

하벨이 카샬을 불렀다.

"예, 도련님."

카샬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도멘 씨가 어디 출신이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음, 어디에서 스승님을 만났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땐 제가 좀 어렸고, 아무 의미 없이 걷다가 만났으니까요."

'카샬은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 용용이가 태어난 곳이 그곳 근처라는 건가?'

하벨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애초에 도멘은 이걸 왜 용용이한테 주라고 말한 거지?'

무얼 의미하는 건지.

뭘 말하고자 하는 건지.

하벨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걸로 머리 묶어도 예쁘겠는데요?"

레디나가 칼리우스의 천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칼리우스가 하벨을 바라보았다.

"너 가져. 이건 처음부터 네 거니까."

하벨은 기지개를 쭉 켜고는 카샬이 넘기는 지팡이를 받았다.

"이제 출발할 시간 맞지?"

"예. 정확하십니다."

카샬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 * *

"…으함."

하벨은 마차에 앉아 길게 하품했다.

[많이 졸려, 대장?]

창문에 붙어 있던 아라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대외적인 이유는 '사절단'이었기에 출발 전에 자잘한 연출이 있었다.

왕실 기사들이 검을 높이 올리질 않나, 겨울이 다 되어가는 날씨에 꽃은 어디에서 구해온 건지 몰라도 여기저기 꽃이 뿌려졌다.

"졸리면 자. 아직 포탈까지 가려면 좀 더 가야 하니까."

라르웬은 밖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무려 물 마법사인 하벨이 하는 첫 공식 행사인 만큼 바안이 무척 신경 썼기에 마차부터가 달랐다.

원래는 마차 창문을 열든 해야 하지만. 혹여나 하벨이 감기가 들까 바안이 튼튼하되,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마차를 가져왔다.

'진짜 지극정성이네.'

라르웬은 다시금 그 사실을 되짚자 하벨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에이, 어떻게 그래요? 다 나 보러 온 사람들이잖아요."

하벨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밖에 수많은 사람이 추위를 이겨내며 자신을 보고자 몰려왔다. 얼마나 고마운가. 약 때문에 몰려오는 졸음이 뭐가 중요하다고.

하벨은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자신이 손을 흔들어본 경력이 몇인가.

정확한 각도에, 정확한 타이밍에 손을 흔들 자신이 있었다.

"너는 부상자야, 막내야."

라르웬의 단호한 말에 온화하게 웃고 있던 넬시아가 말을 꺼냈다.

"웃어, 라르웬. 하벨 너는 몸이 안 좋은 건 알지만 하품은 꾹 참아. 그래 줄 수 있지?"

"물론이죠. 졸음은 참을 수 있지만, 하품은 좀 힘드네요."

하벨은 다시금 올라온 하품을 삼켰다.

"아참, 형님."

하벨은 미소를 띠며 라르웬을 불렀다.

"왜 그래?"

"브란스 씨가 나 언제 보자고 말해요?"

뜨끔.

라르웬은 그 사실에 잠깐 올려둔 미소가 사라졌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알았겠어요? 슬슬 때가 된 거죠. 회의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의논도 했을 테니. 클로저 입장에서 뭘 선택하겠어요?"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클로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싸우자'밖에 없어요. 적의 정체도 밝혀진 와중에 이걸 무시하기란 어려울 테니까요."

"그래. 무시할 수준을 벗어났어. 저번에 열린 회의 역시 검은 달 귀에 들어갔겠지. 내부에 적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위협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어."

라르웬은 담담하게 말했다. 클로저들은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그걸 알기에 검은 달 역시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거겠지.

"그래서 더 내가 필요하겠죠?"

하벨은 자랑스럽게 자신을 가리켰다.

한낱 우연으로 시작했지만, 검은 달의 지부를 알고 있는 자.

달님.

그게 하벨이었다.

"검은 달 역시 내 정체가 궁금할 테고요. 그렇죠?"

"그래. 클로저들은 네가 절실히 필요해 부를 테지만, 널 유인하려는 놈들이 벌이는 수작질이기도 하니까."

라르웬은 아직 미소를 짓지 못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형님. 잠깐만 기다려줘요. 곧 그란덴이 좋은 소식을 가져올 테니까요."

하벨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하나씩 맞춰지고 있는 퍼즐을 기대해보았다.

그란덴이 검은 달에 가져올 파급력은 물론, 지금쯤 엘라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 신성 국가 시엘느, 첫째 아들이 레놀드 폭파 사건과 에르티안의 이전 왕 암살 사건에 이어져 있다는 걸 모르는 코스모피안 왕, 피해자처럼 가만히 당한 레놀드 왕국.

'그리고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올 거라 생각했던 정령들은 기어코 오지 않았고.'

자신의 땅, '아벨'에서 정령들에게 수소문해도 헤스트리아 왕국 일을 알고 있는 정령들은 없었다.

'코스모피안 왕국과 헤스트리아 왕국이 가까우니 여기서 시작해야겠네.'

하벨은 지금 흘러가는 상황들을 바로 잡아 에른스트와 가까워지길 바랐다.

* * *

[우, 우오오옵!]

아라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주변 시선이 없었다면 당장 아라의 입에 손가락을 넣었을 텐데.

하벨은 무척 아쉽게 생각하며 루룸과 함께 라르웬에게 매달린 아라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바람이 차니까, 도련님은 이거 덮어야 해."

칼리우스가 담요를 꺼내 하벨에게 넘겼다.

"고마워."

포탈 근처에 도착했지만, 아직 포탈을 작동하기 전이기에 잠깐 마차를 멈추고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갔다.

여전히 바다는 거무튀튀했고, 불길함이 넘실거렸다.

[루룸! 루룸! 저거 봐봐! 완전 커!]

아라는 바다 근처에 네모난 형태의 건축물을 보며 놀라고, 또 놀랐다.

[완전은 아니잖아, 아라야. 저택 크기 정도인데.]

[그, 그게 엄청 큰 건데? 이 몸은 엄청 커 보이는데, 루룸은 얼마나 큰 건물을 본 거야?]

[이전에도 봐서 그래. 라르웬이 클로저라 여기저기 쏘다녔잖아?]

[아앗, 맞아!]

[티에라 가문과 에르티안 왕실 사이에 체결한 맹약 때문에 다시 돌아와야 해서 많이 봤지.]

루룸은 힐끔 하벨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 생각이 없어 보일 정도로 평온했다.

카샬이 주는 쿠키를 날름 붙잡으며 먹고 있었으니.

다만, 하벨의 시선 끝에 바다가 닿아 있었다.

측은함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포탈이 바다와 가깝다고 해도, 사실 멀어. 그러니 바다로 갈 생각하면 안 돼."

라르웬 역시 하벨을 쳐다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 보면 안 됩니까?"

오도도독.

하벨은 쿠키를 먹으며 물었다.

태연한 표정을 바라보던 라르웬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헤레스. 여기 하벨 말 좀 들어 봐봐."

"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헤레스가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쳐다보는데 목소리 낮추세요!"

"널 보고 있네?"

하벨은 그 말에 굳은 어깨로 고개를 슬쩍 돌리자 그곳에 헤레스가 방긋 웃으며 안경을 올리고 있었다.

앉으셔야죠. 왜 서 있으세요? 자리도 다 마련했는데 왜 서 있으세요? 앉으세요. 앉으세요.

잠깐이지만 그런 마음이 읽히는 것 같아 하벨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진짜 치사합니다. 그냥 치사한 게 아니라, 완전, 많이 치사합니다."

라르웬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린 하벨의 눈매가 가늘어져 있었다.

"치사한 건 치사한 거고, 오늘은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해. 씁쓸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거고."

"알아요."

오도도독!

하벨은 신경질적으로 쿠키를 먹으며 보란 듯이 바다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휴."

한숨을 내쉬는 라르웬이 무어라 구시렁거리든 말든 하벨은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아라의 귀가 쫑긋거렸다.

[누가 와.]

스겅.

카샬이 검을 뽑는 소리에 하벨은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들을 농락하듯 주변에 물을 가득 뿜어내며 다가왔기에 하벨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우와. 이게 여행의 맛?"

입안으로 넘어가는 쿠키가 아주 달콤하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