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바다 너머로
* * *
하벨이 가까이 다가오자 페트리오는 놀라며 의자에 기댔고, 아라는 앞으로 한 바퀴 굴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대장?]
"지금… 뭐라고 했어?"
하벨이 크게 흔들리자 페트리오는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서황이라는 자와 마주하지 않으셨습니까? 카샬이 피를 넘기던데요?"
"서황의 기억도 볼 수 있다고?"
"혹시 보… 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도리어 페트리오가 주춤거리자 하벨은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피 때문에 카샬이 좀도둑한테 서황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은 건가.'
하벨은 카샬이 벌인 일은 이해했다.
만약에 카샬이 페트리오에게 그 일까지 보고했다면 객관적인 정보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하벨은 잠깐 눈을 감았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 자신은 페트리오가 서황의 기억에서 무얼 봤는지 들어야 했다.
"아니. 그건 아니니까 네가 뭘 봤는지 말해봐."
"유렌이라는 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유렌…….'
하벨은 그 이름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역시 살아 있었다. 서황도 살아 있는데 유렌이 죽을 리가 없지.'
"자안이라는 자한테 유렌의 상태를 보고 하더군요. 왜 아직도 정신을 놓고 있냐면서요."
이어진 '자안'이라는 이름에 하벨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유렌도, 자안도 대장이 아는 나쁜 사람이었어?]
아라가 하벨을 빤히 쳐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하벨은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서황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틈의 세계를 열어 바다에 갔다가 산을 갔다가, 그렇게 헤맨 뒤에 자안이라는 자가 '에른스트' 그자에게 보고하겠다고 언급한 말을 들은 뒤, 서황이 도련님을 만났습니다."
에른스트를 언급했을 때, 페트리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벨을 죽인 이의 이름이 아닌가.
'아직도… 에른스트와 이어져 있는 게 맞다니.'
하벨은 유렌과 자안을 이어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까지 알자 저절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에른스트와의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졌다는 건 그들 모두 에른스트의 충실한 수족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 아닌가.
"도련님. 이런 발언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맞아. 내가 아는 놈들이야. 날 죽인 놈들인데 모를 리가 있겠어?"
하벨이 꺼낸 말에 페트리오는 잠깐 넋을 잃다가 곧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런 말은 카샬한테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새끼가 진짜!'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그냥 보고하지 않았을 텐데.
"그다음 읽은 기억은 뭐야?"
하벨이 아무렇지도 않게 묻자 페트리오는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계속 말해도 돼."
"…엘라힘 신관과 관련된 기억이었습니다."
"뭐, 본 거라도 있어?"
"딱히 다른 건 없습니다. 도련님께 말씀하신 것들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혹시 다른 소식은 못 들었어?"
"어떤 소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코스모피안 왕국하고 헤스트리아 왕국하고 제법 가깝던데, 무슨 소문이라도 도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헤스트리아 왕국은 쇄국 정책을 펼쳐 외부에서 온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넬시아와 같이 간다면 적어도 쫓기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기에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을 두고 무턱대고 갈 수도 없어 처리해야 했던 일부터 건드렸다.
만약에 내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면 대비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특히나 나는 해외를 간다는 전제부터가 쉽지 않았으니.'
걸림돌이 너무 많았다.
바다를 건너는 것도, 포탈을 넘는 것도 죄다 조심해야 하니까.
"저도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정책 특성상 거래처가 한정적이라 어딘지 알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딱히 특별한 것도 듣지 못했고요. 이는 정령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페트리오는 아쉬움을 깊이 드러냈다.
"아니야. 네가 가져온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도움 되고 있어. 덕분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머무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테니까."
"헤스트리아 왕국 일에 제대로 손을 뻗지 못한 만큼 준비한 게 있습니다."
"준비한 거라니?"
"코스모피안 왕국의 첫째 왕자가 레놀드 왕국과 이어져 있다는 증거는 빼돌렸습니다."
"어떻게? 아, 아니. 이거 가능하긴 한 거야? 그… 코스모피안 왕국의 왕자잖아. 일단 왕자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는데?"
하벨이 놀라며 물었다.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정령님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기존 서류를 가짜로 바꿔치기한 거죠. 이런 방법은 저도 처음인데, 속도가 달랐습니다. 정령님들은 보이지 않으니 흔적도 남지 않고, 아마 엄청 난리가 났을 겁니다."
페트리오는 키득거리다 하벨이 웃지 않자 괜히 민망해하며 다른 말로 돌렸다.
"듣자 하니 정령님들이 도련님을 무척 돕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나를?"
"예. 도련님의 평판이 장난 아니라는 말을 정령 기사들에게 종종 듣지만, 그들은 이유를 모르죠. 전 알고 있지만요."
페트리오가 굉장히 우쭐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우쭐거릴 만했다. 그가 알아온 정보가 얼마나 큰가.
'이래서 좀도둑이 무서운 거지. 지금은 힘도 얻었겠다,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것들은 다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벨은 불안하지 않았다.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저도 굉장히 참기 힘들었습니다."
페트리오가 저렇게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는데, 뭐가 불안할까.
"거기는 혹시 부정한 게 없었어? 아니면 정령들이 왕실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던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령사가 아니라서요. 어쨌든, 코스모피안 왕국은 마법사들을 싫어합니다. 아주 많이요."
'마법사를 싫어한다라.'
하벨은 이 또한 아주 좋은 정보라고 생각했다.
오만함을 넘어 도리를 넘어버린 마법사의 잔인함을 상징하는 게 마법사의 탑이 아닌가.
반드시 부러트리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있지, 대장. 방금 좀도둑이 증거를 바꿨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 몸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라는 눈을 반짝거렸다.
머릿속에 화려하게 잠입해 증거를 빼돌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라야? 도둑질은 나쁜 거야."
[그럼 좀도둑도 나쁜 거야! 대장도 나쁘구, 그 물건을 훔친 정령들도 다 나쁜…….]
"아라야. 대체 뭘 하고 싶길래 그래?"
하벨은 아라의 입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며 물었다.
[이 몸도 그렇게 증거를 빼돌릴 수 있단 말을 하려고 했어. 이 몸은 도둑질이 나쁜 거라는 건 알아. 나쁘지만, 때로는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어.]
"억지로 무언가를 떠맡지 않아도 돼. 이안도 지금 기다릴 수 있고."
[아니야. 이 몸은 열심히 생각한 거야. 할 수 있으면 뭐든 할래.]
아라는 당당하게 리본에 앞발을 올렸다.
[이 몸도 이제, 정령왕이니까!]
굳건한 아라의 표정에 하벨은 이상하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제발 누구든 좋으니, 말을 돌려줬으면 했다.
"도련님. 실례지만, 이안이 누굽니까?"
'좋은 타이밍이다, 좀도둑.'
하벨은 딱 좋은 순간에 들어온 페트리오의 구원에 실실 웃었다.
"정령왕이야."
너무도 가벼운 그 말에 페트리오는 천천히 입과 눈을 벌렸다.
"예? 예에……?"
도무지 뇌가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정령왕이 누구 집 개도 아니고 만났다니.
정령왕을?
정령왕?
* * *
"…아시겠습니까, 하벨 공?"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하벨은 바안의 재촉에 대충 대답했다.
"예, 예."
"대충 듣지 마시고 제대로 들으십시오. 이번에 공이 내게 보고 한 코스모피안 왕국의 첫째 왕자가 레놀드 왕국에 벌인 폭파 사건으로……."
"그 이유로 예상보다 빨리 앞당겼으니, 몸 건강히, 제발 다치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어쩌고저쩌고 하셨잖습니까."
"…혹시 내가 너무 많이 말했습니까?"
"와.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대단한데요?"
하벨이 눈을 반짝하며 바안을 빤히 보자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배우고 싶을 정도로 하벨의 빈정거림은 예술이었다.
바안은 괜히 머쓱해 말을 돌렸다.
"복부의 상태는 괜찮은 겁니까?"
"아뇨."
바안은 그 대답에 바로 옆에 있는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으앗. 차가 뜨거울 텐데. 엄청 뜨거워.]
아라가 걱정이 되어 바안에게 바람을 솔솔 불어주었다.
"…고맙습니다."
바안은 정령의 호의가 낯설었지만, 일단 인사하며 하벨을 보았다.
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에 다시금 속이 탈 지경이었다.
"아니, 대체 룬델 공이나 넬시아 공, 라르웬 공까지 뭘 하는 겁니까? 이건 적극적으로 공을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룬델하구, 넬시아하구, 라르웬은 대장을 말렸어! 그런데 대장이 이겨버렸어. 이 몸은 대장 입이 제일 무서워.]
아라는 책상에 앉아 꼬리에서 금화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룬델하고, 넬시아하고, 라르웬이 금방이라도 하벨을 이길 것만 같았는데 그가 입을 열자 모든 게 달라졌다.
―알죠. 다 알지만, 저 이외에 누가 갑니까? 대답해보세요.
[대장의 마법은 입이야…….]
아라는 입을 삐죽 내밀며 금화를 꼭 안았다.
하벨은 느긋하게 유자차를 마시며 부드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코스모피안 왕국에 쫓겨나지 않고, 신뢰감 있게, 빨리, 정확하게 코스모피안의 왕을 설득할 사람이 저 말고 달리 누가 있습니까, 전하?"
뻔뻔함은 철판보다 더 두꺼우면서도 사실을 말하니 바안은 다시 목이 탔다.
아직 자신은 게리온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여 코스모피안 왕국과 사이가 더 틀어진 것처럼 보일 테지.
그렇다면 그곳에 그나마 돌팔매 맞지 않고 환영받을 수 있는 존재가 물 마법사라 알려진 하벨 말고 있을까.
"저 이제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 먼저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내가 준 반지, 잊으면 안 됩니다."
바안은 하벨을 마지막으로 붙잡으며 말했다.
자신의 대리인이라 알리는 반지를 하벨한테 주었다.
하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짜 싫습니다."
"싫어도 써야 할 땐 쓰세요. 아니, 하벨 공이라면 분명히 알아서 잘 쓸 겁니다."
"뒷덜미 잘 붙잡고 계세요. 저도 이걸 어떻게 쓸지 모르니까요."
"무엇이 되었든 하벨 공이기에 믿습니다. 이 나라는 잘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바안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배웅해주겠습니다."
"웬일이십니까? 오늘은 바쁜 거 아닙니까?"
"문 앞까지요."
바안이 싱긋 웃자 하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문 앞에 도달했다.
"이제 일하세요, 전하. 첫째 왕자를 들고 올 테니까, 저 없는 동안 전쟁 욕심 세우지 마시고요. 지금은 그저 죽었다 생각하고 내실을 다지세요."
하벨은 문을 열려다 말고 아직 어린 왕을 위해 입이 근질거렸다.
"아, 대신들은 특히 잘근 밟아주시고요. 요새 들어보니 귀족 놈들이 또 뒤에서 슬금슬금 손을 뻗고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 기왕이면 은행이나 보석상이나 그림 등 뭔지 아시겠죠? 돈이 될 만한 곳을 뒤지세요. 어차피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합니다."
"…그, 하벨 공."
바안은 이쯤 되면 올라오는 궁금증을 너무 참기가 어려웠다.
"예, 전하."
"공께서는 대체 뭘 하다 온 겁니까?"
"궁금하세요?"
"궁금합니다."
"잘하고 계시면 상으로 알려드릴게요."
아마 알면 놀라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하벨은 그 표정을 생각하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찝찝한 표정을 한 바안에게 손을 내밀며 하벨은 지팡이를 짚었다.
탁.
조용히 소리가 울렸다.
* * *
"포탈은 마법사 협회가 다시 손을 봤습니다. 도련님께서 이동하기 그나마 편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부작용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출발하기 전, 하벨이 아라와 함께 침대에 뒹굴며 카샬의 설명을 들었다.
이것저것 듣다 말고 마법사 협회가 언급되자 하벨은 카샬을 바라보았다.
"그건 이미 각오했는데, 마법사 협회도 이번에 가면단이랑 함께 뒤따라오는 거 맞지?"
"맞습니다. 마법사의 탑을 부술 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그럴 건데 이것도 코스모피안 왕하고 거래해야지. 내가 얻을 게 있거든. 뭐, '꼭 허락받아야 할 일이 있다면'이라는 가정이라 그럴 필요가 없으면 그냥 얻고. 물론, 다른 일 때문이라도 거래할 필요는 있지."
바로 어제 페트리오한테 코스모피안 왕국이 마법사를 싫어한다는 정보를 듣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련님께서 얻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맞아. 이번에 대장이 뭘 가지고 싶은 건데?]
아라까지 덩달아 기대하자 하벨은 상체를 일으켰다.
"내 신체에 든 영혼."
카샬과 아라가 그대로 굳어졌다.
신체라면 잘린 하벨의 이전 신체를 말하는 게 아닌가.
그들이 굳어지든 말든 하벨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으니 분명히 왕가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미, 미안해! 이 몸이 미안해, 대장!]
아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하벨에게 안겼다.
"아니, 미안할 것도 아닌데."
하벨은 아라를 토닥이며 카샬을 바라보았다.
"참, 도멘 씨 말이야."
"스승님께서 혹 저 몰래 도련님을 찾아오셨습니까?"
카샬은 여전히 편지 하나 보내지 않는 도멘이 야속했지만, 레놀드 왕국에서 일어난 폭발 소식에 가슴이 흔들리지 않았던가.
레놀드 왕국으로 오지 말라고 경고도 했으니.
"아니. 레놀드 왕국에서 폭발이 일어났잖아. 혹시 이걸 알고 우리보고 오지 말라고 한 건가 싶어서."
"저도 아마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대체 스승님께서 무얼 하며 돌아다니는지 저도 알고 싶습니다."
"이전에 뭐 하셨는지 들은 적이 없어?"
"없습니다."
"아버지한테도?"
"예. 가주님께서 미안해하며 사과해주셨지만, 그 이상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미안하네, 카샬. 너를 속이고 말았어. 하지만 도멘이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만큼은 알아주거라.
그건 당연히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말을 해주지 않으니 왜 답답하지 않을까.
―도멘이 무얼 하는지는 네가 답답할 건 알지만, 사실 나도 그 친구가 무얼 하며 돌아다니는지 잘 모른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수수께끼는 질색인데.'
카샬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칼리우스가 레디나와 함께 들어왔다.
"도련님!"
"마차가 준비됐나 보네?"
"응. 마차 준비는 끝났어. 레디나하고 혹시 독이라든지 무슨 장치를 했는가 살펴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어."
"맞아요. 마차는 안전해요. 그리고 이번에 따라오는 자들까지 덤으로 살펴봤는데요, 딱히 수상한 건 없었어요."
레디나 역시 칼리우스의 말에 동의하며 손뼉을 마주쳤다.
"그걸 한 명씩 살펴봤어? 너무 고생했겠는데?"
하벨이 괜히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헤레스가 자신은 여기에 가만히 앉아 누워 있으란 말에 카샬과 아라의 감시하에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아뇨. 페트리오 씨가 명단을 주던데요?"
"벌써 거기까지 조사하다니. 진짜 무섭네. 그렇지?"
하벨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뇨. 진짜 무서운 사람은 도련님이죠."
레디나 역시 활짝 웃었다.
"…잠깐만, 내가?"
"예."
"농담하지 마. 나처럼 순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란덴이 편지를 보냈어요."
레디나는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쪽지를 보여주며 가볍게 흔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왜 도련님이 무서운지 아시겠죠?"
편지를 보냈다는 건 회유에 성공했다는 의미였으니 왜 무섭지 않을까.
과거로부터 도망쳤던 자에게 과거를 마주하게 하고, 생각 자체를 바꾸지 않았던가.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