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떠나기 전에(3)
* * *
[조, 좀도둑이 화가 많이 났나 봐. 카샬이 어, 화나게 한 게 아닐까? 좀도둑은 카샬을 싫어하잖아!]
아라는 얼른 하벨 뒤에 숨어서 페트리오를 빼꼼히 바라보았다.
하벨은 눈을 깜박거리다 곧 페트리오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 언제 왔어?"
"방금 왔습니다. 연락도 없이 와서 죄송합니다."
"그렇지 연락은 했어야지."
카샬이 단번에 빈정거렸어도 하벨은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성이 났을까?"
"저는 에르티안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않고 이렇게 한걸음에 찾아왔습니다. 제가 왜 그랬겠습니까?"
"혹시… 들었어?"
하벨이 이불을 쓱 올리며 카샬을 힐끔 바라보았다.
"예. 저놈이 웬일로 보고를 해준다고 하더니 그냥 제 속을 뒤집어버리려고 그랬나 봅니다."
"말해줘도 지랄이네."
카샬은 페트리오의 발언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혹시 카샬한테 어디까지 들었어?"
"도련님이 저 녀석한테 했던 말과 도련님의 배가 시원하게 뚫렸던 사실까지 전부 들었습니다. 지금 그 몸으로 다시 말씀하기 힘들 거라 생각해 미리 들었습니다. 제가 주제넘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페트리오의 행동은 깍듯했으나, 날이 서 있었고, 아라는 차갑다 못해 얼어 붙어가는 페트리오의 표정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괘, 괜찮아, 좀도둑? 엄청, 엄청 충격이었을 텐데. 이 몸은 그 이야기 듣고 대장 몰래 몇 번 울었는데.]
"…나 몰래 울었다고?"
하벨이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아라를 보자 아라는 깜짝 놀라서는 앞발로 입을 막았다.
"아라 님께서 울만 하실 일이잖습니까."
"울기만 하셨겠습니까?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다."
페트리오는 조용히 하벨을 압박했고, 카샬은 사실을 언급했다.
"아라야……."
하벨이 충격을 받자 아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 대장이 걱정하는 그런 게 아니었어! 이 몸은 그냥 대장이 언제 깨어나는지 걱정이 되어서 빤히 보다가 카샬한테 들킨 거야. 잠은, 음, 졸려서 자버렸어.]
아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하벨은 미안함에 아라를 꼭 안아주었다.
[이 몸은 이제 괜찮아! 헤헤.]
아라도 하벨을 안아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제야 하벨은 안도하며 들어올 때부터 차가운 표정을 한 페트리오를 달랬다.
"이번 일은 당연히 너한테도 말하려고 했어. 너만 몰래 뺀 거 아니야. 섭섭해하지 마."
"제가 저만 빼고 말씀했다고 섭섭해하는 것 같습니까?"
"그거 아니야?"
하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페트리오는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화가 속에서 올라왔다.
하벨의 배가 뚫렸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혈압이 오를 것 같았지만, 뒤이어 즉위식이 열린 그때, 하벨이 자신의 옛 육체를 봤다는 사실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육체가 잘렸다고 했다. 그것도 얼굴을 봤다고 했다.
"제가 도련님께서 언짢아하실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락 안 해도 할 기세인데?"
"차라리 정신 줄을 놓아버리지 왜 그리 속으로 삼켰습니까?"
페트리오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즉위식 때 하벨이 기절한 뒤에 깨어나 아무렇지도 웃고 있지 않았던가.
안도했던 자신이 얼마나 미련하고, 멍청하고, 병신같던지.
"…와. 이건 카샬도 나한테 못한 말인데."
하벨은 자신을 걱정하는 페트리오의 마음씨가 기쁘면서도 웃겼다.
"저놈은 잘 가다가 물러 터진 구석이 있어서 그럽니다. 솔직히 반쯤 물러 터졌고요."
"뭐어?"
카샬이 언성을 높이자 페트리오는 말을 이었다.
"도련님께서는 더 그렇습니다. 홍시나 다름없죠."
"아, 그건 맞지."
카샬이 동의하자 페트리오는 그를 무시하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빙의되었고, 그 몸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가정한다면, 누군가 옛 몸을 잘랐고, 그걸 본다고 했을 때 보통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본디 정신이 나갔어야 하는 게 맞았다.
차라리 그게 낫지, 이렇게 조각조각 난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얼마나 괴롭겠는가.
"세상이 밉지 않으십니까? 다 도련님의 덕으로 살면서 도련님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페트리오가 물었다.
물의 오염을 막은 최후의 힘이 하벨이 가진 힘이었다.
썩지도 못하고 계속 보존된 하벨의 잘린 몸뚱어리 속 힘에 의존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용왕'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상태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다시 생각해도 진짜 웃겼다.
"됐어. 나는 원망 같은 거 하지 않아. 오히려 이렇게라도 세상이 살아 있어 줘서 다행인데? 지금은, 음. 그냥 에른스트를 없애고 싶어. 내 모든 걸 부순 것처럼 나도 놈이 하려는 모든 걸 다 부숴주고 싶어."
하벨은 여전히 평온하게 웃었고 페트리오는 차분히 물었다.
"에른스트의 외형 중 하나가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들었습니다."
"머리카락 색이야 지금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 다만, 내가 생각하는 가정은 하나야."
"에른스트가 직접 이 판에 뛰어들었다는 가정을 하시는 겁니까?"
하벨은 페트리오의 대답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코스모피안 왕국에서 좋은 소식을 물고 왔나 보네?"
"이걸 좋은 소식이라고 말씀드리기에는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갔던 이유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 네가 먼저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넘어갔음에도 아무것도 못 했으면 어쩌나 싶었지."
카샬이 또 빈정거리자 아라는 하벨 앞에 스르르 내려와 앉았다.
[카샬이랑 좀도둑이랑 맨날 싸워. …그런데 대장.]
"왜?"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잠깐 카샬과 페트리오의 신경전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좀도둑이 왜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먼저 간 거야? 이 몸은 이유를 못 들어봤어.]
아라가 고개를 위로 들며 말하자 하벨은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아라가 자고 있었던가.'
하벨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페트리오가 먼저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넘어가 여러 가지를 확인한 이유는 여러 개가 있었다.
"일단 시간 절약이야."
[응응!]
"그리고 음, 그 시간 절약은 현재 에르티안 왕국에서 코스모피안 왕국의 사절단들을 조사라는 명목으로 가두고 있는 이유와 연결되어 있어."
[사실은 동맹이잖아! 이 몸은 알고 있어. 에헴.]
아라가 한층 길어진 리본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우쭐거렸다.
"그래. 사실은 동맹이지. 하지만 외부에서도 과연 그렇게 보겠어?"
[어엇, 아니! 이건 그렇게 안 보여! 서로 사이가 아주 나쁘게 보일 거야.]
"그래, 바로 그거야, 아라야."
[으응?]
아라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사이가 좋지 않기에 코스모피안 왕국에 오래 머물 수가 없어. 빨리, 나라를 떠나야 하거든. 그렇다면 이곳에 뿌리 박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시간이 없다는 거지."
하벨은 페트리오를 가리켰다.
"그래서 나 대신 아주 유능한 좀도둑을 보낸 거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페트리오는 카샬한테 비아냥거리려던 말을 까먹고는 질색했다.
"도련님께서 이렇게 나오신다면 오히려 무섭습니다."
"에이, 내가 칭찬에 야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좀 다릅니다."
"네가 가져온 정보들이 기대돼서 그렇지."
이번에 잡아야 할 꼬리는 에르티안 왕국의 왕을 죽인 암살자였다.
놈이 가지고 있던 문양을 조사했고, 코스모피안 왕국의 비밀 조직이라는 걸 알아냈고 이를 통해 코스모피안 왕국의 사절단 대표인 게리온에게 누구와 얽혔는지를 들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나는 항상 언제나 너를 믿고 있어. 아, 부담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야."
"도련님께서 기대하신 부분을 충족해드렸는지 몰라도 일단 조사 결과 도련님께서 아신 그대로입니다."
"진짜?"
하벨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제가 피를 통해서 기억을 본 결과뿐만 아니라 정령 기사들을 동원하여 정령들을 통해 들은 결과입니다."
이번 일에 페트리오만 투입된 게 아니라, 룬델이 정령 기사들을 변장시켜 그와 함께 조사하도록 보냈기에 오차 범위는 상당히 낮았다.
"그래서 그 두 놈, 첫째 왕자, 레바놈 코스모피안과 그놈 수족인 귀족, 푸렐 텔르나는 누구와 얽혀 있는 건데?"
코스모피안 왕국의 내부자는 그 두 놈인 건 분명해졌다.
이제 중요한 건 어떤 세력과 얽혔느냐였다.
"레놀드 왕국입니다."
페트리오의 대답에 하벨은 잠깐 입을 벌렸다.
"레, 레놀드? 두 나라 사이가 그렇게도 끔찍한데 막내도 아니라 무려 첫째 왕자가 레놀드 왕국과 손을 잡아?"
"예, 그렇습니다. 정령님들의 도움을 받아 첫째 왕자의 피를 얻었고, 가장 최근 기억 속에 '레놀드'를 언급하는 걸 봤습니다. 무언가 일을 벌였는지 되게 겁에 질렸고, 초조해 보였습니다."
―왜, 왜 아직도 답이 없냔 말이야! 레놀드 왕국에서 나를 버린 건 아니겠지?
기억을 떠올린 페트리오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이거 미친 거 아닙니까? 제정신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인데요? 애초에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과 전쟁을 일으켜봤자 이득일 게 없습니다."
카샬이 얼굴을 구겼다.
"…코스모피안 왕국과 레놀드 왕국이라. 진짜 애매하네."
하벨은 턱을 쓰다듬었다.
게리온은 왕실파 귀족이었으며 그를 보았을 때, 코스모피안 왕국은 결단코 레놀드 왕국과 손을 잡을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하벨은 일단 신경 쓰이는 것부터 물었다.
"좀도둑."
"예, 도련님."
"아까 왕자가 무언가 일을 벌였다고 했잖아? 그거 설마… 이번에 레놀드 왕국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이랑 얽힌 건 아니지?"
하벨의 질문에 페트리오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맞습니다. 그놈이 벌인 겁니다. 그 미친놈이 벌인 겁니다."
"…미치인! 카샬!"
"예……?"
카샬이 하벨의 부름에 살짝 당황했다. 아라는 큰소리에 덩달아 움찔거렸다.
"당장 짐 싸!"
"예?"
"이거 진짜 큰일이야. 배가 아프다고 가만히 있다간 전쟁부터 나겠네."
"하지만 도련님. 지금 도련님 배에……."
"내 배랑 전쟁으로 벌어져 일어나는 수많은 목숨 중에 뭐가 더 중요해?"
"도련님의 배입니다."
카샬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카샬… 카샬 넌 진짜 정이 없네. 내 배는 조금, 아니, 좀 아플 뿐, 수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하면 당연히 후자잖아. 그렇지, 좀도둑?"
호응을 유도했으나, 페트리오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카샬의 말에 동의하기 싫고, 자신의 말에도 동의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조금도 아니었잖습니까. 저도 그랬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을 겁니다."
카샬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거기에 페트리오와 아라의 시선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쳐다봐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 내가 에르티안 왕국하고 코스모피안 왕국 사이에 벌어질 뻔한 전쟁을 어떻게 막았는데. 레놀드 왕국하고 코스모피안 왕국하고 전쟁이 벌어지는 꼴을 볼 것 같아?"
하벨은 목소리에 신경질을 가득 담았다. 보나 마나 에른스트가 벌인 일이었다.
"일단 둘 사이에 벌어진 일부터 막을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해."
[이 몸도 전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장은 으음, 아직 아픈데?]
"이건 에른스트가 벌인 일이야."
하벨은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아가씨께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샬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하벨에게 허리를 숙였다.
하벨의 배를 그렇게 만든 에른스트가 얽혀 있었다.
망할.
"그 새끼… 이름 맞죠?"
페트리오가 눈을 번뜩 뜨며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야."
"이건 갈 수밖에 없겠네요. 진짜, 하……. 진짜 짜증 납니다."
페트리오는 올라오는 분노에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도 준비해야 할 게 많네요. 일단 제가 저놈한테 받은 피를 통해 방금 알아낸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페트리오는 손가락을 펼쳤다.
"그란델, 검은 달의 간부로 보였고……."
"간부 맞아."
"다행입니다. 어쨌든, 주로 하는 역할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을 없애는 걸로 보였습니다. 레디나가 말하던 검은 달의 원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죠."
그란덴은 사람의 피로 쌓아 올려진 더러운 돈을 바다에 버리고, 납치된 이들을 구하는 등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란덴은 검은 달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있더라. 간부가 맞는지 모를 정도였어."
"그래서 도련님께서 그란덴을 흔드셨겠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좀도둑 너무 똑똑해!]
아라가 페트리오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볼에 발바닥을 올렸다.
"아라 님께서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페트리오가 이상하게 기대하고 있자 하벨은 뭔가 내키지 않았다.
"계속 말해보라네?"
[이 몸은 좀도둑이 똑똑하다고 말했어! 이러면 이 몸은 오늘 좀도둑한테 편지를 쓸 거야. 아주아주 똑똑하다고 쓸 거고. 예쁜 그림도 그리고, 또…….]
"그리고 똑똑하대."
하벨은 씩씩거리다 도중에 편지를 쓸 생각에 반짝거리는 아라의 눈을 보자 심술이 났다.
아라의 편지는 자신 거였다.
"어쨌든 맞아. 내가 흔들긴 했는데, 레디나가 거의 다 했지. 계속 말해봐."
페트리오는 하벨의 고갯짓에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서황이라는 자의 기억을 봤습니다."
"……?"
하벨은 당장 허리를 바치고 있던 베개에서 멀어져 페트리오를 가까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