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떠나기 전에(2)
* * *
* * *
따스한 기운이 몸을 스며들자 하벨은 살짝 눈을 떴다.
시선 끝에 정령들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그들 몸에서 빛이 났다.
[착한 아이는 더 자는 거야.]
[선물은 두고 갈게.]
'…선물?'
하벨은 정령들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 있는 게 언뜻 보였다.
아프지 말라는 그들의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고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힘이 느껴졌다.
힘이 더 커졌지만, 무엇을 판단하기에는 졸음이 너무 깊이 느껴졌다.
정령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반복되다 겨우 목소리가 닿았다.
[있지, 하벨. 이 땅에 '아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어때?]
[아라의 '아'하고 하벨 네 이름의 '벨'을 땄지.]
하벨은 배시시 웃었다. 예쁜 이름이었다.
칭찬해줘야 하는데.
잠이 너무, 너무 쏟아졌다.
[더 자도 돼.]
[잘 자, 하벨. 좋은 꿈 꾸고.]
정령들의 따스한 손길이 닿자 고통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계속 쓰다듬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 * *
하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정령들이 웅얼거리는 소리와 따스했던 감각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차, 착하다는 의미로 사탕 못 줘서 미안해요. 다음번에는 꼭 줄게요. 막내님.
하벨 티에라가 했던 말이 급히 떠오르자 신경질이 났다.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찼다.
"이……."
하지만 목이 갈라져 있기에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하벨이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손을 내리자 뭔가가 자신을 막았다.
우르르 자신을 보는 시선까지 느껴져 하벨은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그곳에 모두가 있었다.
아라가 단번에 하벨을 와락 안았다.
[으흑…….]
아라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 하벨은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
헤레스가 하벨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 안도하며 웃어 보였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도련님. 기분은 어떠십니까?"
"몸은 무겁지만, 기분은 상쾌한데? 지금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
하벨은 피부를 찌르는 느낌에 말을 멈추고 시선을 살짝 돌렸다.
아라가 털을 바짝 세우고, 카샬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제 괜찮은 모양입니다. 저 입은 정말 쉬지 않고 움직이네요."
카샬이 하벨을 살짝 일으키며 베개를 넣었다.
레디나가 물이 담긴 컵을 내밀며 소리쳤다.
"그 새끼라면서요!"
컵에 든 물이 출렁거렸다.
"에른스트, 그 새끼가 도련님을 이렇게 만들었다면서요!"
"그렇기는 한데……."
"진정해, 레디나. 하벨은 지금 정신없을 거야."
넬시아가 하벨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레디나는 입안을 잘끈 깨물며 물을 넘겼다.
"갑자기 소리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너무 화가 나는데요? 회로 떠주고 싶을 만큼요!"
"아니야. 그 새끼가 맞고, 나도 화가 나니까. 속 시원하게 잘 질러줬네."
하벨이 양손으로 물컵을 받고 입가에 댔을 때, 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가 눈을 떠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하벨은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이 어쩐지 따뜻하게 다가왔다.
낯설면서도 포근하게 다가오는 그 감정에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할 때쯤, 라르웬과 시선을 마주했다.
복잡한 감정이 눈빛에 드러나고 있었다.
반갑고, 기쁘면서도 죄책감이 섞여 있었기에 하벨은 더 활짝 웃었다.
"형님. 나도 이번 일은 너무 놀랐어요. 하지만 살아 있네요."
"막내야."
"예, 형님."
"…고맙다."
그제야 라르웬이 억지로라도 웃어 보였다.
"아뇨. 모두 고마워요. 내가 살아 있는 건 다 모두 덕분이에요. 그때,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알았거든요."
하벨은 배를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뚫린 배 부근에 통증을 느꼈지만, 이 정도는 처음 에른스트에게 뚫렸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컵을 카샬에게 넘긴 하벨은 눈을 힘없이 감았다가 다시 떴다.
[대장 지금 많이 졸려?]
아라는 훌쩍이며 하벨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하벨이 지쳤기도 하겠지만, 신의 은총 때문이야. 재생력을 극도로 올려주는 힘이거든.]
루룸이 말을 꺼내자 아라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루룸을 바라보았다.
[며칠이나 당겨서 썼는지 몰라도 하벨이 가진 재생력을 가득 끌어왔다는 거야. 그러니 엄청 지치는 거지. 몇 날 며칠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계속 뜀박질한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아아앗! 그런 거라면 얼른 코 자. 이 몸이 자장자장 해줄게.]
아라가 깜짝 놀라다 곧 하벨을 토닥거렸다.
"엘라힘 신관님이 오셨어. 아라하고 라르웬하고 레디나가 고생 좀 했어."
넬시아가 하벨에게 일어난 일이 살짝 말해주었다.
엘라힘이 왔다는 건 하벨 티에라한테 들었지만, 하벨은 모르는 척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했어요."
레디나는 속 시원하게 사실을 털어놓으며 키득거렸다.
"갔는데 이미 납치당하셨더라고요."
[이 몸이랑 넬시아가 했어!]
아라가 꼬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와서 다행인데?"
라르웬이 레디나를 슬쩍 보았다.
"갑자기 누님이 나타나서 엘라힘 신관을 데려가는데, 엄청 놀랐지. 네가 설명 안 해줬으면 답답해 미칠 뻔했잖아."
그때 상황을 떠올리는지 라르웬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둘째 도련님."
레디나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도련님. 이미 신의 은총을 경험해보셨겠지만, 상처가 완전히 낫진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완쾌에 가까이 나으려면 일정 기간을 두고 몇 번이나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헤레스는 하벨을 다독였다.
"조급하지 않아. 오히려 지금은 되게 고마울 뿐이야."
하벨은 한 명씩 바라보다 그대로 멈췄다.
그렇지 않아도 후드를 덮은 사람이 있어 몹시 낯설다 싶었는데, 살짝 튀어나온 검은 머리카락을 보자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에른스트와 같은 색이지만, 다른 느낌이었다.
이래서 하벨 티에라가 엘라힘 말고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모양이었다.
"용용아. 일어났어?"
"나를 알아… 보겠어?"
칼리우스는 후드를 만지작거리다가 벗었다.
[용용이가 자고 일어났는데, 엄청 컸어! 대장보다 더 컸어!]
아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칼리우스를 빤히 보았다.
하벨 티에라가 보았던 칼리우스의 모습보다 살짝 어렸지만, 얼추 비슷했다.
"나, 이상하지? 많이 놀랐어?"
칼리우스가 주춤거리며 물었다.
"아니, 전혀. 그렇게 갑자기 자랐으면 아플 텐데, 괜찮아?"
"무릎이 좀 시큰거려. 팔꿈치도 쑤시고. 나는 자면서 내가 자랐다는 걸 몰랐어. 뭔가 시선도 달라져서 알았어. 아차, 걷기가 좀 힘들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졌어."
성격은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목소리가 많이 달라졌다.
나이에 맞게 변한 듯했다.
"마법이 깨져서 내가 다시 만들었어. 이번에는 더 튼튼하게. 엘라힘도 도와줘서 한결 편했어. 하지만 조심해야 해."
칼리우스가 자신에게 경고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하벨은 성장의 신비를 다시금 보자 왠지 웃음이 실실 나왔다.
하벨이 왜 웃는지 몰라 칼리우스는 눈을 살짝 크게 뜨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말을 꺼냈다.
"…아, 이게 먼저가 아니었는데."
칼리우스는 점점 울상을 지으며 금세 눈동자에 눈물이 출렁거렸다.
"도련님이 깨어나서 정말, 정말 다행이야. 진짜 너무 슬퍼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했어. 내가 더 빨리 깨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깊게 자지 않아도 됐었는데. 엄청 후회했어."
아쉬움과 후회가 뒤섞인 눈빛을 보자 하벨은 변하든 변하지 않든 역시 칼리우스라고 생각했다.
"그걸 왜 후회해? 네가 무사히 깨어난 걸로 이미 충분한데? 다행이야. 엄청 기뻐."
칼리우스는 당연하다는 듯 꺼낸 하벨의 말에 기쁘면서도 또 밀려오는 속상함에 잠깐 말을 아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왜 이렇게 포근한지 몰랐다.
"…도련님은 진짜. 진짜 나빠. 못됐어."
지금은 그저 속상했고, 하벨이 왜 본인 말고 자신을 걱정하는지 몰랐다.
심장이 멈춘 것도, 피를 정말 많이 흘린 것도, 배에 구멍이 뚫린 것도 전부 하벨일 텐데.
"나빠도 돼. 나는 계속 말할 건데?"
하벨이 씩 웃었다.
칼리우스가 저 스스로 멸망을 떨쳐냈고, 이렇게 자라기까지 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랐다.
"네가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했고, 네가 아플까 봐 걱정했고, 네가 혹여나 본모습을 내게 보여 날 무서워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까맣고 작은 용.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속에 담긴 그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 내 걱정이었을 뿐이어서 다행이야."
칼리우스는 그 말에 왈칵 오르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자신이 일어난 후에 분명 여러 가지가 변했음에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하벨처럼 말을 했다.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아프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검은 용.
어리숙한 자신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괴물이라며 자신을 쫓아냈다.
하지만 처음 손에 넣은 그 온기를 잊지 못해서 자신은 자꾸 사람 곁을 맴돌았다.
구박해도 좋았고.
질색하며 욕을 해도 좋았다.
"미안해. 도련님은… 나쁘지 않아."
그냥 자신을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그 단 하나의 소원만을 위해 매일 까만 하늘에 있는 예쁜 달님께 빌어보았다.
"이렇게 씩씩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칼리우스."
하벨은 손을 뻗어 칼리우스의 팔을 토닥거렸다.
'…아.'
칼리우스는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하벨을 보았다.
달님은 사실 무척 가까이 있었다.
하벨이 달님이었다.
자신이 매번 빌던 그 예쁜 달님이 하벨이라는 걸 알았다.
* * *
"…몸은 괜찮습니다. 상태도 좋고요. 상처야 아시다시피 바로 낫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건 됐고, 그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하벨은 엘라힘이 말을 꺼내기 전에 그가 언급할 것들을 미리 선수 쳐 말했다.
배에 힘을 주며 숨을 들이마시던 엘라힘이 잠깐 눈을 깜박거렸다.
"그……."
엘라힘이 어정쩡한 자세로 일단 자리에 앉았다.
"편안하게 앉으세요. 아, 혹시 방금 내가 내뱉은 말을 신경 쓰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하도 많이 듣는 말이라서 일정한 유형이 이제는 보여서 그래요."
말과 달리 하벨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앗! 대장, 그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데?]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박거렸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랑이랑 거리가 멀지 않은가.
엘라힘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왠지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주변에서 걱정이 많을 만합니다. 벌써 저를 몇 번이나 만나셨는지 아십니까? 제가 신관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짧은 시기에 신의 은총을 사용한 적은……."
"아이코, 머리야. 그 말 더 들으면 머리가 지끈거리겠는데요?"
하벨은 엘라힘의 잔소리를 막았다.
저주는 에른스트가 저질렀고, 자신이 잔소리를 듣는 사실이 썩 반갑진 않았다.
[이 몸이 헤레스를 불러올게! …엇, 아니야. 엘라힘이 있잖아? 엘라힘한테 부탁해보자.]
아라가 진지하게 말하자 하벨은 그만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야, 아라야.'
이미 잔소리는 엄청, 정말 많이 들었다.
잠깐 몸 상태가 어떤가 살펴보려고 일어나 걸었다고, 헤레스, 넬시아, 라르웬, 카샬, 레디나, 칼리우스, 아라, 정령들까지.
이미 기가 다 빨릴 지경이었다.
'걸을 때마다 배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걸을 만했는데.'
하벨은 한숨을 깊게 내쉬다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치운 뒤에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물을 게 있습니다, 신관님."
"뭐든 물어보십시오."
"검은 달이 시엘느와 손을 잡은 이유가 혹시 치료 때문입니까?"
"…치료요?"
엘라힘은 난생처음 저 소리를 들은 듯이 반응하자 하벨은 입가를 엄지로 살짝 쓸었다.
'이게 아닌가. 감이 잡혔는데.'
"그건……."
미안함에 엘라힘이 살짝 숙연해지자 하벨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면, 그때 알려주세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엘라힘은 자신의 무릎을 몇 번이나 쓰다듬은 뒤에 말을 꺼냈다.
고마움이 묻어나 있었다.
"…제 입지가 하벨 공 덕에 단단해졌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나랑 같이 시엘느까지 가야 하니까요."
"예……?"
엘라힘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내가 코스모피안 왕국과 헤스트리아 왕국을 거쳐 레놀드 왕국까지 갈 것 같습니다."
"그……."
"당신은 날 위해 에르티안 왕국에 고용됐습니다. 그 비싼 돈은 날 위해 쓰여야 하니 당연하죠. 설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아, 아뇨. 절대로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뜻밖이라서. 음, 저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엘라힘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벨이 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그가 자신에게 무척 소중해졌지만, 하벨은 '신'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조차 싫어 보였다.
"당신이 싫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신이라 모시는 자가 싫어요."
하벨이 던진 말에 엘라힘의 눈가 사이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기에 하벨 역시 예상했다.
"화가 나십니까?"
"화가 나는 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가족이 욕보이면 화가 나듯 저 역시 그러하니까요. 그분은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내가 왜 싫은지 인정은 한다는 말씀이군요."
"저도 한 번은 신께 의문을 품은 적이 있으니까요."
"의문이요? 신관님이요?"
하벨이 묻자 엘라힘은 입을 다물었다.
"화내지 않겠습니다."
"왜… 신의 아들인 당신을 그리 보살피지 않느냐고,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신관님께서는 참 마음씨가 좋으시네요."
빈정거림이 아닌 진심을 담아 하벨은 말했다.
자신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신은 원래 오지 않아요. 신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기대는 버리세요. 그게 신관님을 위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저희를 언제나 따뜻하게 바라보았답니다. 그 따스함을 하벨 공께도 나눠주셨으면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는 기대하지 않아요. 내 삶도, 죽음도 온전히 내거니까요.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은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그 말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저 하벨 공께, 가끔, 아주 가끔 그분의 목소리를 전해도 되겠습니까?"
엘라힘은 자신의 부탁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벨에게 말을 전하던 신의 목소리에 매번 슬픔이 가득했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 말 좀 전해줄래요?"
"전해드리겠습니다. 말씀해보세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번에는 제발…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렇게 전해주세요."
짧지만, 깊은 간절함이 담긴 그 말에 엘라힘은 잠깐 넋을 잃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지 정말 궁금해질 정도였다.
"엘라힘 신관님."
하벨의 목소리가 다시 귀에 닿자 엘라힘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예, 하벨 공."
"에르티안 왕국과 체결한 일시적 계약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실 셈이죠?"
"그렇습니다. 돌아가야죠. 가서 제힘이 닿는 한 마지막까지 가여운 이들을 구해야죠."
"아까도 말했지만, 곧 에르티안 왕국을 떠날 겁니다. 그전에 바안 전하께 당신이 그간 모았던 시엘느 왕국의 비리와 부정,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거리, 그리고 검은 달과 이어졌다는 증거까지 주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 말고 누군가는 쥐고 있어야죠. 그래야 제가 죽은 뒤에도……."
아라는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엘라힘을 와락 안았다.
엘라힘의 눈이 잠깐 커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보드라움이었다.
"놀라지 마세요. 여기에는 정령들이 많으니까요. 아마 당신이 꺼낸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령님."
"사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왜 죽기를 각오합니까? 여차하면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아야죠. 그 증거를 가진 사람은 저라고 뒤에 말도 덧붙이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하벨 자신을 팔아치우라는 말로 들려 엘라힘은 당황했다.
"신관님께서 나를 구해줬으니 이건 공평한 겁니다. 뭐, 아직 본국으로 떠나기 멀었으니까 차차 생각해보고……."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벨은 씩 웃었다.
"오늘은, 아니 당분간은 푹 쉬세요. 이래저래 쫓기느라 힘드셨잖습니까."
"그……."
"여기는 안전합니다."
하벨이 던진 말은 엘라힘의 불안을 씻겨 내려주었다.
엘라힘은 깊은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현재 시엘느에 있는 어떤 성자보다 더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밥 좀 챙겨 먹어요, 신관님. 아셨죠?"
[맞아. 엘라힘은 이 몸이 봐도 말랐어. 이 몸이 부엌으로 가서 빵이랑 쿠키랑 케이크랑 막 다 주고 싶은걸.]
"예. 잘 챙겨 먹겠습니다."
엘라힘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 후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페트리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카샬이 따라왔다.
"오, 좀도둑……."
하벨은 페트리오를 반기다 말고 주춤거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페트리오는 아주 많이 성이 나 보였다.